❏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그리스도의 치욕

말씀: 히브리서 11:26
요절: 히브리서 11:26

믿음의 삶이란 세상을 거절하고, 버리고 하나님의 보상을 바라고 선택하는 삶입니다. 믿음은 선택의 순간에 하나님을 택하기 위해 희생되는 것들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누리던 ‘파라오의 공주의 아들’이란 지위를 거절했습니다. 자신이 소유했던 이집트의 보화를 거절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것과 같습니다. 만유의 주께서 종의 형체를 입으신 것의 예표입니다. 말씀을 통해 믿음이 자라난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 때면 언제나 우리 주님께서 행하셨던 것과 동일한 방향, 동일한 목표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삶을 산 사람들은 어느 면에서나 주님을 예표하거나 주님의 모습과 같은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등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모습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들의 삶 역시 말이나 행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과 동일한 무엇이 보여야 합니다. 야보고는 말하기를,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내 행위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2:18)고 합니다. 성도는 행위로, 열매로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자,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가 버리고 거절했던 것들은 보통 세상 사람들의 꿈이요, 목표입니다. 피, 땀 흘려 공부하고 일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다 그런 것들입니다. 모세가 거절하고 버린 것들에 도달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모세가 버린 것들이 만약 여러분의 목표요, 꿈이라면 우리는 모세와 동일한 믿음의 소유자들은 아닙니다. 육신적인 성도들 신앙의 힘, 기도의 힘, 믿음의 힘으로 모세가 버린 것들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이런 것들을 달라고 새벽에 기도하고, 철야를 하며 기도합니다. 기복 신앙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치욕,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이집트의 왕자’ 모세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 교회에 불어 닥친 오순절 은사주의 운동을 오랫동안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신앙의 능력으로, 기도로, 헌신을 통해 모세가 버리고 거절했던 것들을 얻게 해달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불신자와 기복주의 기독교 신자들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얻고자 하는 꿈과 목표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방법론적인 것뿐입니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런 것에 도달하려고 하는 반면 육신적인 성도들은 기도의 힘, 말씀의 힘, 은혜를 받아서, 성령의 능력 등 믿음을 활용해서 그런 것에 도달하려고 한다는 수단의 차이 밖에 없습니다.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힘과 지혜만을 사용하는가? 하나님의 힘을 끌어 들여서 활용하는가? 그 차이 뿐입니다. 추구하는 것, 추구하는 방향이 완전히 동일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얻는다, 믿으면 도달할 수 있다, 믿으면 불가능이 없다 등등의 철학으로 무장한 이들은 모세가 거절하고 버린 것들을 얻는 것이 승리요, 간증이요, 하나님의 영광이요, 주님이 주신 복인 줄로 압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가 이집트의 왕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이집트의 보화’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그런 것들을 거절하고, 포기하고, 버렸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선택한 것은 그리스도의 치욕입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얻고자 한 것은 이집트의 보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이었습니다. 모세의 관심은 이 땅에서 사람들이 주는 명예, 부, 지위, 권세, 인기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얻고자 했다면 그는 왕궁에 남아서 파라오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권력 투쟁을 해야 합니다. 파라오가 된다는 것은 곧 이집트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산 결과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니엘 역시 믿음으로 산 결과 바빌론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 누구도 총리가 되기 위해서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총리가 되기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결과로 총리란 지위가 주어진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고위 관리가 되고, 재벌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핵심은 삶의 방향과 목표입니다. 믿음으로 산 결과로 주어진 것이라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또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그가 /주께서/ 보상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느니라.](26). 이집트의 보화란 “the treasures in Egypt”입니다. 이집트는 당대 세계의 문명의 중심지요, 최대 제국이었습니다. 이집트에는 육신을 입고 땅에 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었습니다. 이집트에는 풍부한 농산물이 있습니다. 나일 강을 중심으로 비옥한 토지에서 나오는 양식은 항상 넉넉했습니다. 강에서 풍성하게 하는 수산물이 있었고, 고기들이 있었습니다. 채소나 과일은 얼마나 많았던지 히브리인들은 종살이를 하면서도 음식만큼은 넉넉하게 먹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하던 불평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이집트에서는 마음대로 먹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집트에서 마음대로 먹던 물고기와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양파와 마늘을 우리가 기억하거니와] (민11:5). [...우리가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고기 솥 옆에 앉았던 때와 빵을 배불리 먹던 때에 [주]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터이니...](출16:3). 이집트가 얼마나 경제적으로 넉넉했던지 노예들조차 고기와 빵과 채소와 과일을 마음대로, 배불리 먹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이집트에서 엄청 주리고, 헐벗었다면 먹을 것이 없다고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말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유가 없고, 힘든 노역으로 고생을 하긴 했지만 먹을 것은 풍족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궁중에서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었던 모세가 누렸던 지위, 영광, 권세와 부(富)는 달리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이집트의 보화(the treasures in Egypt)는 오늘날 미국이나 서방 선진국의 경제력이나 지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시 이집트는 지상 최고의 문명과 과학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천문학과 수학 각종 과학의 철학의 중심지였습니다. 정치, 경제, 군사, 문화, 학문 등 모든 부분에서 최고였습니다. 각종 우상들이 넘치는 종교의 고장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왕족이나 귀족 정도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그런 최상의 삶을 살았을 것이고, 땅에서는 더 바랄 것이 없는 그런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매일 파티(연회)를 열고, 철학을 논하고, 기이한 마술을 구경하고 기타 등등의 모든 것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 있는 보화”야 말로 누구나 탐내고 얻고 싶어 하는 것들입니다.

이집트는 세상을 예표합니다. 이집트의 보화들이란 세상에 있는 모든 보화들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갖고 싶어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보화들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이집트에도 로마는 물론 지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참된 자유, 평강, 기쁨, 안식은 이집트에 있는 보물들이 아닙니다. 이집트에 있는 보물 목록을 다 정리해도 사람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들은 없습니다. 금과 은과 각종 진귀한 보물들과 특산물들, 예술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사랑’은 없습니다. 이집트가 자랑하는 Great Pyramid 속에는 방부 처리한 죽은 시체인 미라만 있을 뿐 부활이 없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에 있는 보화들보다 그리스도의 치욕을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이는 재물을 평가하는 가치 기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 세상, 땅, 육신의 영화는 시들어가는 풀의 꽃보다 못한 것입니다. 광야에서 우리 주님이 시험을 받을 때 사탄은 예수님에게 “세상의 모든 왕국들과 그것들의 영광을 보여 주며 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엎드려 내게 경배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8-9)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일언지하에 사탄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리스도의 치욕을 선택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치욕이 이 땅의 모든 왕국과 영광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의 보화는 아무리 가치 있어도 육신과 함께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가져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집트의 보화에 관심을 가질 때 믿음은 파선하게 됩니다. 이집트는 세상을 예표하는 말입니다. 모세가 이집트에 대해 가졌던 자세가 오늘날 성도들이 ‘세상’에 대해서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위에 있는 것들에 애착(愛着)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지니](골3:2).

모세는 이집트에 있는 보화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영을 지닌 성도들의 영적 가치관이요, 삶의 방향이요, 목표입니다. 신약에서 구약의 모세와 완전히 동일한 가치관, 동일한 믿음의 영으로 산 사람의 본이라면 바울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이득이 되던 것들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손실로 여길뿐더러 참으로 모든 것을 확실히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3:7~8)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이득 되던 것들을 모두 손실로 여겼고, ‘확실히 손실’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지위, 학위, 종파, 태생 등 그 모든 것이 누구 앞에서나 내세울만한 것이었지만 그런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손실로 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똥)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똥으로 여기는 것들을 얻기 위해 믿음이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하고,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이 필요한 분들이 있다면 그는 ‘탐심’의 소유자이지 ‘믿음’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바울은 세상을 못 박고, 세상에 대해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세상과 친구가 되지 말고,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이것이 성도들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모세는 이집트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의 보화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한 선택은 ‘그리스도의 치욕’입니다. ‘그리스도의 치욕’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무능함, 무지, 실수, 죄악 등으로 인해 겪는 ‘수치’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심한 수치와 모욕을 받을 때, 근거 없는 비난을 받을 때 잘 견디지 못합니다. 우울증을 겪기도 하고, 대인 기피증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치욕]을 받을 때는 도리어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기쁨이 가득해 집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고 수치를 당하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졌을 때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치란 말 그대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으로 인해 받는 수치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주님을 위해 받는 수치가 바로 그리스도의 수치입니다. 믿음으로 살 때 세상으로부터 받는 수치, 모욕, 비난을 성경은 ‘그리스도의 수치’라고 말합니다. 이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의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비난의 표적이 되며,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1,500년 전의 인물인 모세가 그리스도의 치욕을 택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낫게 여길 수 있는가 의아해 합니다. 여기서 성경을 정확하게 보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치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수치와 모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수치와 모욕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는 그 절정을 이룹니다. 구약의 대언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예언하고 기록했습니다(벧전1:11). 예를 들어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너희 아버지 아브라함은 나의 날 보기를 기뻐하다가 그 날을 보고 즐거워하였느니라, 하시니](요8:56). 마찬가지로 모세가 ‘그리스도의 수치’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선택과 그 선택에 따른 결과, 받을 고난과 수치에 대해서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수치]가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이란 것은 그리스도의 수치가 후에 영광의 상급, 유업, 보상으로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치욕’이란 무엇인가? 시편 69편에 보면 다윗이 6차례에 걸쳐 ‘치욕’이란 말을 씁니다. 다윗 자신의 실수나 잘못이나 죄악으로 인해 받는 치욕이 아니라 “까닭없이” 치욕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모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치욕’을 당했습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치욕을 짊어졌으므로 수치가 나의 얼굴을 덮었나이다.](시69:7). 다윗이 주를 위해 치욕을 짊어졌습니다.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 때 당하는 치욕은 ‘나의 치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치욕’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은 후로(행11:26)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의 종교인들로 규정해 버렸습니다. 그 후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들은 누구나 박해를 받게 되었고, 고난이 따랐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예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그분의 수치를 짊어지고 진영 밖에 계신 그분께로 나아가자.](히13:13).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동안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짊어지고 나아가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치’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삶입니다. 신약에서는 이것은 주로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 안에 넘치면 넘칠수록 성도들은 더 큰 보상이 주어집니다.

-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 안에 넘치는 것같이 우리의 안위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기 때문이라.](고후1:5).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고난 당하는 것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고난들 뒤에 있는 것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기뻐하라. 이것은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때에 너희 또한 넘치는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4:13).

다시 26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그가 /주께서/ 보상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음이라.](26). 주를 위해 포기한 것이 없고, 희생한 것이 없을 때 주께서 우리에게 보상해 주실 일도 없습니다. 보상은 말 그대로 보상입니다. 은혜의 선물과 달리 행위에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보상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우리는 각자 자신이 행한 대로 주님으로부터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보상(報償)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 행위에 따라 주리라.](계22:12)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가끔 성도들 가운데 “저는 보상을 바라고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태연스럽게 말하는 것을 봅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께서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반드시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히11:6). 보상에 대한 기대가 없고, 관심이 없다면 그는 자기 의로 충만한 종교인이지 믿음을 지닌 성도가 아닙니다. 주님을 섬기는 강한 동기는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라 보상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너희가 상속 유업의 보상을 {주}께로부터 받을 줄 아나니 이는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3:24). 보상은 섬김, 봉사, 헌신, 수고, 그리스도의 수치를 당한 일에 대해 주님이 주시는 상급입니다. 모세가 이집트에 있는 보화들보다 주님이 보상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음에 주목하십시오. 우리의 눈은 언제나 주님이 주시는 보상에 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마땅히 어떻게 하늘에 보물을 쌓을 것인가? 어떻게 더 큰 상급을 받을 것인가? 이런데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더 큰 보상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주를 위해 한 일들에 대해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한다면 구원받은 성도들이 헌신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보상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동기와 목적이 사람들의 눈에 있다면 그는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해도 하나님의 보상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구제이든(마6:1-2), 기도이든(마6:5), 금식이든(마6:16) 사람들 앞에서 행할 때 주님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보상(報償)을 받지 못하느니라.](마6:1)고 말씀합니다. “...자기 보상을 받았느니라.” 말씀합니다.

둘째, 속임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2: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로 너희를 속여 너희 보상(報償)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골2:18a). 보상은 구원과 달리 얼마든지 잃어 버릴 수 있습니다. 구원은 주님께서 영원히 안전하게 지켜 주십니다. 우리는 구원을 잃어 버릴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때로 구원의 영원한 보증을 믿지 못해서 행위와 노력으로 구원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지만 성경은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구원은 행위에 대한 대가, 보상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보상은 얼마든지 빼앗길 수 있기 때문에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경고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공부하고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도 속이는 자들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셋째, 자기 성찰입니다. 우리는 늘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너희 자신을 살필지니 이로써 우리가 이룬 것들을 우리가 잃지 아니하고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되리라.](요이1:8). 자신을 살피지 않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은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순수하고 선한 양심을 소유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자백과 회개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살펴보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이 아닌 자신을 판단하고 살필 때 우리가 이룬 것들을 잃지 않고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보상을 받는 법에 대해서는 충분히 많이 다루었습니다. 다만 모세와 같이 주님께서 보상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기울일 때 지금 현재 우리의 삶에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는가? 방향과 목표가 달라지면 그 보는 순간부터 현재의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지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관심 사항에 더욱 매진하게 되고,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의 관심이 이 땅에서 얻는 인기나 명예나 영광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보상에 있기를 빕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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