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홍해를 마른 땅을 건너듯

말씀: 히브리서 11:29
요절: 히브리서 11:29

대부분의 불신자들도 “모세”란 이름을 들을 때면 자연스럽게 ‘홍해’를 가른 기적을 생각합니다. 모세가 행한 기적이 수백 가지가 넘지만 누구나 ‘모세의 기적’이란 말을 할 때면 ‘홍해 바다가 갈라진 일’을 연상합니다. 어떤 지역에 자연 현상으로 인해 바다가 드러날 때면 신문을 비롯한 각종 언론은 ‘모세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연일 떠들어 댑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학자들이라 일컫는 이들은 모세의 기적이라 일컫는 ‘홍해를 마른 땅을 건너듯’ 건넌 이 사건을 믿지 못하고 불신의 소리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한 예로 시중에 판매되는 대부분의 성경 지도를 보면 ‘출애굽의 이동 경로’란 지도에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가로 질러 건넌 것이 아니라 홍해 위에 있는 ‘갈대 밭’을 가로 질렀다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성경 책을 사서 뒤에 부록으로 수록된 지도 역시 대부분이 홍해 바다가 아닌 홍해 위의 갈대숲으로 이동 경로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홍해(the sea of Red)를 건넌 기사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the sea of Reed(갈대의 바다)란 말을 ‘발음상 오해’로 인해 빚어진 일이라고 말합니다(Yam-soof). 갈대 밭을 건너는데 왜 믿음이 필요한지, 왜 따라오던 이집트 파라오의 군대는 전멸했는지 전혀 설명하지 못하지만 그 이론을 정설로 받아들이는 것이 배교한 현대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어느덧 신학자들과 강단에서는 구약 성경은 신화나 설화 양식으로 기술된 것이라는 것이 신학의 정설이 되었고, 그런 신학교 졸업생들이 목회 현장을 누비고 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이 아니라면 신약 성경의 기록은 아무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믿음으로 홍해를 마른 땅을 건너듯 한 그들의 믿음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이 기사는 진실한 믿음의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 성도들이 믿을 때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크게 드러나는가? 등을 보여 줍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과 난관에 봉착할 때 히브리서 11:29a,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마른 땅을 건너듯 건넜으나”란 말씀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홍해 앞에선 이스라엘에게 바다를 갈라서 그 속을 걷게 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 인도하심을 생각할 때 절로 믿음이 생기는 까닭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없다! 하나님은 앞에 있는 바다 속으로도 가게 하신다! 등등의 위대한 진리가 바로 이 구절을 통해 선포됩니다.

이집트에서 유월절을 지키고, 어린 양의 피를 통해 구원받은 이스라엘은 목자 모세의 인도를 통해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침례입니다. 세상과의 단절입니다. 파라오는 여전히 성도들을 뒤쫓고, 다시 종으로 삼으려 합니다. 세상은 결코 성도들이 믿음의 길을 평안하게 가도록 구경만하고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피를 통해 구원받은 성도들은 반드시 세상을 못 박고, 세상에 못 박히는 단절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걸어간 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형제들아, 나는 /이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곧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모두 바다를 지나가며 모두가 구름과 바다 속에서 모세에게로 침례를 받고](고전10:1-2).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며 실로 죽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이들이 십자가에서 자아의 죽음을 철저히 경험해야 합니다.

29절입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마른 땅을 건너듯 건넜으나 이집트 사람들은 그것을 시도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으며] (29).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큰 선박을 이용해서 홍해를 건넌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믿음을 통해 안전하게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건넜으나 동일한 시도를 했던 이집트 사람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똑같은 장소, 똑같은 시각, 똑같은 일이라도 그 방법이 믿음이 아닐 때 하나님의 권능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로 들어갈 때 뒤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믿음으로 되는 일은 인간의 기술이나 지혜나 모방으로 재현하려고 해도 동일한 결과를 맺을 수 없습니다. 때로 성도들 가운데 남의 간증이나 전해들은 이야기를 통해 믿음을 흉내 내다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때 투덜대거나 불평을 합니다. 믿음은 모방이 아닙니다. 믿음은 가장이 아닙니다. 믿음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결과와 열매를 얻을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하는 것을 따라 해도 결코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마른 땅을 건너듯 건넜으나](29a). 우리는 이 기사를 읽을 때 좀 당황스럽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이라고 말하면 수긍이 가지만 ‘믿음으로 그들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을 보십시오.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파라오가 병거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추격하자 이들은 믿음은 고사하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보라, 이집트 사람들이 자기들의 뒤를 따라 행진하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주께 부르짖으며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이집트에 무덤이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데리고 나와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고 나와 이같이 우리를 대하느냐?...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리라...우리가 이집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았으리라.](출14:10b-12). 그들은 모세를 향해 불평했고, 당장 이집트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상황이 이런데 히브리서에는 “믿음으로 그들은...”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마치 모순 구절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분명히 불신 가운데 있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 없음을 잘 알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심히 거역하는 세대요, 믿음이 없는 자녀들이기 때문이라.](신32:20b)는 주님의 말씀대로 전혀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날마다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믿음으로 그들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순간까지 믿음이 없었습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앞으로 나아가게 했을 때 거부하지 않고 홍해 속으로 발을 내디뎠고, 바다를 건넜습니다. 이 부분은 분명히 믿음입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건넜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홍해 앞에서의 불신과 불평을 기록하지 않고 다만 그들이 바다 속으로 들어간 사건에 대해서만 ‘믿음으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감히 두려워서 바다 속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권능으로 바다를 가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고, 그 속을 통과해야 하는 것은 성도의 몫입니다. 양 쪽에 거대한 물 벽이 서 있고, 그 속을 통과하는 것은 불 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두렵고도 떨리는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다가 갈라지면서 해저 터널처럼 어떤 건축 구조물이 성벽처럼 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잠시 전까지 믿음이 전혀 없던 이들이 어떻게 그 두려운 홍해를 건널 수 있었던 것입니까? 무리들 가운데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진 모세, 아론, 미리암, 여호수아, 갈렙과 같은 인물들이 발을 내딛고, 앞서 나갈 때 용기를 얻어 모든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른 것입니다. 믿음을 지닌 사람들과 동행하거나 그 뒤를 따를 때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구원을 얻습니다. 열 명의 의인이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가 건짐을 받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을 호송하던 배에는 일백칠십육 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라굴로’라는 폭풍을 만나 모두 죽을 위기에 있었지만 한 사람 바울로 인해 모두 건짐을 받았습니다(행27:24-25). 폭풍우가 얼마나 심했던지 배에 있던 사람들은 “구원받으리라는 희망마저 다 사라졌더라”(행27:20)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러분이여, 기운을 내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노니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행27:25)고 말합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인해 믿음이 없던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예들은 매우 많습니다.

두려움과 불신에 빠져 절망한 이스라엘을 향해 모세는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백성들의 눈에는 뒤쫓아 오는 파라오의 군대만 보였지만 모세는 권능의 하나님, 그들을 멸하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는 구원자 하나님이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홍해가 절망의 바다로 보였지만 모세는 홍해를 갈라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실 하나님의 능력이 보였습니다. 믿음은 동일한 상황에서도 보는 것이 다릅니다. 이사야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나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강들을 건널 때에 강들이 네 위로 넘쳐흐르지 못하며 네가 불 속을 걸어갈 때에 타지도 아니하고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43:2). 모세는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은 파라오의 모든 군대보다 크십니다. 하나님은 홍해보다 크십니다. 우리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그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라.](요일4:4).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은 얼마나 큰지 세상을 다 담아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고 만족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마음 보다 크십니다.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요일3:20). 믿음의 사람 모세에게 이집트는 한 줌의 재였고, 믿음의 사람 갈렙과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사람들은 ‘우리의 빵’(민14:9)에 불과했습니다.

믿음이 없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낮에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자신들과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것을 보면서도 전혀 믿지 못한 채 두려움 가운데 울부짖고, 모세를 원망하며, 이집트로의 회귀를 원했습니다. 열 번의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지만 주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 권능을 잊어 버렸습니다. 불신은 현재 자신이 처한 것, 눈에 보이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시야와 마음을 한없이 좁혀 버립니다. 그래서 그들 속에는 여전히 파라오와 이집트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목자인 모세는 달랐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오늘 [주]께서 너희에게 보여 주시는 [주]의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이집트 사람들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조용히 있을지니라, 하니라.](출14:13~14). 믿음은 조용히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라도 우리를 건지실 수 있는 구원의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구원에 무엇을 더해 드릴 수 없습니다. 주님이 행하시는 일에 일조하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하는 것도 없습니다. 구원의 방법은 조용히 하고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우리는 홍해를 가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파라오의 군대를 몰살시킬 수 없습니다. 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가만히 서서 주의 구원을 보는 것’이 전부입니다. 많은 이들이 안식을 얻지 못하는 것은 주님이 하실 일을 자신이 대신 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다 위로 바람을 일으키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닙니다. 불 기둥을 이집트 군대 앞에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홍해를 가른 일은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부흥의 물결을 일으키자! 는 우렁찬 외침은 때로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대신하자는 외침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으켜 놓은 파도를 타고, 하나님이 갈라 놓으신 바다 속을 걷는 것이 전부입니다. 바다를 가르는데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갈라 놓으신 바다를 걷는데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사야 30:15, [{주}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께서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돌이켜 안식하여야 구원을 받으며, 조용히 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터이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사30:15). 구원은 노력과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땀과 피의 수고가 더해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돌이켜 안식하고, 조용히 하고 신뢰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구원은 언제나 믿음을 통해 얻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다시 말씀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마른 땅을 건너듯 건넜으나](29a).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믿음의 여정, 순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모세의 인도를 받아 평탄하게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기쁨도 잠깐일 뿐 금방 홍해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의 ‘라암셋’을 출발했을 때 아이들 외에 걷는 남자가 ‘약 육십만 명’(출12:27)이었습니다. 이 정도의 인원이 홍해를 건너려면 300명이 탈 수 있는 대형 비행기가 2천 대가 필요합니다. 만 명이 탈 수 있는 함선을 준비해도 60대가 필요합니다. 이는 단지 20세 이상 된 남자만 잡았을 경우이고 여자들과 애들까지 모두 계산하면 이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런 그들 앞에 홍해가 가로 막고 있습니다. 한 쪽은 광야이고, 한쪽은 이집트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로 옆으로 방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뒤에는 이집트의 군대가 오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집트를 떠났는데 모든 일이 순조롭고 평탄해야 할 것 같은데 금방 엄청난 시련,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으로 인도하셨다면 그 피할 길을 내시는 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다 해결할 수 있는 상황에만 살면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을 전혀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홍해를 건넘으로써 이집트란 세상과 파라오로 예표되는 마귀로부터 단절과 승리를 주셨습니다. 시험과 환란은 왜 주시는 것입니까? 믿음을 단련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안에 불순물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속에 인내와 체험과 소망을 낳게 하기 위해서입니다(롬5:4). 또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받고 이 땅을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29절 후반부입니다. [... 이집트 사람들은 그것을 시도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으며] (29b). 이집트 사람들 역시 홍해를 통과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아예 구경만 했다면 그들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을 잡겠다는 한 가지 욕망에 이끌려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들이 이집트인이라는 이유로 물에 빠져 죽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건너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 사내 아이들을 물에 던져 죽게 한 역사적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 홍해에 빠져 죽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한 하나님의 방법이 이집트에게는 멸망과 죽음의 방법이 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영적 진리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는 생명의 향기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사망의 향기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도들에게 구원의 증표이지만 불신자들에게는 ‘멸망의 증표’입니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교훈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믿음의 길은 주님이 함께 하신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홀로 출발한 것 같아도 하나님이 그들 앞에 서 계시며, 앞서 싸우십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이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주] 너희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눈앞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너희 앞서 가시는 그분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신1:30).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주] 너희 하나님 그분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신3:22).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강력한 방패요, 전사이신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 편에 서 계셨고, 그들을 위해 싸우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삶을 시작한 성도들에게 닥친 어려움은 모두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계시는 가운데 있는 것들이며, 주님의 통제 아래 있는 것들입니다. 홍해를 건널 수 없다면 다시 이집트로 끌려가 종살이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고, 의도하지 않고, 계획하지 않는 일들 앞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큰 시련을 대면하도록’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구원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집트를 떠났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길을 갔지만 그 앞에는 홍해가 놓여 있었습니다. 홍해 앞으로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지 마귀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길을 갈 때 우리는 각종 대적들과 원수들을 만나게 되고, 불가항력적인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잠잠히 안식하고 조용히 신뢰함으로 ‘구원의 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둘째, 믿음의 여정을 걸어갈 때 우리는 불가항력적인 두려움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강력한 원수의 위협으로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경우입니다. 마귀는 세상을 포기하고 떠난 성도들을 추격합니다. 세상 역시 밀물처럼 성도들을 향해 몰려옵니다. 죄는 결코 구원받은 성도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육신은 어떻습니까?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것 같다가도 어느덧 내 속에 불길처럼 솟아나며 나를 죄의 법속으로 이끌어 갑니다. 사탄은 어린 성도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다시 잡아 가려고 합니다. 마귀는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다닙니다(벧전5:8). 주님은 세상보다 크시고, 내 마음보다 크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셋째, 믿음의 여정을 걸을 때 우리는 ‘연약한 마음’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믿음이 없을 때 우리는 작은 물소리도 홍수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늘 두려움과 불평을 일삼게 됩니다. 믿음이 있을 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 믿음이 없을 때 큰 문제가 되어 다가옵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장해야 합니다. 담대하고 강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넷째, 위기 속에서 믿음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처음에는 이집트의 군대만 보이지만 곧 이어 모세를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자리 잡으면 믿음이 생기고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은 바다를 갈라 놓으신 다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믿게 하신 후에 바람을 보내어 바다를 가르십니다.

다섯째, 믿음으로 순종할 때 원수는 멸망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 병사들을 모두 싸워서 죽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을 뿐입니다. 그런데 뒤 따라오던 원수들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할 때 주신 구원의 수단을 원수들에게 멸망의 도구로 삼으십니다. 승리하고 싶으면 원수와 싸우기 전에 먼저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서 나아갈 때 원수는 절로 쓰러지고, 패배하고, 멸망합니다. 반면 불순종할 때는 아무리 애를 쓰고 싸우고, 저항하고, 노력해도 속절없이 패배하고 무너집니다. 모든 힘과 승리는 주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깊이 깨달아야 할 절대적 진리가 이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곧 마귀를 향한 가장 효과적인 방어요, 공격입니다. 내가 주님 편에 서면 주님은 언제나 내 편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