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언자들의 믿음
말씀: 히브리서 11:32
요절: 히브리서 11:32 아벨, 에녹, 노아로부터 시작된 믿음의 사람들의 명단은 족장들을 거쳐, 출애굽의 모세와 그 이후의 사사들, 그리고 다윗과 사무엘을 거쳐 대언자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주로 사무엘 이후 왕정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던 이들을 ‘대언자들’이라고 말하는데 성경에는 시가서 뒤에 나오는 모든 성경이 다 ‘대언서’들로 분류됩니다. 대언자들의 믿음은 33-38절까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대언자들이 믿음으로 한 일들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나라를 통치하는 왕, 성전과 율법을 맡은 제사장, 그리고 때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 선포한 ‘대언자들’이 있었습니다. 대언자들은 왕과 백성들이 나아가야 할 향도(餉道)로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때로는 잘못을 바로 잡고, 죄를 지적하고, 책망했습니다. 왕은 유다 지파, 제사장은 레위 지파로 이미 그 대상자들이 정해져 있고, 대를 이어 그 지위를 승계해 나갔지만 ‘대언자’는 주님께서 그 때마다 택하신 자를 부르시고, 일으키셔서 말씀을 선포한 사람입니다. 엘리사는 밭을 갈던 농부였는데 부르심을 받아 대언자가 되었고, 아모스는 뽕나무로 누에를 치던 사람이었고, 에스겔은 재사장의 가문이었고, 다니엘은 몰락한 왕족으로 바빌론의 포로였고, 예레미야는 아이였고, 하박국은 음악가였고 다윗은 목동이었다 후에 왕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여자들도 대언자로 부름 받기도 했는데 출애굽기의 미리암, 사사기의 드보라, 신약의 안나 등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대언자는 주의 영이 임한 자들로서 주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데 만약 선포한 말씀들이 문자 그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거짓 대언자’로 정죄를 받아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구약의 역사를 보면 거짓 대언자들은 잘 먹고 잘 살았던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거룩한 대언자들은 고난과 박해를 받고, 죽음을 당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이들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세상의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언자들은 주의 영으로 임한 말씀을 받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이 그리 가볍고 쉬운 일이 아니었던지라 성경은 무거운 짐(heavy burden)-*우리 말로는 엄중한 경고라고 번역함-이었습니다. 대언자들은 모두 짐을 지고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성경을 통독하면서 가장 자주 접하는 문구를 꼽으라면, 단연 “주의 말씀이....에게 임하니라”일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임했다. 주의 영이 임했다”는 것은 동일한 표현으로 구약 전체에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주의 말씀, 주의 영이 임한 자들이 바로 ‘대언자들’입니다. 사울에게 주의 영이 임하자 사울은 대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삼상10:10). 사울의 사자들에게 주의 영이 임하자 그들 역시 대언했습니다(삼상19:20).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은즉 누가 대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암3:8). 대언자들은 자신들이 받아서 전한 말씀을 믿었습니다. “주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고 선포한 말씀들은 결코 자기 자신들의 말이 아니었고 만군의 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이기에 그 말씀들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말씀을 선포할 수 없습니다. 대언자가 되는데는 훈련이나 교육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주의 영이 임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님이 말씀해 주시고, 주의 영이 임하면 그는 대언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설교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온 백성이 다 대언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해 시기하는 것이냐? [주]의 온 백성이 대언자가 되어 [주]께서 그들 위에 자신의 영을 두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민11:29). 모세의 이런 열망은 신약 성도들에게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모든 신약 성도들은 다 주의 말씀을 맡은 대언자요, 주께 거룩한 희생물들을 드리는 왕가의 제사장들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면 누구나 다 복음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입을 열어 담대히 주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목사나 선교사, 부흥사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인용하여,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며 진리를 선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오늘날 강단의 문제는 자신도 믿지 않는 말씀,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말씀을 선포하는데 있습니다. 성경의 영감, 정확 무오함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단지 신학을 전공했고, 교단에서 안수를 받았다는 것을 자격증으로 삼아 직업적으로 목사와 교사를 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대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믿음으로 그 말씀을 선포하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전하라는 말씀을 한 자도 가감(加減)없이, 변개시키지 않고 전하는 자들입니다. 대언자 미가야를 보십시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使者)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제 대언자들의 말이 한 입으로 왕에게 좋게 고하니 원하건대 당신의 말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의 말처럼 되게 하여 좋은 것을 말하소서, 하니 미가야가 이르되, [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니라.](왕상22:13-14). 그는 당대의 아합 왕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우상 숭배자에 사악한 왕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믿지 않는 왕이었습니다. 바알을 이스라엘의 국교로 삼아 주의 대언자들, 제사장들을 모두 죽인 그런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고합니다. 대언자들의 믿음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었습니다. 말씀을 한 자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선포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읽고 듣는 말씀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전도란 믿음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대언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 왕이나 백성들에게 선포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이 그 말씀을 믿고 확신해야 했습니다. 자신들도 믿지 않는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왕의 죽음을 선포했고, 때로는 민족의 멸망을 선포했고, 때로는 전쟁에서의 패배를 선포했습니다. 때로는 가뭄과 기근을 선포했고 죄에 따른 심판과 저주를 선포했습니다.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면서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 임할 저주와 심판의 선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위로는 왕과 통치자들, 제사장들과 목자들을 향해 그들의 타락을 책망하며 “화로다” 외치는 일은 ‘믿음’이 없이는 결단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리며 선포했고, 미가야는 뺨을 맞으며 선포했고, 이사야는 삼년 동안 벗은 몸과 맨 발로 다니며(사20:2-3) 선포했고, 호세아는 창녀를 아내로 맞아 자식을 낳으면서 선포했습니다. 대언자들은 결코 받은 말씀을 입으로만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완전한 순종이 요구되었습니다. 주님은 때로 실물 설교를 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언자들이 ‘믿음으로’ 주의 말씀을 선포했고, 믿음으로 순종했으며, 믿음으로 고난과 박해를 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들은 모두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신약 성도들의 모델이요, 표준이며, 따라야 할 자취입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서 담대하게 선포하는 일은 대언자들에게 기쁨을 주는 동시에 큰 고통과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말씀을 받아먹는 일이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언제나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계10:9). 대언자들은 믿음으로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은 믿음으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믿음으로 족장들은 약속들을 받았고, 믿음으로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원수들로부터 구원했다면, 믿음으로 대언자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들을 받아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말씀 사역은 전쟁에 비하면 좀 더 쉬워 보이지만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칼을 들고 적을 맞아 전쟁터로 나가는 것보다 예루살렘과 유다, 벧엘 등에서 백성들 가운데서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 더 어렵고 힘들었던 까닭이 무엇입니까? 백성들이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언자들이 믿음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서 가장 힘든 것은 백성들이 냉랭한 반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술한 열왕기와 역대기에는 그 결론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들으려 하지 아니하고 자기 목을 굳게 하되 [주] 자기들의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던 자기 조상들의 목과 같이 하여](왕하17:14), [이는 그들이 [주] 자기들의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분의 언약과 [주]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어기고 그것들을 들으려 하지도 아니하고 행하려 하지도 아니하였음이더라.](왕하18:12). 대언자들에게 이보다 더 힘든 일은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하는 일이라고 해서 언제나 풍성한 열매가 있고, 폭발적인 부흥이 있고, 놀라운 회개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대언자 요나는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서 딱 하루 동안 가장 짧은 설교를 했습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Yet forty days, and Nineveh shall be overthrown.)](욘3:4). 영어로 8단어 밖에 안되는 이 짧은 주의 말씀을 선포했음에도 온 도시가 회심했지만 유다와 이스라엘의 어떤 대언자도 이런 부흥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450명의 바알의 대언자들을 죽이는 승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어떤 부흥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3년 반 동안 하늘을 닫고, 다시 비를 내리는 놀라운 이적을 온 민족에게 보였음에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바알을 섬겼습니다. 대언자들은 각자 받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지만 사역의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왜 부흥이 없고 왜 성장이 없는가? 사람들은 다양한 진단을 내리고,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것입니다. 대언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모두 주의 영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없었습니다. 대언자들이 믿음이 적거나 약했습니까?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거나 뒤틀어서 전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백성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악한 왕들의 견제와 압력을 받으면서도 신실하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언자들의 선포는 회개의 열매, 부흥의 열매를 맺지 못한 때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답이 무엇입니까? 역대기하 24:19, [그러나 [주]께서 대언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사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대언자들이 그들에게 증거하나 그들이 들으려 하지 아니하니라.](대하24:19). 들으려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것보다 더 큰 고역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언자들은 쉼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눈앞의 결과를 보지 않고, 사람들의 인기를 구하지 않고, 누군가의 인정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주신 사역만을 감당했습니다. 이것이 대언자들이 믿음으로 한 일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 하나님의 거룩한 대언자들은 부지런히 말씀을 선포했고, 그 말씀대로 모든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주님은 대언자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너는 가되 포로로 잡힌 자들 곧 네 백성의 자녀들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고자 하든지 아니하든지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하라, 하시니라.] (겔3:11). 주님은 듣고자 하든지 아니하든지 ‘전하라’고 하십니다. 대언자의 사역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일은 믿음이 없이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효율성, 능률, 실용, 결과를 계산하고 예측하며 움직입니다. 그런 것이 없다고 판단되면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언자들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순종해서 일했을 뿐입니다. 단 한 명의 회심자도 얻지 못하는 사역일지라도 주님이 명하셨기 때문에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대언자들은 자신들이 입으로 선포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엄숙한 사실을 확실히 믿었고, 알았습니다. 들으려 하지 않기에 믿음이 없는 백성들의 종말을 훤히 보면서 무거운 짐을 마음에 안고 신실하게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대언자들은 백성들이 언제가 자신들의 노력과 애씀을 알아 줄 것이란 점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들’을 믿었습니다. 야고보와 베드로는 대언자들이 우리에게 보여 준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야고보서 5:10, 베드로전서 1:10을 보십시오. 첫째, 고난과 인내입니다. [내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대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으로 삼으라.](약5:10). 대언자들의 믿음은 고난과 인내로 드러났습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은 결코 고난과 인내의 본이 될 수 없습니다.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던 이들도 환란과 박해가 오면 곧 시들어져 버립니다. 믿음과 결합하지 않는 말씀은 돌밭에 뿌려진 씨앗과 같고, 바위 위에 있는 식물과 같습니다(막4:16, 눅8:13). 대언자들은 말씀을 가볍게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마음 속 깊이 뿌리 내리도록 받았기에 어떤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인내로 견디어 냈던 것입니다. 유다에서 영적으로 조금이라도 깨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대언자들의 고난을 알았습니다. 백성들이 얼마나 완악하고,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지 알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말하기를, [다시 주의 율법으로 데려오려고 그들에게 증거하셨으나 그들이 교만히 행하여 (사람이 행하면 그 가운데서 살게 되는) 주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범죄하고 어깨를 뒤로 빼며 목을 굳게 하고 들으려 하지 아니하였나이다.](느9:29)라고 했고, 대언자 이사야는 이르기를, [이는 반역하는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녀들이요, [주]의 법을 들으려 하지 아니하는 자녀들이니라.](사30:9)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간증이기도 했습니다. 대언자 스가랴는 [그러므로 그가 외쳐도 그들이 들으려 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이 외쳐도 내가 들으려 하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슥7:13)고 합니다. 모든 대언자들이 공통적으로 겪은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들으려 하지 않는다”입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이나 미국이나 한국이나 다 한 가지입니다. 대언자들의 믿음은 [고난과 인내의 본]으로서 우리에게 우뚝 서 있습니다. 오늘날 신약 성도들은 이스라엘의 왕들이나 제사장들이 아니라 대언자들의 믿음과 가장 흡사할 것임을 우리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대언자들이 우리의 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대언자들은 받은바 말씀의 전달자로서 한두 번 외치다 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분명하게 반복적으로 선포하고 백성들을 가르치고, 불경한 죄인들을 상대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들은 우상 숭배자들과 율법을 업신여기는 왕들과 통치자들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때로 그들은 받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표적이 되기도 했고, 비난과 박해를 받기도 했고, 모진 고초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성경을 읽으면서 대언자들의 삶이 존경받고, 영광스럽고, 위대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들의 일생은 결코 평안하고 쉬운 삶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의 증언을 들어 보십시오. [대언자들 중에서 너희 조상들이 핍박하지 아니한 자가 누구였느냐?](행7:52a). 대언자들은 사회에서 존경받고, 인기가 있고, 지위와 명예가 주어지는 엘리트의 삶이 아니라 고난과 박해와 비난을 받으며 살다 마침내 죽임을 당하는 예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의 칼이 멸망시키는 사자(獅子)같이 너희의 대언자들을 삼켰느니라.](렘2:30b) 말씀하신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언자들을 몹시 싫어했고, 그들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마침내 그들을 죽여 버리곤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제자들과 무리들을 향해 [... 그들이 너희 전에 있던 대언자들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2b)고 하셨고, 십자가를 목전에 두시고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대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마23:37a)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대언자들의 믿음이 우리의 본이라면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어떤 일이 닥칠지, 어떤 결과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지 아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둘째, 대언자들은 부지런히 성경을 탐구했습니다. [이 혼의 구원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에 대하여 대언한 대언자들이 부지런히 조사하고 탐구하되](벧전1:10). 대언자들이라고 해서 성경을 공부할 필요가 없이 저절로 모든 말씀을 다 통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 계시의 은사를 받았다는 이들 가운데 성경 공부를 전혀 하지 않고 마치 성경을 다 아는 것처럼 자신을 속이고, 형제들을 속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받았던 다니엘도 늘 성경 읽기와 성경 공부에 매진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니엘 9:2에, [곧 그의 통치 제일년에 나 다니엘이 여러 책을 통하여 [주]의 말씀이 대언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사 /알려 주신/ 그 햇수를 깨달았나니 곧 그분께서 예루살렘이 황폐한 가운데 칠십 년을 채우시리라, 하신 것이니라.](단9:2). 그는 환상과 꿈을 깨닫는 지혜와 명철의 영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읽고, 공부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기도만 열심히 한 사람이 아닙니다. 늘 성경을 연구하고, 그 뜻을 알기 위해 공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대언자들은 성경을 부지런히 조사하고 탐구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대언자들의 이런 본을 받아 성경을 탐구하고(요5:39), 공부해야(딤후 2:15) 합니다. 셋째, 대언자들은 말씀을 믿는 그대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받은 말씀을 입으로 선포한 것으로 그 임무가 끝난 것이 아니라 몸으로, 행위로, 삶으로 그들이 전한 말씀을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우리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말씀을 전해야 하고, 믿고 전한 말씀대로 말과 행위와 삶으로 드러내 보여 주어야 합니다. 전도는 입으로 전한 후에 삶으로도 전함으로 확증됩니다. 우리는 유다서를 통해서 에녹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대언한 것을 알 수 있지만 대언자란 ‘단어’가 처음 사용된 이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그러므로 이제 그 남자에게 그의 아내를 돌려보낼지니 이는 그가 대언자(代言者)이기 때문이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창20:7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족장일 뿐 아니라 대언자였습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말씀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집을 짓지 않고 장막에 거하면서 ‘나그네와 순례자임을 고백’하면서 살았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입으로는 나그네라고 선포 하면서 큰 집을 짓고, 땅을 사들이고, 터전을 일구었다면 그의 삶, 그의 행동이 그의 말을 뒤 엎어 버리고, 거짓이라고 증언해 버리게 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이 믿는다고 선포한 믿음의 내용들을 다 부정해 버리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나의 행위가 나의 말을 배반하고, 나의 삶이 나의 믿음을 부정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대언자들은 자신들이 믿고 선포하는 말씀을 믿었고, 그 삶으로서 선포한 말씀의 증거로 삼았습니다. *밭을 산 예레미야. 대언자들을 믿음의 본으로 삼기에 조금도 이상이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말씀만을 스피커처럼 전하고 만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전한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며 살았던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고난과 박해가 따를지라도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대언자들은 신탁(Oracle)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전해 준 계시의 전달자로서 ‘하나님의 매개체, 전달자’로서 어떤 특정한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받은 말씀을 힘써 선포하고,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고,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엄격한 율법주의를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말하고, 가르치는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고도 여전히 율법주의에 머물 수 있었던 것 역시 그들이 배우고, 듣고, 가르치고, 주장하는 그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선과 외식이 그 특징이었기 때문에 겉 모양은 아무리 강하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즉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사람이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고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롬2:21). 유대교를 웃음거리로 만든 것은 남이 아니라 바로 위선과 외식에 빠진 유대 율법주의자들이었듯이 오늘날 복음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이들은 복음에 합당한 대로 행하지 않는 복음주의자들, 근본주의자들입니다. 킹 제임스 성경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이들 역시 킹 제임스 성경을 외치지만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 킹 제임스 주창자들입니다. 대언자들은 자신들이 선포한 말씀을 믿음으로 행했고 지켰고 살았습니다. 넷째, 대언자들은 기록된 성경 말씀을 믿었습니다. 대언자들은 주의 영으로, 계시로, 환상으로 자신에게 임한 말씀만을 믿은 것이 아니라 이미 이전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들을 철저하게 믿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물론이요, 하나님이 주의 영으로 전해 준 말씀을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해 율법에 기록된 저주와 심판이 임할 것을 믿었습니다. 바빌론 포로기 이전의 대언자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불타고, 백성들이 바빌론에서 70년간 포로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이들은 후에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과 메시야가 오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천년 왕국을 믿었고, 민족들의 심판을 믿었고, 부활을 믿었고, 주의 재림과 심판을 믿었습니다. 대언자들은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 말씀들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물론이요, 다른 대언자들을 통해 선포된 말씀을 믿었습니다. 다니엘이나 스가랴는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자신이 깨달은 말씀, 자신이 배우고 아는 말씀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전부를 철저하게 믿어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언자들이 필요했듯이 지금 이곳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줄 ‘선포자들’(preachers)이 필요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대언자들의 믿음을 본받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주제별(글) > 히브리서11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맹렬한 불을 끄기도 하며(II) (1) | 2008.04.14 |
---|---|
믿음을 통해 얻은 것들(I) (0) | 2008.04.13 |
사무엘의 믿음 (0) | 2008.04.11 |
다윗의 믿음 (0) | 2008.04.10 |
입다의 믿음 (0) | 2008.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