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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맹렬한 불을 끄기도 하며(II)

말씀: 히브리서 11:34
요절: 히브리서 11:34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불꽃 가운데 태어난 민족입니다. 요셉의 초청을 받아 야곱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이집트로 내려와 고센에 정착했고, 무려 400년 간이나 이집트에서 지냈습니다. 당대에 이집트는 수학, 과학, 천문, 지리, 건축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였고, 나일 강을 중심으로 한 풍성한 농산물과 지중해를 통해 무역이 성행하여 지금의 미국과 같은 세계의 중심 국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이곳에서 목축을 하며 인구를 불렸습니다. 그러나 이집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기에 만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격변기를 통해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파라오들이 등장해서 이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에게는 [용광로]였습니다. 대장간이나 제철소를 견학한 분들이라면 용광로에서 벌겋게 타오르는 쇳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용광로는 금과 은을 제련하는 곳도 있지만 강철들을 녹여서 필요한 쇠를 만들어 냅니다. 용광로는 이물질들의 특성을 다 태워 버리고 합성, 합금을 만들어 버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집트에 온 사람들은 다 녹아서 이집트 사람들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이집트란 용광로에서 녹지 않고 무려 400년 이상이나 그 정체성과 민족적 독특성을 유지하고 있던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불 속에서 불이 타지 않는 물질처럼 이스라엘은 그 태생부터 “맹렬한 불속에 있지만 불에 타지 않는” 민족이었습니다.

불타는 용광로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건져내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주]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용광로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사 이 날의 너희와 같이 자신을 위하여 상속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신4:20). [그들이 주께서 쇠 용광로 한가운데서 곧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이며 주의 상속이기 때문이니이다.](왕상8:51). 주님은 용광로 속에서 이스라엘을 녹이신 것이 아니라 단지 단련만 하셨습니다. 용광로의 불 꽃이 이스라엘을 녹여서 이집트에 용해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도록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 하였으되 은을 연단 하듯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 택하였노라.](사48:10). 이스라엘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안고 태생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믿음으로 살 때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 민족적 특성과 맛을 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부름 받을 때의 장면으로 가 봅시다. 출애굽기 3:2-4입니다. [[주]의 천사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나니라. 그가 보니, 보라,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떨기나무가 소멸되지 아니하므로 모세가 이르되, 이제 내가 옆으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가, 하였더라. 그가 보려고 옆으로 가는 것을 [주]께서 보시고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거늘](출3:2-4). 주님은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서 주님을 부르셨습니다. 떨기나무는 분명히 불이 붙어 있었지만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놀라서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가” 라고 말합니다. 왜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 대답을 성경 속에서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불 속에서 전혀 타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와 같은 실제적인 예를 믿음을 통해서 보여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다니엘 3장을 보십시오. 바빌론 제국을 건설한 ‘느부갓네살’은 누구든지 자신이 세운 금 신상에 경배하지 않는 자들은 예외없이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누구든지 엎드려서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즉시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 한가운데 던져지리라, 하니](단3:6). 이 말은 농담이나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왕의 말은 그 자체가 엄한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타는 용광로에 던져지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왕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라 불리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였습니다. 이들은 유대에서 포로로 잡혀 와 왕궁에서 교육을 받았고, 방백들이 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무엇을 믿은 것입니까? 하나님은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에서 능히 건져 내시는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오 왕이여, 그렇게 한다 하여도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에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또한 그분께서 우리를 왕의 손에서 건져 내시리이다.](단3:17). 이들은 하나님이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서 자신들을 건져내실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흔히 성도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데 무엇을 믿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실제적인 문제 앞에서는 ‘믿음’과는 별개의 요소들을 자꾸 고려합니다. 주님께서 건져 주실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믿지만 건져 주실 의사가 있는지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 은혜 베풀어 주심, 구원해 주심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믿음의 현 주소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어야 할 뿐 아니라 구원하실 수 있음에도 구원해 주시지 않을 때에는 불에 타 죽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임을 믿고 받아 들여야 합니다. 주님이 모든 성도들에게 언제나 죽음의 순간에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은 아닙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기적적으로 살아난 성도들보다 정상적으로 죽은 성도가 훨씬 많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역시 주님께서 그들을 살려 주시지 않을지라도 주님이 용광로와 느부갓네살의 손에서 자신들을 건져 주신다는 믿음은 전혀 변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오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형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할 줄을 왕은 아옵소서.] (단3:18).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한 내용들이 자신이 기대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얻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불평하는 성도들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의 주권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있으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뜻과 소원을 다 들어 주는 ‘나의 종된 전능자’가 아니라 ‘나의 주인되신 전능자’로 경배하고 섬겨야 합니다.

이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왕과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선포했을 때 왕은 시험이라도 하듯이 진노하여 평소보다 일곱 배나 용광로의 불길을 세게 한 후에 이들을 묶은 채 던져 넣었습니다. [이 세 사람 곧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당한 채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 한가운데로 떨어졌더라.](단3:23). 그러나 이들은 용광로 속에서 그을린 흔적도 없이 안전하게 거닐다 나왔습니다.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거하시며 불을 꺼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불 속이든, 물속이든, 광야이든, 강이든, 산이든, 사자 굴이든 그곳이 안전한 곳이며, 평안한 곳이며, 자유와 안식과 승리가 있습니다.

불 속에서 건지시고, 왕의 손에서 건지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에 보상해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은 이 세상이 고난의 용광로입니다. 그러나 결코 우리는 불 꽃 속에서 불태워지지 않으며 녹지 않습니다. 고난의 풀무 속에서 불길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믿음이 더욱 순수하게 정련될 뿐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단련하려고 오는 불같은 시련에 관하여는 마치 이상한 일이 너희에게 일어난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4:1). 불 속에 있지만 불에 타지 않고, 녹지 않는 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일찍이 욥이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분께서 아시나니 그분께서 나를 단련하신 뒤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고 고백한대로 우리는 믿음의 단련을 통해서 정금같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꺼야할 불꽃들이 무엇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는 물이 아니라 믿음으로 타오르는 불을 꺼야 하는 소방관들입니다.

첫째, 마귀의 불화살(엡6:17)입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취하며 이것으로 능히 저 사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끄고](엡6:16). 마귀는 언제나 우리를 불태우기 위해 불화살을 준비해 두었다가 쏘아댑니다. 믿음의 방패로 막지 못하면 우리는 불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화상의 고통을 잘 알 것입니다. 작은 성냥 불이나 촛불, 라이터 불에 살짝 대여도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자매들은 요리 하다가 뜨거운 것에 대여본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속사람은 영적으로 불태워질 수 있습니다. 현 세상은 용광로입니다. 우리를 태우고, 녹이려 합니다. 이 불은 영적인 불꽃이라 물로는 끌 수가 없습니다. 이 불은 마귀의 불화살이라 불타오르는 즉시 말씀의 물속에 잠겨야만 합니다. 생수의 강 성령 속으로 깊이 잠겨야 합니다. 엘리사를 찾아온 나아만 장군이 요르단 강 속에 일곱 번 몸을 잠근 것처럼(왕하5:14), 모든 성도들은 하루에 일곱 번씩 하나님의 말씀의 물 속에 자신을 깊이 잠금으로써 메마른 영이 아니라 늘 마음에 수분이 가득하고, 그 뱃속에 샘이 가득하고, 생수의 강이 흘러 나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의 물, 생수의 강에 젖어 있는 곳에 떨어진 불화살은 잠깐 연기만 내고 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둘째, 정욕의 불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것을 심화(心火)라고 불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도 자기 옷을 태우지 아니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뜨거운 숯불을 밟고서도 자기 발을 태우지 아니할 수 있겠느냐?] (잠6:27~28). 가슴 속에 타오르는 정욕의 불꽃은 남을 태우고, 자신을 태우고, 자기 온 집을 태우는 무서운 불길입니다. 불은 아무리 태워도 만족이 없듯이 자신이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다 태우고 맙니다. 정상적인 결혼 생활, 침상을 거룩히 하는 것이 정욕의 불길을 잡는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금욕이나 고행이나 음식 조절, 명상 등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억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게 하라. 이는 불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라.](고전7:9). 결혼은 정욕의 불길을 다스리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결혼을 통해 정상적인 부부 생활, 건전한 가정을 영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르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혼인의 가치를 부정하고, 가정의 가치를 소홀히 여기는 이들은 결코 정욕의 불 길을 억제할 수 없고, 마침내 자신들을 다 태우고 맙니다.

셋째, 위선의 불입니다. 위선은 뜨거운 인두로서 양심을 지지는 불입니다. [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딤전4:2). 성도들이 첫 사랑을 잃어 버리면 위선에 빠지기 쉽습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위선의 가면은 늘어만 갑니다. 위선에 빠지면 한 두 번은 양심의 가책을 받다가 어느덧 자연스럽게 종교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양심은 완전히 뜨거운 인두로 지져진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누룩이 바로 위선이었듯이 현대 교회가 안고 있는 흔한 누룩이 ‘위선’입니다. **하는 척 하고, **하는 체 하는 신앙이 그것입니다. 신앙 연수는 올라가지만 마음을 새롭게 하고, 묵은 땅을 갈아 엎는 일은 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상한 척, 경건한 척, 믿음좋은 척 하는 교회 생활이 바로 ‘위선의 불’입니다. 말은 잘 하지만 실행은 없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형식은 있지만 실제가 없습니다. 위선의 가면을 벗는 데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낮추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넷째, 마음 속에 타오르는 분노, 질투의 불이 있습니다. [/너는/ 나를 도장같이 네 마음에 새기고 도장같이 네 팔에 새기라. 이는 사랑이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가 무덤같이 잔인하기 때문이니 그 숯은 극히 맹렬한 불꽃을 지닌 불붙은 숯이니라.](아8:6). 이 불은 너무나 강렬해서 무덤같이 잔인하고 극히 맹렬한 불꽃을 지닌 불붙은 숯이라고 말합니다. 질투로 인해 벌어지는 살인 사건은 물론이고 크고 작은 일들이 부지기수로 터지고 있습니다. 질투의 영에 사로잡히면 모든 것을 태울 때까지 결코 꺼지는 법이 없습니다. 잠언 6:34-35, [이는 한 남자의 격노가 질투이기 때문이라. 그런즉 원수갚는 날에 그가 용서하지 아니하고 어떤 대속물(代贖物)도 중히 여기지 아니하며 네가 많은 선물을 줄지라도 만족하지 아니하리라.](잠6:34-35). 질투는 정당한 감정입니다. 우리 주님 역시 질투의 불을 가지고 계십니다. 주님이 지닌 질투의 불은 소멸시키는 불인지라, 한번 붙으면 누구도 끌 수가 없습니다. 성도들은 같은 형제, 자매들을 향해 질투의 불을 일으키지 말고 주님을 위해 질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내가 [주] 만군의 하나님을 위하여 심히 질투하였사오니”(왕상19:10,14)라고 말합니다. 그가 한 이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대신 바알을 섬길 때 하나님을 위해 심히 질투했고, 이로 인해 바알의 대언자들을 갈멜 산에서 450명이나 잡아 죽이게 된 것입니다. 성도들이 주님을 위해 질투할 줄 모른다는 것은 주님을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른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을 위해 질투할 줄도 알게 되며, 배교하는 형제 자매들, 배교하는 교회들을 볼 때 견딜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질투로 너희에 대하여 질투하노니](고후11:2a). 그는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질투 할 줄 알았습니다. 사랑과 질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다섯째, 온 몸을 불태우는 불은 혀입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법의 세계라. 이와 같이 혀는 우리의 지체들 가운데 /하나로/ 온 몸을 더럽히고 본성의 행로에 불을 붙이며 자기도 지옥 불로 불타느니라.](약3:6). 혀를 통해 사람들은 본성의 행로에 불을 붙입니다. 불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불이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불이라도 그것을 잘못 사용하면 끝 장입니다. 작은 불씨 하나로 온 세상을 태울 수도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내고, 따스한 열기를 내 주던 불로 집을 태우고, 창고를 다 태울 수도 있습니다. 물을 끓여 주고, 요리를 하던 그 불 길이 카펫이나 커튼에 옮겨 붙으면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혀는 마음을 밝혀 주기도 하고, 뜨겁게 끓어 오르게도 하지만 잘못 붙이면 온 몸을 파멸로 이끕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는 악을 캐내나니 그의 입술에는 타오르는 불 같은 것이 있느니라.] (잠16:27). 이는 단지 입조심, 말조심 하라는 정도의 도덕적 교훈을 주는 말씀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그런데 혀를 길 들일 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믿음을 통해서만 이 불을 끌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성도들 속에 있어야 할 불은 무엇입니까? 믿음을 통해서 맹렬한 불을 끄는 법이 아니라 오히려 더 뜨겁게 타오르도록 붙여야 하는 불이 있습니다.

첫째, 말씀의 불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산산조각 부수는 쇠망치 같지 아니하냐?](렘23:29). 하나님의 말씀은 불과 같아서 그 말씀을 받아 들일 때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이는 제자들이 증언합니다. [그들이 서로 이르되, 그분께서 길에서 우리와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 기록들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24:32). 저는 성경을 통해 말씀을 새롭게 받고, 깨달을 때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어떤 형제의 간증이나 말씀의 교제를 통해 말씀이 새롭게 다가올 때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말씀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 마음이 뜨겁게 되지 못하면 마음 속에 불이 너무 약하거나 꺼져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기도의 불입니다. 뜨겁게 기도하라. 의로운 자의 “뜨겁고 효력있는 기도”가 많은 일을 한다고 합니다(약5:16). 우리는 기도의 불 꽃을 뜨겁게 해야 합니다. 에바브라는 중보 기도를 뜨겁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기도로 뜨겁게 수고하나니”(골4:12). 주님께서는 성막에 사용할 기름 제조법을 말씀해 주시면서, ‘항상 등불이 타게 할지니라.’(출27:20)고 명하셨습니다. 기도는 등불이 꺼지면 모든 사역은 겉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셋째, 영의 등불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영이 등불이라고 말합니다. [사악한 자의 등불이 얼마나 자주 꺼지는가!](욥21:17a), [의로운 자의 빛은 기뻐하나 사악한 자의 등불은 꺼지리라.](잠13:9), [누구든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면 그 사람의 등불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꺼지리라.](잠20:20). 사람의 영이 사람 속에 있는 등불이라면 성령은 주님이 우리 안에 주신 등불입니다. 죄를 짓고, 불법을 행할 때 우리 속에 있는 등불은 꺼집니다. 영을 밝히는 일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등불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따라 행할 때 등불은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성/령을 억누르지 말라.](살전5:19). Quench Not. 이 말은 불꽃을 꺼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거역하거나 슬프시게 하거나 반역하거나 대적하면 우리 속에 있는 등불은 금방 어두워집니다. 저는 쓸데없는 말을 함으로써, 악하고 음란한 생각을 함으로써 내 속에 있는 등불이 갑작스럽게 꺼져 버리고, 성령이 소멸되어 버리는 경험을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의 기쁨과 즐거움이 갑자기 사라진 경험이 없습니까? 마음 속에 번민과 근심과 염려가 나를 사로 잡는 경험이 없습니까? 속이 어두워지면 앞이 캄캄해 집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십시오. 마음 속에 등불이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즉 주의하여 네 안에 있는 등불이 어둡게 되지 않도록 하라.](눅11:35). 특히 보는 것에 주의하십시오. 눈은 몸의 등불이기 때문에 눈이 악하면 즉시 온 몸이 어둡게 됩니다(눅11:34). 주님은 [너희 허리에 띠를 띠고 너희 등불을 타오르게 하며](눅12: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이 뜨거워야 합니다. 불이 꺼져 버리면 뜨겁지도 차지도 않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주님은 이런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이든, 기도 하는 일이든, 사랑을 하든 무엇이든 뜨겁게 해야 합니다. [일을 게을리 하지 말고 영이 뜨거운 가운데 {주}를 섬기며](롬12:11).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해 줄 불은 말씀과 성령이요, 이 불로 무엇이든지 뜨겁게 행할 수 있기를 빕니다.

**주의: 불타는 용광로 속으로 던져지는 것이 성도들의 인생입니다. 마귀의 제안과 타협을 거부할 때 세상은 우리를 불로 태우려 합니다. 중세에 마귀들의 본산인 캐톨릭이 마녀 사냥이란 이름으로 성경 신자들을 잡아서 늘 불로 태워 죽였음에 주목하십시오.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진 폴리갑은 장작더미 위에 놓인 채 불에 타 죽었습니다. 영어 성경을 번역한 틴데일 역시 장작더미 위에서 불에 타 죽었습니다. 중세 1,500년 동안 불에 타 죽은 성경 신자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언제나 믿음을 통해 ‘불을 끈’ 것은 아닙니다. 불에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그들이 믿음이 없었다, 적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가 꺼야 할 불은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마귀의 불화살, 정욕의 불꽃, 위선의 불, 본성의 행로에 불 붙이는 혀. 우리가 꺼뜨리지 말고 활활 타오르게 해야 하는 불들에 대해서도 공부했습니다. 말씀의 불, 기도의 불, 영의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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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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