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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III)

말씀: 히브리서 11:34
요절: 히브리서 11:34

믿음으로 하는 일 가운데 놀라운 것은 ‘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 믿음을 통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부족해서, 믿음이 없어서 하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듭니다. 피한다는 것은 패배자들, 도망자들이 하는 일이요, 힘이 없는 약자들의 불가피한 선택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믿음을 통해 대언자들이 한 일 중의 하나는 ‘칼날을 피하는 것’이었다 기록합니다. 용감하게 원수들의 칼날을 막았다, 장렬하게 두려움 없이 온 몸으로 칼날을 맞았다가 아니라 믿음으로 그들은 ‘칼날을 피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자처럼 담대하게 적을 맞서 싸운 삼손과 달리 이들은 원수들의 칼날을 피해 도망을 쳤습니다. 당장 떠오르는 믿음의 영웅들이 몇은 생각이 날 것입니다. 엘리야는 칼날을 피해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다윗 역시 사울의 칼날을 피해 이웃 나라로 도망을 갔고, 왕이 된 후에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도망을 가야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매우 슬픈 일이지만 반드시 믿음으로 해야 할 일임에 주목하십시오. 원수의 칼날로부터 안전하게 피하는 것은 맞서 싸워 이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싸워 이겨야 할 것이 있고, 피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한 가지만을 절대 선이라고 주장하거나 그렇지 않는 것을 냉소적으로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균형이 있습니다. 진리는 언제나 조화롭습니다.

때로 진리의 수호자인 것처럼 거만한 성도들 중에는 자신만이 오직 성경대로 믿고, 타협을 거부하는 줄 알면서 자신이 알고 믿는 교리만을 정도 이상으로 강조함으로써 함께 강조되어야 할 진리들을 약화시켜 버리거나 무시해 버리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교리적 순수성을 위해 ‘분리’를 강조하지만 결코 ‘하나됨, 일치, 연합’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속성 중에 그 무엇보다 ‘거룩’을 강조하지만 결코 ‘사랑’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리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지만 결코 ‘교훈’의 중요성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자적 해석에 대해서 엄청나게 중요하게 강조하지만 결코 영적 적용이나 예표적 진리에 대해서 무시하지 않습니다. 진리의 한 면을 부각시킬 때 진리의 다른 면이 함께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우리는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영적 전투와 승리에 대해 늘 설교하고 강조하지만 오늘은 ‘피하는 것도 믿음이다.’라고 외칩니다. 전도서에 이르기를,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무너뜨릴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애곡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들을 버릴 때가 있고 돌들을 함께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껴안는 것을 금할 때가 있으며 얻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화평할 때가 있도다.] (전3:2~8)고 말합니다. 솔로몬은 진리의 양면을 잘 말하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한 면만을 지나치게 부각하고 전부인 것처럼 생각함으로 또 다른 진리를 무시하고 약화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합니다. 핵심은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한 것인가? 아닌가? 입니다. 싸우더라도 믿음이 아니라 육신으로 싸웠다면 그것은 승리와 패배를 떠나서 이미 잘못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도망을 치더라도 믿음으로 한 일이라면 그것은 승패와 관계없이 잘 한 일입니다.

34절입니다. [맹렬한 불을 끄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싸움에서 용맹하게 되어 외부의 군대들과 싸워 물리치기도 하며] (히11:34). 하나님은 성도들이 죽는 것을 허락하실 때가 있고, 초자연적으로 죽음의 상황에서 건지실 때가 있습니다. 정해진 공식 같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돌에 맞아 죽고, 칼날에 죽고, 불에 타서 죽고, 광야에서 죽고, 물속에서 죽고, 질병으로 죽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반대로 그런 모든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다 건지실 수도 있습니다. 불타는 용광로에서 건지시고, 바다의 깊음 속에서 건지시고, 광야의 백성에게 물과 빵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핵심은 언제나 믿음입니다. 칼로 맞서 싸우는 것도 믿음이고, 피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다윗은 싸워 이길 때도 있었고, 피해서 도망갈 때도 있었습니다. 이는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명철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선한 판단력을 주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과 결과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 보십시오. 마귀는 살인자입니다. 마귀의 손에는 때로는 활이 들려 있고 때로는 칼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향해서 멀리서 불붙은 화살을 날리고, 때로는 곁에 와서 칼을 휘두릅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믿음의 방패’가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하고, 싸울 때가 있는 반면 믿음으로 우리는 마귀의 날카로운 공격을 모두 피할 때도 있습니다. 맞서 싸워 이기는 것만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을 통해 칼날을 피하는 것은 일방적인 도망자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항복을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내 주신 피할 길,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도피처, 주님이 날개 그늘 아래로 안전하게 피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마귀의 앞잡이가 되었지만 결코 싸워서는 안 되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그냥 손해를 보고, 참아야 할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고전6:6-7). 형제들과의 불화, 분쟁을 끝까지 싸워서 법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해도 그것은 믿음의 승리가 아닙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이제 너희 가운데 전적으로 허물이 있나니 그 까닭은 너희가 서로를 고소하기 때문이라. 차라리 부당한 일을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빼앗기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6:7)고 말합니다. 싸워 이기는 것이 능사가 아닌 경우는 많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또 누가 너를 법에 고소하여 네 덧옷을 빼앗으려 하거든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고] (마5:40)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무능력해서 하는 패배가 아니라 믿음으로 당하는 ‘아름다운 패배’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패배입니다.

다윗은 분명히 뛰어난 군사였고, 백성들의 지지와 당대의 제사장이요, 사사였던 사무엘의 지지를 받는 입장이었지만 사울을 향해 칼을 빼는 그의 칼날을 피해 도망을 갔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들을 향해 칼을 들 수 없었습니다. 사무엘은 칼을 빼서 아각을 죽일 수는 있었지만 자신의 손으로 세운 사울 왕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 싸운다고 하지만 주님은 칼을 거두게 하셨고, 모든 제자들이 도망을 가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동료들을 향해 칼을 빼서 싸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육신으로 방해하는 일은 더욱 안 됩니다. 피해야 할 때 싸우는 것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일 뿐 아니라 죄입니다. 입다는 에브라임을 향해 칼을 빼었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힘을 합해 베냐민 지파를 향해 칼을 뺀 적이 있고, 레위의 자손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한 형제들을 향해 온 종일 칼을 휘두른 적이 있지만 이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우리는 싸우는 것보다 피해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싸우지 않고 피해야 할 때, 겉보기에는 패배인 것 같고, 비겁한 도망자 같지만 이 일은 ‘믿음으로’ 행해야 할 일입니다.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란 말씀은 앞 구절에서 ‘믿음을 통하여’란 말씀에 걸려 있습니다. 피하는 일은 공격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어디로 피해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칼날을 피한 성도들’의 예를 성경을 통해 살펴 보고 우리가 피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함께 성경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자, 보십시오. 출애굽기 5:21, 15:9입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파라오의 눈과 그의 신하들의 눈에서 우리의 향기를 몹시 싫어하는 것으로 만들고 또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주]께서 너희를 보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출5:21). [그 원수가 말하기를, 내가 쫓아가서 따라잡고 노략물을 나누리라. 그들을 덮쳐 내 욕망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출15:9). 이스라엘이 파라오의 칼날을 피하는 길은 믿음뿐입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멸하려고 칼을 잡았습니다. 그들을 모두 잡아 죽이겠다고 결심했고, 군대를 동원해 추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파라오의 칼날에 대항해서 싸우도록 하지 않으시고, 피하도록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이집트 땅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믿음으로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넜기 때문입니다. 칼날을 피하는 일이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피하는 일은 맞서 싸우는 일만큼이나 모험과 담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내시는데 그 길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피한다고 피한 길이 오히려 죽음을 재촉하는 길이 될 수 있고, 더 심한 올무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지혜와 판단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나듯이, 작은 위험을 피하려다 더 큰 위험을 만나는 경우는 허다합니다. 피난길이 죽음의 길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피하려면 믿음으로 안전하게 확실하게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길을 내시고, 하나님이 숨기시면 그는 절대 안전합니다. 안전과 평화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싸우고, 믿음으로 피하십시오. 원리는 같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피하라고 해도 피하지 못합니다. 롯을 보십시오. 주님은 미리 소돔과 고모라에 임할 심판을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19:17, [...도피하여 네 생명을 보존하라. 뒤를 돌아보거나 이 온 평야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피하라. 네가 소멸될까 염려하노라. 하니](창19:17b). 그러나 롯은 산으로 도피하지 못했습니다. 산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롯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산으로 도피할 수 없나이다....](창19:19). 이 얼마나 황당한 대화입니까? 피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구약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음으로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도피하지 못했기 때문에’ 칼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주님께서 대언자들을 통해 미리 칼날을 피하는 법을 말씀해 주셨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믿지 않고, 피하지 않음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믿음으로 피하지 않고 자기들의 힘과 지혜대로 칼과 기근과 역병을 피하려 했던 이들은 결국 아무도 안전하게 피하지 못했습니다. [목자들에게는 도망할 길이 없겠고 양떼의 우두머리들에게도 도피할 길이 없으리로다.](렘25:35).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피할 길을 내어 주셨음에도 믿음으로 피하지 않았다가 재앙이 닥친 후에야 스스로 피한다고 하다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장차 닥칠 여러 가지 환란과 재앙, 심판 등으로부터 피하는 길을 정확히 제대로 알려 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받아 들인 자들은 안전하게 피할 수 있습니다. 원수의 칼날이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칼이든 믿을 때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대언자들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스스로 원수들의 칼날을 피하겠다고 이집트에 원조를 요청하고 주변 민족들과 동맹을 맺었을 때, 그들은 모두 바빌론의 칼날에 죽었습니다. 산으로 계곡으로 도망을 가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들에 나간즉, 보라, 칼에 죽은 자로다! 내가 도시에 들어간즉, 보라, 기근으로 병든 자로다! 참으로 대언자나 제사장이나 다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땅으로 다니는도다.](렘14:18). 이들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발버둥을 치고, 도망을 다녀도 결코 칼날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믿음 외의 어떤 다른 방법으로 바빌론의 칼날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피할 길이 아니라 망하는 길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길 수 없으면 피하라고 하지만 이기는 일이나 피하는 일이나 동일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정말 위험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칼날은 아니어도 각종 사건 사고가 우리 주변에 상존하고 있습니다. 이곳 미국처럼 개개인이 총기를 소유하고 있는 이런 나라에서는 어디서 총알이 날라 들지 모릅니다. 어디서 눈먼 차가 나를 덮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칼 날을 피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을 통해 각종 사고, 질병, 천재지변, 갑작스런 두려움과 재앙, 사악한 자의 황폐하게 함 등으로부터 안전하게 피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너는/ 갑작스런 두려움이나 사악한 자가 황폐하게 함을 무서워하지 말지니 이는 [주]께서 네 확신이 되시므로 네 발을 지켜 /거기/ 걸려들지 아니하게 하실 것임이라.] (잠3:25~26) 고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까닭 없는 저주, 갑작스런 두려움, 사악한자가 황폐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피하게 할 수 있습니다. 길이 없는 곳에서도 주님은 얼마든지 피할 길을 내십니다. 주님 자신이 길이시기 때문입니다(요14:6). 보험이 나를 지켜 줄 수 없고, 국가가 나를 지켜 줄 수 없습니다. 군대와 경찰이, 가족과 친구와 친지들이 나의 피할 길이 되어 줄 수 없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나에게 닥치는 각종 칼날을 피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원수들을 멸하는데도 불패의 용사였지만 믿음으로 원수의 칼날을 피하는데는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22:10, [내 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사랑하는 것을 개의 세력에서 건지소서.](시22:20). 그의 이런 기도에 주님은 신실하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왕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요, 자신의 종 다윗을 그 해하려는 칼에서 건지시는 분이시로다.] (시144:10). 원수의 칼날은 때로 친구를 통해서, 때로는 신뢰하는 종이나 가족을 통해서 찾아옵니다. 평안히 잠을 자다 침상에서 죽은 왕들이나 권력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암살자들이 출몰하고, 내부의 반란자들이 속출합니다. 보이지 않는 사방에서 칼날이 있습니다. 그래서 돈이 있는 사람들은 돈으로 경호원들을 삽니다. 권력자들 역시 항시 경호원들이 따라 붙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원수의 칼날을 다 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건지시지 않으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칼날을 피했습니다. 그는 산으로 강으로, 이웃 나라로 도망치는 그런 도망자 신세였습니다. 누가 다윗의 든든한 후견자가 되어 사울의 칼날로부터 지켜 준 것이 아니라 다윗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사울의 칼날을 피한 것입니다. 다윗이 만약 군대를 일으키거나 백성들 앞에서 정치적 선동을 해서 사울에게 반역을 꾀했다면 물론 성공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당대의 대언자요, 백성들의 등불 역할을 했던 사무엘이 이미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던 데다 전쟁에서 놀라운 용맹을 떨쳐 보였던 그가 사울 왕조를 엎어 버리자고 한다면 못 할 일도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이 그를 잡고자 했을 때 야반 도주를 감행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확고한 결심으로 행한 에스더의 믿음도 놀랍지만, 한 밤중에 사울의 눈을 피해 창문을 통해 도망가는 것 역시 믿음으로 한 일입니다. 사무엘상 19:10-12, [사울이 창으로 다윗을 죽여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눈앞에서 피하고 사울은 창을 벽에 박으니라. 다윗이 그 밤에 도망하여 피하매 사울이 또한 사자(使者)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하므로 다윗의 아내 미갈이 그에게 고하여 이르되, 당신이 오늘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니라. 미갈이 창을 통해 다윗을 밑으로 내리매 그가 도망하여 피하니라.] (삼상19:10~12). 원수들의 칼날을 피해 도망가는 것을 비겁하다고 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욕을 먹을 일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한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몰려드는 무리들을 피하신 적이 있으셨고, 돌을 들어 치려는 사람들을 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가 몰려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작은 배를 대기시키도록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으니](막3:9), [그들이 돌을 들어 그분을 치려 하거늘 예수님께서 몸을 피하사 /성/전에서 나가시되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나가시니라.](요8:59). *hid himself. 자신을 숨기시다.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자녀들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하시고 그들에게서 떠나 몸을 피하시니라.](요12:36). 피해야 할 순간에 싸우기 위해 일어서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만용입니다. 주님은 평소에 이렇게 피하셨지만 십자가를 앞두고 올리브 산으로 몰려드는 군인들의 칼날을 피하지 않으시고, 잠잠히 몸을 내어 맡기시고, 체포되셨습니다. 제자였던 베드로는 칼을 휘두르며 저항을 시도했지만 주님은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잡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b)고 하셨습니다. 피해야 할 때와 감당해야 할 때를 정확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싸워야할 때와 피해야할 때를 잘 구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할 때 싸워보지도 못한 도망자가 되고, 피해야 할 때 싸움으로써 어리석은 패배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핍박하면 다른 도시로 도망하라.] (마10:23a). 놀랍게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저항, 공격’을 명한 것이 아니라 ‘도망’을 명하셨습니다. 성도들이 핍박을 받을 때 피해서 도망을 가는 것은 믿음으로 행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걷고, 믿음으로 싸우고, 믿음으로 씨름을 하며, 믿음으로 달리고, 승리를 쟁취해야 하지만 견뎌야 할 일을 인내로 견디고, 피할 때는 피해야 합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고향을 떠나 대서양이란 망망대해를 건너 미국으로 도망을 온 것은 패배가 아니라 영광스런 승리였습니다. 그들이 믿음을 따라 고향과 나라를 버린 것은 보통 큰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피한다는 것은 세상을 포기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고 버리는 것이 동반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만용입니다. 믿음의 위인들 가운데 칼날을 피하지 않았던 경험이 없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성령 충만했던 사도 바울도 믿음으로 피했던 일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9:23-025, [여러 날이 지나서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고자 하여 의논하거늘 그들이 숨어 있음을 사울이 알게 되니라.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들을 지키거늘 이에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데려다가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행9:23~25). 이 일에 대해 훗날 바울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내가 바구니를 타고 창문을 통해 성벽을 내려가 그의 손에서 벗어났노라.] (고후11:33). 피할 수 있을 때 피했고, 기회를 잘 활용했고, 목숨을 보존했습니다.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면 피하십시오. 피하는 것은 패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 논쟁. 교파 싸움.... 엘리야 역시 피하는데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아합 왕이 아무리 엘리야를 찾고자 노력해도 찾을 수 없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숨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스스로 몸을 숨긴 것이 아니라 ‘가뭄’의 재앙을 선포한 후에 주님이 일러 주신대로 몸을 숨겼기 때문에 아무도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 당신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민족이나 왕국이 없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없다, 하면 그가 그 왕국과 그 민족으로 하여금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왕상18:10). 아합은 전국에 엘리야를 찾는 수배령을 내렸고, 이웃 부족이나 국가에도 엘리야의 소식을 알려주도록 했습니다. 아합 왕은 엘리야를 찾아 죽이려고 아무리 칼을 갈아도 허공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엘리야가 믿음으로 아합의 칼날을 완벽히 피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믿음으로 갈멜산에서 영적 전투를 치르는 일에만 잘 순종한 것이 아니라 그릿 시냇가에 숨는 일(왕상17:3), 시돈의 사르밧 과부의 집에 숨는 일(왕상17:9)에도 잘 순종했습니다. 3년 반 가량 이렇게 숨어 있음으로 ‘아합의 칼날’을 피했는데 이는 그가 믿음이 없어서 아합에게 패배한 일이 아니라 [믿음으로] 승리한 일이었습니다.

칼날을 피한 믿음의 사람 중의 대표적인 대언자 중의 하나는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범죄한 이스라엘의 파멸과 포로 됨, 성전의 소실, 예루살렘의 파괴 등을 대언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왕들로부터 백성들까지 예레미야를 좋아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칼에 죽게 될 것이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예레미야가 칼에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주]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에 내가 너를 건질 것인즉 네가 그 두려워하는 자들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반드시 너를 건질 것임이라. 네가 칼에 쓰러지지 아니하고 네 생명이 네게 탈취물이 될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신뢰하였음이니라. [주]가 말하노라.] (렘39:17~18). 예레미야는 믿음으로 칼날을 피했습니다.

이 말씀을 영적으로 적용해 봅시다. 칼은 꼭 쇠로 만든 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피할래도 절대 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칼날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혀는 독사의 독으로 비유되기도 하지만 예리한 칼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내 혼이 사자들 가운데 있으며 심지어 내가 불 위에 놓인 자들 가운데 누웠으니 곧 사람들의 아들들 가운데라. 그들의 이빨은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예리한 칼이로다.](시57:4). 혀는 매우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들이 칼같이 자기 혀를 갈며 활을 당겨 독한 말로 화살을 쏘고] (시64:3). 혀의 예리한 칼을 피하고, 독한 말로 쏘는 화살을 피하는 것 역시 믿음뿐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항상 말싸움을 할 수는 없습니다. 말싸움을 해서 이긴다고 해서 득이 될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교회는 말로 흥하고, 말 때문에 쓰러집니다. 말이 많고 많아도 교회만큼 말이 많은 곳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혀의 칼날, 혀의 채찍, 혀의 독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피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숨겨 주시면 이런 것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근을 당할 때는 죽음에서, 전쟁을 벌일 때는 칼의 권세에서 너를 구속(救贖)하실 터인즉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으며 멸망이 닥칠 때에도 무서워하지 아니하리라.] (욥5:20~21). 믿음으로 칼날을 피하십시오. 성경은 말합니다. [까닭 없는 저주는 떠도는 새와 날아가는 제비처럼 임하지 아니하느니라.](잠26:2). 남의 험담, 비방, 욕설, 저주 등의 ‘혀의 칼날’로부터 안전하게 피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칼날 중에 제일 무서운 칼날은 ‘말씀의 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요(엡6:17), 양날선 예리한 검입니다(히4:12).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권능이 있어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骨髓)를 찔러 나누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니](히4:12). [그러므로 내가 대언자들로 그들을 넘어뜨리고 내 입의 말들로 그들을 죽였노니 나의 심판은 빛같이 나아가느니라.](호6:5). 하나님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칼로 마귀들과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칼날로부터 피하기 위해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주의 입에서 나오는 칼’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믿음을 통해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란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싸우는 믿음, 피하는 믿음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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