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죽기까지 신실하였으니


말씀: 히브리서 11:35-36
요절: 히브리서 11:35-36

오늘 본문 말씀을 접할 때 참고가 되는 책 3권 정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팍스의 순교자의 노트”, “그들의 피로”(By their Blood), “순교자의 거울”(The Martyr's Mirror)입니다. 이 책들은 교회와 세상간의 실제적 갈등과 싸움을 본질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모두 역사적 실례들을 통해 믿음으로 산 이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고난을 당했고, 어떻게 승리를 쟁취했는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초대 교회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싶다면 ‘죽으면 죽으리라’(안 이숙)는 책을 꼭 한 번 읽어 보기를 바랍니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죽지만 성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으로 인해 죽습니다. 죄인들은 죄로 인해 고난을 받지만 성도들은 ‘믿음’으로 인해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한 고난을 맞게 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으로 산 인물들은 모두 죽기까지 신실하였으며, 죽는 순간까지 믿음을 부인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모두 “죽기까지 신실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문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계시록2:10, 12:11을 보십시오. [너는 앞으로 당할 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너희 중에서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 넣어 너희를 시험하리니 너희가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하리라.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왕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거의 말로 그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세상 사람들은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는데 왜 환란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고, 도망을 다녀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이해하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살 때 교회는 환란, 고난, 박해는 물론이요, 죽음이 있다는 것이 주님의 반복적인 가르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고도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성도들은 이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대 교회의 교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모든 면에서 경쟁해서 더 나은 직장, 더 나은 학교, 더 나은 수입, 더 나은 삶의 질을 누리는 것이 승리요, 간증인 줄로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것이 ‘믿음의 본’인 줄로 압니다. 이는 성경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믿음을 부인하지 않고 신실하게 사는 것은 세상이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 빛을 비출 때 세상은 그 빛을 미워합니다.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고, 그 냄새를 낼 때 세상은 그 냄새를 사망에 이르는 냄새로 알고, 악취를 제거하려고 듭니다. 이는 성경의 증언이요, 역사를 통해 내려오는 생생한 증거이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음으로 살고 있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다면 알게 모르게 시험과 시련을 겪고 박해와 모욕을 받을 것입니다(딤후3:12).

믿음으로 죽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입니다. 더 나은 부활을 바라며 고문을 당하되 구출 받기를 원치 않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분명히 승리입니다. 세상의 승패 기준, 성공 기준, 복의 기준은 성도들의 기준과 다릅니다. 성도들은 믿음으로 인해, 복음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인해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승리입니다. 사람들의 관점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지 않고, 병에 걸리지 않고, 재정적 어려움이 없고, 아무 걱정거리가 없는 것이 믿음의 보상이요, 승리요, 간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신구약 어디에도 전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바다 속을 마른 땅처럼 걷고, 광야를 통과하고, 용광로의 불을 끄고, 사자 굴에서 사자들의 입을 틀어막는 승리도 놀랍고 큰 것이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승리는 더욱 큰 승리입니다. 35-37절을 보십시오. [여인들은 자기들의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받기도 하며 다른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으려고 고문을 당하되 구출받기를 원치 아니하였으며 또 다른 이들은 심한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참으로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겪었으며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며 시험을 받기도 하고 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며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니며 궁핍과 고난과 고통을 당하였으니](35-37). 평생을 주님을 섬기다 이렇게 고생하다 죽는 이를 보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떻게 이런 일이...”라며 슬퍼하고 주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믿은 결과가 땅에서, 육신의 생명을 사는 동안에 다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이야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가족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이런 식입니다. 이는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이들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 주는 말입니다. 궁핍하게 사는 것, 가난을 죄악시하는 가치관입니다. 현재 미국이나 한국의 교회는 35-37절까지 본문 중에서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유일하게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면 ‘궁핍’입니다. 믿음으로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는 것이 간증인 시대에 살다 보니, 믿음으로 궁핍과 고난과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도무지 수용하지 못합니다. 가짜와 진짜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받는 것은 분명히 큰 믿음입니다. 사르밧 과부나 수넴 여인, 회당장 야이로나 나인성 과부, 마르다와 마리아 등은 분명히 죽은 자를 살려 받았습니다. 이들의 믿음만 승리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으려고 죽임을 당하되 구출받기를 원치 않았는데 그것은 더욱 큰 믿음입니다. 칼날을 피하는 것도 믿음이고, 칼날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도 믿음입니다.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마28:20b). 주님은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그 순간에도 함께 하십니다. 믿음으로 인해 성도들이 고난을 받을 때 주님은 거기에 함께 계십니다. 심한 조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을 당할 때, 돌에 맞고 톱으로 잘리고, 칼로 죽임을 당하며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니며 궁핍과 고난과 고통을 당할 때 주님은 거기에 함께 계십니다. 주님은 다니엘의 사자 굴에 함께 계셨고, 불타는 용광로 속에서도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고난이 없다는 것은 성경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꼴짜기를 통과할지라도, 깊은 바다 속을 통과할지라도, 불타는 용광로에 던져지고, 광야에서 떠돌아다닐지라도 궁핍한 가운데 먹을 것이 없을지라도 그것이 패배가 아니며, 그것이 끝이 아니며, 그것이 버림받은 것이 아니며 더 큰 보상을 얻게 하는 것임을 알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영원무궁토록 우리의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죽기까지 우리의 인도자가 되시리로다.](시48:14).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항상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만 인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홍해 바다 앞으로 인도하시고, 광야로 인도하시고, 여리고 성 앞으로 인도하십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결코 평탄하고 좋은 길이 아니었습니다. 광야는 독사들과 전갈과 불 뱀이 있고 대신 물과 빵이 없는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시23:3) 때문에 불의하고 죄악된 세상에서는 필연적으로 충돌이 있고 전쟁이 있게 마련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기 때문에(시25:5) 진리가 없는 악한 현 세상, 음란하고 패역한 현 세대에서 성도들이 겪는 어려움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법입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요16:13)하십니다. 쉬운 길, 평안한 길이 쭉 뻗어 있다하더라도 진리가 아니라면 그리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그 길이 지름길이요, 왕도(royal road)처럼 꽃이 깔린 길이라도 의의 길이 아니면 주님은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언제나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데 그 길은 좁고 협착하다고 하십니다(마7:14). 주님은 우리 발을 ‘화평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어둠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주고 우리 발을 화평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눅1:79). 자, 보십시오. 주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길, 우리가 가고 싶어 하는 길, 평안하고 쉬운 길로 인도하신다는 약속이 있습니까? 그런 길이라면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가 죽기까지 인도자가 되어 주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말하기를, [그분께서 나를 이끄사 어둠 속으로 인도하시고 빛 속으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며 친히 돌이키사 확실히 나를 치시고 자신의 손을 돌리사 종일토록 나를 치시는도다.] (애3:2-3)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대언자 예레미야가 겪은 체험입니다.

저는 이 설교가 여러분들을 낙담하게 하거나 절망케 하는 그런 것이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큰 위로와 큰 평강, 큰 기쁨을 얻기 위해 설교를 듣다 엄청난 부담과 슬픔을 안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자, 보십시오. 이런 진리는 결코 믿음으로 이 땅을 사는 성도들의 마음을 낙담케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어둠 속으로 인도하시고, 광야와 사막으로 인도하시는 일은 분명히 마음에 도전을 주는 일이지만 그 가운데서 우리가 버려진 홀로의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권능과 보호하심을 받는다는 것,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안전하게 하신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고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다윗이 고백하기를, [내가 아침의 날개들을 취하여 바다 맨 끝 지역들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어둠이 반드시 나를 덮으리라, 할지라도 밤조차 나를 두르는 빛이 되리로다.] (시139:9~11)고 합니다. 누구나 자신이 홀로 외진 곳에 버려지고, 어둠이 반드시 자신을 덮는 그런 상황, 현실을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런 환경, 고난,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 인도하시고, 붙드시는 주님으로 인해 우리는 힘을 얻고, 위로를 받고,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이란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고난이 다가올 영광이 되고, 육신의 죽음이 더 나은 부활이 되고, 이 땅에서 겪는 모든 일들이 다가올 세상에서 상속의 보상이 된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행한 모든 일들에 대해 회계 장부를 정리하시며, 보상하신다는 사실로 인해 기쁨을 누립니다. 어려움이 닥친다는 사실에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낙담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그런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고, 승리하게 하시고, 복된 소망을 주신다는 사실에 만족을 누리고, 기쁨을 누리고, 평강을 누리고, 새 힘을 얻으십시오. 제가 전하는 설교를 들을 때 더러 부정적인 인상을 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 견해가 아니라 성경적 진리임을 기억하십시오. 귀에 쓰고, 거부감이 오더라도 진리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고,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에 주목하십시오.

자, 다시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여인들은 자기들의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받기도 하며 다른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으려고 고문을 당하되 구출받기를 원치 아니하였으며 또 다른 이들은 심한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참으로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겪었으며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며 시험을 받기도 하고 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며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니며 궁핍과 고난과 고통을 당하였으니](35-37). 이 일은 초대 교회 시대에만 잠시 있었던 일시적 현상이 아닙니다. 종교의 자유가 없던 로마의 황제 시대에 있었던 일로 치부해 버리고 만다면 그는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인해 죽었습니다(창4:2).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구약 성경의 모든 대언자들은 믿음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까지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피를 이 세대에게 요구하리라.] (눅11:51). 이로써 주님은 구약 성경 전체를 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결코 초대 교회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대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대언자들 중에서 너희 조상들이 핍박하지 아니한 자가 누구였느냐? 그들은 의로우신 분의 오심에 관하여 미리 보여 준 이들을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분을 배반하여 넘긴 자요, 살인한 자가 되었나니] (행7:52). 믿음으로 산 구약 성도들은 이교도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신정 국가’였던 자기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야고보(행12:2), 스데반(행7:51-58), 바울(딤후4:6) 역시 주님을 섬기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 교회 2000년 역사는 어떻습니까? 마찬가지로 피 흘린 발자취의 역사입니다. 요한계시록 17:6, [또 내가 보매 그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순교자들의 피에 취하였으므로 내가 그 여자를 보고 크게 놀라며 이상히 여기니](계17:6). 세계 1,2차 대전에서 죽은 사람들의 수보다 믿음으로 인해 캐톨릭과 이교도들에 의해 죽은 성도들의 수가 훨씬 많습니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순교자들의 피에 취한 여자의 정체가 ‘신비의 큰 바빌론’이라고 말합니다. 로마 캐톨릭을 중심으로 동방 정교, 영국의 국교회, 이슬람, 힌두교, 불교, 유교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믿음으로 인해 흘리는 피는 이 시대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대 환란 시대에 여전히 목 베이는 성도들이 속출합니다. [또 내가 보니 왕좌들과 그것들 위에 앉은 자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심판이 맡겨졌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 베인 자들의 혼들이 있는데 그들은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자기들의 이마 위에나 손 안에 짐승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라....](계20:4a).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목베 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현 시대에 이곳 미국이나 한국에 사는 성도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받는 박해가 거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듯이 사탄 역시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 역시 변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본성 역시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런 조롱과 박해가 없다면 이는 우리가 영적 생활의 모양만 있고,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철저히 동화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복음을 종교로 바꾸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진리대로 믿음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산다면 주님께서 마신 잔, 주님께서 받으신 모든 것을 그 분량대로 마시게 됩니다. 이는 주님이 이미 그러하리라 약속하셨던 것들입니다.

성도들이 받았던 고난 몇 가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채찍질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몸에 맞으셨던 채찍(마27:26), 사도들이 받았던 채찍(행5:40, 16:23)을 비롯해 믿음으로 인해 몸에 받은 증표 가운데 하나가 채찍질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마귀나 세상으로부터 전혀 채찍질을 받지 않기 때문에 주님이 성도들을 채찍질하십니다. 믿음으로 살면 마귀가 성도들을 채찍질하고, 불신과 불법으로 살면 하나님이 성도들을 채찍질합니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만일 그가 불법을 범하면 내가 사람들의 막대기와 사람들의 자녀들의 채찍으로 벌을 줄 것이로되](삼하7:14). [{주}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친히 징계하시고 자신이 받아들이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시느니라, /하셨느니라/.](히12:6). 여러분은 누구의 채찍에 맞으십니까? 믿음으로 인해 받는 채찍이라면 주님이 싸매시고, 힘과 위로를 주시고, 큰 보상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크게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어리석음과 죄와 불법으로 인해 맞는 채찍이라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때에 내가 막대기로 그들의 범죄한 것을 벌하며 채찍으로 그들의 불법을 벌하리라.](시89:32).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둘째, 결박입니다. 오늘날은 흉악범, 중범죄자들의 손과 발에 결박을 합니다. 온 몸에 결박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흔히 전쟁에서 포로들을 호송할 때 결박을 합니다. 결박은 죄수들과 포로들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인해 이런 취급을 받습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단단히 결박당한 채 재판을 받았고 로마로 호송되었습니다. 하지만 장차 주님이 오시면 결박을 당했던 성도들은 도리어 심판을 집행하는 재판관이 됩니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을 높이 찬양함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양날 달린 칼이 있을지니 이것은 이교도들에게 원수 갚는 일을 집행하고 만백성에게 형벌을 주며 그들의 왕들은 사슬로, 그들의 귀족들은 쇠 족쇄로 묶고 기록된 심판을 그들에게 집행하게 하려 함이로다. 이런 존귀가 그분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시149:6-9). 믿음으로 몸의 결박을 당한 자들은 죄의 사슬, 불의의 족쇄를 모두 깨뜨려 버린 참된 자유자들입니다.

셋째, 옥에 갇히는 시련입니다. 옥에 갇히는 자들은 범죄자들입니다. 강도들이나 도둑질을 비롯한 사회의 오물들을 감옥에 처넣습니다. 믿음으로 산 성도들은 세상의 찌꺼기로 취급받아 그들과 동일한 대접을 받습니다. 예레미야가 갇혔던 감옥은 지하 감옥이었습니다.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고, 습기가 찬 그런 지하 감옥에 던져 놓았습니다(렘38:11-13). 성도들이 갇힌 감옥은 오늘날 이곳 미국의 재소자들처럼 T.V가 나오고, 침대가 있고, 건강 검진에다 다양한 취미 생활을 할 수 있는 그런 감옥이 전혀 아닙니다. 바울이 갇혔던 감옥 역시 사슬과 족쇄가 채워진 채 구금되었습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 역시 오랫동안 옥에 갇혔습니다. 신약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던 틴데일 역시 감옥에 갇혔는데 추위와 헐벗음으로 고생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에 아무런 대가나 희생을 치르지 않는 오늘날 이곳의 교회들과 성도들은 안락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전부이지만 어떤 이들은 지금도 불같은 시련을 겪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안은 잠시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곳 역시 회교권이나 공산권, 제 3 세계의 어떤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 때의 불같은 시련이나 2-3세기 때에 있었던 대 박해가 일어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이들이 살기가 극도로 어려운 그런 시기가 반드시 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모든 것을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넷째, 돌로 맞기도 하고. 유대에서 돌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우상 숭배, 간음 등으로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사형법입니다(레22:2, 수7:24-25). 그런데 정작 돌에 맞아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던 스데반(행8:1)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았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자들에게 가해지는 형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처형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모순과 비뚤어짐을 볼 수 있습니다.

다섯째, 톱으로 켜는 것. 이 방식은 다윗이 암몬 자손에게 했던 방식입니다. [또 그 안에 있던 백성을 데려다가 분리시켜 톱질과 써레질과 도끼로 그들을 자르니라.](대상20:3a). 그런데 믿음으로 산 성도들이 그런 대접을 받았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가 톱으로 잘려 죽었다고 합니다. 이런 악형을 견디어 내는 것은 성령의 권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섯째, 시험과 칼로 죽는 것. 이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칼은 범법을 한 자들을 죽이도록 주님이 권세자들에게 쥐어 주신 것인데 하나님의 성도들을 죽이는데 사용된 예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로마 캐톨릭이 성경 신자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역사적 예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어떤 이교도들보다 성경 신자들을 많이 죽였는데 성경은 ‘성도들의 피에 취한 자’라고 말합니다(계17:6).

일곱째,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믿음으로 산 이들 가운데 집과 사회로부터 추방되어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 있었습니다. 짐승과 함께 생활하도록 내쫓으면서 옷을 모두 벗겨 버림으로써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살도록 한 것입니다. 산과 들에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있으면 곧 바로 야수나 맹수들의 표적이 되어 죽음을 당하기 마련이었습니다. 이들이 다시 가정이나 사회로 돌아 오기 위해서는 믿음을 부인해야 했는데 그들은 산이나 광야에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 다니는 것을 택했습니다.

여덟째, 궁핍과 고난과 고통을 당하였으며. 궁핍은 자본주의에 사는 성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생활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 가정에 필요한 돈이 없는 것은 견딜 수 없는 큰 고통입니다. 생활 대책 없이 쫓겨나고, 그들을 돌보는 모든 사람들의 원조에서 벗어나며, 각종 사회 보장 정책의 혜택도 받을 수 없는 것이 궁핍입니다. 고난과 고통을 당했다는 것은 아무런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신체적, 물질적, 정신적 고통이 총체적으로 넘쳤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은 성도들에게 무엇을 하십니까? 세상이 알 수 없는 평강과 기쁨을 주십니다. 넘치는 소망을 주십니다. 세상은 성도들의 궁핍, 고난, 고통을 보지만 성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것들은 결코 볼 수 없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주제별(글) > 히브리서11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 평판  (0) 2008.04.23
무가치한 세상  (2) 2008.04.22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0) 2008.04.19
용맹하게 되어  (0) 2008.04.18
강하게 되기도 하며  (1) 2008.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