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가치한 세상
말씀: 히브리서 11:37, 38
요절: 히브리서 11:37, 38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에게 세상은 어떤 곳인가?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성도들이 세상에 대해 가져야 할 관점’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을 증거 했지만 오늘 다시 한번 말씀을 선포합니다. 성도란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세상에서 택함 받은 자들이요, 교회란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분리, 비동조, 비일치, 비타협의 노선을 굳게 붙잡아야 하지만 동시에 세상은 우리들의 선교현장이요, 주님의 말씀의 씨앗을 뿌려야 할 밭입니다. 우리는 이미 앞 시간에 세상이 믿음을 지닌 성도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생생하게 살펴 보았습니다. 35-38절까지 읽어 보십시오. 세상은 성도들을 고문하고, 심판 조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가두고, 돌로 치고 톱으로 자르며 칼로 죽이며 들과 산과 강으로 추방합니다. 쫓겨난 성도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니며 굴에서 살기도 하고, 짐승들에게 잡혀 먹히기도 합니다. 궁핍과 고난과 고통을 주는 것은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직장을 쫓아내는 등의 불이익을 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교회나 성도들도 세상을 향해 분노하거나 맹목적 증오를 품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극단적 분리주의자들처럼 따로 모여 공동체를 형성하거나 산속이나 계곡이나 섬에 모여 살지 않습니다. 세상은 분명히 영적 전쟁터인 동시에 우리가 일해야 할 일터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야 한다’는 성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리된 삶을 살되 세상 밖으로 나가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고전5:9-10). 세상은 성도들이 정직하고 의롭게 행할 때 세상은 그들은 비타협자, 부적응자, 독불장군, 조직에 부적합한 자로 매도해 버립니다. 동료들이 함께 어울리는 회식 자리, 음담패설을 일삼는 자리, 친목과 화합을 명분으로 하는 술과 가무를 즐기지 않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싫어합니다. 반대로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세상과 어울리면 “썩었다, 타락했다, 악취가 난다, 교회다운 모습이 없다,... ” 등등의 갖은 욕을 다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도 모욕과 조롱을 받습니다. 성경에 충실하면 ‘광신자’란 소리를 듣게 되고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위선자’로 욕을 먹습니다. 세상은 성도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듯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역시 못 박으려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미 세상을 악하다고 증거 하셨듯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에 동화되지 않으며, 세상을 친구로 삼지 않고, 세상에 일치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영광이나 자랑을 추구하지 않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썩어질 영광이요, 쓰는 대로 없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도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을 거부합니다. 세상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깁니다.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세상은 이런 사람들에게 합당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이 사막과 산과 땅굴과 동굴에서 떠돌아다녔느니라.](38). 합당하다=worthy/가치가 있다(KJV). “세상은 이런 사람들에게 합당치 아니하였느니라.” 이런 사람들이란 누구입니까? 믿음을 통해 산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을 나그네요, 순례자로 산 사람들입니다. 이집트를 버린 모세처럼 믿음으로 산 이들은 세상을 포기하고 버렸습니다. 세상을 버리지 못할 때는 자신의 생명을 버렸습니다. 믿음은 결코 세상의 영과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성령을 대적하고 성령이 육신을 대적하듯이(갈5:17), 믿음의 영과 세속의 영은 서로 대적하고 싸웁니다. 본문에는 세상이 성도들을 얼마나 악독하게 괴롭혔는지 다양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패배자가 아닌 승리자로 기록하고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성도들이 채찍에 맞고, 칼에 죽고, 돌에 맞고, 옥에 갇히는 등의 일은 패배자의 굴욕이 아니라 승리자의 믿음으로 해 낸 일들입니다. 세상은 성도들을 세상의 오물이요, 만물의 찌꺼기(고전4:13)로 여기지만 믿음의 성도들은 세상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며, 세상이 주는 모든 영화, 쾌락, 권세 등을 똥으로 여깁니다(빌3:8). 성도들 안에 있는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무엇이든지 세상을 이깁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 지혜를 이깁니다. 하나님의 약함은 세상의 강함을 이깁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육신을 다스립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세상의 죄를 제거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세상을 이깁니다. 지옥의 권세는 하나님의 교회를 이길 수 없습니다(마16:18).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교회, 하나님에게서 난 교회라면 그 무엇도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세상의 모든 말들을 이깁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요, 성령으로 났기 때문에 세상의 자녀들을 이깁니다. 우리는 현 세상의 악함을 알고, 현 세상의 종말을 정확히 압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빛이시고, 세상의 구원자시며, 세상의 죄를 제거하시는 분이시지만 세상에 속하신 분은 아닙니다. 주님은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신 분이시지 세상에서 나신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니라.](요8:23) 하셨습니다. 자, 보십시오. 성도들은 세상에서 택함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위정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위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법을 준수하고, 세금을 잘 내고, 왕을 존경하고, 주인에게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문을 가하고, 채찍질하고, 옥에 가두고, 추방을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 세상왕국이 악한 마귀에게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이 세상의 통치자요, 공중 권세 잡은 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 것을 사랑할 것이라.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며 도리어 내가 세상에서 너희를 택하였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세상과 성도들은 분명히 함께 살고 있지만 양립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일치할 수 없고, 친구가 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많은 신학자들과 종교인들이 교회를 세상과 융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이는 명백히 반 성경적인 일입니다. 주님은 세상을 책망하셨고, 성령 역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요16:8)십니다. 주님은 세상을 이기셨습니다(요16:33).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승리자들이요, 이긴 자들이요, 정복자들입니다. 비록 우리의 겉모습은 세상의 오물처럼 되었고, 만물의 찌끼처럼 되었지만 믿는 이들은 분명히 승리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왜 성도들에게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을 허락하시고, 고문과 채찍과 옥에 갇히는 것은 물론이요, 죽음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왜 의인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이는 불의하고, 모순처럼 보입니다. 주일 예배는 물론이고 새벽 기도까지 착실히 다닌 성도들에게 파산이나 질병, 이혼, 사망, 각종 사고가 임하는 것입니까? 많은 이들이 쏟아내는 질문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지금 히브리서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믿는다고 해서 감옥에 갇히거나 채찍에 맞거나 돌에 맞지는 않습니다. 심한 조롱과 박해도 없습니다. 산이나 들, 광야로 도망 다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모양이 다른 각양 시험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전혀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은혜로 여길 수 없고, 감사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 닥치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시련을 통해 믿음을 연단하기 위함입니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듭니다. [너희 믿음의 단련이 인내를 이루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약1:3). 믿음, 인내, 소망, 체험은 한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환란을 통해 믿음은 단련되고, 인내를 이룹니다. [이것은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단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훨씬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드러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1:7). 단련된 믿음만이 주님의 재림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드러납니다. 둘째, 믿음의 연단은 곧 우리 자신의 배움과 성숙을 이룹니다. 성도는 저절로 자라지 않습니다. 믿은 후에 받는 갖가지 고난을 통해 진리를 확실히 알고 깨닫게 됩니다. 성장하게 됩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길을 잃었사오나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하오니 이로써 내가 주의 법규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이것이 고난이 주는 유익입니다. 욥은 말하기를,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분께서 아시나니 그분께서 나를 단련하신 뒤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고 합니다. 이는 모두 고난의 유익을 정확히 말한 것들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세상에 증거를 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교도들이 가지고 있지 않는 율법에 따른 독특한 생활 방식을 통해 증거 했습니다. 먹는 것이 다르고, 결혼 방식이 다르고, 명절이 다르고, 종교와 문화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런 차이를 통해 이교도들에게 이 땅의 많고 많은 신들 중에 주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과 분리된 삶, 정반대의 가치관, 추구하는 목표의 차이, 물질과 육이 아닌 영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모든 세상 종교는 모두 기복주의, 현세주의, 물질주의, 육신의 안락과 복을 추구하지만 환란과 시련을 기쁨으로 여기는 유일한 무리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땅이 아닌 하늘, 육신이 아닌 영, 현세가 아닌 내세, 물질이 아닌 믿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눈에 보이는 무엇이 아닌 약속의 말씀을 더 추구하고 의지함으로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넷째,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믿음을 통해 은혜로 값없이 받은 구원이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장차 다가올 영광을 받게 됩니다. 로마서 8:17-18,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니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 당하면 이것은 우리가 함께 영광도 받으려 함이니라. 내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롬8:17-18).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고난을 받게 하심으로써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받게 하십니다. 현재 이 땅에서 믿음으로 인해, 의로 인해, 복음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고난은 영원한 영광을 이루어 갑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이 우리를 위해 훨씬 더 뛰어나고 영원한 영광의 중(重)한 것을 이루느니라.](고후4:17). 하나님은 현 세상의 악함을 통해서 성도들이 받아 누릴 영광을 더 크고 많도록 하십니다. 다섯째,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대적, 하나님과 원수된 것들에 동화되고 사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배척과 박해, 고난을 받으면 성도들은 땅이 아니라 하늘을 사랑하고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들을 함께 미워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여섯째, 세상에 하나님의 진노를 쏟아 붓기 위해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세상이 성도들을 괴롭히고 죽이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불같은 진노를 세상에 쏟아 부으실 것입니다. 세상에 불법이 충만하게 찰 때까지 주님은 참고 기다리십니다.
일곱째,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참과
거짓을 구별하십니다. 육신적인 성도들, 교회만 다니는 거짓 신자들은 자신의 믿음이 거짓이요, 헛것임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습니다. 누가 지적해
주면 강하게 반발하고 대적합니다. 만약 그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면 자신은 믿었는데도 구원받지 못했다고 하나님을 욕하며 저주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닥치는 각종 시험과 고난을 통해서 참된 믿음과 거짓 믿음은 확연히 드러납니다. 순금과 찌꺼기를 구분해 주는 곳은 용광로입니다.
순은과 불순물을 구분해 주는 곳은 도가니입니다. 마찬가지로 참 믿음과 거짓은 지독한 시련 속에서 순식간에 드러납니다. 평소에 우리는 거짓
성도들의 화려한 언변과 외모로 인해 그들을 높게 평가하고, 매력을 느낍니다. 그러나 불같은 시험이 닥쳐보면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거짓 믿음의 소유자들은 금을 얻기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성경을 공부하지만 참된 믿음의 소유자들은 금을 팔아가면서
진리를 사고, 그것을 다시 팔지 않습니다.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잠23:23)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참 믿음의 소유자들은 금이 아니라 ‘금보다 귀한 믿음’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세상은 이런 사람들에게 합당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이 사막과 산과 땅굴과 동굴에서 떠돌아다녔느니라.](38).
합당하다=worthy/가치가 있다(KJV). 성도들에게 이 세상은 무가치한 곳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까?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이란 성도들이 세상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성도들은 세상 밖으로 나가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도들을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나지 않았고 세상에 속하지 않아서입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나이다.](요17:16). 맞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지
않았습니다(고전2:12). 우리는 더 살기 좋은 세상,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기도하거나 일하지 않습니다. 이는 종교 지도자들이 하는
일이요, 정치인들의 구호일 뿐입니다. 우리는 곧 불에 타 없어질 이 세상, 이미 주님이 정죄를 받은 이 세상에서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있습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받을 고난과 박해, 조롱과 핍박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고,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세상에 대한 성경적 가치관을 올바르게 지녀야
합니다. 세상이 믿음을 지닌 성도들을 적대시하듯 성도들 역시 세상에 대해 그러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이 말씀은 세상과 성도의 관계를 규정하는 척도입니다. 하나님은 양자택일을 요구하십니다.
1. 세상과 친구가 되지 말라,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약4:4).
2.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하지 않는다(요일2:15)
3. 세상에 동화되지 말라(롬12:2), 하나님께 바른 예배들 드릴 수 없다.
자, 보십시오. 우리는 세상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기에 충분한
이유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은 악함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요일5:19). 현 세상은 세상의 통치자(요14:30, 16:11) 마귀가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신은 복음을 가리고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기 때문입니다(고후4:4). 세상은 성도들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요일3:3). 이 정도만으로도 우리는 세상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기에 충분합니다.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구호는 매우 그럴듯해
보여도 헛된 구호입니다. 주님의 계획은 세상의 변화가 아니라 불 태워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주님 오실 때 세상의 왕국은
모두 멸해질 것이며, 천년 왕국이 끝나면 세상의 외형은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고전7:31). 우리는 이런 이유로 세상을 높이 평가하지 않고,
탐욕으로 이끌리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산 이들이 세상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에게 합당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이 사막과 산과 땅굴과 동굴에서 떠돌아다녔느니라.](38).
믿음으로 산 이들의 삶을 보십시오. 옥에 갇히거나 결박을 당하거나 돌에 맞아 죽지 않는 사람들은 사막과 산과 땅굴과 동굴에서 떠돌아다녔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위해 어떤 타협안도 제시하지 않았던 것은 자명합니다. 오늘날 교계의 지도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이 어떻게 하면 교회가 세상을 위해 좀
더 이바지 할 수 있을까? 교회가 세상의 호의와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궁리하는 것과는 달리 철저히 세상의 따돌림을 받고, 배척을 받는 것을
조금도 이상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각종 세미나를 열고 오늘날 교회가 시대에 적응하자, 사회에 적응하자, 사람들의 필요에 응답하자 등등의 구호를
내 걸며 촛불 집회를 열고, 자선 바자회를 여는 일 등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핍박하면 핍박을 받았고, 죽이며 죽임을 당했고, 때리면 맞았고,
가두면 갇혔습니다. 그렇지만 반정부 시위나 종교의 자유를 보장 받기 위해 결사대를 조직하거나 여론에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참된 믿음의 신자들은
믿음으로 자신들에게 닥치는 모든 일들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왜 성도들에게 세상은 무가치한 것입니까? 성도들이 모두 세상에
대해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것이 정상입니까? 어떤 이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느냐? 반문합니다. 교회사 2000년 역사에
세상을 사랑한 이들이 세상을 변화시킨 예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세상에 들어가 세상과 일치하고 그들과 동화되는 것이 ‘소금’의 역할이 아니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세상에 동화되는 것은 소금의 역할이 아니라 소금이 맛을 잃어버린 순간이요, 아무 쓸모없게 되어 버린바
되고 짓밟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록된 성경 말씀을 덮어두고 자기 생각과 알량한 개똥철학으로 끊임없이 교회를 세상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요,
협력자로 만들려는 이들은 모두 거짓 사역자들이요, 거짓 형제들이요, 마귀의 일꾼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눈여겨보고 단연코
분리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개혁하거나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은 현 세상이 주님의 저주 아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현 세상의 가치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을 가치있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따위의 일을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이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 곳은 이 땅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살 곳을 따로 마련해 두셨습니다. 우리는 새 몸을 입고, 새
예루살렘에 살게 됩니다.
우리는 현 세상이 아니라 앞으로 오는 세상, 다가올 세상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믿음이 있습니까? 세상의 승리자입니다. 세상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십니까? 성경적
가치관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은 분들은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점-New Christian Series(21)” 참조할 것.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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