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하신 것들
말씀: 히브리서 11:39
요절: 히브리서 11:39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다양한 언약들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이들을 위해 많은 약속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폐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므로 거짓말하실 수 없습니다(딛1:2).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자신이 친히 하신 말씀을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시니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느니라.](딤후2:13). 성도들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이 무엇인지 보고 듣고, 그것을 믿음으로 취해야 합니다. 믿을 때 약속하신 것들이 우리 안에 성취되고, 믿을 때
우리 안에 소망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어떤 약속들은 믿는 순간 바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예언의 스케쥴에 따라서 인내로
기다려야만 합니다.
성경을 볼 때 성도들은
사실, 명령, 약속, 교훈을 나누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facts)이란 하나님께서 이미 역사적으로 행하신
일들은 과거의 사건입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일들이 아닙니다. 간절히 바라고 소망해야 할 일들도 아닙니다. 구약 성도들에게는
소망이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성취된 과거의 사건들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 흘리심과 같은 구속의 사건은 구약 성도들에게는
미래의 일이요, 소망이지만 신약 성도들에게는 이미 과거의 사건이며, 성취된 예언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지금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미 기록된 역사적 사건들은 믿음으로 공부하고 마음에 받아 들이면 됩니다. 역사적 사건들을 은유적으로, 영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
역사적 과거는 예언적 사건의 모형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배움과 교훈이 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나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는 말씀은 믿는 성도들에게는 약속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우리가 믿는 순간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같이 ‘세상의 빛과 소금’인 것
역시 사실입니다. 고로 이런 것은 기도와 간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소망의 대상도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그 사실을 알고, 믿음으로 취하면
그만입니다.
둘째, 명령이란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주신 것들입니다.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은 대부분 명령들입니다. 여기에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을 들을 때 우리는 순종하든지 불순종하든지 두 가지
선택만 있을 뿐입니다. “믿습니다.”라고 끝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할 때 복을 주십니다. 불순종할 때 벌을 주시고, 저주나 재앙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명령들이 있습니다. 약속과 함께 주어진 명령은 ‘약속의 명령’입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 중에 다섯 번 째
계명은 약속의 명령입니다. 기도에 대한 명령들은 대부분 약속의 명령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찾으라, 그리하면... 두드리라. 그러면’
이와 같이 명령에 따른 조건과 약속들이 있습니다. 명령에 필요한 것은 순종인데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은 모두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필요한
힘과 지혜는 주님이 주십니다.
셋째, 약속입니다. 약속의 말씀은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무조건적 약속이 있는가 하며 조건부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주님은 노아에게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言約)을 세우리니”(창6: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홍수로 땅을 심판하시는 순간에 주님은 노아와
그 자녀들에게 많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창9:9, 11,12). 창세기 9장은 온통 언약이란 말이 절절이 나옵니다. 무지개는 물로 땅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주님이 주신 언약의 증표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에 사는 이들은 누구도 극지방의 얼음이 녹아서 땅이 잠긴다거나 이상 기온으로 해수면이
높아져 생물이 멸종할지도 모른다는 기상학자들을 비롯한 엉터리 과학자들의 예언을 무시해도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대표적인 약속은 여자의 씨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주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통해 믿는 자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약속은 구약의 모든 대언자들을 통해서 점점
구체화된 약속의 말씀입니다.
넷째, 교훈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내게 주어진 직접적인
말씀이 아니어도 역사적 사건이나 남에게 일어난 일들을 통해서 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배움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롬15:4a). 어떤 이들은 구약 성경은 우리와 별로 상관이 없는 이스라엘의 역사 책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구약의 모든
사건들은 우리에게 본이 되고, 교훈이 되고, 훈계를 위해 필요합니다. [이제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그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기
위함이며 또 그것들이 기록된 것은 세상의 끝을 만난 우리를 훈계하기 위함이니라.](고전10:11). 성도들이 경건의 시간이나 묵상을 할
때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주로 ‘교훈’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삶에 필요한 영적 교훈을 얻는 것은 일상의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약속’에 대해서 다룰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이 불변함을 알게 하시기 위해 맹세로써 확증하셨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약속의 상속자들에게 자신의 계획이 불변함을 더욱
풍성히 보여 주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써 확증하셨나니](히6:17). 믿음으로 살았던 구약 성도들은 모두 좋은 평판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받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통해 좋은 평판을 얻었으되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하였으니]
(히11:39). 개역 성경에는 “약속을 받지 못했다”(히11:39)고 되어 있는데 약속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것들”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믿음의 근거가 아예 없는 것이고, 소망 자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아 들였고, 어떤 계약서보다 더 소중하게 그 말씀을 붙들었고, 자신들의 죽음이 가까워 올 때에는 자녀들에게 그 약속을 상속으로
물려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받은 약속을 이삭에게, 이삭은 야곱에게, 야곱은 12 아들에게 그 약속을 물려주었습니다. 이들을 약속의
상속자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그 약속을 믿고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산 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약속하신 말씀에 대한 불변성, 신실함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죽는 순간에도 때가 되면 반드시 성취될 것이란 확신과
소망 속에서 평안히 죽음을 맞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메시야를 받는 데는 무려 2000년이 걸렸고, 약속의 땅 위에 세워질 영원한 왕국에
대한 약속은 아직도 성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지상의 머리가 되는 왕국, 메시야 왕국에 대한 약속이 폐기되었다고 믿는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나 성경을 믿는 신자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약속을 기다렸고, 인내로 견뎠습니다. 히브리서 10:36,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뒤에 그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하여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하니라.](히10:36). 우리는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약속들이 많이 있습니다. 영광스런 약속들, 보배로운 귀한 약속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들을 읽을 때면 마음 속에 소망과 위로가
넘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먼 미래에 이루어질 약속들은 거의 포기하고, 현재
내가 받을 수 있는 약속들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받아 누릴 수 있는 것, 오늘 내가 기도하고 즉각적으로 받을 수 있는 그런
것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주님의 오심, 몸의 부활, 천년 왕국, 새 하늘과 새 땅 등에 대한 것보다는 몸의 건강, 수입의 증대, 승진 등에 훨씬
더 관심이 큽니다. 성공의 비결, 축복을 받는 비결 등이 설교의 주제가 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믿음을 현재의 삶의 개선에 집중하는
것이 현대 기복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1:1에서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고 시작했습니다. 바라는 것(hoped for)은 막연히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수단이 믿음이 아닙니다. 능력과 재능, 성공과 좋은 환경을 얻기 위한
수단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탐욕의 성취를 위한 도구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바라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지금 필요로하는 것들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바라는 것, 인내로 기다리는 것, 참고
견디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금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약속’은 메시야 즉 여자의
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에덴의 동산에서 아담에게 ‘여자의 씨’를 통해 인류의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범죄함으로 땅이
저주를 받고, 평생토록 수고하여 땅의 소산을 먹어야 하고,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여자의 씨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계시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1-2년 안에 성취된 것이 아니라 무려 4,000년의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 (갈4:4).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모두 정확한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을 믿음으로 받은 후에는 약속하신 것들을 인내로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은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납니다(롬10:17). 말씀의 근거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망상’입니다.
“믿음으로”라고 할 때 성도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무엇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율법 이전 시대에 하나님은 에덴에서 주신 약속을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구체화 시키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주어진 약속은 문자적으로 팔레스타인 땅을 소유할 것이란 것이었습니다(창12:7).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았지만 약속하신 것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땅을 단 한 뼘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시며 “네가 보는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씨에게 영원히 줄 것”(창13:15)이라고 하셨지만 약속하신
것을 받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모세도 그 땅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의 때에 약속의 땅을 거의 차지했지만 영원히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땅을 모두 잃어 버렸습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지금 약속을 받았으나 소유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의 두
번째가 바로 ‘약속의 땅’에 관한 것입니다. 약속의 씨, 약속의 땅은 믿음의 성도들이 바라고, 인내하며 기다린 가장 크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에게 주어진 약속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약속, 우리가 인내로 견디며 바라는 것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상급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우리는 우리가
행한 대로 하나님이 주실 상급이 있고, 상속의 보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땅을 다스릴 통치권을 약속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땅에서 현재는
왕같은 제사장의 신분이지만 장차 우리는 문자 그대로 이 땅을 다스리는 왕이 될 것입니다. 계시록 1:6, [하나님 곧 자신의 아버지를
위하여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분께 영광과 통치가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1:6). [또 우리 하나님을
위해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음이니 우리가 땅에서 통치하리로다, 하더라.] (계5:10). 이런 영광스런 약속은 모든 이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 땅에서 혼의 구원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음으로서 주님이 주시는 영광에 동참자가 되는 것입니다.
환란 성도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무엇입니까? 야곱의 대환란을
인내로 견디어 낸 성도들에게 주님은 약속의 땅을 주시며 천년 간의 통치권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믿음을 부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님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게 하시고, 천년 간의 통치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통치하되] (계20:4c). 이런 약속들은 이미 성경을 통해 주어졌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받지 못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구약 성도들과 달리 ‘약속의 씨’에 대한 것은 2000년
전에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구약 성도들은 약속만 받았지 결코 약속하신 것들을 받지 못했지만 우리는 ‘씨’에 대한 것은 받았고, 땅에 대한 것은 받지
못했습니다. 새 예루살렘, 하늘의 맨션, 부활한 몸과 같은 많은 약속들은 받았지만 ‘약속하신 것들’은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약속하신 것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어떤 이들은 때가 되면 저절로 다 될 것들인데 그에 대한 믿음을 강조할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이들은 실제로 믿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이들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약속을 믿는 믿음은 현재 지금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할 것들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죽은지 수백년이 지나서 될 일들에 대해서 “내가 죽은 뒤에나 될 일인데...”라는 식의 자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부활, 천년 왕국, 새 예루살렘 등에 대한 미래적인 약속들에 대해서 현재 기쁨으로 붙들고, 믿음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미래에 있을 일들에 대한 약속은 이미 과거에 대언자들을 통해 주어졌고, 현재 우리가 소유해야 할 것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구름 같은 믿음의 증인들은 주님이 주신
약속들을 어떻게 붙들고 자신의 삶을 살았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13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다 믿음 안에서 죽었으며 약속하신
것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멀리서 그것들을 보고 확신하며 받아 들였고 또 땅에서는 자기들이 나그네요 순례자라고 고백하였으니](히11:13).
여기서 우리는 믿음으로 산 이들이 주님이 주신 약속들에 대한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생전에
받은 약속들을 안고, 자식들에게 상속으로 물려주며 죽었습니다. 하지만 죽는 것을 허망하게 여기거나 허탄해하지 않았습니다. 약속을 받았지만 약속한
것들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소용이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약속하신 것을 받지 못했지만 그 약속하신 것들을
첫째, 확신하며 받아 들였습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은 현재의 삶에 확신을
줍니다. 비록 죽은 후의 먼 미래에 대한 확신일지라도 그런 확신은 지금 현재의 삶에 활기를 불어 넣습니다. 약속을 확신함으로 받는 순간 삶의
방향과 목표가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삶이 전부가 아니며, 현 세상이 전부가 아니란 점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인해 생긴 이런 지식은 인문 교양학이나 자연 과학을 아무리 공부해도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천문학이나 철학을 아무리 연구해도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아 들일 때 우리의 몸은 현재에 있지만 모든 것이 영원으로 연결됩니다.
둘째, 약속하신
것들을 껴안았습니다. 우리 말로는 “받아 들였고”라고 번역된 부분인 듯 한데 영어 킹제임스 성경으로 ‘embrace’입니다.
껴안았다, 환영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자신이 소유하지 못했지만 장차 자신들의 소유가 될 그 땅을 껴안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것들은 지상에 어떤 보화보다도 더 귀한 것들입니다. 베드로가 ‘보배로운 약속들’이라고 말했듯이 우리는 그것들을 마음에 품고
껴안아야 합니다. 귀한 자식을 껴안듯이, 애인이나 배우자를 껴안듯이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그렇게 껴안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내세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이나 유물론자들은 아무리 크고 귀한 약속들이라도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라면
‘소용이 없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실용주의와 합리주의로 무장한 현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정신세계 역시 그러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이들은
먼 미래를 현재의 것으로 여깁니다. 자신의 죽음이 결코 소망을 약화시키지 못합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체를 소유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가진 채 죽습니다.
셋째, 약속하신
것들을 고백했습니다. 이들은 약속을 마음으로 믿었을 뿐 아니라 입으로 고백했고, 삶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고백하는 것들을 증거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장막 생활을 함으로써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고백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마음으로 믿는 것을 입으로 고백하지 않는 것입니다. 입으로 고백하면 위선자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롬10:13).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을 마음으로 믿고 그것들을
입으로 고백하며, 또한 삶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 현 세상, 물질, 육신 등에 대한 분명한 믿음과 가치관을 가질 뿐 아니라 그런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것이 증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 세상은 사라지는 것이다. 현 세상은 악하다”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의 삶은 세상을
사랑하고 동화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삼가라, 탐심은 우상 숭배다”라고 고백하지만 자신의 행위와 삶은 정반대일 때 우리는 자신의
고백을 스스로 파괴하고 무너뜨리며, 거짓임을 입증하게 됩니다. 말과 행동, 말과 삶이 다를 때 우리의 마음 속에 품은 믿음은 증거의 능력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넷째, 약속하신
것들을 선포했습니다(14). 성도들은 누구나 입버릇처럼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요 순례자’라고 고백합니다. 그 순간은 마치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후손들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집과 부동산에 집착을 하는 모습은 불신자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했습니다. 자신이 나그네요, 순례자라고 믿었고, 고백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분명하게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그분의 다시 오심을 선포합니다. 이는 우리가 믿는 바요,
고백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plainly) 선포했습니다. 우리 역시 하늘에
본향이 있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임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세워질 영원한 왕국이 있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다섯째, 약속하신
것들을 사모했습니다(15). 하나님이 주신 것들은 이 땅에 있는 것들보다 분명히 더 좋은 것들이요, 나은 것들입니다. 지금
비록 그런 것들을 소유하지 못했지만 소유권은 이미 우리 마음 속에 주어졌습니다. 부활을 사모합니까? 주님의 오심을 사모합니까? 장차 세워질
왕국과 우리가 살게될 새 예루살렘을 사모합니까? 그런 것들에 대한 열망이 마음에 가득차면 현 세상의 영광은 시드는 풀의 꽃과 같고, 티끌처럼
무가치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은 지금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래에 주어질 소유, 미래에 얻게 될
영광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무가치하게 여깁니다. 마치 에서와 같이 당장 주린 배를 해결하기 위해서 장자권을 하찮게 여겼듯이 많은 성도들이
그런 정신(mind)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들을 현재 받지 못하고, 현재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해서 무용하다, 무가치하다,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왜 보험을 들고, 저축을 하고, 연금을 냅니까? 강제로
법으로 정해 놓아도 아무런 저항없이 내는 것은 미래에 대한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보험회사는 약관을 정해 놓고, 정부가 정한 법대로 보험금을
지급하겠다는 약속을 믿기 때문에 보험을 내면서 지금 당장은 peace of mind를 얻습니다. 연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보험금이나 연금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어느 날 죽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보험이나 연금은 분명히 미래에 주어질 것입니다. 저축 역시 그렇습니다. 채권이나 주식
등에 지금 번 돈을 투자하지만 언제 받을지 알 수 없습니다. 돈만 내다 죽을지, 조금 타 먹고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계약을 하고, 믿는
순간 우리는 노후 대책 등에 대한 현재적 삶의 안정,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미래에 대해 주어진 약속, 보상 등은 현재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미래에 대한 설계와 준비가 된 이들의 현재적 삶과 그렇지 않는 이들의 삶이 같을 수 없듯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그 약속하신 것들을
믿고 사는 이들과 그렇지 않는 이들의 현재적 삶이 같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미래는 같을 수 있습니까? 전혀 같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산 이들은 미래의 삶이 믿는 그대로 될 뿐 아니라 믿은 것 이상의 삶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믿지 않았던 이들은 지옥에서 살게 되거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고통을 받는 삶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일이 불타면 그는 /보상을/ 손실을 당하리라(he shall
suffer loss).](고전3:15a). 보상을 잃는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 고통이 얼마나 클지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에게
주어질 수도 있었던 것을 눈앞에서 다 태워져 없어지고 사라져 버릴 때 그 고통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왕국의 통치권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주실 유업의 상속과 보상이 사라지고, 영광이 사라질 때 큰 ‘손실의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저 하늘에서 흘릴
첫 번째 눈물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결코 그렇게 헛되이 살지 않을 것이라고 후회를 해도 기회는 없습니다. 우리가 믿은
후로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비록 현실의 삶이 고통스럽더라도 장차 다가올 영광의 비중에는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롬8:18)
자, 우리 모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확신하며 받아들이고,
껴안고, 고백하고, 분명하게 선포하고, 열렬히 사모하며 살기를 기도합시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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