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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더 좋은 것을 마련하사


말씀: 히브리서 11:40a
요절: 히브리서 11:40a


히브리서의 핵심 어휘 가운데 하나는 “더 좋은, 더 나은”입니다. 히브리서에만 better(더 좋은, 더 나은)란 말이 무려 12구절, 13회나 됩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면에서 탁월하신 분이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구약의 어떤 희생물보다 주님이 친히 흘리신 피, 주님이 드리신 자신의 몸이 더 낫다는 사실을 압니다. 주님의 피는 아벨이 흘린 피보다 낫습니다(히12:24). 율법 아래서 짐승들의 희생물을 잡아 드린 피보다 주님이 흘리신 피가 훨씬 뛰어납니다. 히브리 유대인들은 전통, 율법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겼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것보다 훨씬 나은 것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임했음을 말해 줍니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유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이들 중에서도 모세의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주장할 정도였습니다(행15:1).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신실한 종(히3:2-5)이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3:3에는 [집을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 존귀한 것같이 이 사람이 모세보다 더 많은 영광을 받을 자로 인정받았느니라.](히3:3)고 기록합니다. 전통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에서 나온 가지 정도로 생각합니다. 불신자들 역시 기독교란 유대인들의 민족 종교가 발전한 것 또는 거기서 파생된 것 정도로 폄하합니다. 이는 성경도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것들을 많이 받았습니다. 언약을 받았고, 율법을 받았고, 성전과 각종 규례들을 받았습니다. 이교도들에게 없는 좋은 약속들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나은 것)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율법이 비록 의롭고 선하고 거룩한 것이지만 그것은 아무 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율법은 아무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으되 /주께서/ 더 나은 소망을 가져오심은 /완전하게/ 하였나니 우리가 이 소망을 힘입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느니라.](히7:19). 우리는 율법의 연약함, 한계를 잘 압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후에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을 전제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실 때 그보다 더 나은 언약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레위 계열의 제사장을 세우실 때 그들이 불완전하고 연약하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더 나은 제사장 즉 영원한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불완전한 것을 완전케 하셨습니다(히7:21). 또한 주님은 우리에게 더 나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나은 /상속/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7:22).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시고 친히 제공해 주신 더 나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히브리서 8:6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 더욱 뛰어난 직무를 얻으셨으며, 그것에 의해 또한 그분은 더 나은 약속들 위에 세워진 훨씬 더 나은 언약의 중재자이시니라.](히8:6). *더 나은 언약.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제공해 주신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또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이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고 말했듯이 우리를 위해 주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신약 성도들은 구약 성도들과 같이 약속의 땅을 받지 않았습니다. 물질적인 복을 약속받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 주어진 것은 대부분이 땅에 속한 것, 물질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제사장들이나 대언자를 받지 않았습니다. 성전이나 율법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것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물질적인 것 대신 영적인 복으로 복주셨습니다(엡1:4).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지켜야 할 절기나 의식이나 규례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더 뛰어난 것들을 분명히 제공해 주셨습니다. 실체가 오면 모형은 필요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나은 것들을 제공해 주셨으므로 옛날의 전통, 율법, 관습 등으로 돌아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더 나은 언약, 더 나은 제사장, 모세보다 더 뛰어난 중보자, 더 나은 희생물, 더 나은 상속의 보증, 더 나은 피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나은 소망이 있습니다. [율법은 아무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으되 /주께서/ 더 나은 소망을 가져오심은 /완전하게/ 하였기 때문이니 우리가 이 소망을 힘입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느니라.] (히7:19). 구약 성도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잘 알 것입니다. 성전의 지성소 안에는 일 년에 한 번 대 제사장만이 피를 들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약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더 나은 소망’을 가져 오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 나은 소망’은 우리 안에 계신 영광의 소망 예수 그리스도 자신(골1:27)을 말합니다. 성도들은 누구나 기도를 통해,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친교와 사귐을 가질 수 있고, 얼마든지 깊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가까이, 아주 가까이 언제나 접할 수 있는 위치와 거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벨로부터 시작된 믿음의 선진들은 분명히 믿음으로 좋은 평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받았지만 약속된 것들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제공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고난 받는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지내는 희생물보다 더 나은 희생물로 하나님을 경배합니다(히9:23).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마련하사/제공하사(provided)](히11:40a)란 말씀은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할 때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이 모형이라면 신약은 실체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실 때까지 모형으로 주신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 들이는 가정 교사의 역할을 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약 성도들에게 또 다른 모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실체”를 주셨습니다. 신약 성도들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들을 제공해 주셨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주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크고 놀라운 일들이 너무 많아서 능히 헤아릴 수 없다는 고백 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구약 성도들보다 더 나은 영적 삶을 살았다든가 더 위대한 믿음을 소유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20세기의 성도들이라고 해서 에녹이나 노아보다 더 뛰어난 믿음을 소유한 것은 아니며, 아브라함이나 모세, 여호수아, 다윗 보다 더 나은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지금도 그들의 믿음을 본받고, 따르고, 배우고자 애를 쓰는 입장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을 어떤 이는 영생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거듭남, 어떤 이는 중생, 어떤 이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을 받은 것 역시 더 좋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약과 신약을 비교하든지, 유대인과 교회를 비교하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이 예비한 더 좋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신약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누리는 여러 가지 은혜를 구약 성도들은 전혀 누리지 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던 이들 역시 영생을 얻었고(시133:3), 하나님이 장차 주실 왕국을 바라보며 소망했습니다. 다윗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죄 사함을 경험했고(시32:1-2), 느헤미야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느9:20). 우리는 구약 성도들이 신약이 오기 전까지 무지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 성도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부활을 믿었고, 대 환란이나 이스라엘의 회복, 천년 왕국을 믿었습니다. 구약 성도나 신약 성도나 믿음의 차이는 없습니다. 그들은 약속을 통해 장차 올 것을 믿었고, 우리는 약속에 따라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자, 보십시오. 구약의 대언자들은 장차 올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부지런히 탐구했습니다. [이 혼의 구원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에 대하여 대언한 대언자들이 부지런히 조사하고 탐구하되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있게 될 영광을 미리 증거해 주실 때에 /그것들이/ 무엇을 혹은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 탐구하였느니라.](벧전1:10-11). 대언자들은 분명히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있게 될 영광을 미리 증거’ 받았습니다. 그들 안에 있던 그리스도의 영께서 미리 증거 해 주신 내용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그들이 부지런히 탐구한 것은 ‘혼의 구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임할 은혜에 대하여 대언자들은 이미 부지런히 조사하고 탐구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그들 안에 있던 믿음의 영이나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의 영이 다르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어떤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구약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몰랐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거짓말입니다. 구약은 신약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구약 성경으로 자신을 증언하셨습니다. 사도들 역시 구약 성경으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성경을 탐구하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기 때문이니 성경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요5:39). 모세는 단지 모세오경에 율법만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다섯 권의 핵심이요,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너희가 모세/의 말/을 믿었더라면 또 내 /말/을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나에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5:46). 우리는 성경 어디를 펴도 그 중심에 예수님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대언자/의 글/에서 시작하여 모든 성경 기록들에서 자기에 관하여 /기록된/ 것들을 그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시니라.] (눅24:27). 주님은 구약 성경에 자신에 대해 기록된 부분들을 펼치시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에 사도들은 구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마련하사](히11:40a)란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구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기록되어 있고, 선포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보거나 듣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대언자들과 의로운 자들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느니라.](마13:17)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있게 될 영광을 증거 해 주실 때에 그것이 무엇인지, 어느 때인지 탐구했지만 신약 성도들이 보는 것처럼 보지 못했고, 우리가 듣는 것처럼 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대언자들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이 장차 보내 주실 ‘여자의 씨, 이스라엘의 소망’을 보고자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날 보기를 기뻐했습니다(요8:56). 그들은 “멀리서 그 약속들을 보고 확신하며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히11:13).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을 마련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세상은 점점 살기 좋은 곳이 되고, 인간의 수명은 늘어나고, 복지는 확충되고 등등의 점진적 향상과 발전에 대한 전망을 쏟아냅니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의 이런 주장과는 달리 사람들은 갈수록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퇴화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젊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의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수명이 과거에 비해 늘었다고 해도 지금 이 시대에 그 누구도 노아 이전 시대의 사람들처럼 오래 사는 이는 없습니다. 겉 사람은 하루하루 늙어가고, 그 기능은 점점 약해지고, 결국 죽습니다. 산업 혁명 이후에 약 200년 동안에 엄청난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사람들의 가치관, 철학, 사고는 진화론에 완전히 동화되어 버렸지만 냉정하게 살펴보면 사람이 나아진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악해지고, 더욱 나빠졌습니다. 만물은 점점 낡아갑니다. 청산은 유구하고, 만물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점점 옷처럼 낡아집니다. [또, {주}여, 주께서 처음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들도 주의 손이 이루신 작품이니이다. 그것들은 멸망하려니와 오직 주는 여전히 계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아지리니] (히1:10~11). 악한 현 세상은 점점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마지막 순간에 환하게 밝게 타오르는 ‘반조 현상’과 같은 시기입니다. 사람이 죽기 전에 잠깐 맑은 정신이 돌아오는 것과 같이 이 세상 역시 멸망하기 직전 잠시 좋아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점점 좋아지는 것, 나아지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고후4:16).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사람은 세월 앞에서 무기력하게 늙어가거나 죽는 것이 아니라 점점 새로워집니다. 이것은 자연 법칙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들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영적인 몸입니다. 우리의 몸은 수치 가운데 뿌려지고 영광 가운데 일으켜지며, 연약함 가운데 뿌려지지만 권능 가운데 일으켜 집니다(고전15:43). 썩는 것 가운데 뿌려지고 썩지 않는 것으로 일으켜 집니다(고전15:42). 장차 성도들은 모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고전15:48). 육신의 장막이 해체되고 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으로 옷 입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놀랍고도 놀랍기만 합니다. 만화 영화나 전설이나 신화에 나오는 어떤 주인공들보다 더 나은 몸, 더 뛰어난 몸이 우리에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둘째, 우리가 살 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한 더 좋은 것들은 우리가 살 집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저택들/mansions)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14:2). 이 땅에서 우리는 경제력에 따라 다양한 주거 형태에 머뭅니다. 등산이나 들에 놀러 가서 임시로 사용하는 천막에서부터 초호화 저택들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권세자들이나 부자들이 사는 집들이 얼마나 화려합니까? 하지만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동굴과 사막과 광야와 산과 강을 떠돌던 믿는 성도들을 위해 주님은 ‘하늘에 대 저택’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주님은 ‘저택들’을 마련하러 가셨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되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도다.”(마8:20)고 하셨지만 막상 우리를 위해서는 하늘에 맨션을 준비하셨습니다.

셋째, 영구한 도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한 더 좋은 것은 영구한 도시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바라본 도시는 이 땅에 세워질 한 도시였습니다. 신약 성도들이 바라는 더 좋은 도시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이 땅에 있는 도시들을 보십시오. 살기 좋은 도시, 환경이 좋은 도시, 잘 사는 도시, 문화 예술이 발전한 도시, 교육 도시 등 다양한 슬로건을 내 걸고 자랑하지만 완벽한 도시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한 도시는 '더 나은'(better) 도시입니다. 사람들의 건축술로 세워진 도시가 아닙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의 본향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친히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예비하셨음이라.] (히11:16).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았던 이들은 모두 주님이 마련하실 이 도시를 바라보았습니다. [너희에게 하늘에 더 낫고 영구(永久)한 실체가 있는 줄 너희 자신이 알므로 결박 중에 있는 나를 불쌍히 여기고 너희 재산을 노략 당하는 것도 기쁘게 여겼느니라.](히10:34). 이 도시는 거룩한 도시입니다. 슬픔도 눈물도 울부짖음도 없는 도시입니다.

넷째, 더 좋은 부활입니다. [여인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받기도 하며 다른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고문을 당하되 구출받기를 원치 아니하였으며] (히11:35). 이 부분은 이미 설교를 했기 때문에 넘어갑니다. 더 좋은 부활. 하늘에 있는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듯이 부활한 성도들의 영광이 서로 다릅니다. 이들이 이 땅을 포기하고, 자신의 목숨과 육신의 생을 포기한 것은 장차 다가올 영광의 비중과 비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부활을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구원에 동반되는 더 좋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비록 우리가 이같이 말하지만 너희에게는 더 좋은 것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이 있음을 확신하노니] (히6:9). 성경은 우리에게는 더 좋은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은혜 아래 있으며, 어느 시대의 성도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구원 받은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 때 구원은 기본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각양 은혜의 선물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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