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앞에 놓인 경주
말씀: 히브리서 12:1
요절: 히브리서 12:1
믿음으로 살며 좋은 평판을 얻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란
증거를 얻은 구약 성도들의 본들을 제시한 바울은 동일한 환란과 고난에 처한 히브리 성도들을 향해 어떻게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하는지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을 통해 ‘구원’은 성도의 목표가 아니라 출발이며, 단지 시작일 뿐이란 사실을 배웁니다. 믿음의 삶은 구원받은 후부터
달려야 할 경주와 같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은 어떤 면에서 군인의 삶과 같아서 치열한 전쟁터에 있는 것 같고, 때로는 온 힘을 다해 경기를
치러야 하는 경기장의 운동선수와 같습니다. 마라톤 선수나 권투 선수 또는 레슬링 선수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경기자의
관람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안히 좌석에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며 소리를 지르는 박수 부대가 아니라 힘을 다해 뛰어야 하는 선수들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12:1,
[그러므로 이렇게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1).
“그러므로”란 말씀은 11장 전체에 걸쳐 나온
믿음의 성도들에 대한 기록의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란 접속어는 성경의 핵심 어휘입니다. 성경은 "Therefore"로 이루어진
책이란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 시대에 이렇게 믿음으로 산 인물들이 있었다는 사실만 우리에게 나열해 주는 것으로 끝을 맺지
않습니다. “그러므로”란 접속사는 이제 우리에게 줄 말씀을 선포하겠다는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우리는 그것을 기초로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결론이 바로 12:1-12절입니다.
아벨로부터 시작해서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이미 자신들에게 주어진 경주를 마치고 우리에게 믿음의 자취와 본을 남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격려와 응원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란 말은 구약 성도 전체를 다 말합니다. 이들의 수는 결코 적지
않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모두 바알에게 무릎 꿇고, 온 이스라엘이 배교한 그런 시대에도 하나님은 “칠천 명”을 남겨 두셨다고 말씀하셨듯이,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육신 이전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미한 진리의 빛을 보고도 세상이 주는 모욕과
수치와 고난을 모두 감당했다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생하게 보는 우리가 더욱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고, 성령의 내주하심을 입고 있는 성도들이 영적 전쟁을 수행하고, 믿음의 경주를 수행하는
일은 구약의 어떤 성도들보다 훨씬 더 나은 환경입니다. 우리는 구약을 통해서 실제적인 경건의 자극과 도전을 받고 깊은 영적 교훈을 얻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말씀을 살펴보았듯이 구약 성도들의 삶이 결코 관념적이거나 철학적이지 않았음을 압니다. 그들의 삶은 실제적이고,
실천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경건 서적이나 기독교 신학이나 철학을 남긴 것이 아니라
‘삶의
본’을 남겼습니다.
아벨은 바른 희생물을 드리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본으로
남겼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물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의 삶이 주는 결과가 무엇인지 보여
주었습니다. 노아는 세상을 심판할 하나님의 심판을 대비해 방주를 지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는 자신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땅으로 나아갔습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여호수아는 출애굽한 백성들을 이끌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며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자 굴과 용광로로 기꺼이 들어간 이들의 믿음은 결코 관념적이나 이론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믿음은 수동적이 아니라 활력에
차고 생기 넘치고 열매를 맺는 것이며 승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위대한 어록을 남기지 않았고, 믿음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집필한 책을 남기지
않았고, 자신의 사상을 전수해서 교육해야 할 제자나 학교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산 삶의 간증, 자취를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믿음의 행위들을 성경 속에 기록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읽고 동일한 믿음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는 ‘믿음으로 산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동일한 믿음의 영]을
지녔다면 동일한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시 1절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1).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 성도들과 같은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 ‘육상 경주자’와 같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여러 차례 경주자로
묘사하고 자신 역시 경주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경주자라면 우리에게는
출발선(start
line)과 결승선(finish line)이 있습니다. 우리의 출발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순간입니다. 결승선은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입니다. 우리가 경주자라면 우리에게는 주어진 코스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코스를 달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올림픽이나 세계 선수권 대회 등을 보면 선수들에게 각자 자신의 트랙이 주어진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라톤 역시 42.195 Km의 코스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코치들과 선수들은 미리 와서 코스를 답사하고 비슷한 경기 환경에서 연습을 하며 작전을 짜고, 어디서 힘을 내고 어디서
천천히 달리는 등의 완급 조절에 대한 계획을 세웁니다. 정해진 코스를 벗어나 목적지로 가는 지름길로 달리든지 가로 질러 달린다면 그는
실격입니다. 대회 주최 측에서 정해준 그 코스, 그 길로만 달려야 합니다. 다른 길, 다른 방향으로 달려서 낸 기록은 무효입니다.
육상 경기는 어떤
경기보다 규칙이 적습니다. 복잡한 룰을 익히고 숙지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성경을 믿는 이들은 말씀을 믿는 믿음 외에 어떤
규칙도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종교보다 더 단순하고 쉽습니다. 지켜야 할 절기가 없습니다. 반드시 엄수해야 할 의식도 없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신약적 규례라면 구원받은 후 딱 한번 행하는 침례와 성도들의 모임 가운데 행하는 ‘만찬’이 전부입니다. 육상 경기만큼이나 단순한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육상 경기의 유일한 규칙은 그냥 정해준 길로 달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정해 주신 길은
“의의 길, 평강의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주의 길”입니다. 이 길은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그래서 찾는 이가
적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달려야 할 길로 정해 주신 길입니다. 사람들은 ______________을 걷고, 그리로 달립니다.
[이들이 바른 길을 저버리고 보솔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며 길을 잃었도다.](벧후2:15a). 세상은 악독의 길을 따릅니다(벧후2:2).
유다서에는 믿음의 길 대신 다른 길로 간 세 사람의 예가 나옵니다. 그들은 ____________, _________, _________입니다.
[그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들이 가인의 길로 갔으며 대가를 바라고 발람의 잘못을 따라 탐욕을 내며 달려갔고 고라의 반역 가운데서
멸망하였도다.](유1:11). *가인, 발람, 고라.
육상 경기는 개인
경기입니다. 개개인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축구나 농구와 같이 팀을 이루어서 하는 단체 경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달리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각 개인의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은 거의 전부가 자신의
문제요, 책임입니다. 사람들은 잘못되면 남의 탓을 합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누구 때문이다, 무엇 때문이다 등의 핑계와 변명거리를 찾고
거기로 전가해 버립니다. 육상 경기는 이것이 되지 않습니다. 누구 탓을 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뛰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남의 길에 걸림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자기 형제의
길에 걸림돌이나 넘어질 기회를 두는 사람이 없는지 판단할지니라.](롬14:13),
[오직 너희의 이 자유가 약한 자들에게 결코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8:9). 자신의 길만 신경 쓰면 그만인데 남의 길이 더 좋은지, 더 나쁜지 관여하고, 거기에
걸림돌을 놓는 것은 반칙입니다.
육상 경기에는 비싼
장비나 갖추어야 할 도구들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만든 기계나 장비로 승부를 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자신의 힘과 흘린
땀으로 경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동차 경주, 경륜(자전거), 승마 등은 자신의 힘과 기술도 기술이지만 장비가 좋아야 합니다. 장비가 절대적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육상 경기는 신발을 제외하고는 어떤 장비도 없습니다. 요즘은 세계적 스포츠 회사들이 마켓팅을 위해 좀 더 가볍고 편한
신발을 제공하고, 바람의 저항을 줄이고 땀을 잘 흡수하는 운동복을 제공하는 등 육상 경기에도 경기외적 요소가 많이 작용하지만 어느 스포츠보다
장비의 영향이 적은 것이 육상 경기입니다. 믿음 생활 역시 그렇습니다. 출신, 성별, 지역, 학력, 경제력, 권력 등과 거의 상관이 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성경 외에 어떤 다른 장비도 필요치 않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천문학적인 돈이 들거나 대학 교육이나 전문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큰 믿음, 살아 있는 믿음을 얻기 위해 유학을 떠나 더 배움을 얻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일부 무지한 교회와 성도들은 믿음의
경주를 위해서 이런 것들이 매우 중요한 줄로 알고, 그런 것들을 구하는데 시간을 다 써버립니다. 성경의 원어를 배우면 한글로 성경을 읽는 것보다
믿음이 더 좋아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면 믿음이 더 좋아집니까? 전혀 아닙니다. 믿음이란 것이 지역별, 성별, 학력별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올림픽을 보십시오. 미국을 비롯한 경제력이 강한 나라들이 전 종목을 휘잡습니다. 그러나 마라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라톤은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선수들이라고 해서 못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누구나 어느 때나 시작할 수 있는 운동을 대라면 달리기입니다.
골프를 치려면 골프채를 사서 골프장으로 가야 합니다. 미리 골프 연습장에서 스윙 연습이라도 해야 합니다. 매우 간단한 운동이라 생각되는 탁구,
베드민턴 조차도 라켓과 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약간의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달리기는 아무데서나 가능합니다. 운동장이 없으면 길을 따라
뛰면 됩니다. 그래서 의사들은 “운동을 하세요.”라고 말합니다. “무슨 운동?”하고 물으면 대부분은 아침 저녁으로 “가볍게 조깅부터 하라”고
합니다. 아무 장비도 기술도필요치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운동 시간에 비해 가장 운동 효과가 높은 것이 달리기입니다. 믿음 생활이
그렇습니다. 가장 간단하고 쉽습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것 등은 돈이 드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가장 효과가
높습니다.
다시 1절입니다. 12:1,
[그러므로 이렇게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1).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보면 토기는 달리다가 한 숨 자 버립니다. 반면 거북이는 느리지만 꾸준히 달립니다. 토끼는 오직
거북이를 보고, 거북이만 생각하고 경주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경쟁 상대로 생각하고, 자신을 비교하는 신앙 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서로 경쟁시키거나 비교시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요한을 경쟁 상대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 말씀해 주자(요21;19), 베드로는 느닷없이 예수님께서
[... {주}여, 그런데 이 사람은 무엇을
하리이까?](요21:21)라고 물었습니다. 그가 “이 사람은”하고 관심을 보인 이는 바로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미래보다 요한의
미래에 더 관심이 있었고,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 보다 요한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더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요21:22) 말씀하셨습니다. 비교와 경쟁심으로 신앙 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
생활의 핵심은 사랑이지 ‘시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이웃이나 옆에 있는 형제들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목표점, 결승선을 마음에
두고 뛰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실 상급을 바라보고 거기에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요한을 마음에 두고 달릴 필요가 없듯이 우리 역시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추천하는 자들과 감히 한 패가 되거나 혹은 그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오직 그들은 자기들을 기준으로 자기들을 판단하며 자기들 가운데서 자기들을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10:12).
우리는 어떻게 달려야 하는가? 성경은 잘 달리도록 성도들에게 몇
가지 필요한 것들을 말해 줍니다.
1. 모든 무거운
것들을 벗어 버리라. 무거운 짐을 진 채 달리는 이는 없습니다. 육상 선수들의 경기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의 복장은 최소한
간편하고 가볍습니다. “무거운 것들”을 벗어 버리라고 해서 성도가 가족이나 교회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의 말씀이 무겁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말씀을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 이것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니라. 그분의 명령들은 무겁지
아니하니라.](요일5:3). 주님이 우리에게 지라고 주신 짐과 멍에는 결코 무겁지 않습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하시니라.](마11:30). 기도하는 일, 말씀을 듣고 읽는 일, 교회의 집회에 참석하는 일들이 어렵고 무거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벗어 버려야 할 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경주자들이 벗어야 할 무거운 것들은 무엇입니까?
무거운 짐이란 자신의 “불법들”입니다.
[내 불법들이 내 머리 위로 넘어갔으니 그것들이 무거운 짐 같으므로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무겁나이다.](시38:4). 불법들은 겉보기와는 달리 누구에게나 무거운 짐입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11:29)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홀로 우리의 모든 짐을
감당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벗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친히 맡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시편 55:22,
[네 짐을 [주]께 던져서
맡기라.](시55:22a). 잠언 16:3,
[네 일들을 [주]께 맡기라.](잠16:3),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느니라.](벧전5:7).
[네 길을 [주]께 맡기고 또 그분을 신뢰하라](시37:5). 우리가 맡겨야
할 것은 a. 네 짐 b. 네 일들 c. 너희의 모든 염려 d. 네 길들 e. 원수 갚는 것. 주님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복수심, 쓴 뿌리,
원수 갚는 것, 원한 등까지도 다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된바, 원수갚는 일이 내게 속하였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느니라.](롬12:19). 마음 속에 불평과 원망과
한(恨)을 품고 믿음의 길을 달릴 수는 없습니다.
2.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떨쳐 버리라. 죄란 죄는 다 우리를 얽어맵니다. 심리학자들이나 상담가들은 죄의 기준을 바꾸거나 그 표준을
낮춤으로써 죄악으로 고통받고, 신음하는 혼들을 위로하려고 합니다. 세상은 죄를 죄가 아니라고 말해 줌으로써 위안을 주고, 평안을 얻게 해 주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 책임이 내가 아닌 사회 구조적 문제에 기인한 것이요, 환경의 문제라고 함으로써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풀어
주려고 합니다. 때로는 죄악을 실패, 실수, 사소한 허물, 누구에게나 있는 본능, 사람의 연약함, 심리적 문제 등으로 겪는 일시적 현상 등으로
합리화해 줌으로써 자신을 얽어매는 죄를 떨쳐 버리도록 합니다. 그러나 그런 진단과 결과는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죄악의
결과들을 ‘전생(前生)의 책임’으로 떠 넘겨주는 이들이 활개를 칩니다. 성도들은 성경적 죄의 정의를 심리학적 용어로 바꾸거나 사회적 책임이나
자라온 환경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됩니다. 성도들은 죄의 원인과 결과를 정확히 파악하고 또한 쉽게 나를 얽어매는 죄를 떨쳐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떨쳐 버리려면
첫째, 약속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극진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 약속들을 가졌은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둘째, 죄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自白)하면 그분께서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1:9). 자백(confess)을 요구(ask)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주님께서 죄들을
자백하면 주님은 용서하실 뿐 아니라 깨끗하게 하십니다. 다윗은 자신의 체험을 근거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잠잠할 때에 하루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나이다. 밤낮으로 주의 손이 나를 무겁게 누르므로 내 진액이 여름 가뭄으로 변하였나이다. 셀라. 내가 주께 내 죄를
시인하고 내 불법을 숨기지 아니하며 또 이르기를, 내 범죄를 주께 자백하리라 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의 불법을 용서하셨나이다. 셀라.]
(시32:3~5). 주께 죄를 자백하는 일은 죄의 사슬을 끊어 버리는 잘 드는 가위와 같습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주님과 교제하면서 빛 가운데 걸으십시오.
[그러나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만일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교제하고 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1:7). 십자가의 피는 모든 죄에서 우리를 끊어 버립니다.
넷째, 꾸준히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 이미 목욕한 자는 온 몸이 깨끗하니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요13:10a)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씻겨 주는 물과 같습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시고 정결하게 하려 하심이요](엡5:26). *히10:22 참조. 오늘날 교회에서 거룩함이나 정결함을 보지
못하고 온갖 더러움을 보게 되는 것은 그들 속에 말씀의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회 뿐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가정은 불신자들에게 욕을
먹습니다. 성도들 개개인 역시 불신자들에게 거룩함이나 정결함을 전혀 보여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을 멀리한 채 말씀을 마음
속에 풍부히 거하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인내로
달리라.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한 가지는 인내입니다. 좋은 마음 밭의 소유자라도 말씀을 받으면 “인내로써”
열매를 맺습니다(눅8:15). 우리의 경주는 장거리 경주입니다. 성도들은 갖가지 난관을 만납니다. 주님이 정해준 코스에는 오르막도 있고, 평지도
있고, 내리막도 있습니다. 햇볕이 등에서 앞에서 비췰 때도 있고 머리 위에서 뜨겁게 비췰 때도 있고,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때도 있습니다.
Finish line은 너무 멀어서 이 길이 언제 끝날지 감이 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욕구도 생깁니다. 하지만
인내가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내로 너희 혼을 소유하라.](눅21:19) 하셨고,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인내로 기다릴지니라.](롬8:2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인내를 가질 수
있습니까? 인내는 부모로부터 선천적으로 물려받는 성품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 주변에는 참을성과 인내심이 유난히 강한 사람이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타고난 기질이 아닙니다.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라고 해도 ‘인내’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내를 줍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배움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곧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롬15:4).
*성경이 주는 인내.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말씀에서 난 믿음을 소유한다면 누구나 인내의 소유자가 되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습니다.
인내를 주는 또 하나는 환란입니다.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우리가 아노라.](롬5:3-4). *환난이 인내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환난을 주시는 것은 이를 통해
인내를 이루게 하심입니다.
4. 목표를
바라보고 달려라. 달리는데 곁눈질을 하지 말고 앞에 놓인 푯대를 향해 달려야 합니다. 목표가 없이 달리는 것은 ‘허공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와 같이 달리되 정해진 것이 없는 것같이 하지 아니하고 또 이와 같이 싸우되 허공을 치는 자같이 하지
아니하며](고전9:26). 목표는 달리는 방향을 정해 줍니다. 달리는 방향과 목표가 있을 때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떨쳐 내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전에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다 손실로 여겼습니다. 이전에는 내게 즐거움을
주던 것이 지금 영적 생활의 해악이 되고, 달리는데 큰 손실을 끼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전에 즐기던 습관, 취미 등을 점검해 보십시오.
이전에 내게 이득이 되던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손실로 여기는 것들이 무엇인지 한 번 보십시오. 그런 것들이 하나도 없다면 그는 경주자가
아니라 경기장에 찾아온 관전자일 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빌3:14)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6세기의 헬라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은
올림픽 경기와 같다. 상을 타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뛰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이익을 얻기 위해서 음료수를 파는 자들은 더러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앉아서 구경하는 것 외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이 말은 오늘날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주님이 성전에
왔을 때 장사꾼들이 즐비했듯이 오늘날 교회에도 비즈니스를 위해 오는 장사꾼들이 수두룩하고, 주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습니다. 마치 연극이나 영화를 관람하듯이 교회에서 설교자의 설교와 찬양대의 찬양을 구경합니다.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 잡담을 나누고
돌아갑니다. 우리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모두 이전의 구름같은 증인들이 그러했듯이 그들의 증거를
받아 인내로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해는 자기 침소에서
나오는 신랑 같고 경주하기를 기뻐하는 힘센 자 같도다.](시19:5). 우리 주님은 이렇게 달리셨습니다. 3년 반 동안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삶의 모습은 잠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는 종의 모습이셨습니다(눅4:43-44). 주님은 한 곳에 머물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의 온
도시와 회당을 도시며 말씀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자신이 친히 가지 못한 도시들에는 제자들을 내 보내셨습니다(마10, 눅10). 주님은
“경주하기를 기뻐하는 힘센 자” 같이 달려 갈 길을 마쳤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러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冠)이 예비되어 있나니] (딤후4:7~8a). 마지못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앞에
놓인 목표를 바라보고 달렸으며, 상을 바라보고 기쁘게 달렸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즐거움, 기쁨을 바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기뻐하며, 달려 갈 길을
마쳤노라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