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예수님을 바라보자.

말씀: 히브리서 12:2a
요절: 히브리서 12:2a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하는 경주자(선수)들입니다. 구약 성도들은 저 하늘에서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구름 같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싼 채 우리가 낙담하거나 쓰러질 때 자신들의 경험을 들려주며 인내와 위로를 받게 합니다(롬15:4). 죄를 지을 때는 심판 받은 자들의 본보기를 바라보게 함으로 동일한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합니다(고전10:6, 11). 주님 역시 우리를 보고 계시며,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구약의 어떤 대언자나 제사장들보다 더 큰 고난을 겪으셨으며, 자신의 길을 모두 달리시고 마침내 “다 이루었다”(요19:30)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승리자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겪는 모든 시험과 환란을 친히 몸소 경험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구조하실 수 있느니라.](히2:18). 증인이란 말 자체는 이미 자신들이 몸소 보고 듣고 경험하여 마음 속에 확증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믿음의 관람객들이 아닙니다. 믿음을 분석하고 이론을 정립한 학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삶 가운데서 말씀을 듣고 믿고, 믿음으로 삶에서 승리를 얻은 산 유경험자들로서 우리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그들은 우리처럼 살아라, 우리를 본 받아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믿음을 얻었고, 어려움 속에서 주님의 도움을 얻었고, 승리를 얻었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의 비결이 자신들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주님’을 바라 봄으로써 승리했다는 점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란 말은 주님을 바라 봄으로써와 같은 말입니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나를 바라보라. 그리하고 너희는 구원을 받을지어다. 나는 하나님이요,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45:22). 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바라봄으로써 승리의 삶을 살았던 것이며, 우리 역시 그렇게 하면 된다는 것을 증인으로서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가정 폭력에 시달립니까? 아벨을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으로 살던 그는 친 형에게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지금 이곳 미국과 달리 아직도 많은 국가에서는 믿음으로 살다 가족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소위 ‘명예 살인’이라고 해서 가족들이 예수를 믿는 형제, 자매를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돈이나 유산 문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인해 형제들 사이에 따돌림을 당하고 미움을 받는다면 요셉을 생각하십시오. 요셉은 분명히 "그 일은 나도 경험한 일이다."라고 외칠 것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하다 결국 이집트 노예상인에게 팔렸습니다. 깡패들이 술집이나 포주들이 아니라 한 아버지를 둔 형제들에게 인신매매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노예에서 신분 해방이나 탈출을 시도하는 대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는 파라오의 감옥에서나 파라오의 왕궁에서나 주님을 바라 봄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환경이나 운명에 대해서 울분을 토하려면 끝이 없고, 충분히 동정을 받을 수도 있을 상황이지만 그가 형제들을 모두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인품,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단련으로 얻은 승리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당한 억울함을 이긴 인생의 성공 스토리를 들려 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이길 수 있게 해 준 믿음의 역할, 믿음의 권능, 믿음의 주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도시나 직장, 때로는 타향으로 이민을 왔다면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자신의 모든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습니다. 75세의 나이에 낯선 땅으로 떠난다는 것은 일생의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은 계시라도 있었지만 나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이민 왔고, 빚쟁이를 피해 이 땅에 도망 왔고, 누군가에게 쫓겨서 이 땅에 피신해서 왔다면 야곱을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쳐 20년간이나 타향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떠날 때 벧엘에서 주님을 만났고, 돌아올 때 얍복 여울에서 다시 주님을 만났습니다(창32:24-25).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그의 인생 가운데 주님이 간섭하시고 인도하신 장면입니다. 야곱의 간증은 자신이 어떻게 살았다가 아니라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신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입니다. 우리는 야곱을 통해서 그런 상황, 그런 사람을 도우시는 주님을 보며 위로와 힘을 얻는 것입니다. 모세 역시 이집트 땅에서 살인자로서의 처형을 피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40년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정적이었던 사울 왕을 피해 이웃 나라로 도망 다녔습니다. 원치 않는 이민자의 삶이었습니다. 모두 다 아브라함처럼 떳떳하게 믿음으로 자기 고향, 자기의 터전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 살았던 전직(前職)이 부끄럽습니까? 기생 라합에게 격려를 받으십시오. 그는 여리고에서 창녀였습니다. 사사 삼손 역시 창녀들과 놀아났습니다. 미군 기지촌에서 술집 창녀 생활을 하다 미군과 결혼해서 교회에 다니며 거듭난 분들이 자신을 숨기고 피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믿음의 좋은 평판을 남기도록 하셨습니다.

성경 어디를 펴 보아도 여러분은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를 능히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악하고 험한 세상에 살았던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다니엘은 전쟁에서 진 멸망한 민족의 포로로서 끌려가 바빌론 궁전에서 내시로 살았습니다. 자식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까?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아들 중 한명(압살롬)은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를 향해 대적한 반역자였습니다. 또 한 명은 성 폭행범(암논)이었습니다(삼하13:14-16). 우리는 자신의 문제가 커 보이고, 마치 그것들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모두 깊이 파인 계곡만큼이나 어둡고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평안한 가운데 아무 어려움 없이 믿음의 경주를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섬기면서도 죽음을 갈구했던 이는 구약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꼽히는 모세(민11:15)와 엘리야(왕상19:4)였습니다. 이들은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던지 “내 생명을 취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믿음과는 아무 상관없이 “내 생명을 취하소서”(욘4:3,8)라는 이도 있습니다. 돈 문제, 부부 간의 문제, 자식 문제, 자신의 인생의 문제들로 인해서 그냥 고통 없이 죽는 것만도 ‘복(福)’이라고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죽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두 번이나 죽게 해달라고 기도한 사람은 다름 아닌 대언자 요나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겪는 각종 사건들 속에서 주님을 바라본다면 그 사건들, 그 환경들, 주변의 이웃들은 물론이고 원수들까지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관중석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히12:1)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달리는 사람들 앞에 계시기 때문에 관중석에서는 달리는 선수들이 보이지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1-2절은 연결된 말씀입니다. 영어 킹 제임스 성경을 보면 1절에서 시작된 말씀은 2절에서 마침표가 찍힙니다. 연결해서 읽으면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예수님을 바라보자.”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열심히 달립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만 보고 달렸다고 고백합니다. 한 눈 팔지 않고 달렸는데 어느 덧 나이는 60이 넘고 은퇴할 때가 되어 돌아보니 “내가 달리긴 했는데 제대로 왔는지도 모르 겠다”고 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말하기를, [내가 돌이켜 해 아래에서 보니 경주가 빠른 자들에게 돌아가지 아니하고..](전9:11)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이 세운 목표만 바라보고 달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돈만 보고 달리고, 어떤 이는 자식만 보고 달립니다. 어떤 소설에는 무지개를 잡으려고 그것만 보고 달리는 소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산 넘어 있던 무지개는 그 산에 달려가면 다음 산에 걸려 있고, 또 거기에 달려가면 다음 산에 걸려 있었습니다. 평생을 달려도 끝내 잡지 못한 소년이 어느덧 불가능을 깨닫고, 잡기를 포기했더니 자신은 늙은 노인이 되어 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성도들은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려야지 자신이 달리고 싶은 course나 남의 course를 달려서는 안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2). 1절이 성도가 믿음의 경주를 시작하기 전에 필요한 준비 사항이요 -무거운 것,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떨쳐 버리는 것-, 소극적인 면이라면 2절은 준비 된 상태에서 어떻게 달리는가? 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준비가 완료되면 그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달려야 합니다. 이 순서는 성경에서 바뀌지 않는 절대적 질서입니다. 자, 보십시오. 주님께 돌아오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을 버리고, 자기 생각을 버리고 돌아서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분께서 풍성하게 용서하시리라.] (사55:7).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마16:24). 새 사람을 입으려면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엡4:22-24). 십자가의 죽음이 먼저이고 부활의 영광이 있듯이,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하는데도 먼저 무거운 것과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 버린 후에야 달릴 수 있습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기 전에 밭을 갈고, 가시와 엉겅퀴를 제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농부의 수고는 헛고생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마음을 밭, 말씀을 씨앗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속에 있는 가시덤불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영적 해석을 가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가시나무 사이에 떨어진 자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고 나아가다가 이 /세상/ 삶의 염려와 재물과 쾌락으로 숨이 막혀 완전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이라.](눅8:14)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삶의 염려는 가시덤불입니다. 재물에 대한 염려, 돈을 사랑하는 것 등은 그 뿌리가 너무나 깊은 가시덤불들입니다. 쾌락 역시 그러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속에 있을 때 거기에 떨어진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리기 때문에 매주 교회에 나와서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순례자인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들을 삼가라.] (벧전2:11)고 했는데, 이것들이 경주를 방해할 뿐 아니라 선수들이 달리는데 모든 힘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이들이 ‘믿음의 경주’를 한다는 것은 지게에 짐을 가득 싣고 육상 트랙 출발선에 서 있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출발선에 선 선수들은 달릴 때 무엇을 봅니까? 결승선을 바라봅니다. 우승할 때 주어질 상급을 생각합니다. 만약 고개를 떨어뜨린 채 달리면 땅이 보이고, 자신의 발만 보일 것입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동료들이 달리는 것이 보입니다. 달리는 선수들이 도로변에 서 있는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며, 유유히 주변 경치를 구경하면서 뛰는 이는 없습니다. 어떤 이는 달리다가 뒤를 돌아보기도 합니다. 몇 명이 보이기라도 하면 내 뒤에 오는 이들도 많구나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습니다. 내가 제대로 달리지 못하면 뒤에 따라오는 이들에게 방해가 되고 걸림돌이 됩니다. 성도들은 달릴 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보거나 주위 환경을 보거나 옆을 보거나 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바라보고 달려야 합니다. 우리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키고 달리면 길을 놓치지 않습니다. 방향이 틀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달릴 때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땅을 살펴야 하는 줄 알지만 달리는 선수들은 아래가 아니라 위, 바로 앞이 아니라 멀리 앞을 내다보라고 말합니다. 힘이 들면 고개를 숙이는 대신 고개를 하늘로 젖히라고 말합니다. 아래를 보지 않아도 실족케 하는 걸림돌이나 바위에 걸리지 않고, 웅덩이나 구멍에 빠지지 않습니다. [내 발이 그분의 발걸음을 붙들고 그분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으며](욥23:11). 이것이 믿음의 경주를 하는 이들의 변할 수 없는 철칙입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달리면 달릴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달리면 달릴 수록 힘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 힘’을 얻습니다. [그분께서 기진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힘이 없는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느니라. 심지어 소년들도 기진하고 피곤하며 청년이라도 완전히 쓰러지되 오직 [주]를 우러러 바라는 자들은 힘을 회복하리니 그들은 독수리같이 날개 치며 올라갈 것이요, 달려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며 걸어가도 기진하지 아니하리로다.] (사40:29~31). 달릴 때 주님을 바라보는 자들은 달려가도 피곤하지 않고, 걸어가도 기진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마치 축열판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햇빛을 받으면 받을수록 에너지가 충전되듯이, 성도들은 의의 태양이신 주님을 바라보면 볼수록 빛을 얻고,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달릴 때 우리 힘이 아니라 ‘위로부터 받은 힘, 위로부터 받은 지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각양 좋은 선물들을 받으면서’ 달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바라보며 달립니까? 많은 목회자들은 주님을 바라보며 달리다 교회가 커지는 것을 보고, 성도들의 머리 수를 보고, 다른 목회자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시선을 의식하다 간증을 잃어 버립니다. 성도들 역시 주님을 바라보는 대신 형제들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다 방향을 잃고 힘을 소진해 버립니다. 때로 아이들은 엉뚱한 곳을 보며 달리다가 머리나 몸이 부딪히고, 다리가 걸려 넘어지곤 합니다. 아주 익숙한 곳에서도 벽이나 문에 부딪힙니다. 그럼 부모들은 “어디를 보고 달리는 거야.”라며 주의를 주고, 호통을 칩니다. 우리가 걸려 넘어지고, 실족하고, 뒤로 미끄러지면 주님께서는 “어디를 보는거냐? 누구를 본 것이냐?” 책망하십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성경에서 주님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물 위를 걸어 본 사람입니다. 모세, 여호수아, 엘리야, 엘리사는 바다와 강을 갈랐지만 물 위를 걸어 보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분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시거든 내게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매 그분께서,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예수님께 가려고 물 위로 걸어가되 바람이 사나운 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가라앉기 시작하니라. 이에 그가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마14:28~30). 물 위를 걸어서 주님께 가던 베드로가 언제 가라 앉았습니까? “바람이 사나운 것을 보고...” 가라 앉았습니다. 주님만 보면서 걸으면 가라앉지 않습니다.

시편에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명령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시119:32)란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이 어떻게 넓어집니까? 사람들은 높은 산을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며 ‘호연지기’를 기른다고 합니다. 마음이 탁 트이고 넓어지는 그런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마음을 채우고, 넓힌다고 말합니다. 성도들은 먼저 믿음의 삶을 살다간 믿음의 증인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믿음을 축복하시고 인도하셨던 주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마음을 넓힙니다.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넓히시는 방법은 주님 자신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자유로운 행로를 얻게 하심으로써 입니다(살후3:1). 믿음으로 말씀을 듣고, 받을 때 말씀은 강력하게 자라나며, 권능 있게 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자.”(히12:2b).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은 단지 예수를 쳐다보라, 구경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눈을 통해서 왔듯이 구원 역시 눈을 통해서 옵니다. 이브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보았을 때 “먹음직도 하고, 눈으로 보기에도 좋으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서” 따서 먹었다고 말합니다(창3:6). 사람이 가진 대부분의 탐욕은 눈으로 볼 때 즉각 반응합니다. 우리 말에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있듯이, “안목의 정욕”은 끝이 없고, 탐심을 자극합니다. T.V를 켜면 계속해서 광고를 합니다. 뭔가를 보여 줌으로써 마음 속에 욕구를 자극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일은 광고판을 보는 것이나 영화나 게임을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죄인들의 마음을 찌르고, 양심을 찌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때 거기에는 못 박힌 예수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 위에 나의 죄악들이 있습니다. 죄악 된 나의 자아가 거기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 모습을 남김없이 볼 수 있습니다. 차마 들추어 낼 수 없는 죄악들, 깊이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일들이 모두 거기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어떻게 처리하시고, 나를 어떻게 처리하시는지 거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죄인들에게 엄청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부정하고,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의가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죽음을 보지만 동시에 부활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수치를 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잠깐 출애굽의 광야로 가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대적하여 불평하다 하나님이 보낸 불뱀에게 물려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모세가 주께 기도하자 주님은 그들을 물어 죽이는 불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아 백성들에게 쳐다 보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 하시니라.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21:8~9). 이것이 구원 방법입니다. 자신들을 물어 죽인 뱀을 쳐다보는 일은 기쁜 일이 아닙니다. 나의 죄를 생각나게 할 뿐 아니라 두렵습니다. 뱀은 징그럽고 흉물스럽습니다. 뱀을 보는 것은 기분 나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독수리나 사자가 아니라 하필이면 ‘놋 뱀’을 만들어서 “쳐다보라” 하신 것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뱀을 잡아 먹는 새를 만들어서 보게 하지 않으시고, 불뱀을 만들어 보게 하신 것입니까? 이 일은 신약에서 우리 주님이 친히 해석해 주심으로써 풀렸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3:14~15). 주님은 계속해서 자신이 들려야 한다(요8:28, 12:32)고 말씀하시면서 십자가의 죽음을 놋 뱀의 사건의 예로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주님께서 ‘놋 뱀’으로 예표된 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와 저주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물어 죽이는 죄가 되셨고(고후5:21), 우리를 심판하게 하는 저주가 되셨습니다(갈3:13). 그래서 누구든지 놋 뱀이 되신 주님, 우리의 죄와 저주가 되사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구원을 얻게 됩니다.

다시 2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2).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보기 위해서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맹인에게 바라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것은 불신이요,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은 미움입니다(요일2:11).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가운데 있고 어둠 가운데서 걸으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이라.](요일2:11). 주께서 발람의 눈을 열어 주의 천사를 보게 하시고(민22:32), 게하시의 눈을 여사 하늘의 군대를 보게 하셨듯이(왕하6:17)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보게 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은 [내 눈을 여사 나로 하여금 주의 법에서 나오는 놀라운 것들을 보게 하소서.](시119:18)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기도하기를, [너희의 지각(知覺)의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하며 그분의 강력한 권능의 활동을 통하여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지극히 큰 권능이 어떤 것인지 너희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8-19)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둘째, 보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 합니다. 어둠 속에 거하면서 무엇을 보기를 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빛이십니다. 말씀 역시 우리의 발에 등이요, 길에 빛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이미 밝은 빛이 있습니다. 마귀는 이 빛을 가리기 위해 베일을 칩니다.

셋째,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잠자는 자들은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너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시리라, 하시느니라.](엡5:14). 성도들은 지금 깨어 있어야 할 때입니다. 이 시대의 모든 교회는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파수꾼들입니다. 불의와 불법에 대해서 침묵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 자들, 죄악을 지적하고 책망하지 않는 목자들은 모두 짖지 못하는 개들에 불과합니다. 두려움이 있습니까?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의욕이 없습니까? 내 마음을 뜨겁게 해 줄 무엇을 찾는다면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지치고 힘이 드십니까?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를 바라보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며 답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단 한 가지, 단 한 분 예수님만을 제시해 주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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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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