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믿음의 창시자

말씀: 히브리서 12:2
요절: 히브리서 12:2


예수님이 누구신가?
예수님은 성경의 주인공이시며, 주제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누구이신가를 배웁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믿음의 창시자요, 믿음의 완성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산 구약 성도들의 예를 본으로 제시하고, 우리가 어떻게 우리 앞에 놓인 믿음의 경주를 할 것인가 말해 주면서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할 때 예수님은 처음이자 끝입니다. 시작이며 완성입니다. 복음은 주님으로 시작해서 주님으로 끝이 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것이 출발이라면 우리의 마지막은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예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육체의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고후5:8). 이것은 사도 바울이 확신에 차서 원하는 바였고, 우리 역시 동일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는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빌1:23). 사람들은 몸의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출발이 없었기 때문에 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이 태어난 날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통해 거듭난 한 날이 있습니다. 영적 출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창시자이십니다. 창시자라고 번역된 이 말은 author입니다. Author란 말은 저자, 작곡가, 주인, 소유권자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Authority(권세)란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시작이며, 주인이시고, 저자이시고, 소유권자이십니다. 자, 보십시오. 어떤 작가의 마음에 있는 영감이나 사상이 펜을 통해 글로 쓰이면 책이 됩니다. 악보로 그려지면 곡(曲)이 됩니다. 붓으로 그려지면 그림이 됩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작품이라고 합니다. 작품에는 모두 저자(작가)가 있습니다. 누가 만든 작품인가? 에 따라 가치가 달라집니다. 작품을 보면 작가의 정신 세계, 사상,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신격을 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흔히 자연 계시라고 말합니다. 하늘과 땅, 별과 해와 달, 바다와 숲과 나무와 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집을 보면서 집을 지은 이가 없다거나 작품을 보면서 작가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어떤 작품은 작가를 알지 못해서 “무명씨”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Unknown God)라고 말했습니다(행17:23).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주님을 Author(창시자)라고 표현한 곳이 세 번입니다. 고린도전서 14:33에 “화평의 창시자”, 히브리서 5:9의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 그리고 오늘 본문의 “믿음의 창시자”입니다. 창시자란 말은 단지 먼저 시작을 했다는 선구자의 의미가 아닙니다. 유일무이한 저자시며 소유권을 가진 주인이란 뜻입니다. 주님의 작품에는 누군가의 아이디어나 작품을 모방하거나 배우거나 약간이라도 도용한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누가 먼저 주께 가르치거나 제안하거나 예측한 이도 없습니다. 주님의 작품은 전적으로 홀로 주님께서 계획하시고, 창조하신 것들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작품의 저자이시며, 작가는 주님이십니다. [또, {주}여, 주께서 처음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들도 주의 손이 이루신 작품이니이다.](히1:10). 하나님은 사람들처럼 작품마다 표지에 이름을 새기는 대신 작품 속에 하나님의 권능과 신격(롬1:20)을 새겨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자신의 것이라고 감히 주장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진화론, 유물론 등의 철학을 이용해서 자연 속에 드러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신격을 부정함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반복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19-20세기의 모든 학교 교육이 그런 교육입니다. 거짓되이 일컫는 과학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교육을 통해 주의 손이 이루신 작품들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자들은 사실 모두 마귀 숭배자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마치 남의 작품에 이름을 지우거나 그 위에 자신의 이름을 대신 쓰는 것과 같은 짓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작품들을 도둑질하는 도둑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자연 만물 외에 또 다른 작품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열어 보이셨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거듭난 성도,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엡2:10a). 모든 성도들이 다 주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창조되었습니다. 우리 속에 새 사람을 창조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란 각 작품 속에 자신의 형상을 새겨 놓으셨습니다. 성령으로 인을 치셔서 우리를 자신의 소유임을 선포하셨습니다(고후1:22, 엡1:13, 엡4:30). 사람들의 작품을 예술이라고 하지만 그것들은 호흡이 없습니다. 인공 지능 로봇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돌과 나무로 새겨 만든 여느 우상들과 마찬가지로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작품은 모두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믿음의 창시자이십니다. 주님은 작가로서, 저자로서 친히 말과 글을 사용해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친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계1:8,11, 21:6,22: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글자이십니다. 주님은 말씀이십니다(요1:1, 요일1:1). 주님은 말씀을 사용하셔서 모든 것을 지으셨고,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이 있어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느니라, 하였으니 곧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10:8). “믿음의 말씀”이란 믿음을 주는 말씀, 믿음이 생기게 하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 속에 믿음을 나게 합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써 납니다. [그런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느니라.](롬10:17). 말씀을 듣지 않고는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믿음은 형성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신념이나 가치관은 믿음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철학이나 사상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는 것이지 다른 무엇에서는 결코 날 수 없습니다. 정신 수련이나 수양, 고행이나 금욕, 자선이나 선행, 철학이나 종교를 통해 믿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씨를 뿌리듯이 뿌리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작가가 펜으로 글을 쓰듯이 우리 마음 판에 기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작품’이라고 말씀하십니다(엡2:10). 우리는 그분이 지으신 작품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는 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자신의 아들의 형상으로 빚어 나가고 계십니다(롬8:29). 마침내 우리를 그분의 형상과 완전히 일치시킬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완성입니다. 우리를 낳으신 주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그분의 형상과 일치케 하는 것이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란 성경적 의미입니다. 자, 빌립보서 1:6을 보십시오.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 바로 그것을 내가 확신하노라.](빌1:6). 주님은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믿음의 말씀을 뿌리시고, 우리 안에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일을 마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요19:30)고 외치셨는데 그 일이 우리에게는 시작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은 “다 이루어 졌도다”(계21:6)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의 완성자로서 외치시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창시자(author)로써 우리 안에 말씀을 거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마음 판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우리의 마음에 쓰여 있는 우리의 서신으로 모든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난 그리스도의 서신이니 이것은 잉크로 쓴 것이 아니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육체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고후3:2-3).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서신입니다. 영이요, 생명인 말씀(요6:63)이 우리 마음 판에 쓰여진 것입니다. 불신자들, 세상은 성경을 보지 않아도 성도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서신’을 알고 읽을 수 있습니다. 자연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과 신격을 접하지 못한 이들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요, 신격이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성도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선포되고, 알려집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어 마치 등잔대 위의 빛과 같이 우리를 빛으로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고 있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쓰인 말씀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읽게 해 줄 수 없다면 우리는 봉해진 편지에 불과합니다. 주님은 성경을 기록하셨고, 이제 우리 마음 판에 기록하셨습니다. 성도들은 부지런히 매일 성경을 읽고, 세상은 부지런히 성도들을 보고 읽습니다. 성도들은 모두 제 2의 Bible입니다.

주님께서 믿음의 창시자라고 하신 것은 우리 속에 말씀을 통해 믿음의 영을 주시고, 믿음을 나누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3,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냉철하게 생각하라.](롬12:3b)란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나누어 주십니다. 믿음은 성령의 은사이며, 동시에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도들이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하면서 예수를 바라보는 것은 예수님이 믿음의 창시자요, 믿음의 완성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처음이요, 끝입니다. 예수님은 시작이며 또한 마침입니다. 성도들이라면 다 믿음을 크고 강하게 하려는 소원이 있습니다. “믿음을 크게 해 주옵소서”란 기도는 사도들만의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날마다 간절히 바라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믿음의 은사, 믿음의 열매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시련을 통해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때로는 환란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나 핵심은 역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저자로서 우리 마음에 말씀을 담아 주십니다. 우리는 그 말씀 안에 꾸준히 거해야 하고(요8:32b), 풍부히 거하게 해야 하며(골3:16),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잠언 3:3, [긍휼과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들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기록하라.](잠3:3). 마음 판에 말씀을 기록하는 일은 암송과 묵상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리고 실제 삶의 현장에서 체험을 해 보면 더욱 깊이 각인됩니다. 어떤 지식도 실제 체험을 능가하지 못합니다. 반복을 통해서 마음에 새겨진 모든 진리는 순종을 통해서 ‘믿음의 결과’를 맛 볼 때 마음 판에 생생하게 기록되고, 증인으로서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성경 필사(筆寫)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성경을 모두 베껴 써 보는 것입니다. 노트에 쓰는 일은 읽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말씀을 노트에 기록하는 것도 좋은 일지만 더욱 중요한 일은 자신의 마음 판에 기록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마음에 기록됩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해 보십시오. 마음 판에 그 기록들이 선명하게 됩니다. [그것들을 네 손가락에 묶으며 네 마음판에 기록하라.](잠7:3). 말씀이 마음에 기록되면 입으로 나옵니다. 그것이 증언이며, 전도입니다. 마음에 기록된 말씀이 있을 때 양심은 선하고 순수하게 됩니다. 그것이 순결한 삶의 기초입니다. 마음에 말씀이 기록되면 세상의 학문, 철학, 종교가 내 마음 속에 파고들지 못합니다. 이것이 성별입니다. 마음 판에 말씀이 기록되면 건전한 생각, 건전한 말, 건전한 생활이 가능해 집니다. 이것을 우리는 승리라고 부릅니다. 영적 생활이란 곧 마음에 있는 말씀을 근거로 생각하고 사는 삶입니다.

주님은 일찍이 자신의 말씀을 돌 판에 기록하셔서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또 책에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마음에 기록하지 않는 이상 변화도 열매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시고, 마음 판에 기록할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그 날들 이후에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 /중심/부에 두고 그들의 마음 속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31:33). 이 말씀은 성전 중심 신앙을 가지고 살던 유대인들에게 충격적이고 혁명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 중심부에 두고 그들의 마음 속에 기록하여”란 말씀은 신약 성도들에게는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적 유대인들이 결코 받아 누리지 못한 영적인 복들을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늘 말씀 속에 거하십시오. 믿음의 창시자인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 속에 믿음을 주시고, 믿음의 보상, 믿음의 결과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 연약한 믿음, 작은 믿음의 소유자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완성자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모두 거룩하고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시작하신 일은 반드시 끝맺음을 하시고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이 시간 믿음의 생활이란 무엇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고자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믿음’을 매우 추상적으로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 데나 믿음이란 말을 끌어 붙여 버립니다. 믿음이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현재적입니다.

첫째, 믿음의 삶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입니다. 무엇을 신뢰하는가? 누구를 신뢰하는가? 그것이 믿음의 영역입니다. 돈일 수도 있고 재능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일 수도 있고 조직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운(運)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행을 바라는 이는 요행을 신뢰한 것입니다. 확실성의 강도에서 차이가 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모두 신뢰의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신뢰하는가?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주를 신뢰하고 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지어다. 네 모든 길에서 그분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네 행로들을 지도하시리라.](잠3:5-6).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은 여러 번 해 본 일이요,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자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모든 재료가 다 있고, 자본이 충분하고, 일꾼들이 다 있어도 그 일의 성사 여부와 승패 여부는 주님께 있다고 생각하고 주님을 신뢰합니다. 자신이 어떤 분야에 전문 지식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명철을 신뢰하지 않고 주를 신뢰하십시오. 오늘 내가 하는 모든 일에서 그렇게 하십시오.

둘째, 믿음의 삶이란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교제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도다...](요8:29a). 주님은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단 한 순간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15:5). 우리는 주님과의 끊임없는 영적 교제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셋째, 믿음의 삶이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삶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말씀에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믿음은 순종을 통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은 순종을 통해서 증거가 되고, 사람들에게 보여 집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행위의 열매를 통해서 믿음은 실체를 갖게 되고, 보여 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이란 순종하며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 때 모든 사람이 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성도들이 서로 싸우고 다투고, 교회가 서로 분열을 일삼을 때 그 누구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보지 않습니다. 저는 크리스천들이 집에서 부부싸움을 하고 서로 반목하고 결국 이혼하는 것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가정 법원의 통계를 보면 이혼하는 부부의 70%가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목사를 주례로 세우고 결혼을 서약한 이들이 세상에서 판사를 앞세워 이혼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많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 한 가지입니다. 이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마음 속에 부어지게 하십시오(롬5:5).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큰 사랑을 믿고 체험하십시오. 믿음의 삶은 순종의 삶입니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넷째, 믿음의 삶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다가올 세상을 확신하며 사는 삶입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걷지 않는 것입니다(고후5:7). 믿음으로 알고 확신한 일은 실험이나 관찰이나 감각적 경험이나 세상교육을 통해서 배우고 안 어떤 지식보다 더 선명하고 확실합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존재케 하신 분이시며, 모든 것들의 진정한 근원이요 실체가 되시는 분이시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주님이 더욱 선명한 존재로 인식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의 감각과 지식으로 들어오는 어떤 실체도 믿음을 통해 내 마음 속에 들어오는 어떤 실체보다 더 깊이 와 닿을 수 없습니다. 만약 나의 이성과 감각을 통해 들어온 어떤 지식이 영적 지식보다 더 선명하고, 세상의 어떤 피조물이 창조주보다 더 선명하게 인식된다면 엄밀히 말해 우리는 불신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영으로 마음 판에 기록된 진리가 잉크로 종이에 기록된 정보나 지식보다 약하거나 희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언컨대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현재 보이는 이 세계보다 더 현실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할 때 믿음은 점점 자라고 강해지며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란 증거를 얻게 됩니다. 다른 어떤 원리나 비결이 없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믿음의 저자이신 주님의 작품인 성도들은 “어둠 속에서 빛을 내고, 무미건조한 세상에서 맛을 내며, 탁한 곳에서 향기를 뿜으며, 얼어붙은 곳에서 열”을 냅니다. 복음이 전파되어 그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받아들여지면 그 사람이 변화되고, 그 가정이 변화되고, 그 마을이 변화됩니다. 미신이 타파되고 인습과 전통들이 폐지됩니다. 점집이나 무당들이 생업을 잃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현재 이 땅은 교회가 많고 성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빛을 잃어가고, 열기는 식어지고, 맛과 향기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대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보는 대신 사람들을 바라보고, 학자들을 바라보고, 학교를 바라보고, 돈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영적인 빛과 힘을 받아서 그 힘으로 이 세상을 이겨야 할 성도들이 세상이 만든 인공조명 빛(light)으로 밤을 밝히려 합니다. 전력을 이용해서 세상은 화려한 조명등을 만들어 온 도시를 밝히고, 온 집을 밝히는 시대를 열었듯이 성도들은 예수님을 보는 대신 과학과 철학이 주는 이성의 빛을 더욱 신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자들은 위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두고 땅에 있는 것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위에 있는 것들에 애착(愛着)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지니](골3:2). 우리 주님은 위에 계십니다. 경주자들은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고 뒤에 있는 것들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형제들아, 나는 이미 도달한 것처럼 여기지 아니하고 다만 이 한 가지 일을 행하나니 곧 뒤에 있는 그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밀치며 나아가노라.](빌3:13-14). 주님 앞에 고백하고 회개한 죄들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과거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회개하지 말라, 자신을 성찰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달리면 나를 얽어매던 과거의 죄, 현재의 습관들이 벗겨지고 고쳐진다는 것입니다. 상처가 났을 때는 상처를 보지 말고 예수를 보십시오. 열심히 달리는데 누가 나를 걸고넘어뜨립니까? 원수를 보지 말고 예수를 바라 보십시오. 예수님을 바라 볼 때 경주자들이 갖는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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