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기쁨으로 인해

말씀: 히브리서 12:2 
요절: 히브리서 12:2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달리셨는가? 어떻게 십자가를 지셨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님은 친히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기쁨으로 인해” 지셨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 말씀하실 수 있으신 것도 이런 모범을 보이신 까닭입니다. 십자가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그 수치와 멸시, 모욕의 형틀입니다. 벌거벗겨진 채 높이 나무에 매달려야 합니다. 양 손과 양 발에는 큰 못이 박힙니다. 영웅적 희생이나 죽음이 아니라 만인의 모욕을 받으며 수치 가운데 죽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기록된 말씀의 성취며,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서를 읽어 보면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큰 수치를 당하셨는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로 주님을 모욕했습니다. 어떤 이는 그 얼굴에 침을 뱉었고, 어떤 이는 수염을 뽑았습니다. 어떤 이는 뺨을 때렸고, 어떤 이는 옷을 벗겼고, 어떤 이는 가시로 관을 엮어서 머리 위에 씌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십자가를 견디시고 수치를 멸시하셨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승리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주님이 초인적인 정신력, 불굴의 의지, 몸의 감각이나 신경 계통을 마비시키는 약물 복용 등을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부동심’을 유지했다거나 어떤 경지에 다다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멸시하셨던 것은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서입니다. 앞에 놓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십자가로 인해 겪는 육체의 고통과 수치를 다 멸시할 수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이들이 바라보아야 할 것은 ‘그 앞에 놓인 기쁨’입니다. ‘그 앞에 놓인 영광’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고 외쳤습니다. 현재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비교해 볼 때 그러하다는 것입니다(롬8:18).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 우리는 이런 기쁨, 즐거움이 있을 때 주님의 종으로서, 제자로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주의 기쁨]이 있을 때 험한 세상을 이길 수 있고, 환란까지도 기뻐하며 감당할 수 있습니다(롬5:3). 마음에 기쁨이 있다는 것은 ‘환경이 개선되었다, 내 앞이나 주변에 있던 어려움이 모두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어야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최악의 상황이요, 가장 수치스럽고 모욕적이고 견디기 힘든 상황’입니다.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은 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마26:39a)라고 할 정도로 견디기 어렵고 힘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십자가를 견디셨습니다. 수치를 멸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기꺼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감당하신 것은 강한 정신력, 불굴의 용기와 같은 성품으로 이를 악물로 참아 낸 것이 아니라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기쁨을 주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받을 모욕과 박해를 감당할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 속에 기쁨을 넘치게 하심으로 인해 복음으로 인해, 의로 인해 당할 모든 환란을 다 이길 수 있게 하십니다. 문제는 우리 속에 기쁨이 있는가? 란 문제입니다. 주님은 “항상 기뻐하라”(살전5:18)고 명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긍정적 사고 방식, 낙천적 마음,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자기 암시를 걸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주의 기쁨’, ‘주의 즐거움’을 받아서 소유하라는 것입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갈5:22). 항상 기뻐하려면 항상 주의 기쁨이 내 안에 넘쳐야 합니다. 항상 즐거워하려면 항상 주의 즐거움이 내게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기쁨으로 기뻐하고, 즐거움으로 즐거워하며, 주님이 주신 평강으로 평안을 누리고, 주님이 주신 은혜로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우리 속에 부어지고, 주어지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라”(살전5:18)는 명령은 곧 우리 속에 주의 기쁨이 항상 넘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기쁨의 근원되신 주님, 기쁨의 근거가 되는 말씀, 성령의 기쁨이 솟아나는 샘처럼, 흐르는 강처럼 우리 속에 있다면 ‘항상 기뻐하라’는 주의 말씀은 명령이나 무거운 짐이 아니라 단지 ‘반응’에 불과한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 평강은 성도들이 저 하늘에서만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주님은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에 익숙한 사람”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질 때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셨습니다. 기쁨은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입니다. 기쁨은 수치를 멸시할 수 있는 힘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의 기쁨”입니다. 성도들은 믿음의 사람들이며, 동시에 평강과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이성을 초월하지만 지극히 이성적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지각을 열어 주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적 믿음은 분명히 초자연적인 것이지만 조금도 이성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우리 말로 지각, 명철, 깨달음으로 번역된 단어가 모두 Understanding입니다. 믿음이라고 해서 막무가내로 “믿습니다.”를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차분히 읽고, 듣고, 공부함으로 말씀이 주는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깨달음으로 믿음이 자랍니다. 또한 믿음은 감정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때로 교리 공부에 집착하고 치우친 형제들 가운데 “신앙은 감정이 아니다”고 외칩니다. 신앙은 감정이 아니지만 믿음을 가질 때 우리 마음 속에는 “평강, 기쁨, 즐거움” 등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고, 넘치게 됩니다. 성도는 결코 메마른 감성의 소유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을 때, 성령으로 충만할 때,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 우리 마음은 놀라운 기쁨이 찾아오고, 경이로움과 은혜가 샘처럼 솟아나고 강물처럼 흐르게 됩니다. 정상적인 믿음을 지닌 성도들이라면 죄인들을 향한 연민과 동정심, 형제들을 향한 사랑, 진리에 대한 열정. 하나님을 향한 질투가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합니다.

믿음을 가질 때 우리의 이성은 성경대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질 때 사람의 감정은 풍부하게 되어 성경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게 되고, 주님이 느끼신대로 느끼게 됩니다. 감정과 이성은 아무 상관이 없는 별개의 요소인 것 같지만 실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은 회개치 않는 예루살렘을 보시며 울었습니다(요11:30). 이는 단순한 마음의 슬픔이 아니라 이들이 받게 될 재앙, 저주, 고난 등을 모두 보셨기 때문에 느끼는 슬픔이었습니다. 감정은 지식과 믿음에 근거해서 반응합니다. 바른 영적 지식과 믿음이 없으면 올바른 감정이 표출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웃어야 할 때 웃지 못하고,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로 마음이 어두워 져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받게 될 저주와 형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때 영의 무거움과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느낍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뻐합니다. 약하면 약할수록 기뻐하고, 연약함을 자랑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감정적 반응이 다릅니다. 이는 판단의 기준, 가치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모욕과 수치를 받을 때 기뻐하는 것은 그 뒤에 있게 될 보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인하여 수치 당하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진 것을 기뻐하며”(행5:41) 공회 앞을 떠났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힌 채 기도하고 찬양을 불렀습니다. 고난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의미를 알고, 고난이 주는 유익을 알고, 고난 뒤에 자신들에게 주어질 보상을 알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그 수치와 모욕을 멸시하셨던 것은 자신 앞에 있는 기쁨, 부활의 영광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제일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mind control을 배우고, 스스로 자신을 세뇌시키는 학습을 합니다. 환경을 바꾸기도 하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조절하기도 합니다. 운동을 하기도 하고, 취미 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감정을 절제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약물을 복용하기도 하고, 상담이나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감정 자체를 바라보고, 붙들고, 씨름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다양한 조언과 충고를 하지만 성경은 ‘넘치는 기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런 기쁨’을 받으라고 합니다. 우리는 의사가 주는 처방이나 진단이나 약을 받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자기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이들은 십자가를 보지 말고 그 앞에 있는 부활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땅을 걷는 순례자들은 저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감정을 다스리는 성경적 해결책입니다. 대언자 하박국을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올리브나무에 수고의 /열매/가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서 양떼가 끊어지고 외양간에 소떼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주]를 기뻐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리로다.] (합3:17~18). 누가 이런 상황에서 기뻐하겠습니까? 어떻게 기뻐합니까? 경제적으로 보자면 파산 직전이거나 부도가 난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깊은 슬픔에 잠기지 않았고, 우울증에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기쁨에 차 있습니다. 그의 마음의 감정을 주관하는 것은 들의 소출이나 양떼와 소떼가 아니라 ‘주님, 구원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근원이 나의 재산, 나의 힘, 나의 외모, 나의 가족이 아니라 ‘주님’이라면 우리는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슬픔의 사람이요, 고난에 익숙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3년 반 동안 지상에서의 공생애 사역 기간 동안 “웃으셨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주님께서 슬퍼하시고, 통분하시고, 우셨다는 기록은 자주 볼 수 있지만 어떤 사건의 결과에 웃으신 적은 없습니다. 웃지 않았다고 해서 ‘기쁨이 전혀 없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웃음과 기쁨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웃음은 기쁨의 한 가지 현상이요, 다양한 표현 방식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웃는다고 해서 그 마음 속에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개그맨들이나 코미디언들이 우스꽝스런 말과 동작을 하거나 이상한 표정을 지을 때 웃습니다. 연예인들이 세상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크게 웃기도 하고, 쓴 웃음을 짓기도 합니다. 그렇게 웃을 때 내 안에 기쁨이 차고 넘쳤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웃음이 기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내적이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습니다. 쾌락을 기쁨으로 오해해서 열심히 쾌락을 찾고, 오락을 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음주, 가무, 흡연, 도박, 스포츠, 영화, 연극 등에서 기쁨을 찾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시적 쾌락만 있을 뿐 기쁨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의 쾌락들’(히11:25)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나마 이런 것이라도 있기에 살지 이런 것마저도 없다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쾌락, 오락, 향락은 진정한 즐거움도 기쁨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며 즐기던 재미라는 것은 결국 허무함으로 끝이 납니다.

무슨 일을 해서 보람을 얻고, 성취감을 누리며 거기서 ‘기쁨’을 얻는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한 일들을 바라보면서 은근히 자랑하는 이들은 ‘성취감’을 기쁨으로 여깁니다. 뭔가 자랑거리로 삼는 것이 기쁨의 대상이 됩니다. 사람들이 자랑거리로 삼을 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이는 가문을 자랑하고, 자기 머리를 자랑하고, 자기 인물을 자랑하고, 돈 번 것을 자랑하고, 자기 자식을 자랑합니다. 성도들은 자기 교회가 크다, 좋다고 자랑합니다. 자기 믿음이 좋다고 자랑하고 성경 읽고 새벽 기도를 나간다고 자랑합니다. 어떤 이는 40일 금식 기도한 것을 자랑합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나 한 가지라도 자랑 거리가 없으면 인생 살 맛이 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지혜로운 자는 자기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용사는 자기 힘을 자랑하지 말며 부자는 자기 재물을 자랑하지 말라.](렘9:23). 인생의 자랑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과 더불어 3대 악(惡)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자랑함으로써 얻는 기쁨은 참된 기쁨이 아닙니다. [이제 너희가 스스로 자랑하는 것을 기뻐하니 이러한 기쁨은 다 악한 것이니라.](약4:16). 그렇다면 우리는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알고, 그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기쁨과 즐거움을 우리 속에 두시고, 기쁨에 넘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속에 “넘치는 기쁨, 영광스런 기쁨, 말할 수 없는 기쁨, 충만한 기쁨”을 두시고, 그 기쁨으로 인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은 결코 고행의 삶이 아닙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고 해서 그것이 고통스럽고 힘든 삶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참된 제자의 삶은 넘치는 기쁨, 충만한 기쁨의 삶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의 수치를 멸시하셨듯이, 성도들은 누구나 주님의 기쁨으로 인해 세상의 정욕을 거부하고, 세상이 주는 오락이나 쾌락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천연 야생의 벌꿀을 맛본 이들은 설탕물로 범벅이 된 ‘꿀’을 맛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영적 기쁨, 주의 즐거움을 경험한 이들은 세상이 주는 쾌락을 기쁨으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돈을 주시는 대신 평강을 주시고, 기쁨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 날 제자들을 향해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14:27)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또 자신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우리 속에는 주님의 평강, 주님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 이 세상의 어떤 일로 인해 불안이나 근심, 염려,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고난이 닥쳐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혼동이나 혼란에 빠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속에 자신의 기쁨을 주심으로 우리로 기뻐하게 하시는 것은 주의 일을 하고,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기쁨을 주는 책입니다. 성령은 기쁨의 영입니다.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기름진 것으로 넘치도록 만족할 것이요, 주께서 주의 기쁨의 강물을 그들에게 마시게 하시리이다.](시36:8). 성령은 기쁨의 강물입니다. 성령 충만은 “기쁨 충만”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이런 기쁨이 있습니까? 베드로는 성도들을 향해, [너희가 그분(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지금도 너희가 그분을 보지 못하나 믿으며 이루 말할 수 없고 영광이 가득한 기쁨으로 기뻐하니](벧전1:8). *이루 말할 수 없고 영광이 가득한 기쁨. 이것은 세상에서 결코 찾을 수 없고, 얻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기뻐하라. 이것은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때에 너희 또한 넘치는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4:13). *넘치는 기쁨.

우리는 왜 기뻐하는가? 기쁨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1. 주를 기뻐하라.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연예인들이 아닙니다. 스포츠나 스크린을 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 보십시오.

2. 주의 구원. 구원의 기쁨.

3. 성령의 기쁨.

4. 말씀의 기쁨.
성경을 통해 기쁨을 얻을 수 없다면 우리는 모두 우울증이 걸리거나 매일 자살 충동에 빠지거나 비천함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먹는 책입니다. 주님은 “이 책을 먹으라.”고 합니다. [오 [주] 만군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말씀들을 발견하고 먹으매 주의 말씀이 내게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사오니 이는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기 때문이니이다.](렘15:16). 다윗은 말하기를, [내가 주의 증거들을 영원한 유산으로 삼았사오니 그 까닭은 그것들이 내 마음의 기쁨이기 때문이니이다.](시119:111), [근심과 고통이 나를 붙잡았사오나 주의 명령들은 나의 기쁨이니이다.](시119:143). [오 [주]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법이 내 기쁨이니이다.](시119:174).

우리에게 큰 기쁨은 언제 임합니까?

1. 회개할 때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상 예루살렘에 가장 큰 기쁨이 있었을 때는 언제나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이켰을 때입니다. 백성들이 말씀을 따라 주께로 돌이켰을 때 주님은 큰 기쁨을 주셨고 백성들은 많은 수확을 얻었을 때나 전쟁을 이겼을 때보다 더 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예루살렘에 큰 기쁨이 있었으니 이는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때로부터 이러한 기쁨이 예루살렘에 없었음이더라.](대하30:26). 이는 히스기야 때 온 백성이 주의 율법에 따라 명절을 지키고, 자신들을 정결케 하고 죄의 용서를 구했을 때 있었던 부흥의 결과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 때 예루살렘에는 역사상 가장 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자들의 온 회중이 초막을 짓고 그 밑에 앉았으니 이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 시대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적이 없었음이라. 거기에 큰 기쁨이 있었더라.](느8:17).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들이 장막절을 지키면서 누린 기쁨입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생활은 궁핍했지만 자신들을 정결케 하고, 말씀을 따라 살았을 때 ‘큰 기쁨’이 임했습니다. 주님은 말씀에 따라 자신을 돌이킬 때 큰 기쁨을 주십니다. 한 명의 탕자가 회개하면 아버지가 기뻐하고, 땅에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 천사들에게 큰 기쁨이 주어집니다.

2. 부활을 선포하고 믿을 때입니다.
[그들이 두려움과 큰 기쁨으로 서둘러 돌무덤을 떠나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을 전해 주려고 달려가더라.]
(마28:8). 부활의 소식은 누구에게나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천사들은 예수님이 탄생하는 날 목동들에게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지만 부활은 주님의 탄생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3. 복음이 선포될 때입니다.
사마리아에 임한 큰 기쁨을 보십시오. 빌립이 사마리아에 들어가 그리스도를 선포했습니다. 사마리아는 빌립의 복음 선포로 인해 마귀들이 떠나고 병든 자들이 고침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에 기쁨이 임했습니다. [그 도시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8:8).

4. 영적 교제를 통해서입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인하여 상쾌하게 되었으므로 우리도 네 사랑 안에서 큰 기쁨과 안위를 얻었노라.](몬1:7). 형제들의 건전한 영적 교제, 믿음의 교제, 말씀과 은혜를 나누는 일 등은 ‘큰 기쁨과 안위’를 얻게 합니다. 빛 가운데 교제할 때 성도들 상호 간에 얻게 될 기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5.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자라날 때입니다.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걷는다 함을 듣는 것보다 내게 더 큰 기쁨이 없도다.](요삼1:4).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자라난다는 소식, 교회가 든든히 세움을 입는다는 소식, 미 전도 지역에 말씀이 들어갔다는 소식 등은 ‘큰 기쁨’을 줍니다.

성도들은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 source가 매우 많습니다.
기쁨을 누리십시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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