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경주자의 눈

말씀: 히브리서 12:2
요절: 히브리서 12:2


사람들은 저마다 싫든 좋든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나름대로 자신의 길을 정해서 달립니다. 어릴 때부터 인생의 경주장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각종 교육을 받고, 기술을 배우고, 힘을 기릅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남보다 한 발이라도 앞서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늘도 아이들을 부지런히 교육하고 훈련합니다. 자신의 몸 값을 높이기 위해서 스스로 더 공부합니다. 외국어를 배우거나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기도 하고, 따로 시간을 내서 자신만의 무엇을 갖추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 시대는 경쟁의 시대입니다. 남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기술이든 학력이든 돈이든 체력이든 간에 사람들은 경쟁력을 키우는데 주력합니다. 각 나라는 주로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합니다. 지식의 격차가 곧 삶의 격차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각 가정은 자녀 교육에 거의 모든 것을 투자합니다. 비교 우위에 서기 위해서입니다. 이 시대는 속도의 시대입니다. 한 발 앞서지 못하면 그만큼 뒤집니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먼저 개발해 버리고, 먼저 생산해 버리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 회사들은 좀 더 빠르게 생산하도록 독려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신기술, 신제품이 쏟아집니다. 현 시대는 정보의 시대입니다. 정보가 곧 국력이고 정보가 곧 힘입니다. 새로운 정보, 고급 정보, 유익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사람들은 저마다 열심히 달립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승리를 위해, 성공을 위해, 행복을 얻기 위해 전력 질주합니다. 옆 눈 팔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는 분들의 말을 들어 보면 내가 왜 이렇게 밖에 달리지 못했는가? 부끄럽기조차 합니다. 그런데 정작 존경을 받고 성공한 삶을 살았다는 이들이 “나는 헛살았다, 잘 못 살았다”며 부끄러워하고 아쉬워하고 후회하며 허무해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달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 앞에 준 경주가 아닌 엉뚱한 경주를 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달리다가 보니 방향이 틀렸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안 순간 그 허무함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자신이 잘못 살거나 헛되이 살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분명히 자기 눈에는 옳고, 바르고, 깨끗하고, 지혜롭고, 빠르고,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 길로 간 것입니다. 때로 판단이 서지 않아서 남들이 다 가는 길을 갈 수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각자 자신이 선택해서 달린 길의 종착역에 서 있는 것은 남이 아니라 자신이란 점입니다.

다시 믿음의 경주장으로 와 보십시오. 경기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입니다. 코치들은 선수를 지도할 때 늘 “끝까지 보라, 제대로 보라. 정확하게 보라”고 강조합니다. 축구든 농구든 배구든 끝까지 보고, 바르게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어느 종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격, 양궁과 같은 종목은 물론이고 육상 경기 역시 눈은 매우 중요합니다.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으면 경기 자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코치의 싸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목표 지점을 정확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 선수의 움직임도 정확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속임수인지 예비 동작인지 한 눈에 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면서 달려야 합니다.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와 버리는 순간 안개 속이나 어둠 속을 달리듯이 방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넘어지거나 미끄러지게 됩니다. 예수를 바라 볼 수 있는 눈은 복된 눈입니다. 예수만 바라보고 달렸다면 그는 승리자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만 보고 달리는 이를 막을 수 없고, 속일 수 없습니다.

세상을 무대로 각자 달리는 인생의 경기장에는 게임의 규칙이 없습니다. 반칙과 속임수가 난무합니다. 불법과 불의가 대세를 이룹니다. 겉으로는 신용 사회 확립이라고 하지만 속은 불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들은 어떻게 달려야 합니까? 우리는 경쟁의 시대에 살지만 세상과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않습니다. 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속도의 시대에 살지만 ‘좀 더 빠르게’가 아니라 ‘좀 더 바르게’에 초점을 맞춥니다. 빠른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바른 것, 옳은 것’에 가치를 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보의 시대에 살지만 새로운 정보에 민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세상의 결론을 알고, 나의 미래를 알며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있는 것이 이제까지 있어 왔으며 앞으로 있을 것도 이미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나간 것을 요구하시느니라.](전3:15). 성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옛 길”을 찾고 이전부터 우리에게 전해 준 것들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 길로 가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 성경 말씀을 배우고 공부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 경쟁해서 더 빠르게 승진하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자랑할 것이 많은 삶을 사는데 도움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잘못된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열심히 달리는 길은 주님이 주신 길이 아닙니다. 많은 성도들이 주일에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지만 설교에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졸기도 하고, 따분해 하기도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이 전혀 다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망해가는 사업의 재기를 꿈꾸며 절박한 마음으로 교회에 왔는데 아벨의 믿음이 큰 도움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운영하는 사업체의 번성을 기원하는 성도가 세상을 버린 모세의 믿음에 관한 설교가 깊은 교훈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망의 불꽃에 기름을 부어 주기를 원하지만 성경은 주로 그들의 내적 욕망의 불꽃을 꺼 버리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성경은 좀처럼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해 주지 않습니다. 대신 내게 필요한 것들을 말해 줍니다. 주님은 우리가 잘못된 길에 들어섰을 때 더욱 열심히 달리라고 힘을 주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길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발람의 길’이라고 말씀해 주셔도 자신은 돈을많이 벌어서 더 많이 헌금하고 구제할 것이라고 합리화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사람의 길이 자기 눈에는 모두 옳게 보여도 [주]는 마음을 살피시느니라.] (잠21:2). 사람들은 자신의 악한 동기와 욕망을 숨기고 가리는데는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마음을 살피시며, 다 아십니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말 가운데 “내가 보기에는 이렇다. 내가 볼 때에는....”이라고 합니다. 누구에게 의견이나 조언을 구할 때 우리는 “당신이 보기에는 어떻습니까?”라고 합니다. 견해(見解), 관점(觀點)이 무엇입니까? ‘자기 눈을 기준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 옳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만물의 기준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없고, 주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들도 자기 눈으로 볼 때 자기 길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자의 길은 제 눈에 옳으나 권고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지혜로운 자니라.](잠12:15). 옆에 있는 사람이 보아도 ‘아니다 싶은 길’이어서 충고를 해 주면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의 권고를 듣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의 권고에도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마음에 맞지 않는 말들은 모두 ‘목사의 개인적 견해’로 치부해 버리고 맙니다. 자신의 눈에는 자기 길이 절대적으로 옳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의 판단들(judgements)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조차도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책망(責望)하지 아니하며](사11:3b) 오직 주의 말씀을 따라 판단하셨습니다.

성경은 자기를 신뢰하는 자들, 자기 육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의 길은 자기 눈에 옳습니다. 사람들의 길은 자기 눈에는 깨끗합니다. [사람의 모든 길이 자기 눈에는 깨끗하여도 [주]는 영(靈)들을 깊이 살피시느니라.](잠16:2). 그러나 우리 눈이 얼마나 약점이 많습니까? 보지 못하는 것, 볼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착시 현상이 있어서 비뚠 것이 바르게 보일 때도 있고, 바른 것도 굽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뭔가 앞을 가리면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빛이 없으면 더러운 것도 깨끗하게 보입니다. 때가 잔뜩 묻은 옷도 희미한 가로등 밑에서 볼 때와 대낮의 햇 볕 아래서 볼 때는 완전히 다릅니다. 빛이 없으면 더러움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성령의 조명, 말씀의 등이 없으면 그 누가 자신의 죄악 됨, 누더기 같이 더러운 본성을 알 수 있겠습니까? [자기 눈에는 순결하여도 여전히 자기의 더러움에서 씻겨지지 않은 세대가 있느니라.](잠30:12). 죄인들은 자신의 더러움을 더러움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 눈에는 자신이 깨끗하고 순결하기 때문에 씻음을 받지 못합니다. 누가 자신의 더러움, 불의, 사악함 등에 대해서 말하면 도리어 화를 내고, 분노합니다.

두 구절을 보겠습니다. 이사야 5:21, 잠언3:7, [자기 눈에 지혜로운 자들과 자기가 보기에 분별 있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사5:21). [네 눈에 지혜롭게 되지 말지어다. [주]를 두려워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잠3:7). 우리 눈에 지혜로운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보십시오. 우리의 눈은 빛과 어둠, 선과 악,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정확히 볼 수 있는 눈이 아닙니다. 사람은 눈을 통해 죄가 들어 왔습니다. 눈을 통해 탐욕이 들어왔습니다. [여자가 본즉 그 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눈으로 보기에도 좋으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자기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으니라.](창3:6). 눈으로 보기에 좋고, 지혜롭게 탐스러웠지만 그 결과는 죽음이요, 저주였습니다. 안목의 정욕(요일2:16)은 어떤 것보다 크고 강합니다. 아브라함과 순례의 길을 걷던 롯은 소돔을 바라 보았고, 그 쪽을 향해 장막을 쳤습니다. 죄악의 도시였지만 롯의 눈에는 소돔이 주의 동산같고 이집트 같이 좋아 보였습니다(창13:12). 출애굽의 2세대로 요단강을 건넜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던 믿음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였던 아간을 보십시오. 그는 주의 저주받은 물건들을 “보고 탐내어”(수7:21) 취함으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비록 주의 저주 받은 물건일지라도 “바빌로니아에서 만든 아름다운 옷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나가는 금덩이 하나”를 보았을 아간의 눈을 통해 그 마음 속에는 탐심이 일어났습니다. 믿음의 용사였던 다윗은 목욕하는 밧새바를 보았을 때 ‘정욕’이 생겨 범죄했습니다.

믿음의 경주는 ‘발’이 아니라 ‘눈’에서 결판납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누구를 보는가? 에 따라서 믿음의 경주의 승리자가 될 수도 있고 패배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눈을 매우 강조합니다. [내 사랑아, 보라, 네가 어여쁘구나. 보라, 네가 참으로 어여쁘며 비둘기 눈을 가졌구나.](아1:15), [보라, 내 사랑아, 네가 어여쁘도다. 보라, 네가 어여쁘니 네 머리채 속에는 네 비둘기 눈이 들어 있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염소떼 같구나.] (아4:1). 비둘기의 눈은 순결한 눈(single eye)입니다. 비둘기는 한 방향으로 한 가지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단일한 눈(single eye)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달리면서 예수님만을 바라 볼 때 그 눈을 통해 빛이 마음 속에 가득 차게 됩니다. 빛이신 예수님, 의의 태양이신 예수님을 바라 보는 자들은 결코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며 걸려 넘어지게 할 것이 없습니다. 앞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어둡다면 우리는 결코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런즉 네 눈이 단일(單一)하면 네 온 몸이 빛으로 가득할 것이요, 네 눈이 악하면 네 온 몸이 어둠으로 가득하리니 그런즉 네 안에 있는 등불이 어둡게 되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마6:22-23).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달립니까? 눈은 방향과 목표를 정하는 것입니다. 어둠 속의 동굴을 걷더라도 한 줄기 빛이 보이면 보이는 곳으로 달립니다. 어떤 이는 돈이 보이는 곳으로 달리고, 어떤 이는 명예를 얻기 위해 달리고, 어떤 이는 권력을 얻기 위해 달립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진 이들은 이집트를 떠난 모세처럼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로마를 떠나 알프스 계곡으로, 어떤 이는 카타콤의 동굴 속으로 떠났습니다. 예수를 보고 달리는 이들은 예수님을 향해서만 달립니다. 예수가 보이는 곳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요, 달려야 할 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누구나 다 예외 없이 자신들 앞에 놓인 달려야 할 Course가 있습니다. 이 Course는 우리가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고 만든 것도 아닙니다. 구원받은 그 순간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길을 달릴 때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정해 주신 길은 우리 자신의 길이 아니라 사실 ‘주의 길’입니다. 주의 길을 가는데 필요한 것은 돈이나 기술이나 권력이나 사람들의 인기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길을 가면서 주님께서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형통케 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열망합니다. 육신적인 성도들은 자신 앞에 놓여있는 ‘주의 길’대신 죄인의 길, 악인의 길, 음행의 길을 따라 갑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주로 달리는 길은 발람의 길(벧후2:15), 가인의 길(유11), 고라의 길입니다. 발람의 길은 불의의 삯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자기 이익을 쫓아서 가는 길입니다. [이들이 바른 길을 저버리고 보솔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며 길을 잃었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였으나](벧후2:15). 돈이 된다면 무슨 짓이라도 서슴없이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돈 벌이가 된다면 술을 팔고, 마약을 팔고, 무기를 팝니다. 돈이 된다면 사람을 사고 팝니다. 이것은 노예상이 있던 고대 로마 시대나 근대 제국주의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이 땅에서도 흔하게 있는 일입니다. 발람의 길이란 ‘맘몬’(재물의 신)을 따르는 길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딤전6:10). 발람은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말씀을 받았던 모압의 대언자였습니다. 그는 주의 천사를 통해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 멸망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성도들은 모두 발람의 길을 따라 걷고, 달리고 있습니다. 기독교 문화, 교회, 성경 등을 어느 정도는 압니다. 특히 이곳 미국에 살며 매주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발람의 길에 놓여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4 가지입니다. a. 파멸 b. 멸망에 빠지게 하는 시험 c. 올무 d. 여러 가지 해로운 욕심입니다. [그러나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느니라.](딤전6:9). 돈을 잘 버는 것이 능력이요, 존경의 대상이 된 이 시대지만 성도들은 결코 발람의 길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길이란 무엇입니까? 자기 의,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께 인정받고 받아 들여지기를 원하는 종교인의 길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믿음을 버리고 자신의 땀과 노력을 바치는 종교인들의 길이 바로 “가인의 길”입니다(창4:1). 가인은 믿음으로 희생물을 드린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왜 죽였습니까? 자신의 행위는 악하되 아벨의 행위는 의롭기 때문입니다(요일3:12).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종교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이는 이들이 가인의 길로 갔으며 대가를 바라고 발람의 잘못을 따라 탐욕을 내며 달려갔으며 고라의 반역 가운데서 멸망하였음이라.](유1:11). 가인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폭력을 행사하고 정당화했습니다. 이것이 종교인들의 길입니다. 종교 전쟁은 모든 전쟁보다 가장 잔혹하고 무섭습니다. 가인의 길을 따라 달리는 이들은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것보다 ‘자신의 관심, 자신이 원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들은 자기가 정한 길, 자기가 하는 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축복해 주시고 인정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많은 성도들이 가인의 길을 따라 걷고 그 길을 따라 달리고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섬기고, 예배를 드리는 것도 마치 가인처럼 자신을 인정해 주고, 복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만물의 중심이고, 기준입니다.

오늘날 설교나 성경 공부를 해 보면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이고, 그 말씀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공부하고 그대로 순종하려고 하는 대신 “이 말씀이 내게 무슨 유익이 되는가? 이 말씀을 어떻게 삶에 이용해 먹을 수 있는가? 이 말씀이 현재 내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등등의 ‘적용’만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말씀, 믿음이 어느 덧 자신의 삶을 위한 한 가지 이용 도구요, 수단으로 삼습니다. 실용주의 성경 공부와 설교만이 횡횡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세상 철학, 학교 교육, 매스 미디어의 홍보, 사람들의 가치관과는 당연히 충돌합니다. 이는 단지 금전 문제, 직업 문제, 교육 문제, 종교 문제, 남녀의 역할 문제 등 모든 것이 다 충돌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극구 “다르지 않다,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며 도리어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해서 세상의 가치관에 맞추려고 합니다. 간단한 예를 보십시오. 여자 목사 문제가 왜 나옵니까? 여권 신장, 남녀평등이란 세상 가치에 성경을 맞추려다 보니까 그런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과의 충돌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여자 목사 문제는 문제도 아니고 동성애자 목사까지 안수를 받고 강단에 서는 일까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세상과의 충돌, 사람들과의 충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의 길에 선 자들이 세상의 거침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만약 그런 것이 없다면 그가 도리어 잘못된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걸어야 합니까? 성경이 제시해 준 주의 길을 알고, 그 길로 걸어야 합니다. 다윗은 기도하기를, [주의 길들 안에서 내가 다니는 것을 지켜주사 내 걸음이 미끄러지지 아니하게 하소서.](시17:5), [오 [주]여, 주의 길들을 내게 보이시고 주의 행로(行路)들을 내게 가르치소서.](시25:4)라고 했습니다. [오 [주]여,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들로 인하여 나를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시27:11). 우리는 주님의 길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만을 보고 달릴 때 우리는 달리면서 계속 배우고 성장하게 됩니다. 주의 길이 자신의 길이 되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모두 자신의 길을 버리고 주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그 때 주님은 자신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분께서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시리니 온유한 자에게 자신의 길을 가르치시리로다.](시25:9). 주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내 혼을 회복시키시며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시23:3).

이 시간 여러분은 모두 끝까지 주님의 길을 가겠다고 결단하십시오. [오 [주]여, 주의 법규들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그 길을 지키리이다.](시119:33). 우리는 교양으로 성경을 배우는 이들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경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어떤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달리는 자들의 눈, 주님이 우리 앞에 놓은 길에 대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지금 내 안에 가정 문제, 자녀 문제, 직장 문제, 돈 문제, 어떤 죄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들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 한 분을 묵상하고 그분의 길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고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십시오. 그 때 말씀의 빛이 마음 속에 임하게 하십시오. 그 때 문제들은 안개가 걷히듯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믿음을 가질 때 무거운 짐은 벗겨지고, 죄의 사슬은 풀어집니다. 주의 길을 배우고, 예수를 바라볼 때 지친 몸, 낙심한 마음, 근심과 염려 등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말씀의 권능이요, 믿음의 길을 달리는 경주자들에게 주어진 복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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