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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말씀: 히브리서 11:35
요절: 히브리서 11:35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성경에 약속된 모든 것을 현 세상에서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사는 이 땅에서 믿음의 모든 보상을 다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음 이후에 더 큰 보상이 있고, 더 나은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현 세상이 아니라 다가올 세상에서, 이 땅이 아니라 저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더 크고 좋은 것들을 간직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예비된 것들이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 모두 주어진다면 산 소망이나 복된 소망, 영광스런 소망이 아무 것도 아닌 것들로 판명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믿음으로, 믿음을 통해서 산 이들의 다양한 증거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믿음을 통해 어떤 이들은 칼날을 피했고, 연약한 가운데서 강해졌고, 용맹하게 되어 외부의 군대를 물리치는 승리도 했지만 어떤 이들은 그냥 말없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다 모두 욥과 같이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받고, 부와 장수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았다는 Happy ending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모든 성도의 삶이 다 욥이나 아브라함 같은 결말을 맞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동일한 믿음의 영으로 살았지만 그 끝은 모두 다릅니다. 믿음을 통해 산 어떤 이들은 형장에서 고문을 받다가 그냥 죽임을 당했습니다. 평생토록 옥에 갇혀 있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36-37절에는 이들이 세상에서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 잘 나옵니다. [또 다른 이들은 심한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참으로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겪었으며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고 시험을 받기도 하고 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며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니며 궁핍과 박해와 고난을 당하였으니] (히11:36~37). 이들이 믿음으로 산 결과가 이것이 전부라면 우리는 아무도 믿음으로 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이 /세상/ 삶을 사는 동안에만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는다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가 가장 비참한 자이리라.](고전15:19)고 합니다. 맞습니다. 만약 이 현 세상에서 육신의 삶을 사는 동안에만 소망을 갖고,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비참한 자들일 것입니다. 현 세상에서 성도들이 받는 고난과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다가올 세상에서, 저 하늘에서, ‘더 좋은 부활’이란 보상이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꾸 현 세상을 전부로 봅니다. 죽기 전까지의 삶은 전 생애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육신이 살아 있는 동안 어떤 결과와 목표를 이루려고 합니다. 저 하늘에서 받을 보상, 다가올 세상에서 받을 무엇을 믿고 기대하는 대신 이 땅에서 끝장을 보려고 생각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바란 대로 무엇이 되지 않으면 ‘믿음으로 산 결과’가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불평을 합니다. 믿음을 통해 오래 참고 견디지 못합니다.

초대 교회의 예를 보십시오. 베드로는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야고보는 헤롯의 칼날에 죽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대부분의 대언자들은 피를 흘려 죽임을 당했고, 많은 신약 성도들 역시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피흘린 발자취’, ‘팍스의 순교자의 노트’와 같은 책을 통해서 믿음을 통해 살던 이들이 어떻게 죽었는가? 생생한 역사적 증언을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을 통해 우리는 죽을 위기에서도 무사히 살아나고, 기적적인 승리 등을 기대하지만 오히려 믿음을 통해 잘 살던 이가 위기에 빠지고, 죽게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믿음을 통해 가정이 위기에 빠지고, 직장 생활이 위태롭게 되고, 자신의 원대한 꿈과 계획이 좌절되는 예는 허다한 일입니다. 다니엘은 믿음을 통해서 사자 굴에서 극적으로 건짐을 받았지만 초대 교회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믿음으로 인해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들에게 물리고, 찢겨 죽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믿음을 통해 불타는 용광로에서 그을린 냄새조차 없이 안전하게 구원받았지만 교회사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믿음으로 인해 불타는 장작더미에서 화형당해 죽었습니다.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결말은 각기 다 다르지만 이들이 저 하늘에서 받게 될 믿음의 보상과 영광은 모두 동일하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이 땅에서 받는 것만이 전부라면 고문을 당하고 죽은 이들만 억울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성경은 ‘믿음을 통해’ 어떤 이들은 고문을 받되 풀려나기를 원치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모두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그러했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종교를 하나 가진다, 교회에서 새로운 인적 네트워크를 만든다, 신앙을 통해 인격을 수양하고 믿음을 가짐으로 마음에 평안을 찾는다 등등의 의미를 가진 것이 고작입니다. 어떤 이는 가족을 위해서 믿고, 어떤 이는 친구를 따라 교회를 가기도 합니다. 초대 교회 시절에 유대 사람들이 ‘신자’로 산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유대 공동체에서 출회되고, 재산이 몰수되고, 살던 고향을 떠나 어딘가로 도망 다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유대 사회 어디에나 있던 회당에 출입할 수 없고, 그들과 교제할 수 없고 따돌림을 당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감옥에 갇히거나 돌에 맞거나 채찍에 맞는 등의 고난은 예고된 수순이었습니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의 의미는 고난과 희생과 주류 사회의 배척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결단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떤 유대인이 가족들이나 친구들 앞에서 “내가 예수를 믿는다. 예수를 믿겠다.”는 말은 곧 바로 그들과의 절교를 선언하는 것이요, 추방을 당하겠다는 의미였습니다. 1-3세기의 로마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언제든지 붙잡혀 죽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재산의 몰수는 기본이었고, 자신과 가족의 안전은 심각한 위협에 놓이게 되는 그런 선택이 ‘신자’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회의 범죄자나 국가의 반역자로 살겠다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선택임에 틀림없습니다. 중세 1500년의 기나긴 세월동안 성경을 믿고, 믿음대로 살겠다는 것은 종교 재판을 받아 마녀로 판결 받아 죽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 신자로 산다는 것은 엄청난 희생과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하면 자기가 가진 것이 그것을 완성하기에 충분한지 먼저 앉아서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눅14:28)고 하신 말씀대로 이들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자신의 앞날과 삶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하고 계산해야만 했습니다.

오늘날 이곳 미국이나 서구 유럽, 한국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어떤 피해도 손해도 볼 것이 없고, 믿음으로 인해 그저 좋은 것만 얻을 수 있다는 그런 신학이나 설교는 어느 시대에도 없었습니다. 교회의 설교자들이 강단에서 “성도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며, 많은 환란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듣고, 냉정하게 판단하고 그렇게 살기로 기꺼이 결단해야만 한다.”고 외친다면 교회 근처에 얼씬 거리지도 않을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오늘날 전도자들은 신자가 되는데 필수 불가결한 것들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해 주지 않고 ‘믿으면 모든 것이 다 좋다’고 말해 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된다. 말씀을 듣다보면 언제인가 자연스럽게 믿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믿음이 온다...’ 등등의 말로 복음을 전하는데 우리 주님은 결코 그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따르려는 제자 후보들을 향해, 자기 소유를 포기해야 하며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조롱과 박해와 매질을 받을 것이며 심지어 죽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반복적으로 일러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으면 너희도 핍박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키리라.](요15:22).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요, 참으로 때가 이르면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생각하리라.](요16:2).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b). 주님은 제자의 길이 어떤 길인지, 진리를 믿고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자 한 명 더 얻기 위해서, 한 사람의 머리 수라라도 늘리기 위해서 복음의 진리를 약화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일찍이 산상수훈을 말씀하실 때부터 성도들이 받은 고난과 박해, 심지어 죽임 당하는 일까지 반복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약 오늘날 우리가 이런 식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게 되지만 형제들, 친구들, 세상으로부터는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심한 모욕과 조롱과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복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듣기 좋은 말만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에게는 반드시 환란과 핍박이 있을 것을 반복해서 전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많은 환난을 거쳐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야 하리라 하더라.](행14:22b).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다 핍박을 받을 터이나](딤후3:12).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엄청난 비용과 대가를 치를 것이란 점을 분명하게 선포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것을 거리낌 없이, 담대하게 전할 수 있습니까? ‘더 좋은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세운 교회들은 하나같이 불같은 시련과 박해가 임했습니다. 초대 교회 때에도 그러했고, 중세 1500년 동안의 암흑시대에도 그러했고, 지금 현재도 중동의 많은 회교권 국가, 아프리카를 비롯한 동남아 각 지역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합니다. 앞으로 대 환란 시대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곧 바로 사회적 매장이나 목 베임과 같은 위험을 요구 받게 될 것입니다.

자, 모두 다 같이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인들은 자기들의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받기도 하며 다른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으려고 고문을 당하되 풀려나기를 원치 아니하였으며](35). 자기들의 죽은 자를 다시 살려 받은 여인들이라면 당장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의 여인들이 생각납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렸습니다(왕상17:22). 특이한 일은 엘리야의 믿음으로, 엘리야의 능력으로 죽은 자를 다시 살렸다고 말하지 않고, 여인들의 믿음을 통해서 ‘자기들의 죽은 자를 다시 살려 받았다’고 말합니다. 수넴 여인 역시 아들이 죽자 엘리사를 찾아가 아들의 죽음을 고하고 그를 통해 다시 살림을 받았습니다(왕하4:33-34). 히브리서 기자는 이 여인들이 믿음을 통해서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찾고, 그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 그들의 기도를 받고, 안수를 받는 등의 일로 문제를 해결했을 때 그들의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통해서 일한 것으로 기록된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죽은 자식들을 둔 여인들이 엎드려 기도하거나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와 엘리사를 찾아간 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행위입니다. 병든 자들이 있을 때 교회의 장로를 청하는 것이 믿음입니다(약5:14). 우리 주님 앞에 병든 자를 침상에 메고 데려 왔던 친구들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마9:2) 그들이 데려온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자신이 고치셨지만 그들의 믿음으로 행한 일, 믿음으로 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통해서 죽은 이들을 살려서 받기도 하고, 죽게 된 이들을 살려 받기도 합니다.

복음서에도 이와 비슷한 예들이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죽게 된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주님을 찾아 왔지만 딸은 죽어 버렸습니다. 야이로는 병들어 죽게된 딸을 살려 받기를 원했지만, 실제로 그는 죽은 딸을 살려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여겼지만 주님은 야이로를 향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네 딸이 온전하게 되리라.](눅8:50b)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야이로를 통해 우리에게 믿음은 병들어 죽게된 이들을 살리는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을 살리는데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선포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서 병든 자들이나 죽은 자들을 다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네 딸이 온전하게 되리라’. 이미 야이로의 딸은 죽었지만 야이로가 생명이 부활이신 주님을 믿을 때 온전하게 됩니다. 이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말씀하시고 믿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주님은 [나사로야, 나오라.](요11:43) 외치셨습니다. 믿음을 통해 죽은 자들이 일어납니다.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 만에 일어났고,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은 매장하러 무덤으로 가는 중에 일어났고(눅7:14), 야이로의 딸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어났습니다. 오늘 주님이 오시면 2000년 전에 죽은 자들이나 어제 죽은 자들, 사고나 질병으로 지금 갓 죽은 자들이 모두 다 한꺼번에 일어날 것입니다. 죽은 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리로 올라오라.”는 한 마디에 믿음으로 살다 죽은 자들이 다 일어나 순식간에 저 하늘로 들림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죽은 자들을 다시 살려 받은 예는 사도행전에도 나옵니다. 베드로는 도르가란 여인을 살렸습니다(행9:40). 죽은 여인은 말이 없지만 이 여인의 죽음을 베드로에게 알리고 속히 와 달라고 부탁한 이들의 믿음으로 인해 살아났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주님께 달려왔던 이들의 믿음으로 병든 자들이 구원받고, 죽은 자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우리의 믿음을 통해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혼들이 살아나는 귀한 기적들이 날마다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향락에 빠져 사는 여자는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니라.](딤전5:6). 그런데 이 말씀을 교회에 적용해 보십시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비유됩니다. 교회는 여자입니다. 향락에 빠져 사는 여자나 세상에 빠져 있는 교회의 모습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를 향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은 자로다.](계3:1) 말씀하셨습니다. 첫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나 뜨겁지도 차지도 않는 라오디게아 교회나 ‘살아 있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죽은 자’에 불과한 사데 교회를 다시 소생시키고, 살려서 받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죽은 자를 살려서 받을 수 있습니다. 성도 개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았다는 이름만 가진 채 죽어 있는 성도들을 다시 살려 받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너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시리라, 하시느니라.] (엡5:14). 하나님은 마른 뼈들의 골짜기와 같은 이 세상을 향해 ‘바람’을 불러 일으키는 대언자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관에 누워있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향해, [청년아,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눅7:14) 외치신 것처럼 우리 역시 믿음을 통해 죽게 된 자들을 향해 “너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외쳐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믿음으로 행할 수 있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능력입니다. 우리는 에스겔처럼 마른 뼈들의 골짜기를 향해 “너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외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땅에는 부흥이 필요합니다. 이 곳 모든 교회는 다시 살아나야 하는 부활이 필요합니다.

다시 35절입니다. [여인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받기도 하며 다른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고문을 당하되 풀려나기를 원치 아니하였으며](35). 어떤 이들은 죽은 자들을 돌려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죽음을 기꺼이 맞이했습니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풀려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의 생명 연장이나 육체의 삶을 돌려받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올 ‘더 나은 부활’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들은 고문으로 인해 육체의 극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풀려 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육체를 입고 있기에 고문을 당하는 것은 참으로 죽기보다 싫고 두려운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영화나 사진 등을 통해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각종 고문 도구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만약 한번도 못 보신 분들은 인터넷으로 ‘고문 도구’란 검색어를 한번 쳐 보시기 바랍니다. 수사관들이 간첩이나 범죄자들의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서 사용한 것들보다 종교 재판에 사용된 고문 도구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손발톱 뽑기, 눈이나 혀를 뽑기, 각종 관절 마디 꺾기, 신체 절단, 불에 달군 인두로 몸을 태우는 등등의 일반적인 것에서부터 상상조차 불허하는 각종 고문 도구들이 수두룩했습니다. 고문을 당하되 풀려나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은 고문의 강도가 약하거나 견딜만한 어떤 것이어서가 아닙니다. 인간의 체력과 정신력으로는 결코 각종 도구를 사용해 고통을 주는 극심한 고문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의 몸에 가해지는 악랄한 고문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믿음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성도들은 부활의 권능으로 죽음에 이르는 고문을 당하되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고문을 가하는 이들은 언제나 믿음을 배반하라는 회유를 가합니다. 그들의 제안은 주님을 부인하거나 신앙을 포기하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말 한마디만 하면 풀어 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고문을 당하되 풀려나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주님이 말씀하신 바 [몸은 죽여도 혼(魂)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혼과 몸을 능히 지옥에서 멸하시는 분을 두려워하라.] (마10:28)는 말씀대로 몸을 죽이는 이들보다 주님을 더 두려워했고, 몸의 죽음보다 부활의 영광을 더 소망했습니다. 자신의 몸이 각종 고문의 형틀에서 풀려나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끓는 가마 솥에 던져지고, 불타는 장작 더미 위에 묶여 세워진 가운데서 신앙을 포기하거나 믿음을 배반하는 조건으로 몸이 풀려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믿음의 포기나 부인함으로 얻게 된 육체의 자유나 생명은 죽음으로써 얻게 될 영원한 영광의 비중과 차마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육체의 구원을 얻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몸이 멸한 뒤에 얻게 될 ‘더 나은 부활’의 소망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그들은 고문하는 이들의 손에서 육체의 생명을 얻기를 거부했고, 풀려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해”란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이들이 고문을 받으며 육체의 생명을 포기할 수 있는 이유와 근거입니다. 육체의 죽음이 전부가 아니요, 끝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풀려 나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는 이들은 이 땅에, 이 육신에 어떤 소망이 없습니다. 몸을 괴롭히는 고문도 이들을 꺾을 수 없고, 세상이 주는 어떤 영광도 권세도 부도 그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는 이들은 죽음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40-41, [또한 하늘에 있는 몸도 있고 땅에 있는 몸도 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의 영광과 땅에 있는 것들의 영광이 다르니라.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들의 영광이 다르니 이는 이 별과 저 별의 영광이 다르기 때문이라.](고전15:40-41). 믿는 이들이 모두 부활하는 것은 같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영광은 분명히 다릅니다. 주님은 부인하고 배반해도 한 번 받았던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위협이나 고문의 고통에 굴복해서 입술로 주님을 부인하고 풀려났지만 그들이 구원을 잃어 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부활과 믿음을 부인하지 않고 순교한 사람들의 부활에는 분명히 ‘영광’의 차이가 있습니다. 유업의 보상의 차이도 있습니다. 상급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이 고문을 당하되 풀려나기를 원치 않았던 것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일하고,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에 동참함으로 영광스런 부활을 얻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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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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