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시 오리라
말씀: 요14:3요절: 요14:3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의 재림’을 다루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신구약에 약 1,500구절 이상이나 직간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바울 서신서에도 침례에 대해서는 13번 밖에 나오지 않지만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50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 전체에서도 30구절에 한
번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다룰 정도로 재림은 성경이 강조하는 주제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신약 성경보다 최소한 20배 이상 주의 재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 재림의 방법, 재림의 행로, 재림의 모습, 재림의 징조 등 다루어야 할 부분이 매우 많은데 이 매
한 가지씩 주제마다 모두 극심한 논쟁과 서로 다른 견해가 넘쳐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가장 위대하고 복된 소망, 영광스런 소망, 산 소망의 말씀이 교회에서 사장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주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정표요, 깃발이요 푯대로 나부껴야 할 말씀입니다. 내 마음 속에 주님의 다시 오심이란 ‘재림’의 깃발이
없고, 나의 시야에서 재림이란 푯대가 사라지고 없다면 나의 신앙은 방향을 잃은 배와 같습니다. 주님의 재림의 날짜와 시각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주님의 오심이 가깝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의 모든 것을 믿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희미하고 약하다면
우리의 믿음 역시 희미하고 약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넘칠수록 현재의 영적 삶이 선명하며, 성령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지금
현재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고 사모할 때 지금 현실의 삶이 믿음의 삶, 인내의 삶, 소망이 충만한 삶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의 5 대 신앙으로 창조 신앙, 성육신 신앙,
십자가 신앙, 부활 신앙, 재림 신앙을 말합니다. 이 중에 재림 신앙은 모든 신앙의 완결판이며 유일하게 미래를 향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8,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冠)이 예비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딤후4:8). 그분의 나타나심 즉 재림을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의의 관’을 주실 것입니다.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고, 종이 주인을 기다리고, 아들이 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은 본능입니다. 이는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고, 농부가 수확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그는 자신의 영적 신분, 정체성부터 다시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란 거듭난 그 순간부터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소망하며, 인내로 기다리고, 믿음으로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보이지 않던 것들을 모두 보게 될 것이요, 소망의 실체들을 소유하게 될 것이요, 희미하게 보고 알던 것들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며 선명하게 보고 알게 될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으로 마음 속에 갖고 있던 영광스런 약속들이 현실이 되고, 나의 소유로 주어질 그 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죄없는 완전한 마음과 몸은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되고 황홀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언제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란 분명한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영원히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지금처럼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 소망도 없습니다. 우리의 현재적 삶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있을 때까지”라는 분명한 기준과 끝이 있습니다. [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있을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그분께서 자신의 때에 그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딤전6:14-15a). 믿음의 삶, 인내의 삶, 참고 견디는 삶이란 것은 주님의 나타나심이 있을 때까지입니다.
현재의 썩을 몸을 입고 사는 것도 주님의 나타나심이 있을 때까지란 ‘끝’이 있습니다. 죄, 마귀, 육신, 세상, 사망 등과 같은 우리의 원수들이
활동하는 것도 ‘끝’이 있습니다. 영원히 순환하거나 윤회하지 않습니다. 창조 신앙이 시작, 기원, 처음을 보는 신앙이라면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주제는 끝, 완성, 목표점을 보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지막, 끝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재림 신앙입니다. [저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느니라.](딛2:13).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일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떤 선물에서도 뒤처지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나니](고전1:7). 우리는 지금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리라” 이것은 우리가 믿은 후로
해야 할 사역입니다. 낙심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고 인내로 소망 가운데 기다리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역입니다.
[너희도 인내하고 마음을 굳건히 하라. {주}의 오심이 가까우니라.](약5:8).
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주님의 오심과 관련된
진리들을 배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기독교란 종교의 신학적 사상이나 해석, 이론이 아니라 장차 있게 될 한
‘사건’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복된 소망, 영광스런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은 이미 충분히 증명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장차 성취될 ‘예언적 사건’입니다. 성경을 믿는 성도들은 이전에
있었던 일들과 앞으로 있을 일들을 모두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 기록을 근거로 성령의 조명을 얻어서 모든 말씀을 다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이 인류의 구원과 연관되어 있다면 그리스도의 재림은 ‘왕국’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세우실 정치적이고,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메시야 왕국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집니다. 구약 성경의 예언들은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구절들보다 재림에 관련된 구절들이 훨씬
많습니다. 하지만 구약 성경을 읽는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구분해서 보지 못하고 동일한 것으로 보았던 관계로 성경 해석의 오류는
물론이고, 우리 주님의 사역을 크게 오해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10-11, [이 혼의 구원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에 대하여 대언한
대언자들이 부지런히 조사하고 탐구하되 자기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있을 영광을 미리 증언해 주실 때에
그 영께서 무엇을 혹은 어느 때를 표적으로 보여 주셨는지 탐구하였느니라.](벧전1:10-11). 그리스도의 고난은 초림입니다. 그 뒤에
있을 영광은 재림입니다.
초림 때 주님은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 재림 때 주님은 이 땅을 다스릴 만왕의 왕이십니다. 초림의 때에 예수님은 어린 양입니다. 재림 때에 예수님은 유다 지파의
사자(lion)이십니다. 초림 때에 예수님은 죄인들을 섬기시고 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재림 때의 예수님은 죄인들을 징벌하시고 멸하십니다.
초림 때의 주님은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지만 재림 때의 예수님은 왕관을 쓰십니다. 초림과 재림의 차이는 극과 극의 다른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오심을 믿고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구약 성경에 메시야는 두 가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그리스도와 영광의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은 나의 혼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나의 몸의 부활과 구속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누구도 몸의 부활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구약은 제단 위에
제물을 놓고 그 제물의 실체가 되실 어린 양의 오심을 기다렸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써 대제사장들이 날마다 드리는 희생물의 본체로써
자신을 단번에 영원히 모든 사람을 위해 희생물로 드리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죄를 위한 헌물(offering)은 없습니다. 이제 교회는 제단이
아니라 ‘식탁’(table)을 가지고 그 위에 주님의 흘린 피와 죽으신 몸을 상징하는 포도즙과 빵을 가지고 만찬을 합니다. 주님은 만찬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죽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느니라.](고전11:26).
만찬은 주님께서 오시는 때까지 계속됩니다. 주님이 오신 후에는 더 이상 만찬의 테이블은 없습니다. 그때는 이 땅에 왕의 보좌가 놓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재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그 기간이 이미 2000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의 재림은
없다. 허구다, 은유다, 상징이다. 비유다.” 등등 별별 소리가 다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주님은 은밀하게 재림하셨다, 우리
마음 속에 임한 것이 재림이다.” 란 말도 합니다. 어느 덧 성도들 가운데도 긴박한 재림 신앙은 사라지고 더 이상 재림을 사모하거나 기다리는
이들이 거의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때입니까? 로마서13:11, [또한 때를 알거니와 지금이 잠에서 깨어야 할 바로
그때이니 이는 지금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보다 가깝기 때문이라.](롬13:11). 지금이야말로 잠에서 깨어야 할 바로 그
때입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신앙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주의 오심을 기대하고 사모하고 기다리는 깨어 있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는 조금만 있으면 오실 이가 오실 것이요, 지체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히10:37).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만큼 주의 오심은 더디지 않습니다(벧후3:9).
여러분들은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마치 이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최소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주님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의 절제를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오직 모든 것의 끝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라.](벧전4:7). 잠시 후면 주님께서 오실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사모한 이들에게 재림은 말할 수
없는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그러나 재림을 믿지 않는 자들은 재앙이요, 당혹스런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가장 확실한
법은 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이제 그분 안에 거하라. 이것은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게 하려 함이요,또 그분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요일2:28). 주님과의 지속적인
친교야 말로 주님의 오심을 가장 잘 대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이야 말로 성경이 가장 많이, 자주 언급하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3에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 받아 들여 내가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고
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11, [또 그들이 이르되, 너희 갈릴리 사람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바라보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이 동일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분께서 하늘로 들어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니라.](행1:11). *the same Jesus. 이는 천사들이 한 증거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성경의 분명한 주제입니다. 하지만 이런
분명한 성경적 주제에 대해서 사람들은 물론이요, 신자들 사이에서 이견이 분분합니다.
잠깐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몇 가지 이론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주의 재림은
문자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고로 오순절 성령 강림이 곧 주의 재림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믿는 성도들
안에 내주하게 된 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재림이란 주장입니다. 이 주장을 지지하는 성도나 교회는 이미 주님이 재림해서 우리 속에 거하시는데
무슨 재림을 기다린다는 말인가? 힐난합니다. 오순절에 임한 것은 ‘성령’이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성령이 오시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 저 하늘에 앉히신 것의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16:7에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니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위로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내가 떠나면 내가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리니](요16:7).
그렇다면 오순절에 성령님의 오심은 주님이 이 땅을 떠나 하늘에서 보내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하늘로 떠난 주님께서 하늘의 보좌로 가셨는지
블랙홀에 빠졌는지 다른 외계 어디론가에 가 버리셨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령의 오심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오순절 성령 강림이
주님의 재림이라면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주의 오심, 주의 나타나심 등에 대한 기록을 사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다리라.’는 말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모든 신약 성경은 오순절 이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이후에 기록된 신약 성경에 150 회 이상이나 그리스도의 재림을 여전히 미래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났다면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일어나야 할 ‘죽은 자들의 부활, 휴거, 사탄의 결박’ 등과 같은 변화는 물론이요, 이스라엘의 왕국
회복 등과 같은 예언들도 동시에 성취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어디에서도 그런 예를 볼 수 없습니다.
둘째,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 주님이 그 속에 임하는 것이므로 이것이 재림이다. 죄인의 회개가 곧 주의 재림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주님을 마음으로 믿고 영접하는 것으로 인해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임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의 재림이 아닙니다. 죄인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지 그리스도의 사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믿는 성도들 안에 거하시며(골1:27), 우리 안에서 함께
일하시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재림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에 [볼지어다,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晩餐)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3:20)는
말씀을 그리스도의 재림에 연관시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재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영으로 우리 속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런 몸을
입으시고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문자적으로 이 땅에 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사람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이런 주장이 왜 나왔는지 참으로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재림은 매 순간 계속 반복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죽음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주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죽은 혼들은 그가 구원받았다면 하늘로, 구원받지 못했다면 지옥으로 갑니다. 주님이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죽음은 언제나
“떠나는 것”으로 기록합니다. [내가 말하노니 우리가 확신에 차서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
몸을 떠나는 것이 죽음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가 요한에 대해 주님께 질문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주여 이 사람은 무엇을
하리이까?”(요21:21). 그 때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올 때까지 그가 머물기를 내가
원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21:22). 주님께서는 죽음과 재림을 동의어로 보신 적이 없습니다.
죽음은 정복되어야 할 원수입니다(고전15:26,55). 죽음은 죄의 삯입니다(롬6:23). 주님은 우리의 죽음을 폐하시고, 우리의 죽을 몸은 더
이상 죽음과 상관없는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빌3:20-21).
넷째, 주의 재림은
로마가 예루살렘을 파괴한 주후 70년에 성취되었다. 이 이론은 신학교에서 자주 가르치는 그런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성전의 파괴는 로마의 군인들이었고, 이 때에 각 지역 교회들은 여전히 각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사도들이나 주의 제자들 역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나 성도의 휴거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로마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후에도 25-30년을 더 살았습니다. 주님의 재림 때에 일어날 일은 예루살렘의 파괴와 멸망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복과
예루살렘의 건설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예루살렘은 “주께서 거기 계신다”라는 이름의 도시가 되고, 에스겔이 말한 천년 왕국의 성전이
세워질 것입니다.
다섯째, 기독교의
확산이 주의 재림이다. 복음이 전파되어 전 세계가 복음화 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로마 캐톨릭이 퍼뜨린 주된 교리입니다. 온
세계에 선교사가 파송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주의 재림이란 주장은 주님께서 ‘밤에 도적같이’ 오신다는 말씀과 정반대입니다. 기도교의 팽창이나
점진적 확산은 결코 밤에 도적같이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한 날에 일어날 사건이지 결코 점진적
과정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확산은 죄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만 주의 재림은 죄인들에게 갑작스런 멸망을 가져 오는 것입니다(살전5:2-3,
살후1:7-10).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의 확산이 주의 재림이란 주장은 결코 성경적 진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세 가지 신학적 관점을 보겠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후천년주의적 관점’입니다. 천년은 요한 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시간적 기간으로서의 천년’입니다. 후 천년이란 말
그대로 성경이 말하는 천년 이후란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년 왕국 이전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천년의 기간이 끝난 후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이 땅에 평화의 천년 기간이 정착되고, 온 땅에 복음의 물결이 뒤 덮여 정의와 평화가 물결치는 그런 천년의 세월이 지나야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공산주의자들은 스스로 이런 세상을 건설하고자 외치는 정치 세력입니다. 사람들은 이 땅을 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하며, 모든 비인간적인 요소들을 척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은 진화론적 관점과 일맥상통합니다. 모든 종교인들의 꿈이 이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이론은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가장 선교가 활발하게 일어날 때 가장 인기 있는 이론이었습니다. 마치 온 세계가 기독교로 정복될
것처럼 느껴지던 때에 교회는 쉽게 이 이론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둘째, 무천년주의적
관점입니다. 무(無)란 말 그대로 없다는 뜻입니다. 무신론자라면 신이 없다는 뜻이고, 무교회주의자라고 하면 교회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무천년주의란 성경이 말하는 천년 왕국이란 없으며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만물은 마지막 심판에서 한 순간에 끝나 버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관점은 장로교와 캐톨릭에 의해 수용되었으며 점점 많은 단체들이 왕국의 출현이란 비유적이거나 상징이라고 믿으면서 점점 인기있는
이론이 되었습니다.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이 땅에 완전한 평화가 올 것이라고 믿었던 후천년 주의자들이 된 서리를 맞았고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사고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셋째, 전천년주의적
관점입니다. 전천년주의적 관점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해서 이 땅에 왕국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
이전에는 결코 이 땅에 평화가 없습니다. 평화의 왕이 오시기 전까지 이 땅은 전쟁과 전쟁의 소문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은
모두 전천년주의적 관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교회사에 등장하는 모든 위대한 구령자들은 다 전 천년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전 천년주의자들 가운데는
다시 교회의 환란 통과 문제로 ‘환란 전, 환란 중, 환란 후’ 휴거라는 논쟁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몇 가지 이론을 배우고 관점을 정리한 것은 성경적 바른
진리를 확실히 깨닫기 위함입니다. 저희 교회가 가진 교리는 환란 전, 전 천년 세대주의적 관점입니다. 우리는 대환란 전에 휴거가 일어나고,
주님의 오심으로 인해 천년 왕국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영적 진리를 믿고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고
해석함으로써 문자 그대로의 재림, 천년 왕국을 믿습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다루게 되겠지만 성경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영적으로 적용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언약들을 볼 때 조건적인가? 무조건적 언약인가? 를 살펴 볼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과의 관계입니다. 교회를 영적 이스라엘로 보는
것은 합당한가? 란 문제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이스라엘을 철저히 구분하며 이스라엘 민족이 장차 얻게 될 유업을 인정합니다.
주님은 “내가 다시 와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 몸은 변화됩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인내하고(약5:7), 주님이 오실 때까지 만찬을
하며(계1:7), 주님이 오실 때까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혼동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해야 할
일들은 주님이 오심으로 완성되고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계속 말씀을 살펴 볼 때 넘치는
소망과 확신으로 가득차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