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의 징조
말씀: 막13:4요절: 막13:4 오늘은 재림의 징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많은 성도들, 신학자들이 주님의 재림을 어떻게 예측할 수 있는가? 언제쯤인가? 만약 주님의 재림이 있기 전에 이 세상에는 어떤 특별한 징조가 있는가? 등등의 질문을 해 옵니다. 재림의 징조에 대한 대표적인 이론 가운데 하나는 온 세상에 모든 민족들,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다 전파된 후에야 주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주님이 오신다! 공산주의 국가들, 회교권 국가들에 복음이 선포되고 아프리카 오지의 부족들에게 복음이 선포되면 주님이 오신다! 등등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해서 세계 선교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강단에서 많이 선포되었고, 세계 선교와 복음화에 기여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만 온 세상이 복음으로 개심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개심할 일도 없거니와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이 점점 악해진다는 성경적 가르침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복음을 믿고, 천년 왕국이 도래하고, 그 이후에 심판이 있고, 땅이 불로써 소멸된다는 이 가르침은 전형적인 후 천년 주의적 교리입니다. 종교 개혁이후로 서구 유럽에는 복음이 선포되고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고 제국주의의 팽창과 더불어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비롯한 다른 대륙에도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세상이 복음화 되고 있다는 징조를 전혀 볼 수 없습니다. 북미 대륙의 미국과 캐나다는 기독교 국가라고 합니다. 남미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캐톨릭 국가입니다. 영연방 국가에 속한 대부분의 나라들은 기독교 국가로 분류합니다. 그렇다면 호주, 뉴질랜드는 완전히 복음화 된 나라에 속하는 것입니까? 유럽의 모든 국가들은 역사적으로 모두 캐톨릭이었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복음화 된 것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20세기는 19세기보다 더 이혼률이 늘어나고, 전쟁은 더 많아졌습니다. 노사 관계를 비롯한 사람들과 사람들의 관계에 성경적 원칙이나 사랑은 더욱 사라졌습니다. 교도소가 줄어들고 법정이 불필요한 그런 사회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복음화란 말은 어디에도 적용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점점 배교의 길로 나아가지 결코 복음화의 길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사람들은 점점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퇴화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완벽하였다가도 죄가 들어오고, 죄와 연합하여 완전히 타락해 버리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영적 능력은 점점 사라지고, 주의 법은 무시됩니다. 아담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주어지고, 완벽한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죄 없는 순수의 시대라 불리는 이 때에 하나님은 분명하고 확실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에덴에서 사람은 ‘타락’으로 그 시대를 마감했습니다. 홍수 이전 시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양심의 시대라 불리는 이 시대는 음행과 폭력이 땅을 가득 채움으로써 사람들은 육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대홍수’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그 종말을 맞고 말았습니다. 홍수 이후에는 뭔가 달라졌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완전한 사람이었던 노아와 그의 가족들로 새롭게 시작된 시대였지만 바벨탑을 쌓다가 언어의 혼란으로 온 땅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새롭게 믿음의 가족을 만드셨으나 이삭, 야곱, 요셉을 거치면서 이집트의 노예 생활로 끝이 나고 맙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집트에서 불러낸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문법으로 된 율법을 주셨습니다. 시작은 언제나 하나님의 분명한 계시가 주어집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는 율법을 지키는 대신 배교를 반복하는 역사였습니다. 배교와 심판을 반복하다 결국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그 시대를 마감하고 맙니다. 모든 시대는 실패로 끝을 맺습니다. 그렇다면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이전 모든 시대가 실패로 끝났는데 ‘은혜의 시대는 다르다, 예외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의 끝에 대해서 비유를 들어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13:1-52)를 통해 뿌려진 씨앗의 1/4만이 제대로 열매를 맺을 것이며, 그 중에 일부만이 100배의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 땅에는 하나님이 뿌린 말씀의 씨앗과 악한 자 마귀가 뿌린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추수 때란 세상의 끝을 말하는데 주님께서 알곡과 가라지를 따로 거두어서 하나는 하늘의 창고로 하나는 불태워 버리십니다. 만약 세상이 모두 복음화 된다면 세상 끝에 대한 주님의 예언들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 가운데 세상 끝에는 2000년 전 복음 전파의 초기 시대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언급이나 암시조차도 없었음에 주목하십시오. 오늘날 어떤 교회도 초대 교회보다 더 영적이고, 능력있고, 순결하고, 믿음이 좋다는 식의 말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세월의 흐름은 믿음의 증진이 아니라 쇠퇴를 가져왔고, 순결이 아니라 오염을 가져왔습니다. 경건의 능력은 사라지고, 영적 공동체는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외치는 실정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겨자씨의 비유를 보십시오. 교회가 공중의 새들 즉 사탄의 사자들(마13:4,19)이 깃들어 변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겨자는 나물인데 겨자 나무로 변질이 되고 그 나무에는 새들이 깃들어 둥지를 트는데 이는 오늘날 교회에 들어온 각종 이익 집단, 정파, 교단 등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1-2에는 ‘거짓 교사들’이 누룩처럼 교회 내에 퍼지며, 부패시킬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 역시 우리가 현재 목격하고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누룩의 비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룩은 변질시키고 부패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뜨게 만들어 버립니다. 개신 교회를 비롯한 많은 설교자들이 누룩을 복음인 것처럼 이해하는데 이는 큰 오해입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언제나 나쁜 것입니다. 누룩은 스스로 번지지만 복음은 결코 스스로 번지지 않습니다. 만약 복음이 누룩과 같은 것이라면 온 세상은 이미 완전히 복음화가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물의 비유를 통해서도 그 속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함께 걸린다는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온 바다의 모든 고기가 그물에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나마 걸린 고기들은 그릇에 담겨지는 좋은 고기가 있고 버려지는 나쁜 고기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세상이 복음화 된 후에 주님이 오신다는 가르침은 거짓 교리이며, 성경을 오해하거나 왜곡한 가르침일 뿐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화요일 저녁에 주님께서 오실 때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해 주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들이 있겠사오며 또 이 모든 일들이 성취될 때에 무슨 표적이 있사오리이까? 하니](막13:4). 마태복음 24장과 마가복음 13장에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매우 길게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쟁과 전쟁의 소문, 지진, 기근, 역병과 같은 재난이 곳곳에서 터질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많은 이들이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속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난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하늘에도 표적이 있습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들의 권능들이 흔들립니다. 이것은 비유나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자연 현상으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사람들은 기쁘게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고(눅21:25-27),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애곡할 것입니다(계1:7).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주님은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눅18:8)는 말씀대로 불신으로 가득 찬 세대입니다. 세계가 복음화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마저도 배교함으로 완전히 세속화되어 믿음을 찾아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진화가 아니라 퇴화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복음화가 아니라 배교, 믿음이 아니라 불신을 가르칩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날들이 노아의 날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눅17:26). 그렇다면 노아의 날들이 어떠했는지 오늘날과 비교해 보면 재림의 징조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노아의 날들의 특징은
첫째,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에녹과 노아와 같은 선포자가 다가올 심판에 대해서 선포했지만 사람들은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사람들은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소수의 기독교 광신자들이 믿는 교리로 치부해 버리고 맙니다.
둘째, 하나님이 요구하는 희생 제물 대신 자기들이 정한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는 가인과 아벨의 예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피의 속죄를 드린 아벨보다 인간의 땀과 노력의 결실을 하나님께 들고 나온 가인의 후예들은 ‘피의 속죄’를 거부합니다. 종교는 많지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경배, 하나님이 정한 법대로 드리는 희생은 없는 세대입니다. 고등종교는 원시적인 ‘피의 속죄’를 거부한다는 식입니다. 이런 점에서 노아의 날들과 현 세대는 거의 일치합니다.
셋째, 급속한 도시 문명의 발달입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떠나 한 일은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시 문명은 문화, 예술, 사치, 방탕을 조장합니다. 오늘날 각국은 경쟁적으로 대도시를 건설하고, 도시 확장을 위해 노력합니다. 도시 인구의 폭증은 모든 악과 부패의 원인이 됩니다. 부패한 죄성을 가진 죄인들이 함께 모임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은 범죄 뿐입니다.
넷째, 여권 신장입니다. 노아의 날들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지위가 오늘날 어떤 민주주의 국가보다 발달해 있었습니다. 주님은 여인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창3:16)는 명령을 주셨지만 노아의 홍수 이전에 여인들은 집에서 나와 공적인 일을 하였을 뿐 아니라 자유연애를 즐겼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 비가 내릴 때까지 이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웠던 당시의 모습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여권 신장, 여성의 지위 향상을 빌미로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것과 같습니다.
다섯째, 공중의 영적 존재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했습니다(창6:2-4). 성경은 마지막 때에 바빌론이 ‘더러운 영의 소굴’(계18:2)이 될 것임을 말해 줍니다. 오늘날 강신술, 접신, 영매, 점성술 등 갖가지 더러운 영들과의 접촉을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마지막 날들의 표적 중에 하나입니다(딤전4:1-3). 과학의 발전과 지성의 발전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이 유독 영들, 외계인들의 존재에 대해서 끊임없는 호기심과 접촉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여섯째, 주님의 오심이란 재림의 가르침이 거부됩니다. 에녹은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전파했습니다(유14-15). 노아 역시 의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교리는 비웃음을 샀고(벧후3:3-4), 사람들은 자신들이 나름대로 만든 이론과 학설로 세상의 앞날을 예측하고 그것을 믿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조차도 주님의 재림이란 진리는 분쟁과 논쟁의 대상이 될 뿐 아무도 제대로 믿는 이가 없는 실정입니다. 재림의 교리는 이단 교리처럼 들리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노아의 날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복음 선포를 통해 세상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왕국, 하나님 없는 세계 건설이란 목표를 향해 뭉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증가 수는 인구 증가 수를 따라 잡은 적이 없고, 그나마 이미 믿고 있던 나라들의 교회와 성도들의 믿음은 급격히 무너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우리가 볼 수 있는 재림의 징조들에 대해서 몇 가지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비웃는 자들. [먼저 이것을 알라. 곧 마지막 날들에 비웃는 자들이 와서 자기들의 정욕을 따라 걸으며 이르되, 그분께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모든 것이 창조의 시작 이후에 있던 것같이 그대로 계속되느니라, 하리니](벧후3:3-4). 이 시대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는 건전한 교리가 조롱받는 시대입니다. 특히 휴거, 부활, 주의 재림과 같은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는 이들이 매우 적습니다. 재림에 대해 비웃는 자들이 속출하는 것이 바로 재림의 징조입니다. 둘째, 배교.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일어나고 저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드러나지 아니하면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라.](살후2:3). 마지막 시대의 특징은 복음의 확산이 아니라 배교의 확산입니다. 기독교의 문화, 기독교의 전통은 남아 있을지 몰라도 주님을 믿는 믿음, 성경을 믿는 신앙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을지 몰라도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일어나는 거듭남, 순결, 영적 능력 등을 믿지 않고 부인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셋째, 거짓 교사들.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니 그들은 정죄 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 오리라.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악독한 길들을 따를 터인즉 그들로 인해 진리의 길이 비방을 받을 것이요.](벧후2:1-2). 구약의 이스라엘에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다면 신약의 교회에는 거짓 교사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오는 것입니다. 목적은 ‘주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교회가 그런 거짓 교사들을 분별하고 그들의 이단적 가르침을 척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악독한 길들’을 따른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신학교의 강단은 거의 90% 이상이 거짓 교사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 교사들을 따른 이들이 교회의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무오성, 성경의 오류없는 보존, 성경 예언의 문자적 성취 등을 부정하는 것은 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심령술. 인간의 지성과 종교성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 역시 영적 지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교수들, 과학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부적을 지니고 다니고 점쟁이를 찾는 일은 이를 잘 입증해 줍니다.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셨으니](딤전4:1). 심령술, 접신, 점술이 성행할수록 우리는 마지막 때가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한국의 문화 관광부에서 민속 신앙, 토속 신앙이란 이름으로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를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해마다 엄청난 예산을 지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정부가 미신을 타파하고 점쟁이들과 무당들을 없애야 할 것 같은데 반대로 예산을 지원하고 활성화시키는 것입니다. 다섯째, 위험한 때- [또한 이것을 알지니 미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르리라.](딤후3:1). 위험한 때로 핵 전쟁이나 화확 무기, 석유나 개스와 같은 연료의 부족, 지구 온난화와 같은 기상 이변 등으로 ‘위험한 때’가 이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 상태가 점점 짐승 같아지는 인간성 상실, 믿음과 사랑과 같은 영적 상태의 황폐화 등으로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친구 간에, 부부지간에, 부자 지간에 마땅이 있어야 할 애정, 감사, 순종 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위험합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신성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본성의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자들을 멸시하며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딤후3:2-4).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세상이 말세라고 한탄한 적이 많지만 지금 신문, T.V에 보도되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일들의 1/100도 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여섯째, 재물의 축적. 어느 시대나 재물의 축적이 있었지만 오늘날과 같이 재물의 축적이 모든 것이 되는 시대는 없었습니다. 지금은 재물을 축적하는 것이 능력이고, 인격이고, 권력이고, 명예가 되어 버린 세대입니다. 재물을 모으지 못하면 무능력자에 현실을 살 수 없는 허무한 자로 여겨집니다. *약5:1-6 참조. 일곱째, 라오디케아 교회(계3:14-22). 주님이 문 밖에 서 있는 교회, 차지도 뜨겁지도 않는 교회, 재물이 많은 부요한 교회. 여덟째, 무화과 나무의 표적. 이스라엘의 회복(마24:1-3).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1948년 이스라엘은 전쟁 없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나라를 건국했습니다. 2000년 간 나라 없이 떠돌던 민족이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예언의 시계요, 표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아홉째, 노아의 날들과 롯의 날들. 주님이 주신 마지막 날들에 대한 표적이다.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시대의 표적들, 재림의 징조들을 유념해서 보아야 합니다. 기다림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동시에 주님께서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데려 가시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은 나팔 소리가 나기를 기다립니다. 살아 있는 성도들은 들림 받기를 기다립니다. 낙원에 있는 의인들의 혼들은 새 몸을 입기를 기다립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는 것과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기다립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주님이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우리 눈에 보이도록 영광 가운데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며,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