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의 부활
요절: 막13:4 그리스도의 재림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친히 오시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께로 갑니다. 만남의 장소는 공중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는 날 살아 있는 성도들은 모두 순식간에 공중으로 들림을 받습니다. 우리의 몸은 순식간에 변화를 받습니다. 이것이 휴거입니다. 휴거란 말은 성경에 나오는 용어가 아니지만 ‘순식간에 들림을 받는다’는 뜻의 라틴어로 성경적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성도들 즉 땅에 묻힌 자들은 무덤이 열리며 순식간에 부활을 경험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재림과 부활에 대해서 공부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에 사두개인이라고 하는 유대교의 한 종파는 문자적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과 천사와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바리새인들이나 일반 유대인들은 모두 부활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부활이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부활은 성경의 교리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부활은 계속해서 언급됩니다. 우리는 구약 성도들이 부활에 대해서 어떻게 선포하는지 살펴 볼 것입니다. 욥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시는 것을 내가 아노니 마지막 날에 그분께서 땅 위에 서시리라. 내 살갗의 벌레들이 이 몸을 멸할지라도 내가 여전히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 콩팥이 내 속에서 소멸될지라도 내가 직접 그분을 보리니 다른 것이 아니요, 내 눈이 바라보리로다.](욥기19:25-27). 욥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믿은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내 눈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부활한 몸에 대한 영적 지식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다윗 역시 부활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자신의 부활을 믿었기에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이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소망 중에 안식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남겨 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니라.](시편16:9,10). 다윗의 이 말씀은 신약 성경에서 부활을 선포할 때 그대로 인용된 말씀입니다. 주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대언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부활의 진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겠고 그들이 나의 죽은 몸과 함께 일어나리이다. 흙 속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할지어다. 주의 이슬은 채소의 이슬 같으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 놓으리로다.](사26:19). 이 구절은 죽은 몸, 육체의 부활에 대한 분명한 증언입니다. 이슬을 맞은 땅 속에서 풀이 나오듯이 땅 속에 있던 사람들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날 이 일이 문자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잠자는 자들 중의 많은 사람이 깨어나 얼마는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고 얼마는 수치와 영존하는 치욕에 이르며](단12:2). 몸이 죽어 완전히 흙으로 돌아간 상태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잠자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깨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호세아를 보십시오. [내가 그들을 무덤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으로부터 구속하리니, 오 사망아, 내가 네 재앙이 되리라. 오 무덤아, 내가 네 파멸이 되리라. 뜻을 돌이키는 것이 내 눈을 떠나 숨으리로다.](호13:14). 사도 바울은 부활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이미 부활은 구약의 대언자들을 통해서 분명히 선포된 진리이고 부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11:25)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역시 자신의 독생자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그의 부활을 믿었습니다(창22:5 vs 히11:19). 우리는 성경에서 부활의 역사적 사건, 예들을 몇 차례 볼 수 있습니다(왕상 17:17-24, 왕하4:32-35, 13:21). 신약 성경에서 부활에 대한 말씀들은 너무나 많기 때문에 따로 논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고, 모든 사도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어 부활을 선포했습니다. 언제 우리 몸이 부활하는가?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죽음이 헛되고, 재림이 없다면 부활이 헛됩니다. 주님이 오시지 않으면 부활은 무효가 되고 맙니다. 성경의 모든 영광스런 약속들은 부활한 후에 문자적으로, 실제적으로 주어질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성도들에게 갖는 가장 중요한 의의는 ‘부활’입니다. 재림과 부활은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재림의 날이 부활의 날입니다. 산 자들의 휴거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부활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몸은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이든 다 죽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6:23).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히9:27). 우리가 죽어서 땅에 묻히는 것을 땅에다 씨를 뿌리는 것으로 말합니다. “썩는 것으로 뿌리고”(고전15:42), 천한 것으로 뿌리고(고전15:43), 약한 것으로 뿌리고(고전15:43), 본성에 속한 몸으로 뿌린다(고전15:44)고 말합니다. 육신의 몸의 특징은 썩는 것, 천한 것, 약한 것, 본성에 속한 것입니다. 이 몸은 복음을 믿고, 성령 침례를 받는다고 해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 변화를 받거나 부활을 통해서만 완전해 집니다. 고린도전서 15:42-44을 보십시오.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라. 그것은 썩는 것 가운데 뿌려지고 썩지 않는 것 가운데 일으켜지며 수치 가운데 뿌려지고 영광 가운데 일으켜지며 연약함 가운데 뿌려지고 권능 가운데 일으켜지며 본성에 속한 몸으로 뿌려지고 영에 속한 몸으로 일으켜지나니 본성에 속한 몸이 있고 영에 속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2-44). 육신의 몸은 현재 우리가 입고 있는 이 몸입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몸이요, 죄로 인해 흙으로 돌아가야 할 몸입니다. 창조의 마지막 날 흙으로 지으시고 그 속에 호흡을 불어 넣으셔서 영과 혼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새 몸은 영이 거듭나고 혼이 구원받은 후에 주님 오시는 그 날에 몸을 입는 정 반대의 순서가 됩니다. 재림하는 날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한 날에 동일한 몸을 입게 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날 땅 위에 살던 성도들, 땅 속에 잠자던 성도들이 모두 순식간에 저 하늘로 올라가 전혀 새로운 몸을 입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42-44에 따르면 부활한 몸의 특징은 “썩지 않는다, 영광 가운데 일으켜진다, 권능 가운데 일으켜진다, 영에 속한 몸으로 일으켜진다.” 는 것입니다. 썩지 않는다는 것은 영원함을 말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환경에 따라 몸이 약해지거나 늙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활한 몸은 그 재료가 흙이 아니고, 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광 가운데 일으켜진다는 것은 우리가 하늘의 거룩한 천사들처럼, 우리 주님의 몸과 같은 그런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일한 모습의 몸을 갖게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복입니다. 영광의 몸에 대해서는 이미 변화산에서 변화되신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약간이나마 볼 수 있습니다. 천사들은 날개가 없지만 날 수 있습니다. 부활한 몸은 날개가 없지만 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력이나 청력이나 음성, 의사 소통 등은 지금 육신의 몸이 갖는 제약을 완전히 벗어날 것입니다. 하늘의 별과 별들 사이를 마음대로 다닐 것이며, 빛보다 빠른 속도로 하늘과 땅을 오고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권능 가운데 일으켜 진다’는 말은 영적 권능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한 몸은 그 물리적 힘도 엄청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삼손의 힘을 능가할 것은 물론이요, 소위 말하는 초능력이 자연스런 몸의 능력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지혜 역시 다니엘이나 솔로몬을 능가하게 될 것입니다. 영에 속한 몸으로 일으켜진다는 것은 우리 몸이 실체도 없는 유령 같은 몸이 아니란 것입니다. 부활의 몸은 현재 우리의 몸과 마찬가지로 살과 뼈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몸은 ‘혼에 속한 사람’으로서 정신에 따라 몸이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은 영의 지배를 받고, 영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거듭난 영, 하나님이 새롭게 부어 주신 새 사람에 맞는 새 몸을 입는 것입니다. 영에 속한 몸은 먹고, 마시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등 현재 육신의 몸이 할 수 있는 일들은 모두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몸을 ‘구속받은 몸’(롬8:23), ‘영광스런 몸’(빌3:20,21)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부활한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몸과 동일할 것입니다. 옥수수의 씨를 심었을 때 옥수수를 맺듯이 우리의 현재 썩을 몸이 심겨졌을 때 썩지 않을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고전15:43,53). 요한일서 3:2,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지금 계시는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요일3:2). *그분께서 나타나시면=재림의 날에. 이 모든 일이 오직 그분의 재림에 달려 있고, 재림의 날에 있게 될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새 몸을 입히셔서 함께 있게 하십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부활한 몸과 동일한 특징을 지니게 됩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자신의 몸을 제자들에게 보이시면서 부활한 몸이 어떤 몸인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a. 알아 볼 수 있다-눅24:31 b. 만질 수 있다-눅24:39, 요20:27 c. 제한이 없다-요20:19 d. 먹을 수 있다-눅24:42, 요21:12 e. 사라질 수 있다-눅24:31. 주님의 재림은 우리의 몸과 관계가 있습니다. 부활이란 기본적으로 몸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모든 성도들의 영은 거듭나고, 혼은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이는 주님의 초림의 사역의 결과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몸이라고 해도 그 몸은 여전히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믿음이 충만하고 은혜가 충만하다 해도 육신의 몸은 여전히 약하고 천한 몸입니다. 병이 들고, 다치고, 매일 늙어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재림으로 더불어 성도들은 더 이상 죽음이란 것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늙음도 병든 것도 보지 않을 것입니다. 몸은 건강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현재 이 땅의 사람들은 몸의 건강, 몸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지 여러분도 잘 알 것입니다. 몸의 건강 관리, 체력 관리를 위해서 온 힘을 다 씁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예민해 지는 것이 건강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성도든 불신자든 몸에 대한 염려를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우리는 썩지 않는 몸으로 일으켜져 이후로 결코 지치거나 늙지 않는 33세 반의 건장한 남성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역사의 고금을 막론하고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는 길을 찾아 헤매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불로초를 찾아 헤맨 이는 진시황제만이 아닙니다. 스페인의 탐험가였던 Ponce deLeon은 젊음의 샘을 찾아 평생을 허비했습니다. 배우들은 자신들의 늙어가는 모습을 감추기 위해 분장을 하고 주름을 제거하고, 몸에 칼을 대는 성형을 서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화장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가리려고 합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이런 인간들의 모습은 점점 심해지면 심해졌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시면 성도들은 단번에 영원히 몸의 늙음, 쇠함, 약함, 병듦, 죽음 등에서 해방됩니다. 주님이 오실 때 휴거되거나 부활한 성도의 몸은 영원토록 늙지 않는 몸이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젊음의 샘을 가지고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아침의 태(胎)에서 나오는 거룩함의 그 아름다운 것들로 /옷 입고/ 자원하리니 주께는 주의 청춘의 이슬이 있나이다](시110:3). *청춘의 이슬. 지금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없고, 모두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쇠퇴해집니다. 그러나 부활한 몸은 날마다 새롭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소망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새 몸은 새 옷, 새 집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성도들의 부활한 영적인 몸은 영광 가운데 능력 있고, 죄 없고, 썩지 않을 몸이기 때문입니다. 화장도, 운동도, 약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의 육신의 몸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지만 신자들은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영광스런 새 몸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즐거워하며 영광스런 기쁨으로 기뻐합니다. 그 때 우리의 몸은 말 그대로 영광스럽게 되어 슬픔도 고통도 연민도 맛보지 않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부지런히 혼들을 이겨 와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값없이 주실 이 놀라운 선물이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기기 때문입니다. 전도란 이 땅에서 한 세상 믿음으로 살다 평안히 죽자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평안해 지기 위해서 주님을 의지하자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전도의 목적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죄의식을 제거하기 위해서 교회를 도피처로 삼아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 영광스런 부활을 위해서 우리는 혼들을 이겨 와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우리가 부활하는 그 날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이 부활하고 천년이 지난 후에야 부활할 것인데, 이를 ‘악인의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주님의 큰 백 보좌 심판에서 심판을 받기 위해 일으켜졌다가 다시 불 못으로 던져지는 둘째 사망을 맞게 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던 이들은 대 환란을 통과해야 합니다. 주님은 믿지 않는 자들을 불 가운데서 징벌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진노는 사람들이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대환란은 창조 이후로 없었던 그런 엄청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복된 소망을 지닌 우리는 동시에 구원받지 못한 혼들에 대한 엄청난 부담을 안고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금 아무런 부담없이 잘 먹고 잘 삽니다. 어떤 면에서는 믿는 성도들이 도리어 그들의 삶을 부러워해야 할 만큼 아무 걱정없이 살아가는 듯이 보입니다.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갑니다. 능력과 지혜를 발휘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도 육신의 쇠약함과 죽음과 동시에 끝이 나고 맙니다.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소망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오셔도 그들은 여전히 땅속에 있을 뿐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한시적으로만 혼이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혼은 주님이 오신 날에도 여전히 불 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을 것이며, 주님이 이 땅을 다스리는 동안에도 여전히 불타는 고통 가운데 울부짖을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땅이 아무리 살기 어렵고 힘들더라도 이보다 더 나은 삶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평생토록 몸을 병상의 침대에 놓여있고, 산소마스크를 통해 겨우 숨을 이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삶이 최선이요, 최상입니다. 그 이후에는 혼은 지옥, 몸은 심판 받기 위해 영벌의 부활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성도들이 이 땅에서 최상의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장차 다가올 영광의 비중에는 비할 수 없습니다. 다가올 세상은 지금 현 세상보다 몇 백배 더 좋고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말하기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잠자는 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깨어나 얼마는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겠고 얼마는 수치와 영존하는 치욕에 이를 것이며](단12:2)라고 한 대로 ‘수치와 영존하는 치욕에 이르는’ 부활이 전부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에 놀라지 말라. 이는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기 때문이니 선을 행한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들은 영벌(永罰)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5:28~29). “영벌의 부활”이란 불 못에 던져질 둘째 사망에 처해지기 위해 잠깐 부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부활은 주님의 재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성도들의 부활을 위한 것이지 불신자들, 악인들의 부활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24:15,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행24:15). 두 부활은 같은 것이 아니라 1000년이란 시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나는 별개의 사건입니다. 천년 왕국 이전에 한 번의 부활이 있고, 천년 왕국이 끝나고 한 번의 부활이 있습니다(참조, 계시록20:5). 성도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의인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부활 때에 받게 될 새 몸, 완전히 변화될 새 사람으로 인해 기쁩니다. 그 날에 우리가 받게 될 보상이 있어 또한 즐겁습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네게 보답하지 못하므로 네게 복이 있으리니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으리라, 하시니라.](눅14:14). 주의 재림은 의인의 부활, 새 몸, 보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의 부활한 몸에 대해서는 성경은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단지 마태복음 5:29,30을 통해서 썩을 몸이며, 둘째 사망의 고통과 불꽃 가운데 시달릴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의 재림과 부활이 어떤 관계가 있으며 왜 이 땅에서 우리가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배웠습니다. 재림의 소망과 열망이 크고 뜨거울 수록 잃어버린 혼들에 대한 구령의 열정도 커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산 소망, 복된 소망, 영광스런 소망을 더욱 새롭게 해 주시길 빕니다. 결론: 재림의 날은 성도들의 부활의 날이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