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가까우니라
말씀: 히10:37요절: 히10:37 오늘은 ‘재림의 긴박성’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살고 있습니까? 사람은 모두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아는 이는 없습니다. 죽음보다 확실한 것이 없지만 죽음의 긴박성을 느끼며 사는 이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 내일일지, 오늘일지 아니면 지금 당장일지 모른다’는 말에는 동의하고 공감하지만 언제나 죽지 않는 것처럼 생활합니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오심, 재림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습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거듭난 성도라면 주님의 재림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에 대해 ‘긴박성’을 느끼거나 인식하며 사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평소 육신의 죽음에 대해 준비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성도들은 주님의 오심을 알면서도 아무런 준비 없이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의 오심을 맞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역사상 어느 시기보다 주님의 오심을 가까이에 두고 있습니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어떤 날, 어떤 시각을 정해 두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날과 시’를 기다리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time)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의 오심” 즉 주님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의 재림이 어느 날, 어느 때인지 모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이는 어느 시각에 너희 {주}가 올지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마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이는 너희가 사람의 아들이 오는 그 날도 그 시각도 알지 못하느니라.](마25:13)고 하셨습니다. 때로 몇몇 사람들이 주님의 재림을 예언하거나 나름대로 날짜를 계산해서 제시했지만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주님의 사도들 역시 주님의 재림 시기를 알고 싶어 했지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능 안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행1:7). 주님은 제자들에게 때와 시기를 알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재림의 시기, 날짜, 때를 예측하는 일들이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은 주로 아모스 3:7을 인용합니다. [분명히 {주} [하나님]은 자신의 은밀한 일을 자신의 종 대언자들에게 계시하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암3:7). 이 구절은 주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재림의 날짜’를 계시해 준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자신의 은밀한 일’을 어떻게 행하실지 다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주님의 오심을 맞이해야 하는지 다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오심이 어떠한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신 그 모습 그대로 천사들과 함께 이 땅에 임하실 것입니다. 주의 오심을 대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이 시키신 일들을 신실하게 부지런히 하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제게 “주님은 언제 오십니까?”라고 물으면 조금도 주저함 없이 정확히 대답해 줄 수 있습니다. “속히
오십니다.” 언제라고여? “반드시 속히”(quickly) 오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반복해서 말해 주는 대답이요, 정답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언제 죽습니까? 언제라도 죽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 오십니까? 언제라도 오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복된 소망, 영광스런 소망을 기다리지 않고, 선포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긴박성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감각이 무디어졌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2000년 전부터 설교자들은 “때가
가까우니라”고 선포했지만 아직도 “주님은 오시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침례인 요한은 “회개하라,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가까이’란 말이 정확히 얼마의 시간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성경은 주님께서 “속히 오리라”라고 말씀하지만 ‘속히’란 말이 천년,
이천년이 넘어섰다고 하면서 회의적인 시각을 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들은 자신들의 생애에 주님이 오실 줄로 알았지만 주님의 오심은 결국
한 세기를 넘어서 현재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재림은 물 건너 간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가면 그만인 것입니까? 자, 보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이 소망은 혼의 닻과 같아서
확실하고 굳건하여 휘장 안에 있는 곳으로 들어가나니](히6:19). 재림의 소망은 혼의 닻과 같은 것입니다. 이 소망이 우리를 하늘의
지성소로 인도해 줍니다. 재림의 소망 없이 사는 성도라면 지금 현실을 아무리 신실하게 산다고 해도 닻이 없는 배와 같아서 인생의 항로는 늘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재림이란 복된 소망, 영광스런 소망, 산 소망의 닻이 있기에 성령의 바람을 받아 달리는 것입니다. 재림의
소망이 없는 이들의 신앙은 고인 물과 같이, 바람 없는 배와 같이 정체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베드로는 말하기를 주님의 재림이 결코 늦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신 것이 아니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주의 오래 참으심을 오해해서 재림의
약속이 무효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주님의 재림의 임박성에 대한 믿음은 점점 약해지고 마침내 재림은 없다고 생각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주의
오심이 기대하는 때에 즉각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모두 ‘자신의 때’에 맞게 일하시며, 때가 충분히 차면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만약 성도들이 ‘내 주인이 오시기를 늦추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 그는 깨어있지 못할 것입니다. 주의 뜻을 행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재림의 긴박성에 대한 의식이 없는 한 종의 예를 보십시오. [그러나 그 종이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내 주인이
오시기를 늦추시는구나, 하며 남종과 여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고 취하기 시작하면 그가 그를 기다리지 않는 날 그가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잘라 내고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그의 몫을 그에게 지정하리라.] (눅12:45~46). 주의 오심을 자기
마음대로 예측하고, 계산했던 종은 주의 오심을 “알 수 없는 먼 훗날”로 잡았습니다. 최소한 자신의 생애에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믿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속히 오리라)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내 주인이 오시기를 늦추시는구나)을 믿는 이들은 불신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특정한 때, 특정한
시각만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2: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너희가
생각하지 않는 시각에 사람의 아들이 오느니라.](눅12:40). 준비하라고 해서 특별히 준비 사항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오심을
소망하고, 사모하고, 인내로 기다리는 것이 준비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떤 때입니까? [또한 때를 알거니와 지금이 잠에서
깨어야 할 바로 그때이니 이는 지금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보다 가깝기 때문이라.](롬13:11). 주님의 오심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몇 십 년, 몇 백 년, 몇 천 년 뒤에 있다고 할지라도 주의 재림은 여전히 가까운 것이지 먼 것이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몇
천 년이면 아득히 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은 길게는 몇 십 년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애를 ‘길다, 오래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백세를 넘게 산 사람도 모두
[인생은 한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기나 긴 날들이 아니라 모두 한 날, 한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기다린 시각 역시 한 순간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구원받은 후 20년 동안 주님의 오심을 기다렸습니다. 앞으로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 물어 보십시오. 주님 언제 오십니까? [내가
속히 오리라.](계22:12)는 답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언제나 ‘곧, 가까이, 속히’란 말로 요약됩니다.
이 말씀을 듣고 또 그 소리라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대부분의 성도들이 막상 주님이 오실 때 살아 있다면, “이제야 주님이 오시는구나!”란
생각보다 “주님께서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다.”는 생각이 훨씬 더 많이 들 것입니다. 평소에 주님의 오심을 기대하고 사모하고 깨어서 인내로
기다린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주님이 진실로 속히 오셨도다!”란 말 밖에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이렇게 빨리
주님이 오실 줄은 몰랐다”고 후회하고 한탄할 것입니다. 대언자 아모스는 말하기를, [... 오 이스라엘아,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할 것인즉
/너는/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할지니라.](암4:12b)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가장 많이 말씀하신 분은 단연 ‘주님’
자신입니다. 주님은 어떤 대언자들이나 사도들보다 ‘재림’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올
때에”(마24:46),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 중에 모든 거룩한 천사와
함께 올 때에”(마25:41),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중에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막8:38), “내가 다시 오리라.”(요14:2)
등 주님은 자신의 오심에 대해서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뿐 아니라 재림에 대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이미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다시 오심’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초림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오심이 전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몸으로 친히 이 땅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예언들은 모두 “속히”(quickly)될 일들입니다.
자, 요한계시록 22장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더라.](계22:7).
*내가 속히 오리니(I come quickly)- 주님은 내가 속히
가리니(go)란 말씀 대신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입장에서 말씀하지 않고 ‘우리의 편, 우리 입장’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세상의 원리, 육신의
정욕대로, 자기 의지대로 사는 이들은 주님의 재림이 하루라도 늦추어지기를 원합니다. 지금 당장, 이번 주에, 이번 달에, 올 해 안에 주님이
오신다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말씀들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의 속히 오심이 자신에게 복이 아니라 재앙임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재림 신앙을 가진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지키며 삽니다. 주님의 오심이 세상과 불신자들에게는 저주요, 화(禍)겠지만 자신에겐
[복된 일]이기에 더욱 사모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오심이 나에게 복된 일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 구절 더 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보상(報償)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 행위에
따라 주리라.](계22:12). 주님으로부터 보상을 기대하고 받을 보상이 있는 이들은 주님의 오심을 사모합니다. 시상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짧은 시간도 길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보상을 믿고 이 땅을 사는 성도들은 '믿음의 활동,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살전1:3,
히6:10)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주님의 속히 오심을 믿습니다. 어느 덧 일을 하다가 주님이 오실 때 주님을 위해 좀 더 헌신하지
못했던 자신을 회개하며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많은 시간들을 아끼지 못하고 낭비했던 것들을 후회할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을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믿지도 않고 자신만을 위해 산 성도들은 주님이 어느 날 오셨을 때 마치 갑작스럽게 닥친 재앙이나 되는 것처럼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주를 위해 아무 한 일도 없이 이렇게 주를 만나는구나!”란 생각을 지닌 이들은 하루하루가 짧게 느껴지고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재림
신앙은 도피 신앙이 아닙니다.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고, 죄의 권능을 이기지 못해 양심의 가책과 시달림을 받는 등등의 일로 인해 “주님이나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셨을 때 “내게 좀 더 시간이 주어졌으면!”라는 후회가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 하시는도다.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계22:20).
주님은 반복해서 ‘내가 속히(quickly) 오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의 재림을 가장 갈망하는 분은 바로 주님 자신입니다. 주님은 조금이라도
빨리 이 땅에 오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과 같이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죄악이 충만히 찰 때까지’ 기다리셨다고 심판의
때가 되어 오실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1. 구원받은 성도의 수가 찰 때까지 주님의 재림은 없을 것이다. 2. 온 세상에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기 전까지는 재림이 없을 것이다. 3. 회교도나 유대인들이 회심할 때까지 주님의 재림은 없을 것이다. 등등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사적인 견해일 뿐 성경의 진리가 아닙니다. 로마서 11:25에 나오는 “이방인들의 충만함”이란 구원받은 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죄악이 충만히 차는 때를 말합니다. 주님은 죄에 대한 심판을 집행할 때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를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성경은 말하기를, [조금만 있으면 오실 이가 오실 것이요,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10:37)고 합니다.
*조금만 있으면(a little while)-잠시 동안. 이제 주님이 말씀하신 ‘잠시’는 어느 날 한 순간에 임할 것입니다.
주님은 ‘재림’을 [도둑같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하필이면
‘도둑’에 비유하신 것입니까? 이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 예상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도둑은 은밀히 와서 보물을 가져 갑니다. 성도는 모두
‘특별한 보배’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성도들을 데려 가시기 때문입니다. 잠든 성도들과 살아 있는 성도들을 모두 저 하늘로 옮겨
버리시면 세상은 쭉정이들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깨어 있어야 합니다.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깨어 있어 자기 옷을
지키고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여 자기 수치를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16:15).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어야 합니다(롬13:14). 모든 일에 사랑을 덧입어야 합니다(골3:14). 영으로 단장하고, 겸손으로 옷 입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입고 있는 복장부터 다른 법입니다. [이는 {주}의 날이 밤의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완전히 알기 때문이요,](살전5:2). 깨어 있을 때 도적이 들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소리가 들리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주님이 하늘로부터 “이리 올라 오라”는 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천둥 소리로 알아 듣겠지만 성도들은 그 소리가
주님의 공중 재림이란 것을 금방 알아 챌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그러나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 속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같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리라.](살전5:4)고 합니다.
주님의 오심은 한 순간입니다. 부활과 들림 받는 것도 한
순간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의 재림을 증거하는 방법은 이것입니다. 빌립보서 4:5, [너희의 절제를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우리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구제하지 않고,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히 해야 하지만 ‘우리의 절제’를 모든 사람이 알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돈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삽니다. 이것이
절제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대신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이것이 절제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야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이 없어서 세상 사람들과 경쟁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없어서 공부에 목을 매고, 학위나 명예를 얻는데 매진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 없어서 부드러운 것이 아닙니다. 힘이 없어서 박해나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나 혼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위해서,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지 않는 것이 절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좋은 머리로 학문에 매진하지 않고 왜 성경만 끼고 사느냐?”, “그 좋은 재주를 왜 돈벌이에 써 먹지 않고
교회 일만 하느냐?”고 말합니다. 이것이 ‘절제’입니다. 성도들은 꿈, 야망, 능력, 힘, 돈, 가족 등 무엇에나 절제함으로써 ‘절제’를 모든
사람이 알게 해야 합니다.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이 이 세상이 영원한 곳인 것처럼 사는 것은 간증을 파괴하고 주의 오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은
‘인내’입니다. [너희도 인내하고 마음을 굳건히 하라. {주}의 오심이 가까우니라.](약5:8). 인내는 받은 말씀을 간직함으로
열매를 맺게 합니다(눅8:15). 인내는 약속을 상속받게 하는 것입니다(히6:12). 인내는 믿음의 경주를 할 때 필요한 것입니다(히12:1).
인내는 소망하는 것들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인내로 기다릴지니라.](롬8:25). 그러므로
주의 오심을 믿고 기다리는 자들은 인내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의 오심을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저와 여러분이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은 몇 백 년이
아닙니다. 눈 깜짝할 사이, 한 순간이란 표현에 맞는 매우 짧은 시간입니다. 주님의 오심이 가깝습니다. 주의 오심을 더욱 사모하고, 소망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주님, 속히 오시옵소서. 기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