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복된 소망


말씀: 딛2:13
요절: 딛2:13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외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는 믿음은 우리를 단지 기독교적 특성을 갖는 종교인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요, 생명의 소망을 지니게 합니다. 은혜로 주어진 믿음만이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란 진리는 반복적으로 듣는 말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의 소유자들입니다. 믿음이 없는 성도란 말이 존재할 수 없듯이 소망이 없는 성도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소망의 실체이기 때문입니다(히11:1).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창시자이며 완성자이십니다(히12:2). 예수 그리스도는 소망의 주체이며, 대상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복된 소망으로 충만한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복된 소망이란 무엇입니까? 이 소망은 믿는 자들에게 영적인 복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복을 주는 소망이란 뜻입니다. 복권은 추첨을 해서 당첨된 자에게만 상금을 지급하지만 복된 소망은 그 소망을 가진 자라면 누구에게나 100% 주어집니다. 소망은 살아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연합된 자에게 소망이 있나니 이는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으니라.](전9:4). 영적으로 거듭난 자만이 살아 있는 자입니다. 살아 있는 자만이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믿음도 소망도 없습니다. 불신자들이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엡2:12).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복된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오직 나는 계속해서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양하리이다.](시71:14). 믿음과 소망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현대 기독교는 성경적 어휘와 세상의 어휘의 혼용, 오용 등으로 인해 큰 혼란을 겪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과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결코 같지 않듯이 믿음이나 소망 역시 그러합니다. 아무리 좋은 사전이라고 그 정의(definition)은 사람들의 견해에 따른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정의된 개념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믿음, 소망, 사랑, 은혜, 긍휼, 영광과 같은 흔하지만 기본적인 어휘들의 의미를 새롭게 배우게 됩니다. 사람들은 지금은 없지만 앞으로 장차 갖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을 [희망, 소망]이라고 합니다. ‘희망(소망)을 가져라,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등이 그런 예입니다. “꿈을 갖는 것은 공짜다. 그건 어디까지나 너의 희망 사항이지...” 등의 말은 기대, 꿈 등은 ‘가능성’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강단의 유행 중 하나가 성도들에게 “꿈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소망을 꿈과 비전(vision), 때로는 야망이나 욕망, 소원등과 착각하게 합니다. 긍정적 생각, 적극적 사고 방식, 마음 속에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리는 것 등과 같은 설교가 인기를 끕니다. 성경은 Dream Works(꿈은 이루어진다)가 아니라 Faith works(믿음은 일한다), Words of God works(말씀은 일한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든든히 세웁니다(행20:32).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자 안에서 효력 있게 일합니다(살전2;13). 꿈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은 꿈이 아닙니다. 꿈은 내가 주체이고, 소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체입니다. 꿈은 나의 생각과 상상에서 나온 것이고 소망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나온 것입니다. 꿈은 나의 뜻이 실현되는 것이고 소망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꿈은 믿음이 없이도 생길 수 있지만 소망은 믿음이 없이는 생길 수 없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생성된 소원, 욕망이 소망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것들은 주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주를 기뻐하고(시37:4),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할 때 바라는 것들은 이루어 집니다(요일3:22). [너는 또 [주]를 기뻐하라. 그분께서 네 마음의 소원들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라.](시37:4).

세상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사는 것, 유명해 지는 것, 건강하고, 남에게 욕먹지 않고 존경을 받는 것, 지위나 권세를 갖는 것, 후세에 무엇인가를 남길 수 있는 업적이나 성취를 이루는 것 등등이 올해의 소원이요, 평생의 소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소원도 막상 들어보면 거기서 거기입니다. 독립 운동을 하던 김 구 선생은 자신의 소원은 첫째도 조선의 독립, 둘째도 조선의 독립, 셋째도 조선의 독립이었습니다. 그러나 독립 된 후에는 누구도 ‘조선의 독립’을 소원이라고 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이미 일어난 일,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 이루어진 일을 가지고 소원, 소망, 희망이라고 하는 이는 없기 때문입니다. 독립을 했지만 남북이 분단되자 온 국민에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를 가르쳤습니다. 평생을 통일 운동에 전념하는 이들도 나왔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민주화된 조국을 보는 것이 소망이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근대화된 조국, 경제 발전을 이룬 조국을 보는 것이 소망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인 저희들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온 세계가 복음화 되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입니까? 그런 것들은 거룩한 소망처럼 보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이것을 소망합니다. 온 세상에 모든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참으로 위대하고 복된 일입니다. 복음 전파, 영혼 구령, 세계 선교, 기독교 교육, 봉사 등은 성도들이 당연히 전력을 다해 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의 소망은 아닙니다. 누가 나의 꿈은 지구촌 복음화라고 한다면 고상한 꿈이요, 위대한 소망처럼 보일지라도 개꿈이요, 망상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교회가 ‘더 나은 사회, 더 살기 좋은 지구촌, 전쟁 없는 평화...’ 등등을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회, 국가 건설을 꿈꾸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성도들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성경에서 소망이라고 할 때 소망은 ‘부활의 소망’ 아니면 ‘재림의 소망’입니다. 디도서 2:13, [저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느니라.](딛2:13).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을 때 그 믿음은 곧 바로 복된 소망이 됩니다. 믿음은 소망하는 것들의 실체(히11:1)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진리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복(福)이 아니라 저주요, 재앙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주께서 임하심으로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라고 합니다. 즉 이들에게 주의 재림은 저주를 받는 순간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 위에는 이미 하나님의 진노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순간 그 진노에 대한 집행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주님의 오심을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7b-9절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자신의 강력한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타오르는 부로 징벌하실 때에 /그리하시리라/.](살후1:7b-9). 주님의 오심은 사탄과 마귀에게도 재앙 중의 재앙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이 진리를 가리고 왜곡하는데 온 힘을 쓰고 있습니다. 재림에 대한 갖가지 해석과 이단 분파들로 인해서 어느 덧 교회는 ‘복된 소망’, ‘영광의 소망’을 별로 가르치지도 선포하지도 않습니다. 넘치는 기쁨과 설레임으로 기다려야 할 ‘그리스도의 오심’을 사모하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게 되어 버렸습니다. 자, 보십시오. 로마서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음이라. 그러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8:24). 소망이 없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소망의 실체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믿음의 실체로 구원 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입니다(골1:27). 소망이 없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성경은 주님의 오심을 ‘복된 소망’이라고 합니까? 주님의 오심으로 인해 믿는 신자들은 물론이요, 이 땅과 자연 피조물들에게까지 주님의 놀라운 복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이 세상에 들어온 죄와 저주와 사망이 풀릴 것입니다. 마귀가 지하의 끝없이 깊은 구렁에 갇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든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사회적 문제들을 일거에 완전히 해결되는 순간입니다. 모든 정치인들이 헛되이 남발하는 꿈과 희망들은 정치 지도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해결될 것입니다. 모든 불평등과 차별의 해소, 분열과 갈등의 해결은 사회 단체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AIDS, 암, 각종 전염 병 등과 같은 질병 없는 지구촌, 건강한 몸은 제약회사나 의사들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질 일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 각계각층의 모든 전문가들이 이루고자 하는 꿈의 실현이 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생명 연장의 꿈 이루어집니다. *기아 빈곤 질병 없는 사회 이루어집니다. *공평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세상이 이루어집니다. *전쟁과 갈등이 없는 사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중동 문제는 결코 정치와 외교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자연히 해결됩니다. *이단 척결, 사이비 종교 척결 등은 주님의 오심으로 해결됩니다. *마귀들이 없는 세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돈과 능력, 학벌 등으로 대변되는 외모의 차별이 없는 사회 이루어집니다. 그동안 인간의 연구 개발, 발전으로 결코 이룰 수 없던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으로 인해 어둠에 감추어진 일들은 모두 밝혀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사람들의 생각, 삶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충격적인, 혁명적인 변화입니다. 설명과 이해가 불가능해서 단지 기적이요, 신비라고 말했던 모든 것들이 모두 알려지고 이해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건 한 가지 한 가지를 ‘소망’이라고 하지 않고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순간 친히 행하실 일이기에 예수님의 오심을 성경은 [복된 소망/ Blessed hope]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지 않고 인간의 힘과 지혜로 마음 속에 있는 소망들을 성취해 보려고 합니다. 심지어 성도들조차도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신 교세를 확장하고, 돈과 사람을 이용해서 기독교 정당을 만들고, 기독교 방송국이나 신문을 만들고, 기독교 학교를 만들고, 기독교 사회 단체를 만들고, 기타 여러 가지 조직을 만들어서 주님이 오셔서 해야 할 일들을 미리 해야 하는 것처럼 고상한 목표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소망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현재 이 땅에서 하시는 일과 직접 구름을 타고 이 땅에 친히 오셔서 장차 이 땅에서 행하실 일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오심이 소망이 아니라면 그는 ‘복된 소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 본 분이라면 ‘의의 소망(갈5:5), 복된 소망(딛2:13), 산 소망(벧전1:3), 영광스런 소망, 생명의 소망’이라는 다양한 표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의의 소망’(갈5:5)이라고 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롬10:4)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들은 의의 왕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통해 믿음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리나니](갈5:5). 재림이 없다면 이 땅은 여전히 죄와 불의가 승리하는 세상이 지속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죄가 종결되고, 의가 넘치게 됩니다. 주님의 오심을 복된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약속하신 모든 영적인 복들이 우리 마음 속에서만 아니라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게 현실적으로 문자 그대로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질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복들(엡1:4)을 받아 누리지만 주님의 재림으로 인해 이 복들은 물리적으로 현실이 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주가 풀린 땅, 몸의 부활과 변화, 모든 동식물들의 변화 등은 생각만 해도 전율이 솟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산 소망이라고 부르는 것은 ‘소망’이 현재적으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꿈처럼 깨어나면 허망하게 사라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산 소망]이란 폐해질 수 없고, 취소될 수 없고, 무효화 될 수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소망의 대상은 나의 기대, 나의 꿈, 나의 무엇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라면 주님의 오심이란 복된 소망이 있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시며, 소망의 실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신 영광의 소망입니다(골1:27).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7b). 주님이 소망입니다. 이는 모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분을 위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주께 소망을 두라. 시편 130:7, [이스라엘은 [주]께 소망을 둘지어다. 이는 [주]께 긍휼이 있으며 그분께 풍성한 구속(救贖)이 있기 때문이로다.](시130:7). [이스라엘은 지금부터 영원토록 [주]께 소망을 둘지어다.](시131:3),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주] 자기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행복하도다.](시146:5). 주께 소망을 둔다는 것은 주님만이 소망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 주의 말씀에 소망을 두라. [내 혼이 주의 구원을 바라며 기진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에 소망을 두나이다.](시119:81). [주는 나의 은신처요, 나의 방패시오니 내가 주의 말씀에 소망을 두리이다.](시119:114). [내가 [주]를 기다리고 내 혼이 기다리며 나는 그분의 말씀에 소망을 두는도다.](시130:5).

복된 소망은 경건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복된 소망을 가진 이들의 현재적 삶은 모든 불경건을 배척하고 경건을 추구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재림 신앙은 먼 미래를 바라보는 뜬 구름의 신앙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삶의 좌표와 기준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재림이란 복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삶의 모든 부분 하나 하나까지 주님 앞에서 회계해야 하고 그에 따른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더러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는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저 복된 소망 즉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음이라.](딛2:11-13). 우리는 멋대로 살면서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복된 소망을 가진 자들은 세상을 향해 No라고 거부할 줄 압니다.

복된 소망은 절제의 삶을 살게 해줍니다. [너희의 절제를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복된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무절제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일 주님이 오신다 해도 오늘 집의 화단을 가꾸고, 떨어진 창문을 고칠 것이며, 학생들은 밀린 숙제를 해야 합니다. 절제란 하나님의 영에 의해 통제받는 삶을 말합니다. 절제는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 아닙니다. 절제는 술, 담배를 끊는 것만이 아닙니다. 내 속 마음과 생각과 애정과 열정이 성령께 복종함으로써 얻어지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성도들의 영적 지식은 믿음 위에 쌓아져야 하며, 절제를 통해 제어되어야 합니다. 시속 200마일을 달릴 수 있는 자동차가 있습니다. 그 차가 200 마일의 속력을 내려면 아우토반과 같은 길이 있어야 합니다. 비포장 도로나 산길에서 그 속도를 내면 거리는 혼란해지고, 교통은 마비되고, 여기 저기서 사고가 터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40-50마일로 달릴 수 있도록 cotrol하는 브레이크가 있어야 합니다. 브레이크 없는 200 마일의 차를 보는 것보다야 brake 있는 100마일의 차가 안전하며, 차로서의 기능이 좋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덕 위에 세워지지 않는 성경 지식은 많은 형제들을 다치게 하고, 교회를 혼란으로 몰아 갑니다. 절제는 브레이크와 같습니다. 지식에는 반드시 성능 좋은 절제란 브레이크를 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성경, 진리의 지식, 재림에 대한 이 모든 것들은 절제를 통해 빛나게 됩니다. [너희의 절제를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복된 소망 순결의 비결입니다(요일3:2-3). 복된 소망은 삶을 정결케 하는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복된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늘 말씀의 물로 자신을 씻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이 악한 현 세상에서 더럽고 추한 모든 것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에 우리는 매일 매일 말씀 앞으로 다가가 씻음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매일 씻는 사람은 약간 더러워도 그것에 매우 신경이 쓰이고 아주 예민해 집니다. 반면 바쁘다고 씻는 것을 하루 거르고, 귀찮다고 거르고 이런 저런 핑계로 자꾸 거르다보면 점점 더 무감각해 집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계신 그대로 볼 것임이라.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분께서 순결하신 것같이 자기를 순결하게 하느니라.](요일3:2-3).

복된 소망은 인내의 비결입니다(약5:7-9).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산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모든 일에 오래 참습니다. 마음이 조급한 것은 결코 성령의 역사가 아니며 건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농부처럼 때를 기다리며, 주님의 역사를 기다립니다. 기도를 한 후에 응답을 기다리는 것도 성도의 인내입니다. 주님은 금방 주실 수 있는 것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심으로 성도들을 연단하십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약속은 벌써 200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내로써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유난히 성격이 급합니다. 오래 참지 못합니다. 오래 참는 사람은 ‘느려 터졌다’, ‘답답해 미치겠다’, ‘게으르다’고 몰아 부치거나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인내가 없이 이룰 수 있는 주님의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하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받을 때까지 오랫동안 인내하느니라. 너희도 인내하고 마음을 굳건히 하라. {주}의 오심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불평하지 말지니 그리하여야 정죄를 받지 아니하리라. 보라,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시느니라.](약5:7-9).

복된 소망은 참된 위로입니다(살전4:18, 5:10,11). 재림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마음 가운데 늘 위로가 있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은 우리의 기쁨이요, 힘입니다. 오늘날 소위 종말론을 외치는 설교자들, 교파들을 보십시오. 사람들을 겁주거나 위협하고,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끊임없이 긴장감을 심어주어서 재물을 바치게 하고, 금욕 생활을 강요하고, 가정을 파괴합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기뻐하지 않을 장소에서 죄를 짓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언제라도 주님을 맞을 생각을 하는 사람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다른 형제들을 무시하거나 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곧 오신다는 믿음은 이 세상에 우리 마음을 두지 않도록 만드는 동시에 저 하늘에 소망을 가지게 하며, 주님 오실 때 신실한 종으로 발견되려는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8).

우리는 이 시간 주님의 오심이 왜 복된 소망인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가 소망 가운데 계속해서 주를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빕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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