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악할지라도
말씀: 마7:9-11
요절: 마7:11
전 시간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는 점점 강도를 더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구하다가 끝에 흐지부지하지 말고 갈수록 더욱 가열 차게 구하고, 그 다음에는 찾고, 그 다음에는 두드려야 합니다. 구하다가 울부짖고 금식하며 밤을 새워 기도하는 등의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말씀의 요지입니다. 어떤 것은 구하지 않고 생각만 해도 주어지지만 어떤 것은 오랫동안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는 일곱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열왕기상 18:42-44입니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의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자기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자기 종에게 이르되, 이제 올라가서 바다 쪽을 바라보라, 하니 그가 올라가서 바라보고 이르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일곱 번 다시 가라, 하니 일곱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이르되, 보소서, 바다에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올라가서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준비하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왕상18:42~44). 그는 결코 한두 번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늘은 이만하고 후일 다시 기도하자고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무려 일곱 번이나 다시 기도했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엘리야를 신약 성도들이 따라야 할 기도의 본으로 제시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이 동일한 성정(性情)의 지배를 받은 사람이로되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였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그 열매를 내었느니라.] (약5:17~18). 그의 기도의 특징은 끈질긴 기도였습니다. 기도는 하는데 끈질기게 하지 않음으로써 응답이 없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라고 확신한다면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대로 점점 강도를 더해 가면서 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런 기도에 매우 회의적입니다. 응답이 없어도 상관없다는 식입니다. 별로 절박하지도 않고, 반드시 얻어야 한다는 긴급함이나 필요도 없습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고, 주시면 주시는 대로 산다! 그런 기도라면 주님께서 굳이 응답해 주셔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사람들을 보십시오. 한두 번 말하다가 말겠지 뭐! 란 생각이 드는 사람에게는 그가 뭐라고 말해도 그냥 무시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두 번 요구하고 잊어버리거나 포기하는 애들에게는 돈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이야기해도 그 순간을 넘기거나 무시해 버리면 됩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일주일이고 이주일 동안 밤낮으로 요구하는 애들은 많은 것을 얻습니다. 특별히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귀찮게 조르는 것 때문에라도 사 주게 됩니다.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는 모든 성도들이 반드시 몸으로 체득해야 하는 진리입니다.
엘리사는 자신이 죽기 전에 이스라엘 왕에게 구원의 화살을 주면서 땅을 치도록 했습니다. 열왕기하 13:18-19절입니다. [또 이르되, 화살들을 취하소서, 하니 그가 취하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하니 이에 그가 세 번 치고 멈추므로 하나님의 사람이 그에게 노하여 이르되, 왕이 대여섯 번을 치셨어야만 했나이다. 그리하였더라면 왕이 시리아를 치되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그러나 이제 왕이 시리아를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왕하13:18~19). 그런데 왕은 세 번 치고 멈추었습니다. 요아스는 화살을 취하고 땅을 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세 번만 치고 멈춤으로써 엘리야는 크게 노하였습니다. 3번이 아니라 대여섯 번을 쳐야했다는 것입니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두 번 하고 말 것이라면 한두 번 기도하고 말아야겠지만 여러 날, 여러 달, 여러 해 동안 해야 할 기도는 그렇게 오랫동안 기도해야만 합니다. 원수 마귀를 물리치는 것은 하루 이틀의 전쟁이 아닙니다. 한두 번 싸우고 말 일이 아닙니다. 마귀와의 영적 전쟁은 우리가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이 땅에서 지속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시는 그 날까지 계속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는 말씀대로 계속해서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9-10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자기 아들이 빵을 구하는데 돌을 주겠느냐? 혹은 그가 생선을 구하는데 뱀을 주겠느냐?](9-10).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자하는 것은 정상적인 부모의 마음입니다. 어느 부모라도 자식에게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 더 많을 것을 주고 싶어 합니다. 어떤 부모는 빚을 내서라도 자식이 해달라는 것을 해 주고 싶다고 말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듣고 있는 무리들과 제자들을 향해 주님이 한 가지 물으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자기 아들이 빵을 구하는데 돌을 주겠느냐? 혹은 그가 생선을 구하는데 뱀을 주겠느냐?” 무리들이나 제자들 중에 “예”라고 대답한 이는 한 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무리들 중에는 유대 사회에서 죄인들이라 불리는 창녀나 세리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식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가난한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자기 아들에게 빵 대신 돌을, 생선대신 뱀을 주는 이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달라는 이가 남이 아닌 자기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나쁜 것을 주지 않습니다. 돈이 없어서 못 주는 경우는 있어도 나쁜 것, 악한 것을 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웃 아저씨가 아니라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신 아버지(약1:18)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먼 친척 아저씨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먼 친구가 아닙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은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선한 아버지시란 점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란 점입니다. 누가복음 11:1-12절에 거의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한 가지 예가 더 나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빵을 구하는데 아버지가 되어 돌을 주겠느냐? 혹은 생선을 구하는데 생선 대신 뱀을 주겠느냐? 혹은 알을 구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눅11:11-12). 구하는 자가 자기 아들이기 때문에 나쁜 것, 악한 것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아버지이십니다. 자녀에게 무엇을 주는데 결코 인색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풍성하시며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조금만 구하라, 적게 구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성품은 무엇을 받기보다 무엇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얼마나 적게 가졌는가? 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다! 는 말은 주님께서 주실 것이 그만큼 많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한 만큼 주님은 채우실 것이 많습니다.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이 벌었는가? 얼마나 많이 소유했는가? 에 따라서 인생의 승패나 성공 여부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얼마나 많이 구하고 얼마나 받아서 사용했는가? 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질이 결정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회계 장부에서 많은 것을 지출한 이들이 성공한 인생입니다. 해마다 정부 예산을 책정할 때 각 부처에서는 서로 많은 예산을 배정받기 위해 치열하게 로비를 합니다. 한 푼의 돈이라도 더 받아 내기 위해서 의원들을 상대로 설득을 하고, 설명회를 갖기도 하고, 자료를 돌리고, 홍보를 합니다. 한 푼이라도 더 받아야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주님으로부터 더 많이 얻으려고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얼마나 많이 제대로 사용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부족할수록 많이 구하게 되고, 많이 찾게 됩니다. 삶의 표준이 높을수록 생활비가 많이 들고, 많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표준대로 경건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살려는 소원이 크면 클수록 주님께 더 많은 성령의 능력과 도우심과 동행하심을 구하고, 찾게 될 것입니다.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최소한의 생활비만 있으면 족합니다. 아무 일도 계획도 없는 사람은 별로 구하는 것도 없습니다. 잠자는 이는 침대와 이불 외에 아무 것도 구하지 않습니다. 죽은 이는 구할 것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잠자는 이들이나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이들은 주님께 구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는 말하길,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계획하라!”(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고로 “구하면 얻고, 찾으면 찾고, 두드리면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약1:5). 하나님은 자신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십니다(히11:6b). 하나님은 선하신 아버지이십니다. 주는데 인색하지 않습니다. 풍성하시며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조금만 구하라, 적게 구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약함을 잘 모르기 때문에 강하신 하나님께 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무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모르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께 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잘 모르기 때문에 겸손하게 구하지 못합니다. 아버지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대신에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을 규합하고 조직의 힘으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무엇으로 할 수 없고, 땅의 것으로 하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연약해서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잘 모르고 인정하지 않는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경에 보면 많이 빚진 자는 많이 탕감 받습니다(눅7:41-43).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 많이 용서받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강함을 더 많이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인정하고 주님께 구하는 사람입니다. 무지한 자일 수록 주님의 지혜를 더 많이 체험합니다. 그런데 이런 원리를 전혀 모르고 주님께 자신의 연약함을 불평하고, 무능함을 한탄하고, 무지함으로 인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투덜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값없이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부족함, 연약함, 무능함, 무지함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무제한적으로 값없이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데(빌4:19) 무엇이 힘들고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 되겠습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탐욕으로 주님의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로 인해 구하는 것,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 구한다면 우리는 부족함을 토로하지 못할 것입니다. 죠지 뮬러는 평생 동안 기도로 모든 필요를 공급받았는데 그는 영국의 브리스톨에서 최대의 고아원을 운영했습니다. 지금처럼 국비를 받거나 자원봉사자들을 받거나 사회 단체의 기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도움을 구하는 카드나 편지를 외부로 보내지 않았고, 어떤 사람에게도 기부를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필요할 때마다 하늘의 아버지께 필요를 아뢰었고(빌4:6) 하늘로부터 모든 필요를 공급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의 선교사들에게 선교 헌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하나님만 의지함으로 자비량 선교사란 것이 무엇인지 본을 남겼는데 그 후로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 후원자들이 없이 오직 단신으로 주님만을 바라보고 아무 연고 없는 지역으로 선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11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더 주시지 아니하겠느냐?](11). “너희가 악할지라도” - 이 말씀은 주님께서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아시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입니다(요2:23-25). 이 말씀은 타락한 인간의 상태입니다. 이것은 변할 수 없습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을 예로 주님은 많은 말씀을 가르쳐 주십니다.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같이 [주]께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우리의 체질(體質)을 아시며 우리가 /다만/ 먼지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이로다.] (시103:13~14). 성경에는 주님께서 육신의 부모를 빗대어 자신을 표현한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몇 구절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인이 어찌 자기의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겠느냐? 참으로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사49:15),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보석들을 만드는 그 날에 그들을 나의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자기의 친아들을 아끼는 것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말3:17). [내 부모가 나를 버릴 때에라도 [주]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27:10). [틀림없이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니이다. 비록 아브라함은 우리를 알지 못하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오 [주]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요, 우리의 구속자시니 주의 이름이 영원부터 있나이다.](사63:16). 이 구절들은 모두 육신의 아버지보다 훨씬 뛰어난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증거합니다.
육신의 부모들은 악할지라도 자기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압니다. 육신의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합니다. 그들이 의롭고 경건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품이 이기적이고 악하면서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막대한 유학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녀를 외국으로 유학을 보냅니다. 자녀들과 아내를 보내고 혼자 사는 어려움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부모가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최대, 최고, 최선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주로 ‘교육’입니다. 특히 한국인들은 자녀들에게 더 좋은 학교,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시키는 것을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주고자 합니다. 부모가 의롭거나 선하거나 거룩해서 자기 자녀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능력이 되고 사정만 되면 누구라도 기꺼이 모든 것을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신앙이란 유산을 물려 주어야 합니다. 학교 교육이 아니라 하나님께 지혜를 얻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최선의 자산은 해외 유학이나 좋은 대학을 가도록 뒷바라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주의 교훈으로 양육하여 선한 양심을 길러 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자녀들에게 “땅이 아니라 하늘을, 현 세상이 아니라 다가올 세상을, 육신이 아니라 영”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 참된 교육입니다. 어쨌든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줄줄 알거든’이란 주님의 말씀은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 사고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주는 것은 삯이 아니고 빚이 아닌 좋은 ‘선물’입니다. 선물은 값없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 역시 ‘선물’입니다. 모든 좋은 선물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이 위에서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분께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느니라.](약1:17). 모든 좋은 선물은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말 그대로 좋은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우리의 유익(good)을 위해 주십니다. 징계를 주시는 것도 우리의 유익을 위함(for our profit-히12:10)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쁜 것, 악한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때로 나에게 힘들고, 슬프고, 아픈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주시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것이 악한 것이나 나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파산이나 질병이나 사별이나 이혼이나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임했습니까?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요,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자녀 문제, 재정 문제, 건강 문제, 교회 문제 등 우리는 별별 어려움이 닥칠 수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아무렇지도 않다. 괜찮다. 좋다’고 할 만한 것이 없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우리에게 발생하고 주어졌다면 그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요, 그 모든 것이 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조금도 악하지 않으십니다. 편벽됨이 없고, 위선이나 거짓이 없고, 변함이 없습니다(말3:6). 육신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좋은 선물과 하나님이 자기 자녀에게 주는 좋은 선물은 같지 않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자기가 좋을 대로, 자기 유익대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무엇이든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행하십니다. 좋은 선물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다양한 선물(은사·gifts)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최상의 선물은 돈이나 재물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명예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인기를 추구하는 영화 배우나 운동 선수들에게 주십니다. 돈, 인기, 권력 등은 주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주는 좋은 선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좋은 선물을 구하고 찾아야 합니다. [오직 /너희는/ 가장 좋은 은사들을 간절히 사모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또한 너희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리라.](고전12:31).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들 중에 가장 좋은 선물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구하십시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은 최상의 선물입니다. 가장 좋은 은사입니다. 성령 충만을 구하십시오.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 때 하나님께서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는 더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누가복음 11:3에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더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눅11:13)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이 자녀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최고의 선물, 좋은 선물이 성령이란 점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육신의 아버지보다 뛰어나십니다. 선하십니다. 거룩하십니다. 고로 영적인 자녀들인 우리에게 훨씬 더 좋은 것들을 선물로 주십니다. 문제는 구하는 이들이 구하라는 좋은 것은 놔두고 구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구하는데 있습니다. 성도들은 언제나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들, 성령의 열매들을 구해야 합니다. 신선한 기름부음을 허락해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오늘날 근본주의 교회의 교리들 중에 한 가지는 성도들이 성령을 구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역사적으로 오순절에 단 한번 임했고, 믿는 순간 받은 것이므로 성령을 구하는 것은 불신이다.’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령의 임재나 체험이 전혀 없이 수년, 수십 년을 신앙 생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성령으로 침례를 받을 뿐 아니라 우리는 생활 가운데서 성령으로 가득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과도(過度)함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엡5:18). 에베소서 3:19,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엡3:19). 우리 몸은 등이라면 성령은 기름입니다. 성령은 물과 같고 바람과 같습니다. 성령으로 채움 받지 못하면 우리는 정상적인 영적 생활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할 필요성이나 영적 갈급함이 없기 때문에 구하지도, 찾지도, 두드리지도 않습니다. 평생에 단 한 번도 성령으로 충만한 체험이나 의식이 없었으면서도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기 때문에 성령 충만을 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더 주십니다(눅11:13). 다윗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유니콘의 뿔같이 높이시리니 내가 신선한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으리이다.](시92:10). 우리는 날마다 주님이 부어 주시는 신선한 기름 부음이 필요합니다.
저는 근대 교회 부흥의 시기에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많은 신앙 선배들의 전기를 즐겨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선명한 간증이 있었습니다. 부흥을 주도했던 복음 전도자들 가운데 D.L 무디, R.A 토레이, 빌리 선데이, 찰스 피니, 요한 웨슬레, 조지 휫필드, 크리스머스 에반스, 잔 낙스 등 성령으로 충만케 된 사건이 없는 이들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현대 교회의 특징은 성경을 제쳐두고 성령만을 외침으로 마귀 들린 교회들과 반대로 성경만을 외치면서 성령을 배척하는 정통, 근본, 보수를 주창하는 냉랭한 교회들만 있는 듯이 보입니다. 우리는 이런 때에 성경 말씀을 굳게 잡고 성령 충만을 갈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케 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은 매일 제 1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 큰 선물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더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려면 물고기가 물 속에서 살듯이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만 살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며 그리스도로 충만한 것입니다. 성령은 단지 에너지나 물리적인 힘이나 비인격적인 물질이 아니라 이성과 감성과 의지를 지니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소수의 사역자들을 위한 어떤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영적 도덕적 수준을 높이며, 영적 감각을 날카롭게 깨어나게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합당한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더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을 얻기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다시 한번 간구합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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