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와 들보
말씀: 마7:3-5
요절: 마7:3-5
오늘은 [눈 속에 있는 티와 들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티와 들보는 크기가 다릅니다. 티는 눈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물질이지만 들보(beam)은 큰 목재입니다. 눈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눈 속에는 저마다 집의 기둥으로 쓸 만한 크고도 굵고 긴 편견, 위선, 거짓, 선입관 등의 들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물을 보아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의 눈은 공간적으로 멀리 볼 수도 없고, 시간적으로 앞을 볼 수도 없습니다. 다만 지난 간 일들을 되돌아 보는 것이 전부입니다. 여러분의 눈 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어떤 사진을 보면 자신의 얼굴을 제일 먼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사람의 얼굴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배경으로 보입니다. 책을 읽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아는 이야기는 훨씬 눈에 잘 들어옵니다. 그러나 자신이 보기 싫고 듣기 싫은 것들을 보게 되면 눈살이 찌푸려지고, 눈빛이 변하게 됩니다.
주님은 무리들과 제자들을 향해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하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 안에 어떤 들보가 있는지 생각 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데 오류와 실수의 연속이요, 실패를 거듭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가져야 할 눈이 비둘기 같이 순결한 눈, 즉 ‘단일한 눈’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순결한 눈을 가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말씀의 물로 자신을 씻고, 말씀의 빛이 그 눈 속으로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눈은 빛을 만드는 기관이 아니라 빛을 통해 보는 기관입니다. 단순히 빛을 받는 것이 전부입니다. 세상의 빛, 생명의 빛이신 주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빛이신 주님이 우리 눈을 통해 들어올 때 온 몸이 밝아지고, 우리는 무엇이든 주님이 보시는 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요즘 들어 눈이 어두워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노안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안경을 쓰고 돋보기를 필요로 합니다. 육신의 눈은 그렇다하더라도 영적인 눈은 어떻습니까? 영적 감각이 둔해지고, 성경을 읽어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면 눈이 어두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 앞에 눈물을 쏟으십시오. [내 친구들은 나를 비웃되 내 눈은 하나님께 눈물을 쏟으니](욥16:20). 회개와 간구의 눈물이야 말로 눈을 맑고 밝게 하며 눈 속의 티끌과 들보를 제거하는 가장 좋은 것입니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내가 신음하므로 피곤하며 밤새도록 내 잠자리를 띄우고 눈물로 내 침상을 적시나이다.](시6:6)라고 했습니다. 눈은 언제나 물기로 적셔져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구 건조증으로 인해 눈이 아프고 상하게 됩니다. 시력이 떨어집니다. 안경을 쓰신 분들이 안경을 벗었을 때 느끼는 그런 느낌입니다. 사물이 흐릿하고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눈 속에 뭐가 들어갔나 하면서 눈을 부비고 보기도 합니다. 계속 불편을 느끼면 안약이라도 사서 발라야 합니다. 눈물이 마르지 않는 사람들은 정서가 풍부한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과 사람들을 보는 눈을 가진 이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웃을 일보다 울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고난으로 인하여 내 눈이 애곡하나이다. [주]여, 내가 날마다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해 내 두 손을 내밀었나이다.](시88:9). 다윗은 결코 메마른 눈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든 대언자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했습니다. 눈물보다 자신의 눈을 더 깨끗하게 하는 것이 없다는 점은 이미 의학적으로도 증명된 일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들로 인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일들로 인하여 내가 우나니 내 눈에서 곧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도다. 내 혼을 구제(救濟)할 위로자가 내게서 멀리 계시는도다. 원수가 이겼으므로 내 자녀들이 황폐하게 되었도다.](애1:16), [내 백성의 딸의 파멸로 인하여 내 눈에서 /눈물이/ 강물같이 흐르는도다. 내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도 아니하니](애3:48-49).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혼들로 인해 이런 눈물을 흘리지 않고 그들의 죄만 비난하고 정죄한다면 우리는 사실 마귀와 같은 참소자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귀의 심성을 지닌 자의 눈은 악한 눈입니다.
내 눈 속에 들보가 있으면 남의 눈에 있는 티가 보입니다. 이는 참으로 특이한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안과 전문의가 눈을 렌즈를 끼고, 눈을 뒤집어서 보아야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 안에 들보가 크면 클수록 남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까지 선명하게 보이게 됩니다. 이는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3절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느냐?](3). *티와 들보, 보는 것과 깊이 생각하는 것. 말씀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깊이 생각(consider)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대로 해야 합니다.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긍휼을 가지고 오래도록 인내하며 생각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배려입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왜 저런 티가 생겼을까? 저 티로 인해 고통이 얼마나 심할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탐욕의 눈빛이라면 그의 눈 속에는 탐욕이란 들보가 있는 것입니다. 음욕의 눈을 가진 이라면 그는 음욕이란 들보가 있는 것입니다. 야심에 찬 눈을 가졌다면 그의 눈에는 야심의 들보가 있습니다. 이런 들보를 가진 이들은 모든 것을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합니다.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그렇게 받아들이고 믿습니다. 들보를 빼지 못한다면 참으로 영적 생활이 고통스럽습니다. 들보가 크면 클수록 시야는 좁아지고, 장기적인 안목이 사라지고 조급해 집니다. 들보로 인해 눈이 볼 수 있는 것의 범위나 시야가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대언자들은 짧게는 수십 년 멀리는 수천 년 뒤의 일을 바라 보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음으로 바라 보았고, 아직 오지 않는 것들을 내다 보았습니다. 우리는 늘 최고의 의사이신 주님께 나아가 우리 눈을 순결한 눈으로 빚어 주시고,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해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들보를 뽑아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눈 속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눈에 잘 보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하는 실수나 잘못은 금방 적발되고, 비난과 고소거리가 되곤 합니다. 성도들은 자신 속에 세상을 비추는 빛이 있기 때문에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잘 알아보는 까닭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치로 육신적인 성도들은 영적인 성도들을 금방 알아 봅니다. 구령, 기도, 선교에 열정이 있는 분들은 벌써 한 두 번만 이야기 해 보아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장점이나 영적인 면이 전혀 보이지 않고 그들의 약점, 허물, 단점, 죄만 눈에 확연히 들여다 보이면 내 눈 속에 들보가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면 이는 정확한 판단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예가 많이 나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거의 생각하지 못합니다. 말씀을 유념해서 보십시오.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느냐?’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내 눈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이에 다윗의 분노가 그 사람을 향해 불같이 크게 타오르매 그가 나단에게 이르되, 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반드시 죽을지니라.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 일을 행하였으므로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하니라.](삼하12:5-6). 다윗은 나단이 들려주는 어떤 불의한 부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는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빼앗은 것의 4배를 갚아 주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왕으로서 당연한 판결이었습니다. 그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나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와 같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급하게 어떤 부자의 탐욕, 사악함, 도둑질을 판단하고 정죄했던 것입니다. 나단은 즉시 다윗에게 ‘자신의 눈 속에 있는 것’을 생각해 보도록 했습니다. [이에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왕이 그 사람이라.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해내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주고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을 네게 주었느니라. 만일 그것이 너무 조금이었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주의 명령을 업신여기고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족속 우리야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삼하12:7-9). 그는 양을 빼앗은 부자 정도가 아니라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남편을 죽인 강도 중의 강도였던 것입니다. 그의 탐욕은 이웃집의 양을 빼앗은 부자와 비교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안목의 정욕’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육신의 정욕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유다와 사마리아의 예를 보겠습니다. 유다의 아하스 왕은 우상 숭배를 유대 내에 공식화하는 정책을 쓰고, 바알을 섬겼습니다. 그 때 주님은 유다를 심판하셨습니다. 역대기하 28:9-10절입니다. [그러나 거기 주의 대언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오뎃이라. 그가 사마리아로 오는 군대 앞으로 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진노하셨으므로 너희 손에 그들을 넘겨주셨거늘 너희가 하늘에까지 닿은 격노로 그들을 죽이고 이제 또 너희가 유다와 예루살렘 자손을 밑에 두어 너희를 위해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로 삼으려 하는도다. 그러나 너희에게는 곧 너희에게는 주 너희 하나님께 지은 죄들이 없느냐?](대하28:9-10). 사마리아가 유다를 이기고 그들을 포로로 잡아 왔습니다. 유다가 범죄함으로 심판을 받은 것을 기회로 그들은 아예 노예로 삼아 버린 것입니다. 그 때 *오뎃이란 대언자가 이들을 향해, “너희에게는 주 너희 하나님께 지은 죄들이 없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남의 죄를 판단할 때 우리 역시 그 죄로 인해 심판받을 수 있고, 주님의 진노를 불러 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유다가 티라면 사마리아는 들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다를 향해 격노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았던 것입니다.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일은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판단하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남의 민족성을 판단하는 일은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변 국가를 향해서 ‘왜놈, 뗏놈’하면서 비하합니다. 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절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느냐?](3). 사람은 누구나 남의 잘못은 쉽게 보입니다. 부부들은 결혼한 신혼 초에 가장 많이 싸운다고 합니다. 가장 사랑이 넘칠 것 같은 그 때에 평생에 싸울 싸움의 대부분을 합니다. 왜 그런가 하니 연애 시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같이 살면서 다 보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눈 속에 티가 보이고, 아내는 남편의 눈 속에 있는 티가 보입니다. 한국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뭍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모습은 잘 보입니다. 그런데 머리 모양이나 얼굴, 옷, 신발은 잘 보이지만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웬만큼 유심히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이미 앞서 말씀드렸듯이 눈이 밝다고 해도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봐 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눈이 불편해서 좀 보아 달라고 눈을 뒤집어 주어도 한참을 찾아야 하는 것이 남의 눈 속에 있는 티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아 낸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관찰력입니다. 털면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식으로 조사하고 뒤질 때 보이는 것이 남의 눈 속에 있는 티입니다. 저는 신문이 뉴스를 통해서 어떤 사람이 장관이나 고위 공직에 임명 될 때 ‘인사 청문회’라는 것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낱낱이 과거의 전력이나 잘못 등을 캐는지 요즘은 대통령이 임명을 해도 청문회 때문에 고사하는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정보기관을 동원해서 사생활까지 모두 조사하는데 그것이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 차라리 장관직을 고사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약점이나 허물이나 죄를 통해서 비난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들보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남의 티가 보일 때 자신이 스스로 할 일은 ‘나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깊이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이 다 나의 스승이요, 거울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 안에 맹렬한 야수가 한 마리 있는데 이놈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을 토로했습니다. 여러분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바울은 자신 안에 있는 들보를 보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죄의 법’이라고 했습니다. 죄의 정욕은 우리를 진리와 반대의 길로 이끕니다. [이제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그것을 행하는 자가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거하는 죄니라. 그런즉 내가 한 법을 발견하였나니 곧 내가 선을 행하기 원할 때에 악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로다. 이는 내가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안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기 때문이라.] (롬7:20~23). 죄의 법이야 말로 각각 사람들 속에 있는 가장 큰 들보입니다.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인생의 자랑입니다.
4절입니다.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네가 어찌 네 형제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눈에서 티를 빼 주겠노라, 하려느냐?](4). 주님은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라고 하십니다. 눈에 들보가 있는지 살펴보라! 가 아니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라고 하심에 주목하십시오. 우리 눈에는 안목의 정욕이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眼目)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 다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났음이라.](요일2:16). 그래서 전도서에 말하기를, [모든 것이 수고로 가득하여 사람이 그것을 말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아니하고 귀는 들어도 채워지지 아니하는도다.](전1:8)라고 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죄는 보는데서 출발합니다. 에덴의 동산에서 여자가 그러했듯이 눈에서 시작됩니다. 탐욕은 눈에서 시작됩니다. 하와가 그러했고, 아간이 그러했고, 게하시가 그러했습니다. 롯 역시 보는 데서부터 그의 타락이 시작되었습니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의지(will)를 가지고 있습니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욕망(desire)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 속에 들보가 있으면 보아도 바르게 보이지 않습니다. 선입견과 편견, 자신의 정욕, 죄의 욕망을 품고서 볼 때 아무 것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서로의 견해를 물을 때, ‘당신이 보기에는 어떻습니까?’라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런 말을 합니다. 동일한 사안이라도 보는 이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다 다르게 본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눈[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눈 속에 있는 들보가 다양한 것입니다.
들보를 가진 이들이 남의 눈에 있는 티를 그냥 놔두지 않고 빼주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인 듯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먼저 고침 받고, 적응하고, 순종하기보다는 자신을 기준으로 남이 따라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부 간에도 그렇고 부모 간에도 그렇고 친구 간에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을 고쳐 주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남의 성격이나 습관을 고쳐 주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때로 부모나 교사들이 아이들의 버릇을 고쳐 놓겠다며 매를 들지만 버릇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쓴 뿌리를 마치 잡초를 뽑아내듯이, 썩은 이를 뽑듯이 뽑아 내 버리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부부 간에 서로 자신에게 맞추기를 강요하며 싸움을 벌이지만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인정할 때부터 싸움이 멈추고, 불평이 줄어들고, 잔소리가 없어집니다. 우리는 쉽게 “내가 네 눈에서 티를 빼 주겠노라”고 말합니다. 또 시도해 봅니다. 그러나 ‘티’를 빼 주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눈을 찔러 버리거나 더 엉망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5절입니다. [너 위선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 뒤에야 네가 분명하게 보고 네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리라.](5). 주님은 자신을 고치기에 앞서 남의 잘못을 고치려는 이들을 향해 “너 위선자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자들은 다 위선자들입니다. 위선자들의 특징은 자신의 실체를 숨기거나 보지 않고 남의 실체를 드러내는데 열중합니다. 주님은 남을 판단하기 전에, 남을 고치려고 하기 전에, 남을 지적해 주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먼저 성찰해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고친 후에 남을 고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고침 받았다면 그것을 소개해 줄 수 있고,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는 법을 아십니까?
- 안약을 사서 발라 보라. [내가 네게 권고하노니 내게서 불로 정제한 금을 사서 부유한 자가 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말며 또 네 눈에 안약을 발라 볼지니라.](계3:18). 육신의 눈에 안약은 안과 의사의 처방이 필요하지만 영적인 눈이 멀거나 침침한데는 주님이 주시는 안약이 필요합니다. 눈을 밝게 하는 것은 주님의 역사입니다. [가난한 자와 속이는 자가 서로 만나거니와 그 두 사람의 눈을 밝게 하시는 이는 [주]시니라.](잠29:13). 주님은 눈을 밝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 말씀의 빛을 받으라. [[주]의 법규들은 정당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는도다.](시19:8). 하나님의 말씀은 눈을 밝게 합니다. 말씀보다 눈에 좋은 음식이나 약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눈에 관한한 최고의 영약입니다. 여러분의 육신의 눈 속으로 T.V나 컴퓨터 모니터, 영화관의 영사기가 비추는 빛을 받는다면 여러분의 몸은 어둠으로 가득차고 말 것입니다. 성경은 흰 종이에 검은 글자로 인쇄되어 있지만 그 말씀이 내 속에 비추어 지는 빛은 사막의 모래 위에 비치는 햇빛보다 강한 것입니다. 말씀의 빛을 받을 수 있도록 성경을 펴서 눈을 거기에 고정하십시오.
- 주를 바라보라.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하여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보입니까? 보이지 않는다면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라” 예수님이 보여야 합니다. 시편123:1, [오 하늘들에 거하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123:1). 빛이신 주님을 향해 눈을 들 때 우리 눈 속으로 주님이 들어오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지각의 눈을 열어 주시고,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늘 기도합니다. 우리의 눈을 여시고 주님의 놀라운 것들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라. 이사야 28:6에 이르기를, [재판하려고 앉는 자에게는 판단하는 영(靈)이 되시며 싸움을 돌이켜 성문에 이르게 하는 자들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사28:6)고 하십니다. 주님의 판단을 받아서 판단한다면 우리는 영적인 판단, 성경적인 판단이 됩니다. 우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아담의 후손으로서가 아니라 만물의 심판자가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판단하는 판단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장차 세상을 판단하고 천사들을 판단하는 자들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너희가 지극히 작은 문제를 판단하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들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하물며 이 세상 삶에 속한 일들은 더 많이 판단하겠느냐?](고전6:2-3). 주님은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셔서 세상을 판단하고 천사들을 판단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판단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티와 들보’란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뽑아내고 건전한 눈, 단일한 눈, 맑고도 밝은 눈을 갖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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