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말씀: 마7:7-8
요절: 마7:7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은 기도에 관한 말씀일 뿐 아니라 영적 삶에 대한 대 원칙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7a), [이는 구하는 자마다 받을 것이요](8a)라고 하셨습니다. 사업하는 이들은 많은 이득을 구하고, 예술가들은 더 많은 영감과 재능을 구하고, 학생들은 지식을 구하고, 수험생은 합격을 구하고, 취업자들은 직장을 구하고, 사업자는 유능한 사원을 구합니다. 어떤 이는 신부를 구하고, 어떤 이는 신랑을 구합니다. 통치자들은 좀 더 큰 권력을 구하고, 군인들은 승리를 구하고, 과학자들은 새로운 발견을 구할 것입니다. 운동 선수들은 더 좋은 기록을 남기고 메달을 구합니다. 종교인들은 더 깊은 깨달음을 구할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고, 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병자들은 모두 건강을 구합니다. 의사들은 더 나은 의술을 구합니다. 제약가들은 만병통치약을 구합니다. 목사들은 더 좋은 교회, 더 많은 성도들을 구합니다. 이런 것을 구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성경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주의 뜻을 알아야 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그냥 본능적으로 자신이 필요한 것, 자신의 마음의 갈망을 구하는 것입니다. 장사꾼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많이 파는 것’입니다. 핵심은 자신이 잘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입니다. 자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구하는데는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주의 뜻을 알아야 할 필요가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을 구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구한다고 해서 주님이 무조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하라”는 말씀에는 구하는 대상, 구하는 목적과 동기, 구하는 방법 등 원칙이 있습니다.
주님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무 것이나 구한다고 다 얻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 구하는 것은 얻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욕심을 내도 갖지 못하고 죽여서 갖고자 해도 얻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워도 갖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 무엇을 위해서 구하는가? 이것이 받는데 핵심입니다. 구하는 것의 동기, 구하는 것의 목적과 용도를 생각하며 구하십시오. 예를 들어 봅시다. 부모는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식 잘 되기를 구합니다. 이는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메도 그러했습니다. 그녀는 자식이 주의 왕국에서 주의 좌우편에 앉기를 구했습니다. 이것은 본능입니다. 자식이 건강하고, 공부 잘하고, 성공하고, 잘 사는 것은 부모의 욕망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것을 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 자식이 공부를 잘해서 명문대가는 것에 있지 않고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의 자식이 좋은 직장에서 빨리 승진하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롭고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식을 위해 기도할 때 구하는 것이 바뀌어야 합니다. 공부 잘하라는 기도 대신에 부모에게 순종하는 법을 알게 해 주소서! 이것이 바르게 구하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 출세, 성공 대신에 세상과 분리되고, 자기를 부인하고 말씀을 따라 ‘거룩함’을 구하는 것이 바르게 구하는 것입니다. 구하는 것의 목적을 분명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도록 하십시오. 이는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구할 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란 말씀입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가진 담대함이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무엇이든 구하면 그분께서 들으시는 것이라.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그분께서 들으시는 줄 안즉 또한 우리가 그분께 구하여 청원한 것들을 얻는 줄 아느니라.] (요일5:14~15).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려면 나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해야 합니다. 나의 뜻은 출세요, 성공이요, 부와 명예인데 하나님의 뜻은 의를 인해 고난과 박해를 받는 것이요, 거룩함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먼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자신의 뜻을 기꺼이 부인하고 주님의 뜻을 행하리라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하나님의 뜻은 계시되지 않습니다. 때로 성도들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면 순종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난 후에 선택 여부를 내가 결정짓는 것이 아니고 무조건 순종하겠다는 의지가 있을 때 뜻이 계시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분의 뜻을 행하려 하면 그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혹은 내가 스스로 말하는지 알리라.] (요7:17).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도의 필수 요건입니다. 말씀 없는 기도는 동력 없는 엔진과 같습니다. 말씀 없는 기도는 이교도들의 주문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말씀이 없이 기도할 때 그 기도는 그냥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할 것인지 깨닫게 되고, 그대로 구할 때 이루어지게 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요15:7). 우리가 읽고 듣고 배우는 말씀들을 우리 마음 속에 둘 때 우리는 기도 할 것들이 생깁니다. 기도 제목은 나의 필요, 나의 원함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통해 내 안에 주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고 해도 그것을 구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더불어 어떤 일을 할 때 필요한 사람은 학력이 높은 사람, 지위가 높고 권세가 있는 사람, 돈이 많은 사람, 인물이 잘난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그것을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구하는 이가 있을 때 그 일은 이루어집니다. 만약 솔로몬이 구하라고 했을 때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지혜를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대하1:7). 솔로몬은 주님의 뜻대로 바르게 구했기 때문에 지혜를 얻었고 분별력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솔로몬처럼 내게도 그런 지혜를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기는 하지만 말씀대로 뜨겁게 구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주신 것처럼 성도라면 누구에게나 분명하게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이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그것을 그에게 주시리라.](약1:5). 핵심은 구하는 것입니다. 악을 피하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정욕을 피하고 세상을 이기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이 악한 현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 지혜로 세상을 산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에서 배운 지혜, 땅에서 난 지혜, 사람들의 지혜, 육신의 지혜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세상 지혜나 학문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주]를 신뢰하고 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지어다.] (잠3:5). 우리는 비록 이 땅에 살지만 하늘의 법에 따라, 생명의 성령의 법에 따라 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 왕가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하는 성도들입니다. 세상 법이나 원리가 아니라 성령의 법을 따라 살기 위해서 성령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왜 그렇게 지혜가 없느냐? 배움이 없느냐? 무식하냐?’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왜 구하지 않았느냐? 고 책망하실 것입니다. 왜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고 이 세상의 지혜나 사람들의 지혜를 통해 살고자 하는 것입니까? 때로 하나님의 지혜가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나 사람들이 가르쳐 주는 지혜대로 살고자 하면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대로 살아야겠다고 결단하게 되면 하나님의 지혜를 필요로 하게 되고,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행할 때에 단순함과 하나님께서 주신 진실함으로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였으며 또한 너희를 향하여는 더욱더 그리하였노니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또 우리 양심이 증거하는 바라.](고후1:12). 육체의 지혜, 세상의 지혜, 사람의 지혜를 얻는 시간에 우리는 더욱 주께 지혜를 구하는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구하라]는 말씀은 “믿음으로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흔들리지 말지니라. 흔들리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기 때문이니](약1:6).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납니다(롬10:17). 고로 우리는 말씀을 내 안에 품고 필요를 구할 때 믿음으로 구하는 것이 됩니다. 믿음의 기도는 100% 다 받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을 원하든지 받는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받으리라.](막11:24). 흔히 믿음의 능력을 강조하지만 실로 중요한 것은 믿음의 대상이요, 근거인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가능이 없고,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고로 말씀을 믿을 때 말씀의 능력이 기도 응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받으리니"라는 말씀은 믿음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구하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내 이름으로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받으리니 이로써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우리는 위임장이나 대리인이라는 법적 근거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위임권자가 위임해 주는 권한 내에서 그 이름을 사용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종으로서, 사역자로서 권한을 위임 받았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든지 구해도 된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그 이름을 사용하면 도용(盜用), 남용(濫用)이 됩니다. 필요한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십시오. 필요한 대로 응답받을 것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요.](7)란 말씀은 정말 복된 말씀이지만 너무나 오용되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이는 구하는 것마다 모두 응답받게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잘못된 기도, 허황된 기도는 그 기도 자체가 죄가 되고, 가증한 것이 됩니다. [그가 심판 받을 때에 정죄 받게 하시고 그의 기도가 죄가 되게 하시며] (시109:7), [사람이 귀를 돌이켜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 기도마저도 가증한 것이 되느니라.] (잠28:9). 구하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먼저 우리 자신이 바른 사람이 되어야 그 기도는 주님께서 들으시는 것이 됩니다.
찾으라.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7b), [찾는 자는 찾을 것이요](8b). 찾는 일은 구하는 것보다 좀 더 적극적인 행동을 필요로 합니다. 목이 마른 자는 물을 찾고, 배가 고픈 자는 먹을 것을 찾습니다. 어떤 이는 잃어버린 물건을 찾습니다. 어떤 이는 갖고 싶은 것을 찾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필요한 자료를 찾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책이나 신문을 찾든지 논문을 검색하든지, 전문가들을 찾든지 필요한 것을 구하고 찾습니다. 중요하고 급한 것이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을 것입니다. 우연히 보물을 찾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치열하게 찾고 또 찾아서 찾습니다. 우연도 부지런히 찾는 이들에게 더 많이 다가옵니다. 과학자들의 과학 발견은 우연한 발견, 우연한 결과가 많지만 그들은 엄청나게 찾고 찾다가 예기치 않게 찾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구해야 하고, 찾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여서 아무 할 일이 없고 오직 믿음으로, 은혜로 다 주어진다고 오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는 노동이요(labour/수고로 번역)-[그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기도로 뜨겁게 수고하나니](골4:12), 사역(ministry)입니다. 구하고 찾는 일은 엄청난 노동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보물섬을 찾는 해적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광맥을 찾는 노다지꾼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산삼을 찾아 심산계곡을 다니는 심마니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량 종목을 찾아다니는 투자자들이 아닙니다. 범죄자들을 찾는 탐정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처럼 열심히 찾아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찾아도 찾을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확률에 인생을 걸고 찾지만 우리는 찾으면 반드시 찾을 수 있다는 보증이 있습니다. 그래도 찾지 않으면 찾지 않는 자의 책임입니다. 찾으면 찾을 수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첫째, 말씀을 찾으라.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고 감추어진 보화들을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그때에 [주] 두려워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아는 것을 발견하리니 이는 [주]께서 지혜를 주시며 그분의 입에서 지식과 명철이 나오기 때문이니라.] (잠2:4~6). 우리는 금광을 찾는 노다지꾼들이나 산삼을 찾는 심마니들처럼 찾고 또 찾는 진리의 탐험가들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성경의 바다 속에서, 석유와 개스를 찾는 사람들처럼 열심히 진리의 보화를 찾아야 합니다. 성경은 거대한 광맥이 숨어 있습니다. 이것은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7b), [찾는 자는 찾을 것이요](8b). 신자들은 성경이란 대해를 항해하며 진리를 Explorer들입니다. 관광객들이 산과 바다를 구경하듯이 구경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때로는 망원경으로 멀리 보듯이 성경 전체를 훑어보아야 하고 때로는 현미경으로 분자 구조까지 살피는 생물학자들처럼 한 단어, 한 단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입체경으로 보듯이 기록된 말씀들을 보아야 합니다.
둘째, 주를 찾으라. [주께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셨을 때에 내 마음이 주께 아뢰기를, [주]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27:8). 주님은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때로 자신의 얼굴을 돌리시고 숨기십니다. 그래서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찾는 이들에게만 얼굴을 보이십니다. 히브리서 11:6에 [또 그분께서 자신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니라.](히11:6b)고 하십니다. 주님을 찾고 발견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이는 세상에서 어떤 학자가 새로운 원리를 발견했을 때 얻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발견하는 것은 가장 큰 것을 찾고 발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너희는 주를 만날 만한 때에 그분을 찾으라. 그분께서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부르라.](사55:6). 우리는 지금이 주를 찾을 때요, 만날 만한 때임을 압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은혜의 시대요, 구원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주를 부르고, 찾고, 만날 만한 때입니다. 우리의 육체의 생명이 살아 있을 동안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아모스 5:4, 6절입니다. [[주]가 이스라엘의 집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리라.](암5:4), [[주]를 찾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그리하지 아니하면 그분께서 요셉의 집에서 갑자기 불같이 일어나사 그 집을 삼키리니 벧엘에서 그 불을 끌자가 없으리라.](암5:6).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를 찾는 대신 전문가를 찾고, Know how를 찾습니다. 방법론을 찾습니다. 주를 찾아야 할 때에 주를 찾지 않고 우상을 찾고, 점집을 찾고, 예언자를 찾고, 점성술가를 찾는 것은 더욱 황당한 일입니다. 해도 해도 안되는 일, 더 이상 방법이 없을 때 주님 앞에 엎드리든가 기도원에 가든가 금식을 하는 등의 일을 합니다. 처음부터 주님을 찾아야 할 일에서 다른 누구, 다른 무엇을 찾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요즘 가장 유행하는 말 중에 하나는 ‘내 속의 나를 찾아서’입니다. 잃어 버린 자신을 찾자! 이것은 종교인들의 주요 업무처럼 보입니다. 자아를 찾고,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신감을 찾고, 자기 안에 있는 무한한 능력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마치 성령의 사역인 줄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사이비 심리학입니다. 동양의 주술적인 요가, 선, 단 등은 모두 사람이 신이라도 되는 듯 ‘자아 발견’을 중요한 테마로 설정합니다. 그런데 어느덧 강단에서도 ‘무한에 접속하라. 네 안에 있는 잠자는 거인을 깨워라. 잠재력을 개발하라.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우라. 마음에 상상력을 발휘하라.’ 등등의 말을 합니다. 어떤 목사는 상상력은 4차원의 복음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순복음). 이로 인해 주님을 찾는 대신 자기를 찾는 노력을 하게 합니다. 이것은 위로부터 온 지혜가 아닙니다.
주님을 찾을 때 주를 만나고, 주를 구할 때 주님을 만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아사를 맞으러 나가서 이르되, 아사와 온 유다와 베냐민아, 너희는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만일 [주]와 함께하면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하시리라. 너희가 만일 그분을 구하면 그분을 만나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분을 버리면 그분께서도 너희를 버리시리라.](대하15:2). 우리는 주를 찾고 또 찾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구하지 않고, 주님을 찾지 않으면 주님 역시 우리를 찾지 않으실 것입니다.
뭔가를 찾으려면 정확한 지도가 필요합니다. 지도 없이 항해하는 배를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어디를 갈 때 꼭 지도를 먼저 확인하고 프린트해서 갑니다. 몇일 전에 누가 LA에서 우리 집을 정확히 찾아 온 형제가 있었습니다. 보통 말을 해 주어도 한 번씩 헤매고 찾아 오는데 정확히 우리 집을 단번에 찾아 왔길래 어떻게 그렇게 잘 찾았느냐고 물었더니 ‘제 차에 네비게이션이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주소만 입력하면 좌회전, 우회전, 정지 등을 표시해 줄 뿐 아니라 음성으로 말해 주는 그런 기계였습니다. 위성을 통해 위치를 알려 주는 그런 장비였습니다. 성경은 네비게이션과 같은 영적 지도입니다. 누군가를 찾으려면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안내자가 누구입니까? 성령입니다. 찾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주님입니다. 모든 것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2:3). 주님을 찾으시면 모든 것을 다 찾은 것입니다.
3. 두드리라. 마지막으로 ‘두드리라’입니다.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7c).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니라.](8c).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을 볼 수 있습니다. 집 주인이 문을 닫으면 아무도 열 수 없습니다. [집주인이 한 번 일어나 문을 닫으면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하여도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들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눅13:25). 이 경우를 제외하고는 구하고 찾은 다음에 두드리면 문이 열립니다. 장차 때가 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문을 열어 놓으실 때
여러분은 어떤 집의 문을 두드려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아니면 남이 우리 집 문을 두드릴 때 열어 주어 본 적도 있을 겁니다. 문 앞에 왔지만 문패만 확인하고 가만히 서 있거나 그 앞에 앉아서 누가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주인이 집에 없거나 있으면서도 문을 열어 주지 않을 때는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일단 집을 찾는 즉시 문을 두드립니다.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기 때문입니다. 밖에 서성거리면 집에서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구하고 찾는 일에 대해서는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양의 문입니다. [내가 곧 문이니 누구든지 나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 들어가고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10:9). 문을 두드리는 것은 주님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주님께서 각 사람들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晩餐)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계3:20). 주님은 우리에게 문을 ‘열어 다오’ 말씀하십니다. [내가 잘지라도 내 마음은 깨어 있으니 이것은 나의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로다. 문을 두드리며 이르시되,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더럽혀지지 아니한 자여, 문을 열어 다오. 이는 내 머리에 이슬이 가득하며 내 머리채에 밤의 이슬방울이 가득하기 때문이라, 하시는도다.] (아5:2). 그러나 우리가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주인이 되어 주실 때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두드려야 할 문은 무엇입니까?
전도의 문입니다. 복음 선포의 문입니다. 이 문을 두드리는데는 험난한 과정이 있습니다. 그 문으로 가는 데는 대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고자 함은 크고 효력 있는 문이 내게 열렸으며 대적(對敵)들도 많기 때문이라.] (고전16:8~9). 문을 발견하긴 했지만 대적들로 인해 두드리기를 포기해 버리면 들어가지도 못하고 혼을 얻지도 못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앞에 문을 열어 주시면 우리는 믿음으로 대적들과 싸우며 이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또한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려고 드로아에 이르매 {주}께서 내게 문을 열어 주셨으되] (고후2:12). 문을 열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문을 두드리는 일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문을 결코 스스로 찾지 못합니다. 이 문은 참으로 좁고 협착합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좁아 찾는 자가 적기 때문이라.](마7:13-14). 그래서 우리가 이 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문을 두드리는 행위 중의 하나가 기도입니다. [아울러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께서 말씀 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신비를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또한 이것을 위하여 결박당하였나니 이것은 내가 마땅히 할 말을 하여 이 신비를 드러내고자 함이라.] (골4:3~4). 여러분은 이 문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하고, 두드려 본 적이 있습니까? 문을 찾았다, 문을 구경했다. 문을 만져 보았다. 이것으로는 족하지 않습니다. 문을 찾았으면 두드리고, 문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장에는 동일한 내용이지만 한 가지 예화가 들어 있습니다.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친구가 있는데 한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친구여, 내게 빵 세 개를 빌려 다오.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그 앞에 차려 놓을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기를,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이제 문을 닫았고 내 자녀들이 나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비록 친구라는 이유로는 그가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가 귀찮게 졸라대므로 일어나 그의 필요대로 다 주리라.] (눅11:5~8). 괴롭게 할만큼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응답의 이유 중의 귀찮게 졸라대는 것 오직 한 가지입니다. 두드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습니다. *눅18장 참조. 울부짖으며 반복적으로 기도하는 자들이 얻습니다. [이 과부가 나를 괴롭게 하니 내가 그녀의 원수를 갚아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항상 와서 나를 지치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관이 말한 것을 들으라.] (눅18:5~6). 전도의 문을 열어 주시도록, 말씀 전할 문을 열어 주시도록 구할 때 그 문이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역시 구하고, 찾고, 두드림으로서 얻고, 찾고, 열리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