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돼지
말씀: 마7:6 요절: 마7:6
이 시간은 ‘개와 돼지’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흔히 인간성이 나쁜 사람들을 ‘개, 돼지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욕합니다. 개와 돼지는 사람과 매우 친숙한 동물들입니다. 오늘날 애완용 개는 사람이 먹는 음식보다 나은 음식을 먹고 잠을 자고 샤워를 합니다. 개에게 유산을 남겨 주는 사람들도 있고, 개의 공동묘지도 있습니다. 저는 성도들 중에도 개를 키우면서 ‘아가야’라고 하는 이를 보았고, 자신을 개의 ‘엄마’라고 하는 끔찍한 고백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개는 충직하고 사람을 잘 따르고, 집을 지키거나 사냥을 한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개는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으면 한 몸을 희생해서 양식이 되는 그런 짐승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개에 대한 표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개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바를 알면 오늘 본문의 의미는 절로 고개가 숙여질 것입니다. 개는 마을의 썩은 것을 청산하는 청소 동물로서, 혹은 집을 지키고 (사56:10), 가축의 무리를 지키는 파수꾼입니다(욥30:1).
주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라고 하십니다. 개는 거룩한 것을 먹을 수 없습니다.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들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것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을 개에게 던질지니라.] (출22:31). 개는 사람들이 먹을 수 없는 것을 주어서 먹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개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애완용 개를 돌보고 먹이고, 입히고 쏟는 정성을 형제들에게는 반의 반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정작 도움이 필요한 형제들이나 이웃들에게는 무관심하면서 자기 개를 먹이는 것은 주님께 가증한 일입니다. 개는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을 먹고, 먹다가 남은 것들을 던져서 먹이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먹어야 할 것은 개에게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마15:26). 오늘날 이곳 선진국에서는 개들이 너무나 대접을 잘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의 몸값은 주님께서 창녀의 몸값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받습니다. [창녀의 몸값과 개의 몸값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주] 네 하나님의 집에 가져오지 말라. 이는 이 둘이 [주] 네 하나님께 다 가증한 것이기 때문이니라.] (신23:18). 우리는 개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통해 배우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6절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들을 자기 발 밑에서 짓밟고 다시 돌이켜 너희를 찢을까 염려하노라.](6). 거룩한 것들을 개들에게 주지 말라. *개는 성경에서 비유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교도들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과 이교도들을 결코 같게 보지 않으십니다. 성도들이 먹어야 할 것들을 이교도들에게 주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들]이란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을 위해 구별된 것들은 다 거룩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이교도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교도들에게 성경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교도들에게 거룩한 것을 결코 주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 모든 것이 값없이 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개들은 누구인가?
첫째, 주님을 모욕하고 비난하며 찌른 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모두 거룩한 양무리가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개들이 나를 에워싸며 사악한 자들의 무리가 나를 둘러싸고 내 손과 발을 찔렀나이다.](시22:16)라고 했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외친 모든 유대인들이 다 개들입니다. 이들은 결코 주님의 양무리가 아닙니다. 우리 말에서 개는 욕설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동물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개같은 사람’과 성경이 말하는 개 같은 사람은 격이 다르고 차원이 다릅니다. 주님을 모독하는 이들은 그가 어느 방면의 대가로 존경을 받는 그는 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둘째, 탐욕스런 목자들로서 양들을 돌보지 않는 종교 지도자들은 모두 개들입니다. [그의 파수꾼들은 눈먼 자들이요, 그들은 다 무지한 자들이며 다 말 못하는 개들이므로 짖지 못하는 자들이며 잠자고 눕고 졸기를 좋아하니](사56:10).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개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욕설을 하시는가? 싶은 분들은 성경을 통해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개들, 독사들의 자식, 이리, 울부짖는 사자 등 여러 가지 동물들을 비유로써서 욕을 하셨습니다. 교양과 학식을 갖춘 점잖은 사람들의 입에서는 도무지 나올 수 없는 말들 같지만 주님이나 주의 대언자들은 가끔 쌍 욕을 사용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기대들은 밤에 성을 두루 돌아 다녔고(시59:6), 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기도 했습니다(왕상 14:11, 16:4, 21:24).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의 개는 길들여지지 않은 동물이었으므로 개에게 손을 대는 것은 위험하였습니다(잠 26:17). 그래서 솔로몬은 말하기를, [지나가다가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다툼에 개입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잠26:7)고 했습니다.
셋째, 개는 가장 심한 모욕의 말이었습니다(삼상 24:14; 삼하 3:8, 9:8, 16:9; 왕하 8:13; 이사야 66:3). 다윗이 저주를 받을 때 그는 [죽은 개]에 비유되었습니다. [이에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이르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원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매](삼하16:9). 죽은 개는 가장 보기 싫고 하찮은 인간을 뜻하는 관용구였습니다. 죽은 개는 시체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신하였던 시므이에게 죽은 개라는 저주를 들었지만 후에 사울의 손자였던 므비보셋은 다윗 앞에서 자신을 죽은 개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나같이 죽은 개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삼하9:8). 하나님은 모든 것을 받은대로 보응하셨습니다.
넷째, 복음의 원수들, 주의 원수들은 모두 개입니다. 블레셋은 자신을 향해 나오는 다윗을 향해 ‘내가 개냐?’고 성질을 부렸습니다. [그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으니 내가 개냐? 하고 자기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는](삼상17:43). 개는 원수나 적들입니다. 복음을 믿는 성도들이 탐욕을 부리고 자신의 배를 섬길 때 그는 양무리가 아니라 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많은 사람들 곧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걷느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파멸이요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수치스런 일에 있고, 그들은 땅의 일들을 생각하느니라)](빌3:18-19). 교회 내에는 주님을 섬기지 않고 자신의 배를 섬기며, 하늘에 애정을 두지 않고 땅의 일들을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다 십자가의 원수요, 개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교회를 오래 다녀도 결코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들은 결코 성경의 깊은 것들을 받지 못하고 누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지식의 보화를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개들에게 거룩한 것을 던지지 않습니다.
다섯째, 거짓 사역자들은 개들입니다. 빌립보서 3:2에 [개들을 조심하고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며 살을 베어 내는 자들을 조심하라.](빌3:2) 말씀합니다. 거짓 사역자들의 특징은 양들을 먹이는 대신 양들을 착취합니다. 먹는 것과 대접받는 것을 탐합니다(빌3:19). 개가 귀한 것, 거룩한 것들을 단지 먹을 것으로 생각하고 물어 뜯는 것같이 거짓 사역자들은 결코 복음의 가치를 알지 못하며, 영적 은사들과 열매들의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자신들의 직업이나 밥 벌이로 생각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바울이 직접적으로 언급한 개들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복음을 믿은 성도들을 향해 '할례를 받으라,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안식일을 지키라‘고 요구합니다. 몰몬교, 안식교 등 이런 교리를 주장하는 이들은 성경에 따르면 주님이 양들이 아니라 개들입니다. 여러분은 양들입니까? 개들입니까?
여섯째, 믿지 않는 남자들이 개입니다. [그러나, 개는 자기가(his) 토한 것으로 되돌아가고 씻겨진 돼지는 진창 속에서 뒹군다, 하는 참된 잠언에 따라 그 일이 그들에게 일어났도다.](벧후2:22). 여기 보면 개는 남성 대명사인 he/his로 받습니다. 돼지는 여성 대명사인 she/her로 받습니다. 개는 믿지 않는 남자들을 언급합니다. 세상 모든 남자들은 주의 피로 씻김받기 전까지 다 개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여러분이 불신자 아내와 살고 있다면 돼지와 사는 것이요, 불신자 남편과 살고 있다면 개와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라고 설교했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불신자 아내와 남편을 둔 이들이 매우 불쾌한 말일지 몰라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믿지 않는 모든 남자들은 개입니다. 점잖고 교양있고 학식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신사도를 발휘해도 술이 좀 들어가 보면 개같은 행태를 보입니다.
일곱째, 개들은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 올 수 없습니다. [이는 개들과 마법사들과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누구든지 바깥에 있기 때문이라.](계22:15). 오늘날 개들을 집 안에, 방안에 심지어 침대 안에까지 들여오는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개들은 성 안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개들은 마법사들, 음행하는 자들, 살인자들, 우상 숭배자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개들이 누구인지 살펴 보았습니다.
다시 6절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들을 자기 발 밑에서 짓밟고 다시 돌이켜 너희를 찢을까 염려함이라.] (마7:6).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진주는 값진 보석입니다. 교회는 진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성도들 역시 진주에 해당합니다.
돼지는 구약 성경에서 6회, 신약 성경에서 13회 나옵니다. 돼지는 탐식의 대명사로 사용됩니다. 성경에서 돼지는 개와 마찬가지로 부정한 동물이며, 유대인들에게 금지된 음식이었습니다.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나 되새김질을 하지 아니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레11:7),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되새김질을 하지 아니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들의 고기를 먹지 말며 그것들의 죽은 사체(死體)도 만지지 말지니라.](신14:8). 돼지는 굽은 갈라져 있지만 돼새김질을 하지 않습니다. 둘 중 하나만 충족되어서는 안됩니다. *굽이 갈라진 발- 성도는 두 가지 성품을 지닌 분리된 자들이다. 겉사람, 속 사람. 되 새김질-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주야로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돼지는 누구인가?
첫째, 분별이 없는 여자입니다. 잠언 11:22에 [아름다운 여자가 분별이 없는 것은 돼지 코의 금장식 같으니라](잠언11:22)라고 합니다. 여자의 외적 아름다움은 금장식과 같은 것입니다. 분별력이 없을 때 그것은 마치 돼지 코에 붙은 금장식과 같게 됩니다. 성경은 지혜로운 여인과 어리석은 여인이 나옵니다. 성경이 칭찬하는 여인은 외모가 아름다운 여인이 아닙니다. 분별력이 없는 여자는 돼지다!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칭찬하는 여인은 첫째, 은혜로운 여인- 잠 11:16, 둘째, 덕스런 여인- 잠 12:4, 잠 31:10, 잠 31:29 셋째, 분별있는 여인- 잠11:22 넷째,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 렘6:2, 넷째, 지혜로운 여인- 삼하14:2, 20:16 다섯째, 주를 두려워 하는 여인- 잠31:30 여섯째, 거룩한 여인- 벧전3:5입니다. 모든 여자들은 외모를 가꾸고 꾸미기에 앞서 영을 단장하고 가꾸는데 힘써야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성경은 “악한 여인, 게으른 여인, 수치를 끼치는 여인, 어리석은 여인, 음란한 여인, 향락 속에 사는 여인”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개같은 남자들이 돼지같은 여자를 찾는 것이 세상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어떤 형제가 섹시한 여자, 능력있는 여자, 돈 잘 버는 여자, 살림 잘하는 여자'를 찾는다면 그는 아직 영적 가치관이 없는 어리석은 형제요, 바른 것을 구하는 능력조차 결여되어 있는 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옛 생활로 돌아간 사람이 돼지입니다. [그러나, 개는 자기가(his) 토한 것으로 되돌아가고 씻겨진 돼지는 진창 속에서 뒹군다, 하는 참된 잠언에 따라 그 일이 그들에게 일어났도다.](벧후2:22). 성경은 이전 생활, 옛 생활로 돌아간 배교자들, 타락한 자들은 개와 돼지라고 말합니다. 거듭난 사람이 잠시 영적 생활을 하다가 롯과 같이 세상 속으로 빠져들면 그는 세상과 동화되어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씻겨진 돼지가 깨끗하여졌으나 곧 다시 더러운 구덩이에 가서 뒹굴어서 더러워지는 것과 같이, 성도들이 세상과 육신, 죄악의 쾌락으로 빠져들 때 그는 어린 양이 아니라 돼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셋째, 돼지는 마귀 들린 유일한 가축이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마귀들이 주님께 돼지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는 놀라운 말을 듣게 됩니다.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으므로 마귀들이 그분께 간청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허락하소서, 하매 ](마8:30-31). 성경에 마귀를 예표하는 동물들이 많이 있지만 직접적으로 마귀 들린 짐승은 돼지들이 유일할 것입니다. 당시 게르게스 지방의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먹지 않고, 배척하던 돼지들을 엄청나게 사육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부근에 있는 로마의 군대에 군납품으로 팔기 위해서였습니다. 돈벌이를 위해서 기꺼이 율법을 부정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자기 배를 섬기는 이들을 우리는 개라고 했습니다. 게르게스 지방의 돼지 사육은 마치 이곳 어느 지역에 거대한 양조 제조 공장이 있고, 향락 산업이 판을 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부정한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주님은 마귀들을 돼지들에게 들어가게 함으로써 심판하셨습니다.
넷째, 돼지를 먹는 이들에 대한 심판. [자기를 거룩하게 구별하며 자기를 정결하게 하고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뒤에서 돼지고기를 먹고 가증한 것과 쥐를 먹는 자들이 함께 소멸되리라. [주]가 말하노라.](사66:17).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셨고, 돼지고기를 먹는 이들은 소멸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에덴의 동산에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만큼이나 엄중합니다. 이스라엘은 타락할 때마다 이들의 식탁에서 금방 표시가 났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보면 그를 교회는 다닐지 몰라도 ‘성도’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성도라 해도 타락했구나, 실족했구나, 맛이 갔구나! 자동적으로 이런 판단이 듭니다. 이방인들은 누가 돼지를 먹으면 그를 결코 유대인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구약 중간 시대의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Antriochus Epiphanes)는 이스라엘의 신앙의 포기 및 배교의 증표로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했습니다. 돼지 고기를 먹는 순간 그는 유대교 신앙을 포기하고 굴복하였음을 의미하는 증거로 삼았던 것입니다. 돼지 고기를 먹는 일은 단지 ‘음식, 육식’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포기, 민족성의 포기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역사 기록을 보면 어떤 율법사의 입에 강제로 돼지 고기를 집어 넣자 그는 자기를 더럽히느니 명예롭게 죽는 것이 낫다며 고기를 뱉고 태형대로 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신약의 교리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고기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10:25)고 말합니다.
다섯째, 타락한 성도의 친구 돼지. 누가복음 15:15-16, [이에 그가 가서 그 나라의 국민 중 하나에게 연합하니 그 사람이 그를 자기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니라. 그가 돼지들이 먹는 곡식 껍질로 배를 채우려 하되 아무도 그에게 주지 아니하므로](눅15:15-16). 주님은 탕자의 밑바닥 생활을 ‘돼지치기’, ‘돼지들이 먹는 곡식 껍질로 배를 채우려 할 정도’로 말씀합니다. 돼지는 인간의 타락과 가장 낮은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양치기로 고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돼지치기로 전락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의 모습, 즉 타락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탕자는 더 낳은 생활을 위해 떠났습니다. 독립적인 생활을 위해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 결과는 돼지치기였습니다. 신앙의 포기는 이와 같습니다. 영적 타락이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다시 6절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들을 자기 발 밑에서 짓밟고 다시 돌이켜 너희를 찢을까 염려함이라.] (마7:6). 우리 주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개와 돼지는 거룩한 것, 진주의 가치를 전혀 모릅니다. 고마워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짓밟아 버리고, 다시 돌이켜 반격을 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을 ‘아무에게나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해하거나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전해야 합니다. 복음은 아무 때나 전해야 합니다. 복음은 귀한 것이고, 거룩한 것이고, 진주에 해당하지만 그런 영적인 적용은 다른 성경 구절과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한 영적 적용이 아니라 정확한 문자적인 의미와 적용을 하자면 이렇게 됩니다.
개와 돼지는 거짓 대언자들과 거짓 교사들입니다. 거룩한 것은 주님께 구별된 모든 것이 다 거룩한 것입니다. 진주는 귀한 보배로서 성도들입니다. 거짓 대언자들과 거짓 교사들에게 성도를 맡기고 교회를 맡기면 그들은 탐욕을 부리고, 혼들을 먹이는 대신 노략질 합니다. 교회를 자신의 사유 재산인 줄로 압니다.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수단으로 삼습니다. 거짓 대언자들은 약탈하는 이리들입니다. [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이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으로는 약탈(掠奪)하는 이리니라.](마7:15). 그들은 사람들을 속입니다. [거짓 대언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고](마24:11). 이것이 거짓 대언자들의 특징입니다. 거짓 대언자들 앞에 거룩한 것을 놓으면 모두 자기들의 것이 됩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그러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친 것들을 자신들이 먼저 마음대로 먹고 취했습니다. 이와같이 거짓 대언자들, 거짓 교사들은 성도들이 내는 물질에 탐욕을 부리고, 교회 건물에 욕심을 내고, 성도들의 머리 수에 군침을 흘립니다.
이들이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성도들을 거짓 교리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니 그들은 정죄 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리라.](벧후2:1). 이들은 양치기가 아니라 혼들의 사냥꾼들입니다. 주님은 이 점을 말씀하시고, 이들을 잘 판단할 수 있도록 거짓 대언자와 거짓 교사의 특징들을 성경 곳곳에 선명하게 기록해 두셨습니다. 구령한 혼을 가까운 아무 교회나 가라! 고 하는 것만큼 위험천만한 일이 없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개종자(改宗者) 하나를 만들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만들면 너희보다 두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우리는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단인 자들, 거짓 교사들, 종교인들에게 거룩한 것과 진주를 던질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짓밟고 우리를 공격하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많은 말씀을 비유로 하신 것도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개와 돼지’란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목자장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어린 양이 개와 돼지 같이 살거나 행동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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