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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판단하지 말라(01)

말씀: 마7:1
요절: 마7:1

사람들은 평생 동안 늘 판단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우리는 수백 번, 수천 번 판단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어떤 사건이나 일에 대해서 판단합니다. 판단력이야 말로 분별과 지혜의 결정체입니다. 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일은 누구나 몇 번 쯤은 다 경험했을 것입니다.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는 그 방면에 유경험자, 전문가들을 찾아가 조언을 구합니다. 그래도 판단에 확신이 서지 않으면 점쟁이를 찾기도 하고, 마귀들린 자들을 찾습니다.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서 외모를 보지 말고 큰 자뿐 아니라 작은 자의 말도 들으며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고 너희가 판단하기 어려운 사정이거든 내게로 가져오라. 내가 들으리라, 하였고](신1:17). *재판, 판단, 심판은 같은 말이다. 판단은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판단하기 어려운 일은 주님께 가지고 나아오라고 하십니다(신17:8). 중요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많은 정보와 지식을 구합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을 찾습니다.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지식이 있어야 하고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판단의 기준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익이 기준인 사람은 돈 되는 것은 모두 다 좋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악을 선이라 부르고, 선을 악’이라고 부릅니다(사5:20). 자기가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언제나 옳은 것, 선한 것, 의로운 것만을 선택하면 좋겠지만 바른 선택이라고 확신한 일이 때로는 잘못된 선택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지혜의 대왕 솔로몬이 말하기를,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잠14:12,16:25)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의 빛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그들이/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만일 그들이 이 말씀에 따라 말하지 아니하면 그 까닭은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니라.](사8:20). 말씀은 어두운 곳에서 등불처럼, 빛처럼 누구든지 그 말씀을 신뢰하는 자들과 두려워하는 자들을 인도해 줍니다. 그리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무리들과 제자들을 향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말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은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판단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판단하라(요7:24)고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 백성들에게 판단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오 예루살렘 거주민들아, 유다 사람들아, 청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사5:3). 베드로와 요한 역시 사람들을 향해 판단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눈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지 너희가 판단하라.](행4:19). 사도 바울 역시 성도들을 향해 자신이 말하는 바를 판단하라고 요구합니다. [내가 지혜로운 자들에게 말하듯이 말하노니 너희는 내가 말하는 바를 판단하라.](고전10:15). 거리낌 없이 당당히 나를 판단하라, 나의 말을 판단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들의 마음이 거리낌이 없고, 선하고 순수한 양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수차례나 주님께서 자신을 판단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오 [주]여, 내가 나의 순전함 가운데 걸었사오니 나를 판단하소서.](시26:1a). 주님의 판단은 정확합니다. 주님의 판단은 틀림이 없습니다.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은 그냥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 뒤에 생략된 말씀이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판단하지 말라](마7:1). 우리는 말씀대로 우리가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기 위해서 아무 것도 판단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식과 지혜를 구하는 것은 바른 판단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것도 바른 판단을 위한 것입니다. 특히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이의 판단은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릅니다. 옳은 판단, 잘못된 판단의 차이에서 오는 결과는 극과 극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판단은 가능한 모든 정보 취합하고 결과를 고려해서 내립니다. 우리는 학교, 직장, 교회 등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선택은 판단을 기초로 합니다. 판단의 핵심은 가치 기준입니다. 바른 가치관의 형성이야말로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의 차이를 판단해야 합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해야 합니다. 선과 악을 판단해야 합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판단해야 합니다. 국가 정책이나 세상의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크리스찬으로서 판단해야 합니다.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취할 것인가 버릴 것인가? 판단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판단하지 말라.’ 하십니다. 누가복음 6:37,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판단을 받지 아니할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아니할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6:37)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판단하지 말라”는 무조건적으로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행간을 함께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구절과 구절들을 비교함으로써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판단하지 말라는 말 뒤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주님께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구절을 봅니다. 요한복음7:24, 요한복음 8:15입니다.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말고 의로운 판단으로 판단하라.](요7:24).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요8:15). 남성은 여자의 외모에 이끌려 판단하고 여자는 남자가 가진 능력, 재물, 힘 등 소유에 끌려서 판단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겉모양이나 육체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 영을 달아 보시고 그것으로 판단하십니다. [이는 [주]가 보는 것이 사람이 보는 것과 같지 아니하기 때문이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삼상16:7b). 주님께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겉모양으로는 판단하지 말고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겉모양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돈, 지위, 지식, 가문 등이 있으면 사람이 달라 보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인물이나 옷차림을 보고도 사람을 판단합니다. 외모를 보고 사람을 깔보다가 그 사람이 지위가 높은 사람이란 것을 알 때 당황합니다. 무시하던 사람이 알고 보니 상당히 부자라는 말을 듣는 순간 놀라게 됩니다. 인물이 좋고 상당한 권세를 지닌 사람인 줄 알고 굽실거리다 알고 보니 사기꾼이었을 때 분노합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본능입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판단이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주의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외모는 결코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자란 이유로 그 사람이 의롭거나 사랑이 넘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아무도 돕지 못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부자라고 해서 다 성실하게 의롭게 일을 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부자들이라고 해서 다 주님의 은혜를 입고 복을 받은 사람은 아닙니다. 부자들이라고 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외모로 판단하다 보니 부자들에게는 상당한 신뢰를 주게 됩니다. 이는 교회 내에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집회에 금반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몹시 허름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화려한 옷을 입은 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그에게 이르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그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거기 서 있든지 여기 내 발받침 밑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약2:1~4). 주님은 이것을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부자를 높여 주는 것은 의로운 판단이 아니라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교회 내에는 세상보다 더 외모를 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도 중에 지위가 높거나 부자나 학식 있는 사람이 오면 덩달아 믿음까지 높여 줍니다. 욥기에 [만일 너희가 은밀히 사람들을 외모로 취할진대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를 책망하시리니](욥13:10), [청하건대 당신들은 나로 하여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게 하며 사람에게 아첨하는 호칭을 붙이지 말게 할지니](욥32:21)라고 합니다. *참조-욥34:19. 사람들이 높여 주는 부자들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겼도다. 부자들은 너희를 학대하고 재판석 앞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를 부를 때 쓰는 그 귀한 이름을 모독하지 아니하느냐?] (약2:6~7). 마찬 가지로 공부를 많이 하고 높은 학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인격이 고매한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학력의 유무가 인간됨의 차이를 낳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지위가 낮은 자들은 헛되며 지위가 높은 자들은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그들을 다 더해도 허무보다 가볍도다.] (시62:9). *지위=degree/학위. 부, 학력, 지위, 권세 등이 결코 신앙의 높낮이, 인격의 완성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공학 박사, 의학 박사, 철학 박사 등이 오면 어떤 목사님들은 설교하는 것조차도 부담된다고 말합니다. 그들 앞에서 말실수를 하지 않을까? 자신의 무식이 드러날까 봐 두렵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한 결과입니다. 세상의 어떤 높은 학위를 가졌다 해도 영적 지식과 지혜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영적 성장과 성숙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외모, 겉모습으로 죄를 이길 수 있는 경건의 능력, 영적 힘을 소유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둘째, 긍휼없이 판단하지 말라. [이는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가 긍휼 없는 심판을 받을 것임이니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기뻐하느니라.](약2:13).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관이시며,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는 분이시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사람의 연약함을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시편 78:39, 103:14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들이 다만 육체에 지나지 아니하며 지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는 바람임을 그분께서 기억하셨음이라.](시78:39). [이는 그분께서 우리의 체질(體質)을 아시며 우리가 /다만/ 먼지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이로다.](시103:14). 사람은 천사가 되고, 신이 되려는 초인(超人) 의지를 품고 있지만 실상은 먼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심판하시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까닭에 오늘 하루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긍휼을 입은 자로서 긍휼을 가지고 판단해야 합니다. 시편18:25, 스가랴 7:9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는 주께서 주의 긍휼을 보이시고 곧바른 자에게는 주의 곧바르심을 보이시며](시18:25).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니,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집행하며 저마다 자기 형제에게 긍휼과 동정심을 베풀고](슥7:9). 남을 판단하는 데는 서릿발처럼 날카롭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한 것은 비뚤어진 저울이요, 잘못된 자를 가진 것입니다. 이중 기준입니다. 고무줄 자란 말도 있습니다. 남에게는 긍휼 없이 판단하고 자신에게는 ‘인간이니까, 감정의 동물이니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니까, 부득이하게도…….’ 등등의 말을 붙이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할 때 긍휼을 가지고 그렇게 판단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판단하지 말라”하신 말씀에는 ‘긍휼없이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 율법을 판단하지 말라. 율법을 판단하는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은 의롭고 거룩한 것입니다. 율법에 대해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불가능한 일이다, 말이 되지 않는다, 구시대적이다, 유대인들의 이야기다 등등으로 판단하는 이들은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아니라 판단하는 자들입니다. 믿음으로 받아서 순종할 생각을 하지 않고 말씀을 비틀고 부정하고 교훈으로만 받으려고 하는 이들 역시 율법을 행하는 자가 아니요, 판단하는 자들입니다. 자기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자들 역시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자들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자기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자기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율법을 비방하며 율법을 판단하는 자니라. 그러나 만일 네가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을 행하는 자가 아니요, 판단하는 자로다.](약4:11). 주님은 형제들 간에 서로 비방하는 일은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자로 여기십니다. 형제들 간에 서로 비방하고 불평하는 일, 험담하는 일은 모두 정죄를 받을 일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불평하지 말지니 그리하여야 정죄를 받지 아니하리라. 보라,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시느니라](약5:9). 율법은 형제들아, 서로 사랑하라. 서로 돌아보라. 서로 짐을 나누어지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본성대로 사는 것은 쉬운데 율법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야 말로 율법의 비방자요, 판단자입니다.

넷째, 뇌물을 받고 판단하지 말라. 뇌물은 모든 판단을 굽게 합니다. *뇌물의 특징- 눈을 어둡게 한다. 세상에 선물을 싫어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선물에 대가를 지불해야 하면 그것은 더 이상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 됩니다. 때로 사람들은 선물과 뇌물의 경계가 모호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선물과 뇌물은 하늘과 지옥만큼이나 다른 것입니다. 구원은 뇌물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선물조차도 훗날을 대비하든지 이면에 다른 뜻을 품고 주기 때문에 뇌물이 되기 십상입니다. 신명기 16:19에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고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이는 뇌물이 지혜로운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기 때문이니라.](신16:19)고 합니다. 잠언 17:23에 [사악한 자는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의 길들을 굽게 하느니라.](잠17:23)고 말씀합니다. 재판, 심판은 모두 judge로써 판단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재판관이었습니다. 그는 왕정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 재판관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의롭고 바르게 재판했지만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와 같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8:3,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길로 걷지 아니하고 옆으로 돌이켜 이익을 추구하며 뇌물을 취하고 재판을 굽게 하니라.](삼상8:3). 사무엘의 아들들은 아버지와 달리 이익을 추구하고 뇌물을 취했습니다. 뇌물은 재판을 굽게 합니다. 요즘 법조인들의 비리가 터질 때마다 뇌물이 원인입니다. 주님께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뇌물을 받고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다섯째, 증거나 증인 없이 판단하지 말라. 오늘날 법치 국가, 민주주의를 자랑하는 나라들은 저마다 증거제일주의를 채택합니다. 성경은 일찍부터 재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증거요, 증인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재판관은 부지런히 조사할지니, 보라, 그 증인이 거짓 증인이요, 자기 형제를 대적하여 거짓으로 증언하였거든 너희는 그가 자기 형제에게 행하려고 생각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가운데서 악을 제거하라.](신19:18~19). 재판관은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늘 부지런히 증거를 조사해야 합니다. 증인의 진실성을 조사해야 합니다. 한 명의 증인이 아니라 최소한 두 명 이상의 증인을 확보하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거짓으로 증언한 것이 발각되면 위증죄를 엄격하게 물어서 처벌하게 했습니다. [너는 조사하고 살펴보고 부지런히 물어 보되, 보라, 그 일이 사실이며 이런 가증한 일이 너희 가운데 있음이 확실하면 너는 반드시 그 도시의 거주민들을 칼날로 죽이고 그 도시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것과 그 가축을 칼날로 진멸하며] (신13:14~15). 증거나 증인 없이 판단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증거와 증인 없이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증거도 없이, 증인도 없이 함부로 판단하면 우리 역시 그렇게 판단 받게 될 것입니다.

여섯째, 부당하게 판단하지 말라. [너희가 부당하게 재판하며 사악한 자들의 외모를 존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셀라.](시82:2). [그러나 부당하게 행하는 자는 자기가 행한 부당한 일로 인하여 보응을 받으리니 여기에는 사람을 외모로 취함이 없느니라.](골3:25). 부당한 판단을 받아 본 사람들은 그 피해를 절감합니다. 우리는 부당하게 판단하지 않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너는/ 지나치게 의로운 자가 되지도 말며 스스로 지나치게 지혜로운 자가 되지도 말라. 어찌하여 네가 네 자신을 멸하려 하느냐?] (전7:16).

일곱째,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라. 충분히 인내하면서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판단하십시오. 충분히 겪어 보지 않는 사람, 경험해 보지도 않는 일들을 미리 예단하는 것은 오류로 판명날 때가 많습니다. 이미 time -test를 겪은 것들은 문제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것들은 시간을 두어야 합니다.

“판단하지 말라”는 방법론에 대한 것 외에 대상이 있습니다. 성경은 형제들을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판단에 대해서 세 번이나 엄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4:4, [남의 종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거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느니라. 실로 그가 서게 되리라.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서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롬14:4).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리라.](롬14:10). [그런즉 우리가 더 이상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형제들 앞에 거치는 것이나 방해물을 놓지 아니하였는지 판단해야 하리라.](롬14:13). 우리는 형제들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삶을 판단하는 재판관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선악 간에 판단하는 일은 주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때로 우리는 창세기를 읽을 때 롯을 구원받지 못한 사람처럼 읽지만 그는 구원받은 성도요, 의로운 롯이라 불립니다. 열왕기를 읽을 때 므낫세처럼 악한 왕은 없어 보이지만 그가 회개하여 구원받은 왕이란 사실은 역대기하에 나옵니다(대하33). 누가 보더라도 삼손은 형편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히브리서 11장에는 그의 이름이 믿음의 영웅들 가운데 하나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판단할 수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만 우리는 롯이 한 일들에 대해서 판단하고, 므낫세가 행한 일들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5). 여기서 바울은 분명히 “모든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을 판단하라고 말했습니다. 반면 주님은 마태복음 7:1에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구절은 전혀 모순된 구절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위대하다고 판단했다가 후에 그가 위선자라고 판명날 때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반면 등신, 머저리로 판단했는데 알고 보니 숨은 일꾼으로 판명날 때 우리의 죄는 단순히 실수라고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들이 함부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사람의 회개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오늘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고 자신을 깊이 회개했다면 나는 그 사람의 죄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은 사람을 내가 계속 판단한다면 그것도 성도로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회개의 열매를 판단하겠다고 덤빕니다. ‘저 사람이 회개했다는 말은 믿을 수 없다. 저 사람이 한 말은 믿을 수 없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지나치게 의로운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회개의 합당한 열매에 대한 기준을 자기 자신의 마음에 차느냐? 그렇지 않느냐? 에 맞춥니다. 이것 역시 자기 의에 빠진 어리석은 자들의 행동에 불과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런 사람들을 향해 말하기를, [/너는/ 지나치게 의로운 자가 되지도 말며 스스로 지나치게 지혜로운 자가 되지도 말라. 어찌하여 네가 네 자신을 멸하려 하느냐?](전7:16). 구원파 교회 사람들은 다른 교회 교인들의 구원을 판단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교리, 자기들이 정해 둔 모범 답안에 따라 대답을 하면 구원을 받았다고 인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머리로 받은 구원이니 지식 구원이니 하면서 무시합니다. 이들은 모두 판단하지 말라는 것들을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네가 누구이든지 변명하지 못할 것은 네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 자신을 정죄하기 때문이니 곧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들을 행하기 때문이니라.](롬2:1). [율법을 주시는 이가 하나이시니 그분께서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네가 누구이기에 남을 판단하느냐?](약4:12).

우리 주님은 사람에 대해서 판단하지 말 것을 말씀하신 동시에 마땅히 판단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판단하지 못할 때 책망하셨습니다. 옳고 그른 일을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가 능히 하늘과 땅의 생긴 모습은 분별하거니와 어찌하여 이때는 분별하지 못하느냐? 또한 어찌하여 너희에 관하여도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지 아니하느냐?](눅12:56,57). 우리는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주님이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때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도 이런 사실들에 대해 전혀 분별력이 서지 않는다면 헛공부한 것입니다. 주님은 오래지 않아 곧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예언을 주의 깊게 살피고 공부함으로써 이런 사실들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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