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판단하지 말라(02)

말씀: 마7:1-3
요절: 마7:1-3

이 시간에는 판단할 때 가져야 할 기본적인 원칙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합니다. 판단받는 것이 두려워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안주고 안 받기’ 정도의 발상 밖에 되지 않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 봅시다. [너희가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판단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가 판단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도로 헤아림을 받을 것임이니라. 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도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하지 못하느냐?](마7:1-3). 이 말씀은 항상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판단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잣대로 자신을 먼저 판단해 보면 우리는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욕하기에는 너무나 추하고 더러운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이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자신은 누구보다 더 엄청난 죄인이요, 긍휼을 입은 자란 사실을 정확이 알고 감격한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 더러움, 사악함을 제대로 본 사람들 함부로 형제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방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태복음 7:1-4의 말씀을 읽지만 그 정확한 의미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도, 아무것도 전혀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주님은 판단의 순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판단하지 않고서는 남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에 들보를 생각하지 않고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는 것은 바른 판단이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말씀을 통해 자기 자신을 판단해야합니다. 이미 앞서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판단력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판단력이 없는 인간은 백치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뭔가를 판단하면서 살아갑니다. 선악의 판단이 없고, 옳고 그름의 판단이 없다면 무법천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판단을 하되 어떻게 하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전에 제가 아는 한 분 목사님은 한국 교계의 모든 목사님들을 판단하셨습니다. 기독교 신문을 보시면서 붉은 펜 한 자루를 손에 잡고서 기독교 칼럼 아래 밑줄을 죽죽 그어 나가며 이것은 비성경적이고, 이것은 뭐가 잘못되었고, 이것은 뭐가 틀리고... 이런 식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석서들의 오류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비판하고 바로 잡곤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분의 놀라운 성경적 지식에 놀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매료되기도 했습니다. 그분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고린도전서 2:15이었습니다.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5). 그분은 판단하기만 했지만 판단 받는 것은 거부했습니다.

그렇다면 영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은 세 가지 부류의 사람으로 나눕니다. 첫째,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 둘째, 거듭났으나 육신에 속한 사람 셋째, 거듭났으며 영적인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거듭났지만 여전히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책망했습니다. 다툼, 자랑, 시기, 분열 등은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잘 판단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들은 성경을 최종 권위로 삼는 사람들입니다(고전14:37). 성경을 주의 말씀으로 알고, 주의 명령인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대언자나 영적인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들이 주의 명령인 줄 알지니라.](고전14:37)고 말씀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판단 기준은 자아입니다. 물질입니다. 유익입니다. 이익을 경건이라고 생각합니다(딤전6:5). 교회도 크기, 규모, 사람의 수 등이 판단 기준이 됩니다. 영적인 사람들의 유일한 판단 기준은 오직 기록된 주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말고 의로운 판단으로 판단하라.](요6:24)고 말씀하십니다. *의로운 판단=주의 말씀. 성경 말씀은 주의 선한 판단들입니다. 주의 의로운 판단들입니다. 다윗은 말씀을 주의 판단들이라고 합니다(시119편 참조).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으로만 판단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미 이전 시간에 다룬 내용들이 중복되는 것도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판단의 기준은 철저히 성경이어야 합니다. 성경에 기준하지 않는 판단은 무시해도 됩니다. 이사야 8:20, [그들이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들을 따를지니 만일 그들이 이 말씀에 따라 말하지 아니하면 그 까닭은 곧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니라.](사8:20). 육신적인 사람들은 자기 기준, 세상 기준, 전통을 기준으로 남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만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성경만을 기준으로 삼기 위해서는 성경을 공부해야 하고, 성경적 기준을 정립하고, 의(義)의 말씀에 능숙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5:13-14, [이는 젖을 사용하는 자마다 갓난아이이므로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한 자로되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니 그들은 곧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3-14). 욥의 친구들이 어떻게 욥을 판단했는지 여러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한 명은 자기 경험에 맞추어 욥을 판단했습니다. 한 명은 이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기준으로 욥을 판단했습니다. 한 명은 순수한 교리에 근거해서 욥을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모두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 대한 이들의 잘못된 판단을 엄히 꾸짖으셨고 용서를 구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런 죄에 대해서 주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어떻게 판단하셨는가 보십시오. [그로 하여금 [주]를 두려워하는 가운데 속히 깨닫게 하시리니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귀에 들리는 대로 책망하지 아니하며] (사11:3).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만 판단하기 때문에 언제나 의롭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침묵하는 것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2:16, [그러므로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거룩한 날이나 월삭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골2:16). 구약과 달리 신약 교회에서는 먹는 문제로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커피도 마시지 말라, 홍차도 마시지 말라고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안식일을 준수하라고 가르칩니다. 어떤 교회는 고난절, 부활절, 추수 감사절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성경이 아무 말씀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성경이 논점으로 삼지 않는 것에 의미를 부여해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성경이 언급하고 있지 않다면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입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판단들을 들을 때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다윗은 반역자들에게 하나님의 버림받은 자란 판단을 받고, 엄청난 모욕과 저주를 받았습니다. 신약에서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는 자기 양들에게 사도권을 의심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판단을 받거나 사람의 판단으로 판단을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참으로 나도 내 자신을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나 스스로 /판단 받을/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이로써 내가 의롭게 된 것은 아니니 오직 나를 판단하시는 이는 {주}시니라. ](고전4:3-4). 예수님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내가 성경적으로 옳다고 확증한 일에 대해서 판단 받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셋째, 판단할 때 외모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앞 시간에 한번 다룬 내용입니다. 잠언 24:23, [이것들도 지혜로운 자에게 속한 것이라. 재판할 때에 사람의 외모에 관심을 두는 것은 좋지 못하니라.](잠24:23). 사람은 누구나 외모에 영향을 받습니다. 사무엘 같은 위대한 제사장도 이새의 아들들을 판단할 때 외모를 보고 엘리압을 취하려 했습니다. 힘 있고, 능력 있고, 재산 있고, 명예가 있으면 아무래도 재판에 유리합니다. 이런 세상의 조류가 교회 내에도 그대로 흘러 들어와서 유력한 사람들이 교회의 직분을 쉽게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이 과대 포장되고,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칭찬과 존경을 받게 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장(長)자리 교인이 들어오면 그날로 뭔가 직분을 맡겨 버린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외모에 관심을 둔 결과입니다. 주님은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말고 의로운 판단으로 판단하라.](요6:24)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은근한 호의를 베풀 수 있습니다. 약자에 대한 보호 본능이 발동하여 잘못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외모를 취한 역차별입니다. 이곳 미국은 같은 사안이면 약자 우선입니다. 남자보다는 여자, 어른 보다는 아이들, 정상인 보다는 장애인, 다수 인종보다는 소수 인종, 집 주인 보다는 세입자 우선 등등의 차별 금지법을 엄격하게 실행합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공평한 판단이 아닌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종교 차별을 금지한다는 명분으로 소수 종교를 보장하기 위해 공립 학교에 성경이나 기도회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레위기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고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강력한 자라고 예우하지 말고 오직 의롭게 네 이웃을 재판할지니라.](레19:15). 판단은 항상 공평해야 하고, 공의로워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외모에 관심을 두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 점을 엄중하게 경고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사람의 외모에 관심을 두면 죄를 범하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확정하리라.](약2:9).

넷째,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왕상 3:5-12). 솔로몬은 하나님께 백성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솔로몬은 20대에 성군 다윗의 뒤를 이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천 배를 드렸을 때, 그의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 때 솔로몬이 구한 것은 바로 ‘판단력’이었습니다. 주의 백성들을 판단할 힘, 즉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재판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솔로몬처럼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혜를 구할 때, 후히 주십니다. 교회의 대부분 문제는 기도로써 해결됩니다. 기도하기 전에 먼저 판단하고 정죄해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가 이것을 기도하노니, 너희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판단에 있어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빌1:9). 판단이 서지 않을 때면 그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가십시오.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가르쳐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기도하고 평안과 확신을 얻을 수 있다면 그보다 안전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면 오늘 내가 판단해야 할 많은 순간에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기도 제목입니다. 오늘도 판단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선택의 순간이 많이 닥칠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진리로 판단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리저리 예루살렘 거리를 뛰어다니며 이제 보고 알며 그 넓은 곳에서 찾아보라. 만일 너희가 공의를 집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거나 혹은 거기에 그런 자가 있다면 내가 예루살렘을 용서하리라.](렘5:1).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을 때 이 땅에는 심판이 임합니다. 이 땅에, 이 교회에, 각 가정에 하나님의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을 때 심판이 임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먼저 공의를 집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인가 판단하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비성경적인 교회인 줄 알면서 그 자리에 계속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성경적인 설교인 줄 알면서도 떠나지 못합니다. 비성경적인 교리와 실행이 버젓이 행해지고 있음에도 개의치 않습니다. 틀린 성경, 잘못된 성경을 가지고 주님께 예배를 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악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의 잘못된 성경관, 잘못된 예배관, 잘못된 신앙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보실 때 한 명도 진리를 구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볼 때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에스겔 22:30-31, [이 땅을 위하여 내 앞에서 울타리를 세우며 무너진 곳에 서서 나로 하여금 그곳을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들 가운데서 찾았으나 아무도 찾지 못하였나니 그러므로 내가 내 격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그들을 소멸시켜 그들의 길대로 그들의 머리 위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겔22:30-31). 교회는 사랑을 외치기에 앞서 진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3:8, [이는 우리가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할 수 있기 때문이요,](고후13:8). 진리로 판단하지 않을 때 아무도 거기에 수긍하지 않습니다. 진리에 따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욱 진리의 성경인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공부하고, 묵상하고,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여섯 째, 자기 자신을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판단하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고전11:31). 우리는 날마다 자신을 판단함으로써 주님의 정죄를 피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데는 게으르고 남을 판단하는데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하나님께서 판단하지 말라고 한 것들에 대해서는 재빠르게 판단하고, 하나님이 판단하라고 하는 일에 대해서는 마치 판단력이 부재한 사람처럼 행동해서도 안 됩니다. 성경이 말한바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 입증하라’ 하신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 현재 나는 성경적으로 제대로 성장하고 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구원 받은지 몇 년이 지났지만 한 명도 구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지 않는지 점검 해 보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구원받았음에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아직 여러분이 열매를 맺을 만큼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과는 심으면 6년째 접어들면서 과실을 맺습니다. 초본성 식물이나 나무는 심은 해 당해 바로 열매를 맺습니다. 접 붙임 한 나무는 그해 당장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해 당장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당한 나무들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은사가 풍성했지만 열매가 없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아직도 너희가 젖을 먹는 어린아이여서 단단한 고기를 먹지 못한다고 질책하였습니다. 그 열매로 나무를 안다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구원 여부가 아니라 성장 여부를 측정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남에게 판단을 받을 때입니다. 사람이 누구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좋지만 판단을 받는 것은 매우 불쾌한 일입니다. 마음에 참된 자유가 없으면 더욱 그러합니다. 사람들에게 판단을 받을 때 그로 인해 판단하는 사람을 대적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주의 징계로 받아들이십시오. [우리가 판단을 받으면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함께 정죄를 받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1:32). 판단을 겸허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고치고, 죄를 회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세상과 함께 정죄를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판단하는 죄를 짓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판단을 받았습니다. 저는 남을 판단했던 죄에 대해서는 생각날 때마다 회개하고 또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판단 받는 일에 대해서는 주께 징계를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을 무시해 버리곤 했습니다. 때로 그런 판단을 들을 때면 오히려 의로 인해 받는 비방, 욕설, 핍박이 아닌가? 스스로 합리화하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서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통해서 일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을 잘 몰랐던 까닭입니다.

확신을 갖고 하는 일, 양심의 거리낌이 없는 일들에 대해서 판단을 받을 때는 무시해도 됩니다. 그런 일에 일일이 예민하게 대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판단을 받거나 사람의 판단으로 판단을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참으로 나도 내 자신을 판단하지 아니하노니](고전4:3).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정죄할 일이 없다면 아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양심에 담대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판단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우리 성경에 심판이라고 번역된 이 모든 말씀이 바로 판단입니다. 재판을 말합니다. 우리의 판단은 굽고, 왜곡되어 선악이 뒤틀린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무엘과 같이 영적인 선지자도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여 다윗이 아닌 다윗의 형에게 기름을 부으려 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법정의 판단, 재판관의 판단을 두려워합니다. 저는 재판정에 몇 번 간 적이 있습니다. 검사는 날카롭게 죄를 추궁했습니다. 피고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굳어 있었습니다. 다행히 변호사가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변호사가 대신 답변해 주었지만 변호사가 없는 사람들은 어찌할 줄 모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행실이 모두 하나님 앞에서 판단을 받게 됩니다.

1. 모든 사람은 심판을 받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있는 것같이](히 9:27). [그들은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게 될 그 분께 설명하게 되리라.](벧전4:5).

2.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무시하느냐? 이는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설 것임이니.](롬14:10).

3. 믿지 않는 자들은 누구나 영원한 백 보좌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2:12)

4.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곧 그가 나타나실 때와 그의 왕국에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분 앞에서 네게 명하노니](딤후4:1).

5.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는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 또 다시 "주께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그 분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니](히10:30).

6. 우리의 생활양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자유의 법에 따라 심판받을 사람처럼 말하며 행동하라.](약2: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일에 대해 판단하고, 자신을 판단하고, 때를 판단하는 지혜를 얻도록 기도하고 훌륭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대신 다른 형제들을 판단하지 맙시다.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양에 차지 않는다 해서 정죄하고 비방하는 일은 주님을 거스리는 일이요, 주님의 심판을 받는 일이란 점을 기억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대로 주님 앞에서 심판(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말, 행위에 대한 심판도 심판이지만 형제를 판단한 일에 대해서도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무시하느냐? 이는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설 것임이니](롬14:10). 우리는 오늘 판단할 때 명심해야 할 일곱 가지 기준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언제나 말씀을 손에 잡고, 마음에 새김으로써 무릇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 갈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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