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하지 말라(02)
말씀: 마6:26-31
요절: 마6:26
근심, 걱정, 염려는 사람의 피부색이 다른 것처럼 말의 모양만 다를 뿐 동의어입니다. 세상에 근심, 걱정, 염려가 없는 이는 없습니다. 믿음은 근심, 걱정, 염려를 막아주는 방부제요, 방패입니다. 믿음이 커지면 근심은 사라집니다. 믿음이 강해지면 염려는 그만큼 약해집니다. 믿음이 자라나면 걱정이 없어집니다. 사람은 저마다 근심이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는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염려입니다. 이는 죄의 결과로 인간에게 형벌이기도 합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외치는 설교자들은 무엇을 설교할까? 어떻게 설교할까? 걱정하며 한 주일을 보냅니다. 제가 설교 제목이나 본문을 놓고 걱정하는 동안 저희 집 사람은 주일 아침에 교회에 무엇을 해 가야하나? 걱정을 합니다. 저마다 나름대로 걱정이 있습니다. 모양과 형태만 다를 뿐 모두 염려를 안고 삽니다. 의사들은 이것을 Stress라고 말하고 만병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삶에는 지치고 힘든 일, 감당하기 어려운 괴로운 일 자체보다 그 짐이나 일로 인하여 생기는 근심, 걱정, 불안, 초조 절망 등이 마음에 파탄을 가져오고, 건강을 해치고, 인간관계를 망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보다 먹을 것을 걱정하다 슬퍼하고, 염려와 근심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살해서 죽는 이가 더 많습니다. 지레짐작으로 길이 없다, 방법이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며 절망하는 첫 단계가 염려입니다. 염려를 하다보면 절망하게 되고, 절망하다 보면 심신이 쇠약해지고, 병들거나 죽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와 근거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에덴에서 동산을 만들어 주시고, 모든 것을 값없이 주신 그 주님께서 산에 오르사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동일한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죽음과 더불어 닥쳐온 문제가 [먹는 것과 입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더 이상 먹고 입는 문제는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생각하지도 말고 구할 것도 없다고 하십니다.
26절입니다. [공중의 날짐승을 보라. 씨 뿌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먹이시나니 너희는 날짐승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아니하냐?](26).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로 삶의 염려를 덜어 버릴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공중의 날짐승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날짐승들은 먹는 문제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왜 걱정을 합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욥기 38:41, 시편147:9입니다. [까마귀 새끼들이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 헤맬 때에 누가 까마귀들을 위해 먹을 것을 마련해 주느냐? 까마귀 새끼들이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 헤맬 때에 누가 까마귀들을 위해 먹을 것을 마련해 주느냐?](욥38:41). 하나님은 욥에게 누가 까마귀들을 위해 먹을 것을 마련해 주었느냐? 물으셨습니다. 그 대답은 시편에 있습니다. [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들에게 자신의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시147:9). 주님이 들의 짐승들을 먹이시고, 공중의 새들을 먹이십니다. 그들은 심지도 않고, 곳간을 만들지도 않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먹습니다. 시편104:27-28, [이것들이 다 주를 기다리오며 적당한 때에 주께서 자기들의 먹을 것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주께서 그것들에게 주신즉 그것들이 모이고 주께서 주의 손을 여신즉 그것들이 좋은 것으로 채워지며] (시104:27~28). 들의 짐승들이 먹이를 먹는 것은 식량을 구할 수 있는 진화의 소산이 아니라 주님이 먹이시는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생물학자들, 조류학자들이 모든 개체는 자연 진화하여 자신의 먹이를 찾는 능력으로 분화했다고 하지만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주를 기다리고, 주께서 자기들의 먹을 것 주시기를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중의 날짐승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영적인 구석이 있습니다. 들의 짐승들이 먹이를 찾아 울부짖을 때 주님은 그것을 들으십니다. 들의 짐승들은 주를 기다립니다. 공중의 새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인간들보다 훨씬 더 주를 신뢰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들의 짐승들도 주께 부르짖으오니”(욜1:20), “젊은 사자들이 자기들의 먹이를 쫓아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자기들의 먹을 것을 구하다가”(시104:21) 와 같은 구절들을 봅니다. 짐승들이 씨를 뿌리지도 않고 곳간을 만들지 않지만 먹을 것을 얻는 것은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고, 주님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런 날짐승들보다 훨씬 더 귀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한 사람의 혼을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십니다. [사람을 정금보다 귀하게 하되 심지어 오빌의 금광석보다 귀하게 하리로다.] (사13:12). 사람은 하나님의 모습(약3:9),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눈을 들어 주를 바라볼 때 주님은 양식을 주십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바라오니 주께서는 적당한 때에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주의 손을 여시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시145:15~16). 하나님은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시오,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염려하는 것은 공급의 근원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직장이 공급처이면 직장이 불안해 질 때 염려가 옵니다. 자신의 능력이 공급처이면 경쟁에서 밀려나거나 도태되는 것이 걱정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공무원이 편하다고 말합니다. 그나마 더 안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공급처/공급자가 하나님 아버지라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급은 풍성합니다. 하늘에는 파산, 부도, 부족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고, 어려워서 못할 일이 없습니다.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넘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항상 모든 일에서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선한 일에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이제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권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도록 능히 행하실 분에게] (엡3:20). 주님은 겨우 겨우 예산에 맞추시는 분이 아닙니다.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도록 능히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은혜가 넘치고, 긍휼이 넘치고, 내 잔이 넘치도록(시23:5) 부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주님의 성품을 알고 믿을 때 염려가 우리 안에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 중에 일이 아니라 그냥 마음 상태에 관한 것을 찾아보면 “두려워하지 말라.”-365회나 나옴, “근심하지 말라”-[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나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염려하지 말라”(빌4:6), “무서워하지 말라”, “불안해하지 말라”(살후2:2, 벧전3:14), 낙심하지 말라-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눅18:1), 환난들에 대해(엡3:13), 열매가 없다고 낙심하지 말라(갈6:9), 모순된 일들에 대해 낙심하지 말라(히12:3), 주의 징계와 책망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12:5). 우리는 마음을 지키는 것이 성을 지키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주님의 은혜가 의를 통해 우리를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 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27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한다고 자기 키를 일 큐빗 더 늘릴 수 있겠느냐?](27). 주님은 염려의 효용가치가 백해 무익하다고 하십니다. 염려한다고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염려한다고 자기키를 일 큐빗 늘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염려함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이 계속해서 대화법을 사용하시는 것은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에게는 “내일 비가 오면 어쩌나?”하는 것까지 걱정입니다. 누가 염려한다고 해서 살 사람이 못살게 되는 것도 아니고, 늙은 사람이 젊어지지도 않고, 병든 사람이 낫지 아니하고, 죽는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연구 기관의 자료에 따르면 ‘사람이 걱정하는 일중에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 40%,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걱정이 30%,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 22%,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한 걱정이 4%라고 말했습니다.’이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하는 염려, 걱정, 근심의 96%는 실제로 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불과 4%인데 그나마 염려한다고 해서 나아지지도, 변화되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나 지혜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3:6,7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자나 물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6-7).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것, 손 발톱이 자라나는 것 하나까지도 다 주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땅에서 풀이 자라나고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십시오.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놀랍기만 합니다. 그것들이 자라는데 ‘염려’가 큰 기여를 했다는 연구 결과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영적 성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자라는 것은 염려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이는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기 때문이니라.] (벧전5:7)고 했습니다. 주님은 부모가 자기 자녀를 돌보듯이, 농부가 자기 농작물을 돌보듯이,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우리를 돌보십니다.
미국의 목사님들이 염려에 대한 설교를 할 때 자주 인용하는 통계가 하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으로 약 20만 명의 미국 군인이 전사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약 200만 명의 사람이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고 염려, 근심, 불안, 초조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전쟁에 죽은 사람은 20만 명인데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은 200만 명입니다. 10배나 많은 사람이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으로 죽었습니다. 이처럼 질병이나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염려입니다. 잠언17:22, 18:44에는 영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즐거운 마음은 약같이 좋으나 상한 영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사람의 영이 그의 병약(病弱)한 것을 지탱하려니와 상처 입은 영은 누가 감당하리요?](잠18:14). 실제로 의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음속에 근심이 있으면 당의 수치가 급격히 올라간다고 말합니다. 고혈압 환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상태는 몸의 상태와 직결됩니다. 우리는 이미 성경적 건강법에 대해서 여러 번 다루었습니다. *잠3:8(주를 두려워하고 악을 피함), 잠4:22(하나님의 말씀), 12:18(지혜로운 자의 혀), 13:17(신실한 대사), 16:24(선한 말), 17:24(마음의 즐거움).
예화) 미움이나 염려와 근심은 몸에 암을 발생시키거나 굉장한 병을 가져옵니다. 염려는 또한 충치도 일으킵니다. 미국의 노스트 웨스턴대의 레오나르도 포스트익 박사에 의하면 사람이 근심, 걱정을 하게 되면 침 분비가 억제된다고 합니다. 누구나 근심하고 염려하거나 화가 나면 입술이 바싹바싹 탑니다. 입에 침이 마릅니다. 그래서 입속의 타액이 중성화되지 못해서 충치 등 입병이 생겨납니다. 그뿐 아닙니다. 미국 북쪽 위스콘신 주의 먼로 병원장인 쉰들러 박사는 류마티스의 30%가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으로 생겨나고 피부병의 33%와 담낭병의 50%는 마음에 혼란과 고통으로 생겨난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대다수의 질병이 외부의 육체적 자극 때문이 아니라 무기력감, 좌절감, 불안, 염려, 공포, 패배감, 절망 등의 정서적 이유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라토 박사는 의사들의 가장 큰 잘못은 환자의 정신을 그냥 두고 육체만을 치료하려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영이 혼에, 영이 몸에, 몸이 혼과 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이미 살펴 보았습니다. 즐거운 마음은 골수의 양약이지만 마음의 근심, 슬픔, 염려는 뼈를 마르게 합니다(잠17:22). 영이 상하면 몸은 병을 견디지 못합니다(잠18:14).
28절입니다. [또 너희가 어찌 옷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28). 오늘 날은 옷이 너무 많습니다. 어느 집이나 옷장에는 입지 않는 옷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런데 정작 입을 만한 옷, 제대로 된 옷이 없다고 투덜댑니다. 하지만 2000년 전에는 옷 한 벌 구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겉옷은 담보물로 잡기도 했습니다. 옷은 재산 목록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어찌 옷을 위하여 염려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들의 백합은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합니다. 그런데 멋진 옷을 입고 있습니다. 주님이 입혀 주시기 때문입니다. 들의 백합이 입는 옷은 싸구려 옷이 아닙니다. 그 옷의 아름다움, 영광은 솔로몬이 입었던 왕복보다 나은 것이었습니다.
29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자기의 모든 영광을 누리던 솔로몬이 차려 입은 것도 이 꽃 하나와 같지 못하였느니라.](29). 왕복이나 대제사장들이 입었던 옷이 가장 화려하고 멋진 옷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옷이 들 꽃 하나와 같지 못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이 무엇입니까? 유명 디자이너가 만든 옷이 아닙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은 이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육신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롬13:14).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이 보다 더 나은 옷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입게 되는 옷입니다. 천이나 가죽으로 몸을 가리는 옷이 아니라 우리의 혼을 가려 주는 참된 옷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또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음이라.](갈3:27). 우리가 장차 입게 될 옷은 이것입니다. 고린도후서5:2-3, [우리가 이 장막에서 신음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옷 입기를 간절히 원하노니 우리가 그와 같이 옷 입으면 벌거벗은 채 드러나지 아니하리라.](고후5:2-3). 주님은 우리에게 최상의 옷을 입히십니다. 이 옷은 썩지도 않고, 상하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이 옷은 무너지거나 부수어지지 않습니다. 이 옷은 영원합니다.
30절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든, 오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물며 너희는 더 잘 입히시지 아니하겠느냐?](30).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는 이들을 주님은 ‘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책망하십니다. 들풀도 하나님께서 입히시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입히지 않으시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더 잘 입히십니다. 우리가 먹는 것과 입는 것을 걱정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아버지의 아들의 관계가 정립되면 먹고 입는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31절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31). 주님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는 말을 하지 말고 도리어 성도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요21:15,16,1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먹을 것을 주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독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자신과 모든 양떼에게 주의를 기울이라. 성령님께서 너희를 그들의 감독자로 삼으사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먹이게 하셨나니](행20:28). 교회를 먹이는 것이 임무입니다. 목자의 역할은 양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고 ...](벧전5:2a). 이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받아야 나누어 줄 것이 있습니다. 때로 어떤 목자들은 자기 배만 채우고 양들을 굶겨 죽이는 예가 있습니다.
주님이 세상의 모든 백성을 먹이시는 방법은 주님을 믿는 제자들을 통해서입니다. 바울은 나누어 줄 영적 선물이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은 너희에게 어떤 영적 선물을 나누어 주어 너희를 굳게 세우고자 함이니](롬1:11).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주님이 주신 것을 받아서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받은 것들을 나누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모른 척하는 것은 공공의 적입니다.
주를 바라보면 주님은 먹을 것을 주십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바라오니 주께서는 적당한 때에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주의 손을 여시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시145:15~16). 모든 생물들은 주님이 먹여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것을 먹습니다. [이것들이 다 주를 기다리오며 적당한 때에 주께서 자기들의 먹을 것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주께서 그것들에게 주신즉 그것들이 모이고 주께서 주의 손을 여신즉 그것들이 좋은 것으로 채워지며 ](시104:27-28). 그러나 사람들은 먹을 것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주님이 공급하시는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임하는 저주가 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먹을 것을 찾아 위아래로 헤매게 하시고 만족하지 아니하여 불평하게 하소서.](시59:15).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돌이키지 않았을 때 주님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들을 잡아먹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비둘기 똥을 사 거기서 소화되지 않는 곡물을 찾아 먹는 일도 있었습니다. 범죄하고 타락하고 반역하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민족은 미래가 없습니다.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리니 죽는 자는 죽을 것이요, 끊어질 자는 끊어질 것이며 나머지는 각각 서로의 살을 먹을 것이라, 하였느니라.](슥11:9).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거기서 도움이 오고, 영육간에 양식이 나옵니다.
주를 찾는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젊은 사자들은 부족하여 굶주릴지라도 [주]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34:10). 주님은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선하십니다. 버리지 않으십니다(시9:10). [온유한 자는 먹고 만족할 것이며 [주]를 찾는 자들은 그분을 찬양할 것이요,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리로다.](시22:26). 주를 찾으십시오. 주님은 광야에서 풍성한 식탁을 차리시고 원수들 앞에서 상을 베푸시며, 잔을 넘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먹이십니다. [오 [주]의 성도들아, 너희는 그분을 두려워하라. 이는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로다.](시34:9). 주를 두려워하십시오.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보호를 받고, 복을 받고,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주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먹이십니다. [주의 백성을 구하시고 주의 상속에게 복을 주시며 또 그들을 먹이시고 영원토록 들어올리시옵소서.](시28:9).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면 먹고 마시는 문제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더 가지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물자가 부족하고 무엇이 부족한 사람들은 있을 때 모아두고, 저축해 두려고 합니다. 없을 때를 늘 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늘 풍족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부족할 때를 대비해서 모아두고, 쌓아둘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언제나 함께 하시고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행실을 탐욕이 없게 하고 너희가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 이는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라.](히13:5).
주님은 기도하는 자를 먹이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아뢰라.] (빌4:6). 필요를 구할 때 주님은 공급하십니다(빌4:19). 주님은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을 친히 약속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이 있다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부인하거나 파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친히 선포하신 약속을 결코 무효화하거나 폐기하실 수 없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양떼를 먹이십니다.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 것이며 나는 그분의 것이니 그분은 백합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시는도다.](아2:16, 참조 6:2-3). [그분께서는 목자같이 양떼를 먹이시고 어린양을 자기 팔로 모아 품에 안아 옮기시며 어린것들과 함께하는 어미들을 부드럽게 인도하시리로다.](사40:11). 우리는 모두 주님의 양떼들입니다. 양들의 먹을 것은 목자가 책임지십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를 먹이십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띠로 그들을 이끌었나니 곧 그들에게 턱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았으며 또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호11:4).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아들도 아끼지 않으신 주님께서 무엇을 더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악할지라도 자기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 먹입니다. 하물며 선하시고 의로우시며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먹이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이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주님은 자신의 사역자를 먹이십니다. [여행을 위하여 짐보따리나 덧옷 두 벌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준비하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라.](마10:10). 주님은 누구든지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신실하게 먹이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과 의를 구할 때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먹을 것을 받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도들의 의무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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