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하지 말라(01)
말씀: 마6:25
요절: 마6:25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한 가지 절박한 걱정거리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먹는 것’입니다. 에덴의 동산에서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freely) 먹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대로라는 말은 ‘공짜로’ 먹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제외한 모든 것을 마음대로 먹게 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라는 먹는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그 남자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동산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은 네가 마음대로 먹되](창2:16). 에덴의 동산에서 사람은 무엇을 먹기 위해 노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입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freely"(마음대로, 공짜로, 자유로)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범죄한 이후로 사람들은 ‘죽음’이란 사망의 형벌 외에도 당장 자신의 힘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절박한 문제가 생겨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었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는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 때마다, 무엇을 입을 때마다 창세기 2-3장이 저절로 생각납니다. 범죄 한 후에 우리 몸은 먹고 입는 문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먹고 입는 문제는 환경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인구의 증가로 인해 생긴 문제가 아닙니다. 분배의 불균형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진단은 사회학자들의 진단일 뿐입니다. 먹고 입는 문제는 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문제의 해결없이는 결코 인류의 식량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3:17-19,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령한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토록 고통 중에 땅의 /소산을/ 먹으리라. 또한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네가 들의 채소를 먹으며 땅으로 돌아가기까지는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하여졌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7~19). 주님은 아담에게 “네가 평생토록 고통 중에 땅의 소산을 먹으리라”,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고 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이후로 사람들은 땅에서 나는 것을 먹기 위해 얼굴에 땀을 흘리고 일을 해야 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큰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살기 위해 먹는 것인지, 먹기 위해 사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먹기 위해 삽니까? 살기 위해 먹습니까? 사람들은 스스로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먹어야 사는 것은 사실이지만 먹기 위해 살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절대 빈곤에 허덕이고 있으며 여전히 무엇인가를 먹어야할 때 먹지 못한 채 굶고 있습니다. 난민들만 그런 것이 없습니다. 이는 선진국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생명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란 염려는 아담이 범죄 한 이후로 계속되어 온 문제입니다. 이것은 결코 정치 체제나 제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빈곤은 교육으로 타파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든 선교사들이 교회를 세우고, 주님을 믿는 이들이 늘어날 때 그 지역의 빈곤이 기적처럼 해결됩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을 향해 “너희 자신을 위해 땅에다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 하셨고,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등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도 쓰지 말라고 하십니다. 무리들과 제자들이 부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산으로 온 이들은 다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권력자들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생각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땅이 아닌 하늘, 맘몬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에게 필수적인 일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란 염려에서 놓여야 합니다. 먹는 문제는 주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해 주실 뿐 아니라 먹고 입는 문제에서 자유를 주십니다. 먹고 입는 문제에 대한 염려가 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에게 내려진 저주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갈3:13)에 의해 풀립니다. 몸의 구속을 제외한 모든 죄와 저주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해결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25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생명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생명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25). “그러므로”란 앞의 문맥에 이어지는 결론이란 것입니다. 맘몬이 아닌 하나님,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에 대한 결론이 먹고 입는 문제에서의 해방입니다. 우리 말로 “염려하지 말라”고 한 염려는 "Take no thought"입니다. 아예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가 에덴의 낙원도 아닌데 왜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입니까? 먹는 문제와 입는 문제는 주님이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이 아무 식물도 자라지 않는 황무지이고, 아무 샘이나 강도 없는 광야라 할지라도 먹는 문제는 주님이 친히 해결해 주십니다. 이는 이미 출애굽 40년 광야 생활에서 입증해 보이신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기근을 만난 때는 언제나 죄의 결과였습니다. 징계와 심판의 결과였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그들은 먹을 것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의 공급자이십니다. 구원받는 순간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서 살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생활의 첫 단계입니다. 때로 우리를 주리게 하시는 것은 우리를 시험하사 낮추시고, 사람이 말씀으로 사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신8:3).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먹고 사는 법을 가르칩니다. 공부를 시키고, 기술을 가르치는 것은 다 먹고 살라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자식을 교육시키는 것은 “자기 혼자 스스로 밥 벌어 먹는 법은 알게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처럼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을 구해야 합니다. 당장 먹고 살 것이 막막한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번 달에 내야 할 payment을 생각하면 숨이 턱에 와 닿습니다. 이곳 미국 생활이란 것이 우체함을 열어 보면 거의 매일 청구서가 들어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란 염려가 들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부담이 되는 그런 시스템입니다. 염려한다고 나아 질 것은 없지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손에 한 움큼의 청구서들을 들고 집에 들어가면 “주여... 도우소서!” 한 숨을 쉽니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현실입니다.
주님은 연 이어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24,31).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마6:34). 염려란 어떤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 말씀일 때 그것은 묵상입니다. 생각의 대상이 주님일 때는 애정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일을 계속 생각하면 염려입니다. 염려는 주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의심하는 죄입니다. 걱정, 근심, 염려 등은 거의 같은 말입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안 되는 일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염려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자기도 모르게 염려하는 것은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이 현재 나를 인도하시고 계시다는 믿음과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노래하기를,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23:1)고 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가 부족한 만큼 주님이 채우십니다. 내가 50%가 부족하면 주님이 50%를 채우시고, 내가 90%가 부족하면 주님이 90%를 채우십니다. 내가 아무 힘이 없고 Nothing이라면 주님이 전부(all)이 되어 주심으로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아이들이나 장애인들이 어디를 가거나 무엇을 할 때면 반드시 “보호자 동반(행)”이란 조건이 붙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동행하는 보호자가 채워야 합니다. 보호자가 없다면 문제가 되지만 보호자가 있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간단한 예를 들어 봅시다. *내가 같이 가 줄께!! 이는 안내자로서, 도우는 자로서, 공급자로서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양들은 혼자 살도록 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항상 목자가 곁에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먹이고 보살피고 보호합니다. 그들을 인도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무리를 향해 “먹고 입을 것은 내가 마련해 줄테니 염려하지 말아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 돈주머니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준비하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짐보따리나 덧옷 두 벌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준비하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라.](마10:9-10). 이들은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각 도시로 흩어졌지만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휴일이나 방학 때에 애들과 함께 놀이 공원을 간다고 해 봅시다. 애들은 매우 좋아합니다. 그래서 언제가? 어디로 가? 묻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너희들끼리 다녀와라. 엄마 아빠는 안 간다.” 그러면 애들은 난감합니다. 혼자 가는 것과 함께 가는 것의 차이가 뭡니까? 혼자 가면 먹을 것, 입을 것이나 혼자 다 준비해야 합니다. 혼자 모든 일을 다 처리해야 합니다. 위험이 닥쳐도 혼자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와 함께 가면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마음에 두려움이나 염려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덧 나이가 들면 아이들은 혼자 가겠다고 말합니다. 함께 가면 시간을 같이 보내야 하고, 간섭하고, 잔소리 듣기 싫고,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등등의 이유로 돈만 두둑이 달라고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넉넉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만 넣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던져 주시고 혼자 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아무 것도 주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영적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내 주머니 속에 천금을 넣어 주는 것보다 더 넉넉하고 안전합니다. 누가 나와 함께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있습니까?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단연 1순위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한 분이면 아무 것도, 그 누구도 필요치 않습니다.
영적 생활의 비밀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즉 임마누엘의 진리를 얼마나 깊이 마음에 받아 들이고 있느냐? 에서 비롯됩니다. 주님은 모세나 여호수아나 재판관들(사사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사명을 주실 때 다른 어떤 특별한 능력이나 지혜나 엄청난 자금을 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 믿음의 선진들이 받은 것 역시 동일합니다. 야곱의 경우를 한 번 살펴 봅시다. 야곱은 죽음의 위기에서 멀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는 도망가는 길에 벧엘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야곱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아무 것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28:15, [또,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리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임이라, 하시니라.](창28:15). 이 약속은 몇 차례나 반복됩니다. 창세기 31:3, [[주]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친족에게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하시매](창31:3). 야곱 곁에는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사람들은 초라한 야곱의 모습만 보입니다. 야곱 곁에 계신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곱 곁에는 언제나 주님이 계셨습니다. 창세기 46:4, [내가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고 또 반드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창46:4).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갈 때 야곱 혼자 내려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내려가셨습니다. 야곱은 특별한 힘과 지혜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그는 유명한 왕이나 장군이 아닙니다. 그는 탁월한 학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무엇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 땅에 대 기근이 들었을 때에 그들은 먹을 것을 걱정했지만 하나님은 이미 요셉을 통해서 그들이 먹을 것은 물론이요, 살 거처까지 다 준비해 두셨습니다. 주님은 야곱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마28:20, 히13:5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닫게 되기를 빕니다. 금은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군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돈많은 친구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뒤를 보아 줄 권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것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이런 것을 든든하게 형성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만이 필요합니다. 80세가 된 양치기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는데 필요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탁월한 카리스마?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화 같은 지지도? 우호적인 언론? 절묘한 국제 정세? 유능한 참모들과 든든한 군대?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이집트로 가서 백성들을 인도해 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의 능력이나 지혜로 될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세를 보내시면서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하십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는 필요 충분 조건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하리라. 네가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낸 뒤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그 일이 내가 너를 보낸 증표(證票)가 되리라.](출3:12). 제가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나와 함께 한다.” 주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보내시면서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같이 간다는 것입니다. 일은 같이 한다!!
여호수아의 예를 봅시다. 신명기 31:6, 8, 23입니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膽大)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이는 [주] 네 하나님 그분께서 너와 함께 가실 것임이니라. 그분께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니라.](신31:6). [[주] 그분께서 너를 앞서 가시고 너와 함께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하니라.](신31:8), [그분께서 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책무를 주시며 이르시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여 내가 그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하시니라.](신31:23). 가나안으로 입성해서 치러야 할 수많은 전쟁을 앞두고 장수로서 필요한 한 가지가 이것입니다. 이 말씀은 여호수아에도 반복해서 나옵니다(수1:5,9 3: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영원토록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먹고 입을 것이 걱정이겠습니까? 아무 것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 바락- 사람을 의지함. 이스라엘에 바락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군사 만명을 이끌고 시스라와 싸우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그때 바락이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여대언자 드보라에게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드보라가 없이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가 야빈의 군대 대장 시스라와 그의 병거와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 하셨느니라. 바락이 드보라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삿4:7~8). 때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더 의지하고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유능한 참모, 우호적인 동료나 누가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이는 사람의 약점입니다. 어떤 교회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성도들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한다고 하면 염려부터 합니다. 말만 나오면 부정적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도 없고, 말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부자 집사님이 한 분 계셔서 “걱정 마십시오. 제가 나서 보겠습니다.”라고 하면 모두 환호를 하면서 안심을 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부자 집사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을 보고 크게 낙담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바락과 같은 인물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염려가 가시지를 않습니까? 그렇다면 기도의 동역자, 주의 신실한 동역자를 찾으십시오. 그리고 점점 사람을 의지하는데서 벗어나 오직 한 분 주님만을 신뢰하십시오.
바락과 달리 기드온은 표적을 구했습니다. 기드온은 겁이 많아서 포도즙 틀에서 밀을 타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주의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사사기 6:12, 15-17, [[주]의 천사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강한 용사여,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기드온이 그분께 이르되, 오 내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내 가족은 므낫세 중에서 가난하며 또한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하리니 네가 미디안 족속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 기드온이 그분께 이르되, 이제 내가 주의 눈앞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주께서 나와 말씀하심을 보여 주는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삿6:12~17). 겁쟁이를 불러서 강한 용사라고 하신 것은 농담이 아닙니다. 이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순간 그가 강한 용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기드온과 함께 하시는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소심한 겁쟁이가 아니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구원자가 됩니다. 주님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하리니”라고 하심으로 기드온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부족분은 주님이 채우십니다.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무 것도 없어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전부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는 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도 자라나지 못하게 합니다. 염려는 말씀의 숨을 막습니다. [가시나무 사이에 씨를 받은 자 또한 말씀을 듣되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수로 인해 말씀이 숨이 막혀 열매맺지 못하는 자라.](마13:22). 우리 안에 받은 말씀이 믿음과 결합하지 못하면 아무 효력이 없고, 염려가 있으면 숨이 막혀 자라지 못합니다. 믿음의 성장을 가로 막는 한 가지가 염려입니다. 주님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내 속에 염려가 많을 때에 주의 위로가 내 혼을 기쁘게 하였나이다.](시94:19)라고 합니다. 성령은 위로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에 근심 걱정을 주님 앞으로 나아가 내려 놓으십니다. 주님께서 모든 염려를 맡아 주시고 마음에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요14:16).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다 기억나게 하시리라.](요14:26). 사람들의 위로는 참된 위로가 아닙니다.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 더 상처를 줍니다. 욥의 친구들을 보십시오. 욥을 위로하기 위 해 왔다가 욥을 반쯤 죽여 놓고 말싸움만 벌였습니다. 그러나 위로자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주시는 위로는 기쁨과 평강과 안식으로 드러납니다.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염려를 맡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돌보십니다.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이는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기 때문이니라.](벧전5:7). 하나님은 우리를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돌보십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다 세시며, 마음속 생각을 아시고, 발 걸음을 재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기도하기 전에도 이미 필요를 다 아십니다. 그래서 어떤 것들은 전혀 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이 생각지도 말라는 것들은 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염려가 있습니까? 주님께 맡기십시오.
기도하십시오. 빌립보서 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 이상으로 풍성히 공급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 이상으로 주실 수 있습니다. [오직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빌4:19).
범죄한 아담에게 내려진 저주는 마지막 사람이요,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풀립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담의 저주와 상관없이 먹고 입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도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친히 공급자요,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모든 믿음의 선진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은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을 통해 오신 것도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참된 만족과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누립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주제별(글) > 산상수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염려하지 말라(03) (0) | 2007.04.11 |
---|---|
염려하지 말라(02) (0) | 2007.04.09 |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0) | 2007.04.07 |
단일한 눈 (0) | 2007.04.03 |
보물과 마음 (0) | 2007.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