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황금률

말씀: 마7:12
요절: 마7:12


오늘 말씀은 성경의 ‘황금률’이라 불리는 구절입니다. 누가 이름 붙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 7:12은 성경의 ‘황금률’로 통하고 있습니다. 황금률이란 뜻은 이 한 가지로 모든 율법을 다 완성할 수 있는 만능의 율법, 최고의 율법이란 뜻입니다. 모든 율법에 다 통하는 율법, 율법 중의 율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종교에나 산상수훈의 황금률과 유사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브라만교에는 “너에게 행했을 때 고통이 될 만한 일이라면 남에게 전혀 하지 말라.”, 불교에는 “네 자신에게 상처가 될 만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일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 논어에는 “기소물욕 물시어인”(남이 나에게 하기를 원치 않는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 힌두교에는 “자신에게 해서 안 될 일이라면 남에게 해서도 안된다.”. 소크라테스는 “남들이 나에게 했을 때 화가 날 일이라면 그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 이 말들은 모두 주님이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유사품들인지라 현저히 품격과 질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단지 알아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만 가르치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고 행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 중에 어느 하나도 알고 믿는 것으로 족한 말씀은 없습니다. 모든 말씀은 알고, 믿고 그대로 행해야만 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들은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생이라고 부르면 우리는 배우는 학생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면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행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1) 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 곧 그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기 때문이라, 하시더라.](마12:50)고 하셨습니다. 이는 행위 구원을 주장하거나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혼의 구원, 죄 사함, 영원한 생명이 믿음으로 얻는 은혜의 선물임을 압니다. 믿음, 은혜 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성경의 분명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개념 짓는 믿음, 말로만 외치는 믿음과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너무나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바 믿음은 믿는 순간부터 활동력 있게 일하는 그런 믿음입니다. 살아서 움직이는 어떤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구원하는 믿음’(saving faith)이라고 합니다. 살아 있는 믿음(living faith)라고 합니다. 반면 사람들은 머리 속에 관념이나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개념을 이해했다, 감을 잡았다, 무슨 말인지 알았다, 동의 한다 등등의 믿음을 성경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며 이런 믿음의 소유자들은 ‘허무한 사람’(약2:20)이라고 부릅니다. 믿음과 행함은 뿌리와 가지의 관계입니다. 믿을 때 선한 행위의 열매가 나옵니다. 믿을 때 의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런데 아무런 행위의 열매가 없을 때 우리는 참으로 믿음 안에 있는가? 자신을 스스로 시험해(prove-입증) 보아야 합니다.

이제 성경의 황금률을 보겠습니다. Golden Rule이란 성경의 Golden Key입니다. 모든 율법을 다스리며, 모든 율법을 포함하며, 모든 율법은 이 말씀에 걸려 있습니다. 모든 말씀이 다 절대적인 말씀이지만 이 말씀은 구약의 모든 율법과 대언자들을 다 포함합니다. 주님께서 “이것이 율법이요, 대언자니라.”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의 율법 조문을 다 외우지 못하고, 다 기억하지 못해도 이것 하나만 행하면 다 행한 것이 되고, 다 지키는 것이 되며, 충분한 말씀이기에 ‘성경의 황금률’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그와 같이 행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대언자니라.](12). “그러므로”란 것은 이미 앞에서 말씀하신 것들을 근거로 결론을 내시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앞에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말씀하셨고,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것들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들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1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란 말씀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할 때 좋은 것들을 더 주시므로”란 말씀입니다. 성경 신자들의 신앙은 “그러므로”(therefore)란 한 마디에 모두 걸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란 말의 앞은 주님의 성품과 능력, 인격, 행하신 일들, 약속 등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믿고 행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이요, 근거요, 공급의 원천입니다. “그러므로”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기독교는 ‘therefore’ 신학이 전부다.”라고 할 정도로 모든 진리가 “그러므로”란 말씀으로 연결됩니다. 신약 성경에만 이 말씀이 약 400회 가량 나옵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근거,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행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하늘의 아버지께서 더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명령을 주시는 것은 모든 필요를 풍성히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와 주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주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 소원이 없다면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주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주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충분한 기도가 없다면 역시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림으로써 주님께 받은 것들은 모두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한 기도는 자신의 정욕을 위해 사용하려고 구하는 잘못된 기도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라고 해서 이웃에게 집을 사주고, 차를 사주고, 생활비를 줄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대로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그와 같이 행하라.”는 말씀대로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만큼이나 이웃과의 바른 관계 설정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웃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반복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도들에게 이웃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이웃사촌이라고 해서 함께 놀고, 대화하고, 여행가는 정도입니까? 성도들에게 이웃이란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존재입니다(마19:19, 약2:8). 놀랍게도 성경은 이웃을 하나님 다음으로 사랑하고 섬겨야 할 자들로 규정합니다. 어떤 이가 주님께 “누가 내 이웃이니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이웃의 정체를 규정하셨습니다. [이제 너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었다고 생각하느냐? 하시니 그가 이르되, 긍휼을 베푼 자니이다, 하매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눅10:36~37). 이웃이란 긍휼을 베풀어야 할 대상입니다.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고(엡4:25), 이웃을 기쁘게 하며 그의 유익을 구하여 세움을 받게 하라고 합니다(롬15:2).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웃들을 향해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사람들이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공평하게 대해주고, 인격적으로 대해 주기를 바랍니다. 인정해 주기를 바라고, 칭찬해 주기를 바라고, 존경해 주기를 바라고, 잘 대접해 주기를 바랍니다. 누구도 차별하고 무시하고 멸시하고 물어뜯기를 바라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이웃에게 그렇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은 멀고 높은 것이 아닙니다. 높은 도덕률이란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남에게 받고 싶은 대로 해 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주님은 결코 ‘받은 만큼 해 주라. 받는 대로 해 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인과응보’를 기준으로 제시하신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사람이 나에 대해 욕설을 하고, 험담을 하고, 수군거린다고 합시다. 본성대로 하자면 그대로 돌려주고 싶습니다. 그대로가 아니라 몇 배로 더 지독하게 되갚아 주고자 합니다. 이것이 아담의 본성입니다. 육신입니다. 사람은 원한을 갚을 때는 되로 받아도 말로 주어야 속이 시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에 대해 욕을 하거나 저주를 하는 이들, 악평을 하고, 험담을 하는 이들을 향해서 ‘그대로 갚아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12절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는 대로’가 아니라.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입니다. 기준은 이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에게 선을 베풀고, 기도하고, 복을 빌어 주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바라고, 복을 빌어 주기를 바라고, 선을 베풀어 주기를 바라고, 긍휼을 바라고, 사랑해 주기를 바라고,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바라고, 용서 해 주기를 바라고, 때로는 도움의 손길을 바란다면 우리 자신이 바라는 그것들이 이웃을 향해 해 주어야 하는 것들이 됩니다. 상대로부터 대가를 바라거나 합당한 감사를 듣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께 칭찬받고 인정받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말씀을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대로 ‘내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해 준다고 해도 오해와 비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은 고사하고 욕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주목하십시오.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해 주는가?는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받은 대로 주는 사람들이 아니고, 사람들로부터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기대하고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하는 원칙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한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아닙니다. 만약 누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해 주겠다고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 죄인들도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합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면 무슨 보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와 같이 하지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행하는 것이 무엇이냐? 세리들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느냐?] (마5:46~47).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뒤에 그분께서 또 자기를 초대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을 베풀거든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말라. 그들이 또한 너를 다시 초대하여 네게 갚을까 염려하노라. 그러나 네가 잔치를 베풀거든 가난한 자와 불구자와 다리 저는 자와 눈먼 자를 부르라. 그리하면 그들이 네게 보답하지 못하므로 네게 복이 있으리니 이는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눅14:12~14).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로부터 보상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충분한 대가를 받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것을 기대한다면 실망과 좌절의 연속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면 준만큼 받고, 이자를 쳐서 더 받으려고 합니다. [너희가 어떤 자들에게 받기를 바라며 빌려 주면 무슨 감사를 받겠느냐? 죄인들도 준 만큼 받으려고 죄인들에게 빌려 주느니라.] (눅6:34). 이웃을 향한 성도들의 행동 기준, 삶의 원칙은 ‘사람들이 내게 해 준대로가 아니라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입니다. 크리스천의 선한 양심으로 확립된 기준에 따라서 이웃을 대하는 것입니다.

몇 구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네 원수가 주리거든 그를 먹이고 그가 목마르거든 그에게 마실 것을 줄지니 이는 그리함으로 네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으리라.](롬12:20). [조심하여 아무도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선하고 또 모든 사람에게 선한 것을 항상 따르라.](살전5:15). [악을 악으로, 욕설을 욕설로 갚지 말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축복하라. 이런 일을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줄 아나니 이것은 너희가 복을 상속받게 하려 함이라.](벧전3:9).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대로 해 준 것에 대한 모든 보상과 대가는 이 땅에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보화를 쌓아 두는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상속의 유업을 받을 때 주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의 행위와 그분의 이름을 위해 너희가 보여 준 사랑의 수고 곧 너희가 성도들을 섬겨 왔으며 또 섬기고 있는 것을 잊지 아니하시느니라.](히6:10).

다시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그와 같이 행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대언자니라.](12). 우리는 이 말씀에 지적으로 동의하고 이해하고, 마음으로 공감하고 믿는다고 말함으로써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와 같이 행하라”고 합니다. 들은 바 말씀을 믿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본성은 남들이 이 말씀대로 나에게 잘 해 주기를 바라지만 ‘그들에게 그와 같이 행하라’는 말씀은 싫어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롬12:2). 생각의 영(엡4:23)이 새롭게 되지 않으면 이 일은 불가능합니다. 기준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고도의 난해한 법률적 해석이나 철학적 이해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매우 쉽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실천입니다. 주님은 “남들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들에게 행하는 것이 율법이요, 대언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어렵고 복잡하고 수많은 율법 조항들의 해석을 내려 주던 율법사들의 역할을 단 번에 끝장 내 버리는 말씀입니다.

흔히 성경의 황금률이라 불리는 이 말씀을 저는 “율법의 대중화, 보편화”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남녀노소, 학문의 유무에 관계없이 모든 대언서와 율법을 쉽게 행하고 지킬 수 있도록 단 한 마디로 요약해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누구나 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아도 율법과 대언자들의 말씀을 능히 성취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별다른 해석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대로” 그들에게 행하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율법이요 대언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동일한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너는 간음하지 말라, 너는 살인하지 말라, 너는 도둑질하지 말라, 너는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너는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어떤 다른 명령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이 말씀 안에 간략하게 들어 있느니라. 사랑은 자기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9-10). 구약의 많은 율법 조항이 단 한 구절, 단 한 단어로 요약이 됩니다.

이 말씀은 성경 전체를 관통합니다. 갈라디아서 5:14절입니다. [온 율법은 이것, 즉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이 한 말씀 안에서 성취되었느니라.](갈5:14).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대로 남에게 행하는 것이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사랑에 어떤 깊은 철학적 의미를 부여해서 어렵고 힘들게 만들지 마십시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다른 사람도 싫습니다. 내가 듣기 싫은 말은 남들도 듣기 싫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남들도 원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내가 받기를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란 이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고로 우리가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에게, 형제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 어려워서, 배우지 못해서 못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웃을 어떻게 얼마만큼 사랑해야 하는가?란 기준은 남이 아니라 ‘자신’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 한 말씀 안에 온(all) 율법이 성취됩니다. 700여 가지가 넘는 율법 조항을 외워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면 다 성취됩니다. 이 말씀 역시 ‘율법의 대중화’라고 할 만큼 위대한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2:8입니다. [너희가 성경 기록에 따라,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왕가의 법을 성취하면 잘하는 것이거니와](약2:8). 이 말씀에 따르면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왕가의 법’(Royal law)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법 중의 법이요, 최고의 법이란 뜻입니다. Golden Rule이 사람들이 편의상 붙인 이름인데 반해 “Royal law”는 성경적인 명칭입니다. 이 법의 가치, 위대성을 잘 말해 주는 용어입니다. 한 건물에 수많은 열쇠들이 필요해도 주인은 ‘Master Key’ 하나로 모든 문을 열 수 있듯이 성경에는 많은 율법 조항이 있어도 ‘Royal Law’ 하나로 모든 법을 다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중의 율법이요, 왕가의 법이라고 부릅니다. 갈라디아서 6:2, [너희는 서로 남의 짐들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바울은 이 법을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표현은 ‘서로 남의 짐들을 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법, 그리스도의 법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말로 사랑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서로 간에 남의 짐을 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주님은 친히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짐을 던져서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짐을 지시고, 자신의 멍에를 우리에게 지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멍에는 쉽고 가볍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적 진리가 그러하듯이 우리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림으로써 하늘 아버지가 주시는 더 좋은 것들을 받아서 이런 일들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날마다 은혜를 받고, 신선한 기름 부음을 받고, 지혜를 받고, 능력을 받으십시오. 꾸준이 말씀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받아서 우리의 이웃들, 형제들에게 ‘그들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우리가 먼저 해 주는 선한 이웃, 선한 형제들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저희들은 오늘 성경을 통해 황금률이라 불리는 왕가의 법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평생을 살아가면서 이 한 가지 법을 온전히 붙들고 있기를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법이요, 핵심이요, 완성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모든 율법과 대언자의 완성이요, 핵심인 황금률을 언제나 마음 판에 깊이 간직하는 종들이 되기를 빕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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