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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말씀: 마7:13-14
요절: 마7:13,14


사람들은 누구나 넓은 대문이 있는 넓은 집에 살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은 넓은 길을 원합니다. 시간과 속도를 중요시하는 현대인들에게 넓은 길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자동차로 마음 대로 속도를 내는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산행을 할 때 구불구불한 좁은 길을 걸을 때면 참으로 힘이 듭니다. 신앙의 길은 대로(大路)가 아니라 행로(paths)입니다. 앞서간 주님과 신앙 선배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걷는 길입니다. 시편 85:13에 [의가 그분 앞에 나아가며 그분의 발자취가 있는 길에 우리를 세우리로다.](시85:13)라고 합니다. 믿음의 길을 걸었던 이들이 남겨 놓은 발자취는 마치 산 길에 난 오솔길처럼, 눈 길에 난 발 자욱처럼 선명하게 우리 앞에 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왕의 대로에 서게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도시와 도시를 잇는 대로를 따라 달리게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주님의 발자취, 즉 성문 밖에 있는 갈보리 언덕으로 이어지는 그 길에 우리를 두십니다. 이것을 믿음의 발자취라고 합니다. 이 길은 잘 포장된 대로가 아닙니다. [참으로 너희가 심지어 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나니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사 너희가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벧전2:21). 믿음의 길을 걸었던 이들이 남겨 놓은 발자취를 따라가면 안전합니다. 그 길이 평강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성경은 이 길을 옛 길(렘18:15)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가르침, 새로운 사상, 새로운 발견, 새로운 종교, 새로운 무엇을 찾습니다. 철학과 종교가 고도로 발전했던 그리스의 아테네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는 모든 아테네 사람들과 거기 있는 나그네들이 새로운 어떤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외에는 자기 시간을 달리 쓰지 아니하였음이더라.)](행17:21). 이는 오늘날 산업 사회, 정보화 시대를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학,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장르를 계발하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종교인들 New Age Movement를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연극, 영화, 뮤지컬을 하는 이들은 새로운 소재를 발견하고 새로운 유행을 만들기 위해 애를 씁니다. 심지어 T.V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이들도 새로운 제작 기법, 새로운 무엇을 찾아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자본가들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서 특허를 내는데 총력을 기울이며, 새로운 신소재를 이용해서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신제품, 신상품을 만드는데 온 힘을 쏟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외에 자기 시간을 쓰지 않는 것처럼 모든 현대인들은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에 집중합니다. 이것이 유일한 살 길인 줄로 압니다. 사람들이 모두 새로운 것만 원하지만 오직 하나 ‘자기 자신’만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옛 사람을 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피조된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고후5:17). 성도들은 옛 길을 고집하지만 새 사람을 원합니다. 오래전부터 내려온 Old Gospel(옛 복음)을 믿지만 새 사람이 됩니다. [그런즉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성도들이란 새 사람을 입은 사람들입니다(엡4:24, 골3:10).

사람들은 옛 본성 그대로를 간직한 채 자신 외에 세상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그대로 둔 채 자신이 새로워지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좁은 문, 좁은 길을 말씀하신 것은 남이 아닌 나, 세상이 아닌 나를 새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회심으로 새롭게 됩니다(행3:19). 우리는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습니다(롬12:2, 엡4:23). 우리는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받았습니다(딛3:5). 주님은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이룩하고자 했지만 결코 할 수 없었던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왕좌에 앉으신 분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내게 이르시되, 이 말들은 참되고 신실하니 기록하라, 하시며](계21:5).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세상을 새롭게 하십니다.

13-14절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좁아 찾는 자가 적기 때문이라.](13-14). 이 말은 우선 역사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교회사를 읽어보면 초대 교회 성도들의 고난과 순교의 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재산의 몰수나 사회적 지위의 박탈,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감수해야 하는 그런 중차대한 문제였습니다. 이는 성도가 되는 조건이 까다롭거나 어렵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선택은 육신의 포기, 세상의 포기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문자 그대로 세상에 못 박히는 삶이었습니다. 성도의 길은 참으로 좁고 협착한 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 신분이 말소되는 일이었습니다. 유대 민족 공동체에서 그 이름이 제명되는 것은 물론이요, 사회적 불이익을 그대로 감수해야 했습니다. 로마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로마 황제에게 반역하는 반역자의 길을 택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어느 지역, 어느 나라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어렵고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교가 되는 순간부터 좁은 문은 넓어졌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갔던 이들은 모두 생명을 택해 들어간 이들이지만 넓은 문으로 들어간 이들은 로마 캐톨릭이란 교회로 들어간 것일 뿐입니다. 마귀는 고난과 박해, 순교라는 좁은 문, 좁은 길 대신에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 넓은 길을 열어 두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 세상 사람들이 들어가는 길은 생명의 문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곳 미국이나 서구 유럽이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교회는 마을마다 있을 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게 교회입니다. 교인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서로 자기 교회에 등록하라고 초청합니다. 신자가 되는 것이 대접받고 특권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물질주의에 젖어든 많은 교회와 신학교에서는 좁은 문, 좁은 길을 넓히는데 온갖 힘을 다 기울입니다. 기독교 통합주의, 종교 통합(에큐메니칼)은 좁은 문, 좁은 길은 넓게 만드는 일입니다. 종교의 다원화, 다양성, 종교간의 대화는 모두 좁은 문을 넓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때려 부수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욕하고 비판하는 기독교는 ‘너무 편협하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진리는 외길입니다. 진리는 둘이 아닙니다.

주님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 무엇인가를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게 되리이까? 하매](마19:27). 이 말은 가감(加減)없이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예수를 믿는 자는 회당에서 출회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요12:42). 중세 캐톨릭 교회 시대 역시 성경 신자들은 세상을 철저히 등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캐톨릭의 교리와 실행이 반성경적이며, 마귀적이란 사실을 알았기에 동조하지 않았기에 도리어 마귀요, 마녀로 몰려서 화형을 당하고 극심한 고문과 더불어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둘에서 내쫓을 것이요, 참으로 때가 이르면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생각하리라.] (요16:2). [[주]의 말에 떠는 자들아,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를 미워하고 내 이름으로 인하여 너희를 쫓아낸 너희 형제가 이르기를, [주]께서 영광 받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서 너희의 기쁨이 되실 것이요, 그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사66:5). 믿는 이들은 항상 소수의 남은 자들로서 좁은 문을 택했고, 좁은 길을 걸었습니다. 세상에서 법과 제도로 보장된 종교 체계, 교단이 아니라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고 실행하는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자들이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능히 들어가지 못하리라.](눅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선택, 결정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롯의 손을 강제로 이끌듯이 끌어들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동산 중앙에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고 선택하게 하시듯이 좁은 문과 넓은 문, 좁은 길과 넓은 길을 두고 택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 앞에 두 가지를 두시고 우리 스스로 택하라고 하십니다. [보라, 내가 이 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신11:26), [보라, 내가 이 날 생명과 복과 또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30:15), [내가 이 날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로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또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나니 그러므로 너와 네 씨가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며](신30:19). 무엇을 택하는가? 에 따른 결과와 책임은 전적으로 선택한 당사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어려서부터 악을 거절하고 선을 택할 줄 아셨습니다(사7:15-16).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바른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많은 재물보다는 훌륭한 이름을 택해야 하고, 금이나 은보다는 사랑 많은 은총을 택할 것이며(잠22:1), 모세가 그러했듯이 이집트의 보화보다는 그리스도의 치욕을 택하며, 죄의 쾌락보다는 고난 받는 것을 택해야 합니다(히11:25). 좁은 문이란 바로 선택의 문제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13)는 말씀은 구원의 문이 좁아서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사람들은 구원의 문이 어렵고 힘든 길이요, 평생 고행의 수련과 금욕의 길인 줄로 잘못 생각합니다. 중세 수도사 생활이라 금욕적인 종교 생활을 경건인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행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규칙적인 종교 생활, 의식이나 어떤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이란 행위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정해 주신 한 가지 방법 즉 믿음 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대상을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정하셨고, 구원의 방법 역시 오직 믿음 한 가지만을 주셨습니다. 문이 하나 밖에 없고, 길이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믿음이란 말이 너무나 오용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곧 자아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자 청년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했습니다. 문제는 재물을 팔아 구제라는 선행을 해야 한다, 바쳐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을 신뢰하는 것, 자기의 소유를 포기하는 것, 자신 안에 있는 물욕, 탐심의 문제를 포기하라는 것이 주님의 요구였습니다. 주님을 믿는 다는 것은 자신의 재능, 지식, 가문, 자산 등 모든 소유는 물론이고 자기 생명까지도 능히 미워하고 버리는 ‘자아 포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선한 청년이었습니다(눅18:19). 부자 청년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준수하는 모범적인 종교 생활을 영위했습니다(눅18:21). 그는 영생에 관심이 많았고(눅18:18) 구원의 길에 대해 주님께 질문을 했습니다(눅18:18). 그는 어느 정도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구원의 길, 믿음의 길이란 자신의 소유와 자기의 혼, 생명까지도 능히 미워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이요, 좁은 길입니다.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가 심히 근심하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기 때문이니라, 하시니](눅18:25). 재물을 가진 이들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은 그들이 재물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막10:24). 돈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딤전6:11). 탐욕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탐욕을 주의하고 조심하라. 사람의 생명이 그의 풍부한 소유에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12:15). 육신의 길은 쉽고, 편하고, 넓습니다. 아무 것도 포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현대 기독교는 세상을 포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포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세상을 얻고, 자신의 가치를 더욱 높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좁은 문으로 들어 가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무한 광대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습니다. 구약의 성막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재산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놀라운 학문적 재능이나 세상의 권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혈통이 좋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힘이 좋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지성소로 들어가는 데는 오직 하나 ‘어린 양의 피’만이 필요했습니다. 그 외에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마찬 가지로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는 데는 오직 한 가지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히10:19). 예수님이 피로만 들어갈 수 있는 길이기에 주님은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그 길이 왜 좁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나는 [주]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43:11). 하나님은 많은 길, 다양한 선택권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선택의 폭이 너무 적고, 좁습니다. 한 분 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취하지 말라.](출20:3). [[주]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물을 드리는 자는 진멸할지니라.](출22:20). [내가 네게 말한 모든 일에서 너는 신중히 행하고 다른 신들의 이름은 언급하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하지 말지니라.](출23:13), [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하지 말지니 이는 [주]가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니라.](출34:14). 성경은 오직 한 분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편협한 것이 아니라 진리이며, 사실입니다. 이는 유대교의 민족적 편협성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좁은 문, 좁은 길을 제시하신 까닭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집트 땅에서부터 [주] 네 하나님이니라.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알지 말지니 이는 나 외에 구원자가 없기 때문이니라.](호13:4). 이는 신약 성경에서도 바뀌지 않습니다(말3:6).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니라, 하였더라.](행4:12). 주님께서 좁은 문이라고 하신 것은 주님 외에 구원자가 아니며, 희생을 드리지 말고, 이름을 언급하지도 말고, 경배하지도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문은 좁습니다. 이는 구원받기 어렵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습니다(마11:28). 핵심은 그 문이 좁다는 것입니다. 좁다는 뜻은 선택의 폭이 점점 적어서 결국 하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문이 없고,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믿는 이들은 포용성이 없고 너무나 배타적이고, 편협하다고 비난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해 양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길로 넘어가는 자 바로 그자는 도둑이며 강도이나](요10:1). 주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문입니다. 주님만이 하늘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 하늘로 가려는 어떤 노력이나 시도는 모두 헛된 것입니다. [내가 곧 문이니 누구든지 나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 들어가고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10:9). 구원이신 주님의 초청을 받아 들이는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통과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라! 이것이 하나님이 마련해 두신 하늘 문이며, 생명의 길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문이나 길은 하늘로 향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문은 들어가도 하나님께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학문의 길, 예술의 길, 구도의 길을 일생토록 정진했다고 하는 이들이 끝에 이르면 ‘허무’를 고백합니다. 그 끝에는 죽음 외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길은 좁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문과 길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예수님이 문이시오, 길이시란 사실을 알고 그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 본 사람이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13-14절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좁아 찾는 자가 적기 때문이라.](13-14). 지옥으로 가는 길은 매우 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제외하고 무슨 일을 해도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교회를 다니고, 신학을 공부하고, 구제와 봉사를 하고, 교회 건물을 짓기도 하고, 고아원이나 양로원이나 학교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멸망으로 떨어집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아무 곳으로 들어가도 됩니다. 무엇을 해도 됩니다.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지 않고 무엇을 해도 멸망으로 인도됩니다.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어떤 길을 잡아도 그 끝은 멸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원하지 않아도 최종 종착역은 지옥입니다. 잠언 14:12에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것의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 (잠14:12)고 합니다. 옳게 보이는 길이라 할지라도 그러할진대 다른 길들이야 달리 말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사람의 모든 길은 다 멸망으로 통하며 사망의 길들입니다. 어느 방향으로 달려도 지옥행입니다. 그만큼 문이 넓고, 길이 넓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들어갑니다.

때로 사람들은 저렇게 많은 이들이 믿는 종교인데 그들이 다 지옥 간다는 말인가? 반문합니다. 어느 종교에나 유력한 정치인이 있고, 학자가 있고, 교수가 있고, 재벌이 있고, 존경받는 명망가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믿는다고 해서 그 종교가 옳은 종교란 보증이 되지 않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이 넓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기 때문에 지옥은 지금도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받으려고 스스로 자신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옥이 자기를 확장하고 한량없이 자기 입을 벌렸은즉 그들의 영광과 그들의 큰 무리와 그들의 영화(榮華)와 또 기뻐하는 자가 거기로 내려가리로다.] (사5:14). 지옥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도 다 채워지지 않습니다. 지옥은 범죄한 천사들은 물론이요, 양들의 문이시오, 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로 가지 않는 모든 자들의 최후의 종착역이 됩니다. [지옥과 멸망이 결코 가득 차지 아니하는 것같이 사람의 눈도 결코 만족하지 아니하느니라.](잠27:20).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 넓은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으로 인도하는 마귀의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개종자(改宗者) 하나를 만들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만들면 너희보다 두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기 때문이라.](마23:15). 종교인들은 그리스도인들 못지 않게 개종자를 얻기 위해 열심히 포교 활동을 합니다. 선교사를 파송합니다. 이들은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닙니다. 저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얼마나 열심히 전도를 하는지 놀랄 때가 많습니다. 몰몬교도들을 보십시오. 모든 신도들은 일정 나이가 되면 의무적으로 군대를 가듯이 2년간 선교지를 정해서 선교사 생활을 한 후에 학업을 마치고 생업을 갖습니다. 어느 종교나 개종자 하나를 얻기 위해 애쓰지 않는 이들이 없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지옥 자식을 만드는데 전력을 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때에 좁은 문, 좁은 길을 전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있습니다. 대신 우리에게는 성령이 함께 하시고,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담대하게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려고 어디론가로 갈 때 주님은 문을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려고 드로아에 이르매 {주}께서 내게 문을 열어 주셨으되] (고후2:12). 우리는 문을 열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앞에 열린 문을 두시고, 열어 주실 뿐입니다. 우리는 문을 열어 주시기를 구합니다. 이방인의 사도요 교사로 부름을 받았던 바울조차도 이를 위해 늘 기도했습니다. [아울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께서 말씀 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신비를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또한 이것을 위하여 결박당하였나니](골4:3). 주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라.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아무도 닫지 못하리라](계3:8a). 우리가 열매를 거두는 것은 주님이 어떻게 문을 열어 주셨는가를 증거하는 일일 뿐입니다(행14:27).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신 주님께서 우리 앞에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말문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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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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