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판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선악 간에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성품은 판단하시는 하나님이시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일들을 판단하시며,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하십니다. 판단은 재판, 심판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은 재판관이신 하나님, 심판자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성도들이 흔히 오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판단’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판단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가 판단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도로 헤아림을 받을 것임이니라.](마7:1-2)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무 것도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의 전후 문맥과 주님의 의도를 무시한 결과입니다.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또한 어찌하여 너희에 관하여도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지 아니하느냐?](눅12:57)고 책망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5)고 말씀합니다. 판단력이 없는 사람을 우리는 바보라고 부릅니다. 판단력은 사람이 살아가는 중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옳고 그름, 선과 악, 해야 할 일과 말아야 할 일 등 우리는 끊임없이 판단을 요구받으며, 판단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판단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올바른 판단력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묵상과 경건(35번) 참조>. 사도 바울은 권면하기를, [형제들아, 이제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다 같은 것을 말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판단으로 완전히 함께 결합하라.](고전1:10)고 했습니다. 또 기도하기를, [내가 이것을 기도하노니 곧 너희의 사랑을 지식과 모든 판단에서 더욱더 풍성하게 하사](빌1:9). 모두가 같은 생각으로 같은 판단을 한다면 이는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 속에 동일한 법, 동일한 기준, 동일한 가치관이 있으면 동일한 판단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판단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성경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판단의 법도, 판결의 법을 마음에 둠으로써 바른 판단력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판단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믿음의 여인 사라였습니다. [믿음을 통해 사라 자신도 나이가 지났을 때에 씨를 수태하는 힘을 받아 아이를 출산하였으니 이는 그녀가 약속하신 분을 신실한 분으로 판단하였음이라.](히11:11). 사라는 하나님을 약속하신 말씀에 신실한 분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녀의 판단은 정확하고 위대했습니다. 그녀의 이런 판단에 기초한 믿음은 이삭을 낳기에 충분했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엄한 사람으로 잘못 판단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뒤에 일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엄한 사람이라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 속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이 여기 있나이다, 하매](마25:24~25). 이 사람은 주인을 전적으로 잘못 판단했습니다. 주인을 잘못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으니 그러므로 마땅히 내 돈을 돈 바꾸는 자에게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했어야 하였도다.] (마25:26~27). 그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주님은 진노하셨습니다. 바른 판단,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주님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주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주 이 시간 [하나님을 바로 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바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속에 지혜와 명철을 넣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사람의/ 속 /중심/부에 지혜를 넣어 주었느냐? 누가 마음에게 명철(明哲)을 주었느냐?] (욥38:36).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 없이는 결코 바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판단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 판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배울 수 있다면 우리는 최상의 판단력을 소유한 솔로몬과 같은 지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판단은 의롭고 진실합니다.
편견 됨이 없고, 오심(誤審)이나 약간의 실수도 개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정확합니다. 무한하신 지혜와 지식과 명철로 내리시는 판단이시며,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의 동기와 일의 과정과 결과를 모두 다 살피신 후에 판단하십니다. 시편 기자가 말하기를, [[주]의 두려우심은 깨끗하여 영원토록 지속되고 [주]의 판단들은 진실하고 다 의로우니](시19:9). 세상 법정에서는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원통해 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하나님의 판결 앞에서 억울해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판단들은 진실하고, 다 의롭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축구나 야구, 농구 등과 같은 sports 경기를 자주 봅니다. 모든 경기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은 경기 규칙에 따라 판단합니다. 그러나 오심은 피할 수 없고, 편파 판정에 대한 시비는 그칠 때가 없습니다. 감독들이나 경기하는 선수들은 늘 심판의 판정에 항의하고, 불만을 토로합니다. 특히 경기에 진 팀들은 더욱 판정에 불만을 드러냅니다. 하물며 법정에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어떤 죄인들도 판사의 판결에 마음으로 인격적으로 순복하고, 받아들이는 경우는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뿐입니다. 억울해 합니다. 사람의 판단은 진실하고 의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판단들은 진실하고 다 의롭습니다. 주님은 뇌물을 받지 않으십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판단은 제한적입니다. 오류가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정확무오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법이 되시기 때문에 판단에 오류가 없으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서 외모를 보지 말고 큰 자뿐 아니라 작은 자의 말도 들으며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고 너희가 판단하기 어려운 사정이거든 내게로 가져오라. 내가 들으리라, 하였고](신1:17). 어떤 일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외모를 볼 필요가 없고,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전쟁이 주님께 속하였듯이(삼상17:47), 재판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판단력을 주십니다. 판단하는 기준을 주십니다. 판단의 기준은 언제나 성경입니다. [곧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법의 판결에 따라 그들이 네게 알려 주는 판결에 따라 행할 것이요, 그들이 네게 보여 주는 판결을 거부하고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치우치지 말지니라.](신17:11). 마음 가운데 말씀의 법이 있는 사람은 그 법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법을 무시하거나 잊어버리면 우리는 불법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판단력이 흐린 사람, 선을 버리고 악을 택하는 사람, 순간의 이익을 위해 속임수를 행하는 사람, 육신을 위해 영적인 것들을 희생하는 사람들은 모두 판단력이 마비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판단력이 흐린 것은 교육 수준이 낮아서가 아닙니다. 지성이 낮아서, 배운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성격이 못 되 먹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판단을 할 수 있는 바른 기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판단력이 흐린 것은 판단의 기준인 주의 법을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경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사악한 자들의 무리가 나를 강탈하였을지라도 내가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시119:61). [내 혼이 항상 내 손 안에 있사오나 나는 여전히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시119:109). 주님의 법이 확고하게 마음에 새겨져 있으면 그대로 생각하고 그대로 행동하면 됩니다. 영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되며, 건전한 생각의 영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게 됨으로써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판단력이 좋은 사람을 안목이 있는 사람, 통찰력이 있는 사람, 뭔가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존경합니다. 그런 안목을 기르고자 노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안목과 통찰력이 있어야 하는데, 주의 법을 잊지 않으면 바른 판단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말하기를, [내 아들아, 내 법을 잊지 말고 네 마음으로 하여금 내 명령들을 지키게 할지어다.](잠3:1)고 했는데 이것이야 말로 바른 판단력을 소유하는 비결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할 때 그는 어리석은 욕심에 끌리지 않게 되고, 죄의 속임수와 세상의 정욕에 끌리지 않게 됩니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하는 완전한 법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그 일을 행하는 자니 이 사람은 자기가 행하는 일에서 복을 받으리라.](약1:25). 마음에 주의 법을 두시고, 지켜 행하십시오. 그럴 때 무슨 일을 행하든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습니다.
둘째, 주의 판단들은 정확하며 바릅니다.
[오 [주]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들은 바르오며 또 주께서 신실하신 가운데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시119:75). 판단은 정확함이 생명입니다. 우리의 재판을 맡으실 하나님께서 진실하시고, 의롭고, 바르다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현재 당하는 억울한 일, 모순된 일, 오해받거나 모함당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주님께 의뢰하고 판결해 주시도록 맡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악한 일에 대해서 판결을 통해 보상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옳고 그름을 정확히 판결해 주시고, 악한 자들에 대한 징벌을 집행하시며, 선한 자들에게 상급을 주십니다. 사람들은 “아차! 생각을 잘못했다. 아차! 판단에 오류가 있었다. 잘못 판단했다!”는 후회와 탄식이 있지만 주님의 판단들은 정확하며 바릅니다. [오 [주]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들은 곧바르며](시119:137). 하나님은 올바르신 분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판단들은 곧바를 수밖에 없습니다. 곧바른 자에게서 곧바른 말과 행동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전혀 불의가 없으시며(시92:15), 굽은 것이 조금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판단은 선합니다.
[주의 판단들은 선하시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것 곧 나에 대한 모욕이 나를 떠나게 하소서.](시119:39). 주의 판단 가운데 선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들의 판단은 악합니다. 그들은 뇌물을 받거나 권세에 따라 정치적 판단을 하거나 자신의 실수를 합리화하거나 변명합니다. 증거를 조작하거나 거짓 증인을 세우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참기 어려운 것 가운데 가장 힘든 것은 판결이 부정확하고, 뒤바뀔 때입니다. 악한 판결이나 잘못된 판결은 사람들을 미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판단들은 모두 선합니다. 하나님은 엄하고, 엄격하지만 은혜와 긍휼이 있습니다. 죄인들을 향한 대속이 있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에게 불법과 죄를 지적하시는 동시에 회개의 길을 제시해 주시며, 생명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죄를 자백하고 회개할 때 용서해 주시며, 그 죄를 친히 담당해 주시는 의로운 재판관이십니다. 그래서 주의 판단들은 정확할 뿐 아니라 선하십니다.
넷째, 하나님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우리는 주님의 판단을 모두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있고,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 뿐이십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주님의 판단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기계를 만든 설계자와 제작자가 그 기계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알듯이,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설계자요 제작자이신 주님의 판단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판단과 주님의 판단이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우리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같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상상할 수 없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경이로운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욥이 단 한 마디도 답변할 수 없었듯이 우리는 주님의 지혜의 언저리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는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기 때문이니라.](사55:9).
우리는 부분을 보지만 주님은 전체를 보십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지만 주님은 미래를 아십니다. 주님은 영원과 전체 가운데서 생각하십니다. 우리는 단편적으로 생각하지만 주님은 종합적으로 생각하십니다. 우리는 한 면만 볼 수 있지만 주님은 모든 면을 다 보십니다. 우리는 땅에서 보지만 하나님은 하늘에서 보십니다. 우리는 현재만 보지만 주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보십니다. 그러므로 판단에는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의 판단들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들을 배울 때에는 올바른 마음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119:7). 우리는 배우지 않고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주의 의로운 판단들을 배워서 정확하고 곧 바른 판단을 할 뿐 아니라 주의 판단들을 이해하고,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다윗은 평생 동안 삶의 현장에서 주의 판단을 배웠습니다. 그는 죄를 지어 보았고, 혹독한 주의 징계를 받아 본 사람입니다. 어릴 때는 사울 왕 앞에서 그가 주의 징계를 받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는 책상 앞에서 성경을 배운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삶의 현장에서 성경을 배웠고, 주의 판단들을 배웠습니다. 그는 매 사건에서 교훈을 얻었고, 주의 판단들을 배워 나갔습니다. 우리는 매일 삶에서 겪는 모든 일들이 주의 판단들을 배우는 귀한 실습장이란 사실을 기억하고, 배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일을 하는 현장에서, 종업원들 간에, 친구와 친지들 사이에서, 힘들고 어려운 사건을 통해, 질병을 통해서, 돈 문제나 여러 가지 난제들을 통해서 주의 판단들을 배워야 합니다. 다윗은 주님께 ‘주의 판단들’을 배우고자 애썼으며,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오 [주]여, 주께 간청하오니 내 입이 /드리는/ 자원 헌물들을 받으시고 주의 판단들을 내게 가르치소서.](시119:108).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날마다 매 순간 주의 판단들을 가르쳐 주시고, 여러분은 배움을 얻기를 바랍니다.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면 결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주의 판단들을 사모해야 합니다. [내 혼이 언제나 주의 판단들을 사모하므로 상하나이다.](시119:20). 법에 관련된 사람들은 성문법, 불문법, 관례 등을 열심히 연구할 뿐 아니라 이미 이전에 내려진 판결들을 열심히 살펴봅니다. 판례(判例)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미 사건에 대해 법의 판결이 내려진 것들은 다시 판단하는데 중요한 참고가 됩니다. 구약의 역사를 통해 주님께서 판결을 내리신 사건들을 주목해서 보면 우리는 주님이 철저히 모세오경에 따른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에 근거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어떤 경우에 진노하시고, 벌을 주시며, 어떤 경우에 복을 주시는지 그 판단들을 사모할 때 우리는 귀한 배움을 얻게 됩니다. 주의 판단들을 사모하십시오. 그 때 우리는 주님의 판단들이 곧바르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대상과 같이 닮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주의 판단을 사모하면 주의 판단대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생기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주의 판단들을 사모하면 자기 육신의 생각과 판단들을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주의 판단들을 따라 판단하게 되고, 주의 판단이 가치관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주의 판단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 [주]여, 내가 옛적에 주께서 행하신 판단들을 기억하고 내 자신을 위로하였나이다.] (시119:52). 이미 앞서 증거했듯이 주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면 불법자가 되고, 무법자가 되고 맙니다. 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삶에서 순종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판단들을 몸소 체험하는 귀한 영적 간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언제나 진리요, 사실이란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의 판단들은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 소홀히 하거나 넘어갈 것이 없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말씀들에 집중해서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합니다.
주의 판단들을 내 앞에 두어야 합니다. [내가 진리의 길을 택하고 주의 판단들을 내 앞에 두었나이다.](시119:30). 앞에 둔 것은 보기 쉽습니다. 언제나 따를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무엇이 있는가? 누가 있는가?는 인생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배교하고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에 두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들을 뒤에다 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오히려 순종하지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율법을 등 뒤에 두고 주께로 돌아오라고 증거하는 대언자들을 죽여 큰 진노를 일으켰나이다.](느9:26). 앞에 있어야 할 것이 뒤에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앞에 있어야 할 교통 표지판이 옆에 있거나 뒤에 있으면 우리는 정확하게 차를 운전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의 앞에 있는 교통 신호등을 보아야지 옆에 있는 신호등이나 뒤에 있는 신호등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의 판단들을 우리 앞에 두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앞에 가신 분이십니다. 목자는 양들 앞에 섭니다. 우리는 뒤따라가면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낯선 곳에 여행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행자는 여행 안내원을 앞에 두고 따라가야 합니다. 안내원이 뒤에 있고 내가 앞서 가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전에 히말라야 등반대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짐 휘테이크라는 미국의 등산가의 이야기를 제가 읽어 보았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기 위하여 고도의 훈련을 해왔던 미국의 등반대원들이 네팔에 모였습니다. 네팔 안내원은 그들을 보고 “여러분이 저 정상까지 올라가고 싶다면 저를 전적으로 믿고 따라오셔야만 합니다.” 그러자 산악 등반에는 프로급이라고 자신하는 등반대원들은 “우리는 수년간 이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하기 위하여 혹독한 훈련을 한 전문가들인데 기껏해야 등산 안내원 주제에 감히 우리에게 자기를 믿고 따라오라고? 웃기는 놈이야”하며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등산 안내원을 앞에 두지 않고 자신들이 앞서 갔습니다. 그러나 짐 휘테이크란 사람은 “나는 정상에 꼭 올라가고 싶습니다. 당신이 하라는대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며 그 안내원을 앞에 두고, 그가 인도하는대로 뒤를 따랐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에 도전했던 모든 등반 대원들은 아무도 정상에 도달하지 못하고, 안내원을 앞에 두고 뒤를 따랐던 짐 휘테이크만이 에베레스트산 꼭대기까지 올라간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의 판단들을 앞에 두고, 그 판단들을 따라야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들은 안내원의 판단을 무시하고 자신의 판단을 앞세웠지만 아무도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의 판단들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면 안됩니다. 겸손히 주님의 판단들을 앞에 두고 그 판단들을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판단들을 지켜야 합니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들을 지키리라 맹세하였사오니 그것을 이행하리이다.](시119:106). 우리는 주의 판단들이 정확무오하다는 사실을 믿고, 그 판단들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 눈에는 좀 이상한 것 같고, 이해가 되지 않아도 주의 판단이 옳은 것입니다. 어느 공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공장장은 직원들에게 기계에 문제가 생기면 즉시 기계의 작동을 멈추고 자기를 부르라고 거듭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직원들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간단한 오작동은 자기가 직접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계를 망쳐 버렸습니다. 공장장은 즉시 직원을 꾸짖었습니다. 공장장의 판단을 지키지 않고 자기 판단을 더 믿고,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이런 예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주의 의로운 판단들을 지켜야 합니다. 주님의 판단들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와 패배를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을 수도 없는 정보를 근거로 판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여 [주]를 신뢰하고 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지어다.](잠3:5). 자기 판단을 내세우지 말고 주님의 판단들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다윗은 언제나 자기 판단을 버렸습니다. 자기 판단이 아니라 주님의 판단들을 지켰습니다. [이 일 후에 다윗이 [주]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유다의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 올라가리이까? 하매 [주]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하시니 다윗이 이르되, 내가 어디로 가리이까? 하니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하시니라.](삼하2:1). 자신이 알아서 판단하거나 참모들을 불러서 판단을 구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물었으며, 주님의 판단을 구했습니다. 이 때 주님은 다윗에게 올라가라는 응답뿐만 아니라 어느 도시로 가야 하는지 정확하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주의 영은 지혜와 명철의 영이요, 모략과 능력의 영입니다(사11:2). 모략이란 정확한 판단을 위해 조언하고 상담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이 [주]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주시겠나이까? 하니 [주]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올라가라. 이는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겨줄 것임이라, 하시므로](삼하5:19). 다윗이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주님께 묻는 것을 보십시오. 그는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주님의 판단을 구했고, 주님이 결정해 주시는 판단을 의지했습니다. 주님의 판단은 의롭고, 진실하고,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보내셔서 판단들을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판단을 앞에 두고, 그 판단을 기억하고, 사모하고, 배우려 할 때 주님은 자신의 판단들을 보여 주십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자신의 법규들과 판단들을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시147:19). 하나님은 판단하시며, 자신의 판단들을 구하는 자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존중하고, 사모하고, 조언을 구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판단을 보여 주지, 말해 주어도 무시하고 믿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는데 누가 말해 주고 싶어하겠습니까? 말해도 듣지 않을 사람에게 말해 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주님의 판단들을 바라고, 존중하고, 배우고자 할 때 주님은 자신의 판단들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망설임이 많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다윗처럼 주님께 판단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 판단을 지키십시오.
주님께 판단을 구하고, 주님께 맡길 때 우리의 판단은 정확해지고, 강한 확신이 임하게 됩니다. [네 길을 주께 맡기고 또 그분을 신뢰하라. 그분께서 그것을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너에 대한 판단<thy judgement-너의 판단>을 대낮같이 나타내시리로다.](시37:5-6). 다윗이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할 때 주님은 다윗의 판단을 대낮같이 하셔서 그는 전쟁에서 단 한 차례의 패배도 경험하지 않는 백전불패의 장수가 되었고, 마침내 다윗 왕국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통한 계시와 조명으로 말미암는 판단은 오류가 없습니다. 주님께 문제를 맡길 때 우리는 생각이 바로 서게 됩니다. [네 일들을 [주]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생각하는 것들이 굳게 세워지리라.](잠16:3). 생각하는 것들이 삐딱하고, 부정적이고, 불신에 매여 있고, 비관적일 때 나오는 판단은 결코 현명한 판단이 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주일 예배나 기도 모임에 와서 “주여 나의 문제를 주께 맡깁니다.” 기도하고 난 다음 돌아갈 때는 도로 다 찾아갑니다. 그래서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판단들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내가 주의 입의 모든 판단들을 내 입술로 밝히 드러내었으며](시119:13).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주신 판단들은 입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주의 입의 모든 판단들을 드러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감사와 찬양입니다. 그리고 전도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판단들로 인하여 감사를 했는데 얼마나 감사가 넘쳤던지 한 밤중에 일어났습니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들로 인하여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시119:62). 주님의 판단대로 따랐을 때 그의 인생은 목자를 따라간 양들처럼 푸른 초장을 만났고, 쉴만한 물가를 만났고, 원수들의 목전에서 잔이 넘치는 풍성한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잠을 자다가 일어나 감사를 했고, 한 밤중에 고요히 있을 때에도 주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주의 의로운 판단들로 인하여 내가 하루에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시119:164). 하루에 일곱 번씩 찬양을 드렸는데 이는 찬양이 몸에 배인 습관이요, 생활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감사와 찬양은 입술이 드리는 자원 헌물입니다. [오 [주]여, 주께 간청하오니 내 입이 /드리는/ 자원 헌물들을 받으시고 주의 판단들을 내게 가르치소서.](시119:108). 감사와 찬양을 드릴 때 주님은 자신의 판단들로 가르쳐 주시고, 가르침을 받은 다윗은 또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선순환이 연속되었습니다.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말로 드러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를 해도 마음 속으로 하는 묵상 기도, 묵언 기도보다 부르짖는 기도가 훨씬 더 효과적이고 강력합니다.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은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요,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주의 판단들을 내 입술로 밝히 드러내는 것은 성도들이 주님께 드리는 입술의 열매요, 희생제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말을 들으시고, 그에 따라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부정한 영이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렸기 때문이니 이 여자는 그리스 사람이요, 민족으로는 수로보니게 사람이라. 그녀가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시기를 그분께 간청하거늘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먼저 자녀들을 배부르게 할지니 이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기 때문이라, 하시매 그녀가 그분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밑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의 빵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그분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마귀가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니라.](막7:25-29). 주님은 그녀에게 “이 말을 하였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마음에 있는 것을 마음에만 간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주님만이 딸을 고칠 수 있고, 고쳐 주실 분이란 마음 속에 있는 절박한 믿음을 무시를 받아가면서도 개의치 않고 말로 표현했습니다. 주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은 모두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말을 할 때 믿음은 현실이 되고, 체험이 됩니다. 승리의 말을 할 때 승리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무슨 말을 하든지 말은 씨앗이 됩니다. 주님은 능력 있는 기도, 응답받는 기도에 대해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에게 이르기를, 옮겨 가서 바다에 빠지라, 하며 마음 속으로 의심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으면 무엇을 말하든지 다 받게 되리라.](막11:23). 주님은 기도 응답에 필수 요소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마음 속으로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여기서는 주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기도할 때 말한 것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구할 때 말한 것을 마음 속으로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가 말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가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으면” 무엇을 말하든지 다 받게 됩니다. 이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영적 원리입니다. 이런 구절들을 이용하여 기독교 문화에 익숙한 이곳 미국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제하고, 성경의 부분만을 취하여 적극적 사고 방식, 긍정적 사고 방식 등의 성공학 강좌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교회 목사님들도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 ‘적극적 사고 방식’ 등을 설교에 도입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한 심리학적인 성공 강좌는 마귀적인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성경 전체적인 진리 속에서 이런 부분적인 진리들을 정확히 인식하고, 말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마음 속에 믿고, 그 말하는 대로 여러분의 삶은 흘러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의 말씀을 근거로 확신 가운데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도전 정신을 가진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언제나 자신의 입술로 주의 입의 모든 판단들을 드러내었습니다. [내가 주의 입의 모든 판단들을 내 입술로 밝히 드러내었으며](시119:13). 명사들의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면 내 입에는 명언이 쏟아집니다. 유명한 시인들의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면 읊으면 나는 시인이란 별명을 얻게 됩니다. 친구들 가운데 속담과 격언을 많이 외워서 적재적소에 적절한 속담을 쓰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속담을 잘 인용하고 썼던지 그는 학교에서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영화 속의 명대사를 외우고 다닙니다. 어떤 아이들은 유명한 가수들의 노래를 줄줄 외우고 다닙니다. 그들이 외운 것을 입술로 밝히 드러내면 꼬마 가수가 됩니다. 책을 많이 읽은 아이들의 입술에는 책의 내용이 나오고, 연극을 많이 본 아이들의 입술에는 연극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은 주의 입의 모든 판단들을 밝히 드러내었다고 했는데, 다윗의 마음 속에는 주의 판단들이 가득 들어 있었고, 줄줄이 외우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은 은혜로왔고, 복된 말씀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외운다면 여러분의 입술에는 성경이 나오며, 입술에서 나오는대로 그 인생이 전개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입술의 말은 혼을 구속하기도 하고, 몸을 구속하기도 합니다. [네 입의 말들로 인하여 네가 올무에 걸렸으며 네 입의 말들로 인하여 붙잡히게 되었느니라.](잠6:2). 그래서 주님은 입술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든지 다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에 보면 행동이 아니라 말만으로도 유죄가 확정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혼이 입술로 말하여 악을 행하리라 하든지 선을 행하리라 하고 맹세하면 사람이 맹세로 무엇을 말하였든지 비록 그 일이 그에게 드러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그가 그것을 알게 된 때에는 이 일들 중 하나에서 유죄가 될지니라.](레5:4). 여러분들이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말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어떤 자매는 자기는 시집 갈 돈으로 교회에 헌금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이 자매의 허튼 말이라도 듣고 받으십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현장에서 들었는데 참으로 놀랍고도 무서운 대화였습니다. 우리 입술은 찬양과 감사와 기도와 덕을 세우는데 좋은 것들을 말하고, 주의 판단과 법도들을 증거해야 합니다.
말에는 위력이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적극적 사고 훈련가인 지그 지글러 박사가 뉴욕의 지하도를 막 들어가려 할 때 거지가 연필을 팔고 있었습니다. 지글러도 다른 사람들처럼 돈만 1불 주고 연필을 받지 않고 가다가 다시 와서 거지에게 말했습니다. “아까 드린 1불 대가로 연필을 주세요” 거지가 연필을 주자 “당신 직업도 나와 같은 사업가요. 당신 거지가 아니요”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거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1불씩을 구걸하는 거지가 아니라 1불에 연필을 파는 지하도의 사업가이다.” 그날부터 그는 마음 속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사업가다. 연필 파는 사업가다.” 그는 그날 이후로 거지가 아니라 사업가가 되었고, 후에 자기 혼자만 인정하는 사업이 아니라 누구나 다 인정하는 훌륭한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물며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를 바꾸지 못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의 말을 받아도 인생이 변한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살아있는 능력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고, 입술로 고백한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달라질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판단들을 배울 때 우리는 영적인 사람으로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게 되며, 천사들을 판단하고, 밖에 있는 일들을 판단하고, 자신을 판단함으로써 죄를 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판단해야 하는가?
첫째, 우리는 세상을 판단합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너희가 지극히 작은 문제를 판단하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겠느냐?](고전6:2). 하나님은 세상을 악하다고 이미 판결을 내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판단을 그대로 믿고 수용할 뿐입니다. 세상은 악하다는 판단 아래 모든 것을 판단하면 됩니다.
둘째, 천사들을 판단합니다. [우리가 천사들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늘 하물며 이 /세상/ 삶에 속한 일들이랴? 그런즉 너희가 만일 이 /세상/ 삶에 속한 일들을 판단하려거든 교회 안에서 가장 작게 여기는 자들을 세워 판단하게 하라.](고전6:3-4). 우리는 장차 천사들을 판단할 것입니다. 이는 타락한 천사들을 말합니다. 천사들을 판단하게 될 우리가 세상 삶에 속한 일들을 판단하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일입니다.
셋째, 형제들 사이에서 일을 판단합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말하노라. 너희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그 말이 사실이냐? 자기 형제들 사이에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단 말이냐?](고전6:5). 형제들을 판단하지 말고 형제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판단해야 합니다. 부모님은 자식들 사이에 일을 판단하고, 선생님은 제자들 사이에 일을 판단하고, 감독은 선수들 사이에 일을 판단하듯이 우리는 형제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넷째, 성경적인 것과 비성경적인 것들을 판단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덮지 않은 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냐?](고전11:13). 교회 내에서 행해지는 일들이 모두 성경적인 것은 아닙니다. 잘 판단해서 비성경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성경적인 진리들을 세워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强勸)하시기 때문이라. 우리가 이같이 판단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으면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5:14). 이것은 훌륭한 판단이요, 바른 판단입니다. 영적 진리에 대한 성경의 판단을 받아 들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판단입니다.
다섯째, 우리는 우리 자신을 판단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판단하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으면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함께 정죄를 받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1:31-32). 우리가 판단해야 할 것은 형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남을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일을 하지 말고 자신을 판단하고 자신이 행한 일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자기 형제의 길에 걸림돌이나 넘어질 기회를 두는 사람이 없는지 판단할지니라.](롬14:13). 끊임없이 자신을 판단하고, 형제의 길에 걸림돌을 두지 않았나? 판단하는 것은 형제 사랑의 기본입니다. 바보들은 남의 탓만 합니다. 반면 성도들은 늘 자신을 판단하고 자신의 일을 판단합니다.
계속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 하겠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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