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오늘날 사람들은 육체를 단련하는데 많은 시간과 <br />정열을 씁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육체를 단련하는데 많은 시간과 정열을 씁니다. 반면 주님이 명하신 경건의 훈련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싸이클은 근력 단련, 하반신 단련에 좋고, 수영은 전신 근육을 단련하고, 윗몸 일으키기는 하복부를 단련하고, 하루 만보 걷기 운동은 하반신을 단련하고, 등산은 전신 척추 단련에 좋다며 여러 가지 신체 단련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이와 별개로 심신을 단련하는 프로그램도 많습니다. 승마, 국궁 등은 몸과 신체를 동시에 단련한다고 광고를 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약점을 단련하고 강하게 하고자 합니다. 아무리 좋은 신체를 타고나도 단련하지 않으면 점점 퇴화되고, 건강을 잃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 역시 단련하지 않으면 믿음의 퇴화되고, 약화되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 소용이 없어지고 맙니다. 주님은 단련하시는 trainer 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 속 중심부를 단련하시며, 우리의 믿음을 단련하시는 단련자이십니다. [도가니는 은을, 용광로는 금을 단련하거니와 [주]는 마음을 /단련/하시느니라.](잠17:3). 주님은 성도들의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단련하심으로 두려움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도우십니다. 순수하고 선한 양심을 소유하도록 단련하십니다. 약한 양심의 소유자는 아무리 정결한 양심을 가졌다 해도 더럽고 사악한 자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단련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다 함께 단련(연단)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상고해 보고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순수하게 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단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께 소망을 둔 모든 자들아, /너희는/ 크게 용기를 내라. 그분께서 너희 마음을 강하게 하시리로다.](시31:24). 주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데 강건함은 주님의 명령이며, 주님이 친히 이루실 일입니다. [그분의 영광스런 권능에 따라 모든 강력으로 강건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인내와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1:11). 우리의 육신은 연약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날마다 쇠해지고, 보잘 것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 사람은 강건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하시고 단련하십니다. 불같은 단련을 통과한 사람은 누구나 예외없이 믿음의 빛을 남기며, 간증을 남기고, 열매를 남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강하게 하는 첫 번째 방법은 고난입니다. 고난을 통해 단련되면 사람은 강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부르사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신 분께서 너희가 잠시 고난을 받은 뒤에 너희를 완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고 정착시키시리니](벧전5:10). 주님은 우리를 잠시 고난을 받은 뒤에 완전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람을 강하게 하는 두 번째 방법은 주의 말씀입니다. [내 혼이 근심으로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에 따라 주는 나를 강하게 하소서.](시119:28). 걱정과 근심은 마음을 녹슬게 하며, 약하게 하지만 주의 말씀은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은혜의 말씀, 생명의 말씀, 권능의 말씀, 의의 말씀, 지혜의 말씀은 사람을 강건하게 만들어 줍니다. 사람을 든든히 세워 줍니다(행20:27). 주님은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사용하도록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주님이 사람을 강하게 하는 세 번째 방법은 기도입니다. [내가 부르짖은 날에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기력을 주사 내 혼을 강하게 하셨나이다.](시138:3).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우리를 강하고 담대하게 합니다. 기도 응답을 많이 받아본 성도들은 어지간한 어려움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기도하는 사람은 걱정을 모릅니다. 저는 가난한 고학생이 유학을 가기 위해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독지가를 붙여 주셔서 네델란드로 유학을 보내 주셨고,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학비, 생활비를 모두 받아서 공부했습니다. 반면 한 형제는 부지런히 모금을 하러 다니는데 지금도 모금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를 하니님 앞에 들고 나가서 맡기는 사람보다 더 강한 사람은 없고, 그 사람을 무너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염려를 주께 맡기고, 일을 주께 맡기고, 길을 주께 맡기고, 짐을 주께 맡기고, 사정을 주님께 맡긴 사람을 무엇으로 이길 수 있겠습니까? 마귀도 두 손들고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를 주님 앞에 내려 놓지 않기 때문에 마귀는 계속 공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기도하도록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네 번째 방법은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그리스도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을 빨리 깨달을수록 그 사람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해집니다. 주님이 모든 것이라고 고백하는 사람, 그렇게 믿는 사람은 강건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단련하셔서 주님 한 분만이 모든 것이란 믿음을 심어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다섯 번째 방법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단련은 성도를 강인하게 만들며, 승리자가 되게 합니다. [(믿음으로) 맹렬한 불을 끄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싸움에서 용맹하게 되어 외부의 군대들과 싸워 물리치기도 하며](히11:34). 성도는 아무도 스스로 강하게 될 수 없습니다. 고난, 말씀, 기도, 믿음, 그리스도를 통해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이 다섯 가지로 강하게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단련하면 우리는 강하고 담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시련이 많은 믿음일수록 생명력이 강하고,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여섯 번째 방법은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부함에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하여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엡3:16). 성령 충만한 성도는 강한 성도가 됩니다. 성령은 잠자는 영이 아닙니다. 성령은 침묵하고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성령은 능력과 지혜의 영이요, 은사를 주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 안에서 살도록 강력하게 단련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일곱 번째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내 아들아, 너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건한 자가 되고](딤후2:1).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맛본 사람들은 은혜의 말씀, 은혜의 영,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니다. 자신의 힘이나 세상의 도움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성도들이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고, 은혜를 구한다면 강건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은혜를 얻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하나님은 단련하지 않으시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나 단련해서 쓰십니다. 순수한 말씀이요, 완전한 말씀인 성경조차도 주님은 단련된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으로 말하건대 그분의 길은 완전하고 [주]의 말씀은 단련되어 /순수하니/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가 되시는도다.](삼하22:31). 우리 손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철저히 단련되어 순수한 은과 같이 된 것입니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단련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시12:6). 은을 단련하듯이 주님은 주의 말씀을 일곱 번이나 단련하여 순수하게 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은을 제련하는 사람들은 은을 단련할 때에 도가니에 은을 넣고 불에 달굽니다. 그래서 은 도가니에서 은이 부글부글 끓을 때 위에 올라가는 찌끼를 걷어내고 또 끓여서 들여다보고 또 찌끼를 걷어내고 또 들여다봐서 나중에 그 은 도가니에 있는 은이 완전히 부정한 것이 제거되어 자신의 얼굴이 환하게 비칠 때 그때 그는 단련이 다 끝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런 과정을 일곱 번이나 거친 순은과 같은 것이 주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은 세월을 통해 온갖 비평과 악담과 모욕을 받고, 공격을 받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성경은 과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고고학적으로, 언어학적으로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오류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일반 종교 서적이나 종교 경전들 가운데 성경과 같이 공격받고, 시험당한 책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책들이 성경이 받은 공격의 1/10,000만 당했더라도 오류와 거짓으로 점철된 모순투성이란 사실이 다 드러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성경을 단련되도록 두셨고, 더 이상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성경은 이미 충분히 단련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어떤 말을 할 수가 없으며, 비판할 수는 있지만 반박할 수는 없는 책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역시 단련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산돌이신데, 단련 받은 돌이십니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로 삼으리니 곧 단련한 돌이요, 보배로운 모퉁이돌이며 견고한 기초로다. /그것을/ 믿는 자는 다급하지 아니하리로다.](사28:16). 단련 받은 돌을 우리는 보석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보석은 강한 열과 압력 등을 통해 단련 받은 돌들입니다. 주님은 광야에서 40일간 금식을 시작하시면서부터 온갖 시련과 고난을 다 겪으시며 단련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그 메시야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는가? 우리의 구원자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고,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시험받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단련을 받았는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고난과 시험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 아들이실지라도 고난받으신 일들로 말미암아 순종하기를 배우사] (히5:8). 주님은 아들이시지만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단련한 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지 않으셨다면 그는 단련한 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를 중보할 대제사장이 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심으로 고난의 발자취를 남기시고,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너희가 이것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니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사 너희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벧전2:21). 주님이 남기신 발자취는 고난의 발자취이기에 우리는 고난을 통해 단련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외 없이 고난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요, 주님께서 고난을 통해 단련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의 딸로 인하여 어떻게 할까? 내가 그들을 녹이고 단련하리라.](렘9:7). 주님께서 그들을 녹이고 단련하시는 것은 그들을 특별한 보배로 만들기 위한 필수 과정입니다. 흙덩이나 돌덩어리로 보여도 그 안에 금과 은 같은 보석이 섞여 있으면 녹입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는 흙덩이나 돌덩어리를 도가니에 넣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럽고 추해 보여도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다면 주님은 녹이시고 단련하십니다. 보배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녹이고 단련해야 합니다. 단련 없이는 아무 것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녹이시고 단련하시겠다고 결정했다면 이는 우리가 매우 가치있는 존재들이란 증거입니다. [[주]는 자신의 거룩한 전(殿)에 계시며 [주]의 왕좌는 하늘에 있도다. 주의 눈은 사람들의 자녀들을 바라보시며 주의 눈꺼풀은 그들을 단련하시는도다. [주]께서 의로운 자는 단련하시되 사악한 자와 폭력을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혼이 미워하시는도다.](시11:4-5). 주님께서 의인을 단련하시지 악인을 단련하시지 않습니다. 악인은 미워하시고, 심판하실 뿐입니다.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지 사생자나 남의 자식을 징계하시지 않습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은 대 환란을 통해 이스라엘을 정결하게 하고 희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슬라브족이나 중국의 한족, 몽고족을 단련하시거나 힌두교도들을 단련하시지 않고 이스라엘을 단련하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단련을 받으면 보배가 되지만 단련을 받지 못하면 쓸모없는 자가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결하게 되고 희게 되며 단련을 받을 것이나 사악한 자들은 사악하게 행하리니 사악한 자들은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들은 깨달으리라.](단12:10).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고 단련하십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성도를 결코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예전에 농부는 우시장에서 길들여져 있지 않는 소를 사오면 반드시 길을 들입니다. 길을 들여야 밭을 갈고, 짐을 나를 수 있습니다. 집에서 난 송아지는 때가 되면 길을 들여서 팝니다. 길을 들여야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찬 가지로 주님은 우리를 값주고 사셨습니다. 그냥 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이는, 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은을 단련함같이 우리를 단련하셨음이니이다.](시66:10). 은을 단련하듯이 우리를 단련하심은 불결한 것을 제거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주님이 친히 단련하시기 위해 도가니를 준비했다면 우리는 그 속에 들어가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회피하고 반항해 보아야 고통만 큽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전쟁을 수행할 훌륭한 군사로 빚으시기 위해서 훈련을 시키시고, 반복적인 실전을 통해 점점 강한 군사로 빚어 나가십니다. 첫째, 주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적 감각들을 단련시킵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니 그들은 곧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4). 이 훈련은 성령의 검인 말씀을 사용하는 법입니다. 말씀을 선악을 분별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적과 아군을 구분하고, 주님의 뜻과 마귀의 간계를 구분하는 영적 감각 훈련입니다. 이것은 거듭났다고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능력이 아니라 의의 말씀을 통해 자기 감각들을 단련해야만 합니다. 단련되지 않는 사람은 속기도 하고, 실수도 잦습니다. 그러나 예민한 감각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감각이 단련된다는 것은 어느 분야에서나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운동 감각, 승부 감각, 본능적 감각이 발달되어 있는 사람을 당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도들은 머리로 고민하고 생각하기 전에 영적 감각을 통해 선악을 분별할 수 있을 만큼 주님은 우리를 단련시키십니다.

둘째, 주님은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하라고 하십니다. [오직 속되고 늙은 부녀(婦女)들이 꾸며낸 이야기들을 거부하고 도리어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훈련하라. 이는 육체의 훈련은 유익이 적으나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하며 현재의 생명과 앞으로 올 생명의 약속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니라.](딤전4:7-8). 성도들은 끊임없이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경건에 이르도록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는 운동선수와 같습니다. 권투 선수로 비유되기도 하고, 마라톤 선수로 비유되기도 하는데 이는 모든 성도가 절제와 오래 참음, 인내로 자신을 훈련해야 함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훈련관이시오, 단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적절한 조련과 끊임없는 훈련, 단련 없이 어떤 방면에서 대가를 이루거나 성취를 이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련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용도와 목적에 맞게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강한 쇠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연장을 만들거나 어떤 도구로 만들려면 풀무 속의 뜨거운 불에 넣어 벌겋게 달군 다음 두들기고 또 두들깁니다. 이런 과정을 한두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강도와 재질이 충족될 때까지 반복합니다. 반복적으로 오래 불 속에 넣고, 두들기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무엇인가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서, 채찍을 통해서,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해서 인생을 단련하시고 빚으십니다.

하나님은 왜 고통을 주시는가? 사람들은 고통없는 낙원을 생각합니다. 너무 고통스러우면 잠이 오지 않고 식사를 해도 소화가 되지 않습니다. 고통이 왔을 때 가장 힘든 것은 고통의 의미를 전혀 모를 때입니다. 고통이 왜 왔는지, 이 고통이 내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면 견딜 수 있지만 그것이 없으면 너무 힘들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제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라고 묻는 성도들에게 성경은 고통의 목적과 의미를 정확하게 말해 줍니다.

솔로몬은 사람들에게 임하는 고통의 이유와 목적을 정확하게 통찰했습니다. [내 마음을 쏟아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찾아보고 탐구하였나니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이 쓰라린 해산의 고통을 주사 그것으로 단련 받게 하셨느니라.](전1:13). 모든 고통은 단련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아들들에게 해산의 고통을 주사 그 안에서 단련 받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전3:10). 주님은 복을 주시듯이 고통을 주십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다 고통을 주십니다. 주님이 고통을 주시는 것은 괴롭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련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가마 솥에 불을 때고, 온도를 높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를 고통의 풀무 속에 던지셔서 그 강도를 높이심으로 쓸만한 그릇으로 빚으시는 것입니다. 진흙으로 빚어진 그릇이 진흙 그대로 있으면 물에 잠길 수도 없고, 국이나 수프를 담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도기나 자기로 변하면 거기에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습니다. 물에 담그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시련 같아도 주님은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시험 당할 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하여금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시련은 믿음으로 이기라고 주시는 것이요, 도전에서 승리하라고 주시는 것이지, 회피하고 불평하라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통해 단련받게 하신 것을 알고 고통이 올 때마다 기쁨으로 감당하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성도의 삶은 도전과 응전의 삶의 연속입니다. 크리스찬은 복음을 들고 온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도전자들이요, 개척자들입니다.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내가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또는 “왜 다른 사람은 안 그런데 나만 이런 고통을 당하는가, 왜 하필이면 내게만 이런 문제가 다가오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여러 가지 고통이 다가오고 도전이 다가올 때 이것을 수용해야 합니다. 믿음을 지녔다는 것은 삶에서 고난과 시련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시련을 이겨 나가는 삶을 살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우리 앞에 놓인 도전을 우리 혼자 헤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겨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끔 우리 앞에 빵대신 돌을 두기도 하시는데, 어떤 사람은 그 돌에 걸려 넘어지고, 원망과 불평으로 걷어차다 발이 부러집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 돌을 디딤돌로 삼아서 멀리 내다 보기도 하며, 주춧돌로 삼아 집을 짓기도 합니다. 고난은 시련이요, 단련이란 사실을 알고, 이것을 주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기도할 때 우리는 넉넉히 이길 힘과 능력을 얻게 됩니다. 지혜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어떤 도전과 시련에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시련과 고난이 올 때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마십시오. 마치 나에게는 찾아오지 말아야 할 이상한 것이 온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단련하려고 오는 불 같은 시련에 관하여는 마치 이상한 일이 너희에게 일어난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기뻐하라. 이것은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때에 너희 또한 넘치는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4:12~13). 불같은 시련은 우리를 단련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기뻐할 일이지 불평하고 원망할 일이 아닙니다. 하는 일마다 일이 안 풀리고, 망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정에는 끊임없이 병마가 찾아 듭니다. 가족 간에는 갈등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단련하기 위해 있는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 “모든 일에 감사하라” 하셨으니 이 일도 모든 일에 해당하므로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항상 기뻐하라”하셨으니 이 때도 기뻐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그런 일들을 기쁨으로 맞이하십시오. 그 때 우리는 제대로 단련되어 정금같이 빚어지는 것입니다.

욥은 말하기를, [고난은 티끌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지라도 사람은 고생하려고 태어나나니 불티가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욥5:6-7)고 말합니다. 삶은 고해(苦海)라는 말과 같이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괴로움이 가득하며](욥14:1)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삶이 고생스럽다는 것은 익히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죄로 인해 고통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과 시험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연단하시며, 특별히 자기 백성들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치 질그릇을 빚은 토기장이가 토기 가마에 넣어 불을 때듯이, 제련소에서 금과 은을 제련하듯이 주님은 우리를 인생이란 가마에 넣으시며, 용광로에 은을 넣으시듯이 그렇게 단련하십니다.

토기장이가 흙으로 빚어진 질그릇을 가마에 넣지 않고 그늘에서 말리면 아무 그릇으로도 사용할 수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그릇으로 사용하는 도자기는 도기와 자기의 합성어입니다. 도자기는 굽는 온도에 따라 토기, 도기, 석기, 자기로 나뉘어 지는데, 700 - 1000도에서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굽는 것을 토기라고 합니다. 1100 - 1200 도에서 굽는 것을 도기라고 합니다. 1200 - 1300도에서 굽는 것을 석기라고 하며, 도기보다 단단하고 실용적입니다. 잘 깨어지지 않습니다.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굽는 것을 자기라고 합니다. 청자나 백자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하며, 예술품으로 인정받습니다. 엄청난 가격을 붙여지기도 하고, 그 자체만으로도 따로 보관할 정도로 귀한 그릇이 되기도 합니다. 더 뜨거운 가마에 들어갈 수록 더 아름답고, 단단하고, 귀한 그릇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손에 빚어진 질그릇들입니다. 고난의 풀무를 통과한 정도에 따라서 토기, 도기, 석기, 자기와 같은 용도가 결정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역시 고통의 풀무를 얼마나 통과했는가에 따라 인생의 깊이가 결정되고,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건으로만 단련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단련하시기도 합니다. 시편 기자가 말하기를, [이는, 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은을 단련함같이 우리를 단련하셨음이니이다. 주께서 우리를 이끄사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고난을 우리의 허리에 두시며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머리 위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사오나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사 풍요로운 곳으로 들이셨나이다.](시66:10-12). 인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험장이요, 단련장입니다. 시험을 통과하여 제대로 정련된 후에 주님은 풍요로운 곳으로 들이십니다. 아무런 시험 없이 복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 대신 우리를 이끄사 그물에 걸리게 하셨다면 그 고통이 어떠하겠습니까? 사냥꾼의 그물에 걸린 짐승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물의 새처럼 이웃 나라에 포로가 되게 하시고, 종이 되게 하신 것은 단련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고난을 허리에 두었다는 것은 마치 허리 띠가 몸에 붙어 다니는 것처럼 고난이 늘 붙어 다녔다는 것입니다. 허리가 아프면 온 몸이 꼼짝을 못하는데 주님이 주신 고난은 우리를 꼼짝 달싹하지 못하게 한 그런 고난이란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 머리 위를 타고 갔다는 것은 짓밟고 갔다는 말입니다. 불과 물을 통과한 후에야 주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은혜와 복을 감당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시험의 통과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성도의 삶이 순례자요 나그네길이라고 해서 유유자적하게 평안한 여행길이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꿈은 고통이 없고, 시련이 없고, 시험이 없는 평안하고 희락이 있는 낙원을 꿈꾸지만 연단의 과정 없이 들어간 낙원은 낙원이 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시험하시되 은을 단련함같이 우리를 단련하셨다고 말합니다. 광산에서 은을 캐는 사람을 굴토자(광석을 캐는자)라고 하고, 은을 캐서 나르는 사람을 부토자(광석을 갱밖으로 나르는자)라고 합니다. 광부가 캐낸 광석을 제련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작업으로 야장(冶匠), 황장(黃匠), 연장(鉛匠) 등의 전문적인 장인들이 전담하였습니다. 철이나 금, 은, 구리같은 것은 모두 야로(冶爐)와 풍상(風箱)을 사용하였습니다. 은을 녹이면 찌꺼기들이 위로 뜹니다. 그것을 걷어내고, 또 걷어내다 보면 어느덧 자신의 얼굴이 거울에 비치듯이 환히 비치는데 이것은 순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 백성들을 단련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사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우리의 허리에 고난을 두시기도 하시며, 머리 위로 사람들이 타고 가기도 합니다. 불과 물을 통과하게도 하십니다. 이것이 다 주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단련하시는 주님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한 관계로 이런 일들은 모두 마귀의 소행인 줄 알거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서 이런 일이 생기는 줄 압니다. 고난과 박해는 죄의 결과가 아니라 단련을 위해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민족인 이스라엘은 그냥 저절로 택함 받은 민족으로서의 특권을 누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고통의 용광로 속에서 나왔습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쇠 용광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용광로 속에서 나온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용광로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사 이 날의 너희와 같이 자신을 위하여 상속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신4:20). [이는 그들이 주께서 쇠 용광로 한가운데서 곧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이며 주의 상속이기 때문이니이다.](왕상8:51). 주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민족이요, 특별한 보배로 삼기 위해 400년 동안 쇠 용광로 속에 집어 넣으셨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연단을 받았습니다. 용광로는 찌꺼기를 정결하게 합니다. 모든 불순물을 제거합니다. 열방의 머리가 되기 위해서 그들은 철저히 연단 받아야 했습니다. 주님은 더러워지면 다시 정결하게 하시는 단련의 손길을 뻗치십니다. [내가 또 내 손을 네게로 돌려 네 찌꺼기를 정결하게 제거하며 네 주석(籌渲)을 다 치워 버리고](사1:25). 이렇게 제련된 된 후에야 깨끗하고 단단한 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제련되지 않는 보석은 보석이 아닙니다.

최고의 보석으로 인정받는 다이아몬드는 탄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연필심으로 사용되는 흑연과 숯(목탄)과 광채 나는 다이아몬드는 모두 동일한 재질이요, 탄소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셋은 완전히 다릅니다. 값싼 흑연을 다이아몬드로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흑연이 다이아몬드로 쉽게 바뀔 수 있다면 다이아몬드는 더 이상 보석의 가치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한 가지 방법은 흑연에 엄청난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지금 시도되고 있는 새로운 방법은 흑연 판에 전자빔을 쪼이는 것입니다. 흑연과 다이아몬드가 다른 점은 탄소 원자가 배열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다이아몬드는 피라미드 형으로 조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반면 흑연 원자는 층상 구조로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흑연은 보통의 압력에서 매우 안정적이지만 다이아몬드는 지하 500-700m 이하의 깊숙한 곳에서 강한 압력과 뜨거울 지열 속에서만 자연 생성됩니다. 흑연이 다이아몬드로 바뀌는데 엄청난 세월의 강한 압력과 뜨거운 지열이 필요하듯이 사람은 고난의 풀무 속에서 오랫동안 연단을 거쳐서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지게 됩니다.

영국의 조지 왕이 도자기 공장을 방문 했을 때 두개의 꽃병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꽃병들은 같은 원료로 만들어졌는데 그 스타일과 무늬도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광채가 찬란하게 나고 하나는 희미하고 뿌옇고 광채가 나지 않았었습니다. 볼품이 없었습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조지왕은 도자기를 굽는 사람에게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도기공이 말하기를, "폐하!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는 불에 구워졌고, 하나는 구워지지 않았습니다. 고난은 인생을 윤기 있게 하고 생동감 있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특별히 제작하여 전시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마치 불에 구운 도기와 같아서 빛이 나고 영광이 납니다. 고난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굽지 아니한 토기와 같아서 빛이 나지 않고 영광이 나지 않고 쉽게 깨어지고 맙니다. 불을 통과한 그릇은 도자기가 되지만 불을 통과하지 않는 그릇은 질그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을 통과한 믿음은 정금같이 빛나지만 불을 통과하지 않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단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훨씬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드러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1:7).

믿음의 시련이야말로 불로 단련한 금보다 훨씬 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독특한 민족이요, 많은 특권을 향유한 민족이었지만 그들은 그만한 단련을 수시로 받았던 민족이었습니다. 지상의 어떤 민족도 그런 단련을 받지 못했습니다.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고 은을 단련하듯 단련하며 금을 단련하듯 단련하리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그들의 말을 들을 것이며 또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리라.](슥13:9). 주님은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시며, 은을 단련하듯 단련하시고 금을 단련하듯 단련하셨습니다. 이런 단련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독특한 백성이요, 특별한 보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참으로 내 목소리에 순종하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내게 모든 백성들보다 뛰어난 특별한 보배가 되리니 이는 온 땅이 내 것이기 때문이라. 또 너희는 내게 제사장 왕국이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 너는 이 말들을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출19:5~6). 이스라엘은 특별한 보배이기 때문에 그만한 단련이 필요했던 것이며, 더러움에 빠지면 정화 과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자신을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신의 특별한 보배로 택하셨음이로다.](시135:4). 특별한 보배는 혹독한 제련의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때로 성도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시련과 고난, 고통이 전혀 오지 않기를 기도하고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원석을 아름다운 보석으로 빚고, 빛나는 광채를 발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 우리 역시 이런 단련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구약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들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주심은 모든 불법으로부터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사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곧 자신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그러나 너희는 택함 받은 세대(世代)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이것은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께 대한 찬양을 너희가 보여 주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특별한 백성으로서 주님은 그에 걸맞은 연단을 주십니다. 성도는 성도 다와야 합니다. 그러나 단련 없이 저절로 빛과 소금으로서 역할을 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음악사상 가장 뛰어난 작곡가로 평가되는 사람은 요한 세바스찬 바하입니다. 그의 생애는 고난과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바하는 10세가 되기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도 결혼한 지 13년 째 되는 해 죽었고 자녀 중 한 명은 정신박약아였습니다. 또 그는 노년에 과로로 인해 여러 가지 병을 얻었는데 1750년에는 두 번의 눈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시각장애인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이처럼 억센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처럼 모진 고난과 시련이 거듭되었지만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던 그는 늘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고통이 다가올수록 더욱 많이 기도하고 주께 매달려 늘 성령 충만하여 놀라운 하나님의 영감과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작곡을 한 음악마다 끝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을 반드시 기록했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이 바하의 음악을 통해 큰 영감을 받고 감동받습니다. 바하의 인생에 그처럼 쓰디쓴 고난과 괴로움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바하 음악은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하의 생애는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참으로 처절했습니다. 바하에게 고난은 오히려 놀라운 영감을 받는 계기가 되어 불후의 명작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고난 받을 당시에는 그 고난이 너무나 힘들지만 그 고난은 주님의 단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은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은 사기꾼이었습니다. 그는 민족의 조상이 될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습니다. 자질이나 인품이나 무엇을 보아도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머리가 될 만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을 단련하셨습니다. 그는 꾀를 내어 형의 장자권을 빼앗고, 어머니와 결탁하여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 77세였습니다. 그는 쌍둥이 형 에서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피해 외삼촌이 살던 밧단아람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는 거기서 아내 둘을 얻는데 무려 14년을 고생했습니다. 그는 외삼촌 아래에서 종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짐승에게 물려 찢긴 것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내가 손실을 담당하였으며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께서 내 손에서 그것을 요구하셨나이다. 내가 이와 같았으니 곧 낮에는 갈증이 밤에는 서리가 나를 쇠약하게 하고 내 눈에서 잠이 떠났나이다.](창31:39-40). 얼마나 심한 단련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요셉을 낳고 고향으로 돌아 올 마음을 먹었지만 그는 빈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마지막 해에 거부(巨富)가 되긴 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는 이기적이요, 자기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에서가 사백 명을 데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두려워하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창32:7). 그는 즉시 주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전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네 고향 네 친족에게 돌아가라. 내가 너를 선하게 대하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보여 주신 모든 긍휼과 모든 진리 중 가장 작은 것도 감당할 수 없사오니 이는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르단 /강/을 건넜으나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음이니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이는 내가 그를 두려워함이오며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염려함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네게 선을 베풀어 네 씨로 하여금 바다의 모래같이 곧 너무 많아 셀 수 없는 모래같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창32:9~12). 말씀을 근거로 한 바른 기도요,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한 후에 즉시 자기 꾀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물을 만들어 에서의 마음을 녹이려 했습니다. 혹시나 공격할 경우를 대비해서 긴 행렬로 나누어서 보냈습니다. [이같이 예물이 그보다 앞서 갔고 그 밤에 그는 무리 가운데서 묵었더라. 그 밤에 그가 일어나 자기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여울을 건너더니 그들을 데리고 가서 시내 너머로 보내며 자기 소유도 보내었더라.](창32:21~23). 다 보낸 후에 야곱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맨 뒤에 홀로 남았습니다. 그는 지도자가 아니라 겁쟁이였습니다. 그는 자기 생명만을 구하고자 최후에 남아 있었습니다. 야곱은 많은 연단을 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더 많은 연단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야곱을 평생 동안 연단하셨습니다.

야곱은 딸 디나가 세겜의 청년들에게 더럽혀지는 사건을 통해서 모든 우상들을 상수리 나무 밑에 묻고 벧엘로 올라가 주님께 경배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먼저 보냈습니다. 유난히 사랑하는 아들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로 이집트로 팔려 갔지만 짐승에게 죽은 줄 알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이것은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의심할 바 없이 요셉이 갈기갈기 찢겼도다, 하고](창37:33). 그에게는 평안이 찾아올 틈이 없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 야곱은 더 극심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양식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로 하여금 내 자식들을 잃게 하였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너희가 또 베냐민을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 일들이 다 나를 대적하는도다, 하거늘](창42:36).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항상 함께 하시는데 왜 이런 일이 계속 발생하는지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그는 자신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이런 연단을 통해서 계속 부서지고, 꺾어지고, 깨졌습니다.

그 결과 그는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만 의뢰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자신의 소유를 모두 포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전능자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긍휼을 베푸사 그 사람으로 하여금 너희의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들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하니라.] (창43:14). 그는 이제 “내가 자식들을 잃게 되면 잃으리라.”며 자기 부인을 하는 성숙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야곱은 이스라엘로 자신이 아닌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단련된 성도가 된 것입니다. 이 때 진정한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정련같이 단련된 그의 모습을 보십시오.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파라오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파라오에게 축복하매 파라오가 야곱에게 이르되, 그대의 연세가 얼마냐? 하니 야곱이 파라오에게 이르되, 내 순례 길의 연수의 날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삶의 햇수의 날이 얼마 못되고 험악하였으며 내 조상들이 순례하던 때에 그들이 누린 삶의 햇수의 날에 미치지 못하나이다, 하고 야곱이 파라오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창47:7~10). 야곱은 제국의 황제요, 자기 아들 요셉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파라오 앞에서 고개를 숙인 것이 아니라 파라오를 축복해 주었습니다. 두 차례나 파라오를 축복하는 야곱의 모습은 파라오를 압도하는 영적 위엄과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파라오의 눈치를 보며, 어떻게 사기 칠 궁리나 했을 사람이지만 70여년의 연단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믿고 의지하는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는 요셉이란 총리 아들을 둔 상태로 이집트에서 무려 17년을 살았고 평안한 육신의 안락을 누렸지만 아버지 이삭과 달리 영적 분별력이 조금도 쇠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아버지 이삭은 말년에 눈이 어두워 둘째 아들 야곱이 형 에서로 변장해서 나갔을 때 분별하지 못하고 야곱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야곱도 이제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 창세기 48장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르되, 이들은 누구냐? 하니 요셉이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내게 주신 내 아들들이니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원하건대 그들을 내게로 데려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하니라. 이제 이스라엘이 연로하여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그들을 데려다가 이스라엘에게로 가까이 나아가니 그가 그들에게 입을 맞추고 그들을 안고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였는데, 보라, 하나님께서 내게 네 씨도 보여 주셨도다, 하니라.](창세기 48:8-11). 야곱은 예전에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축복을 받았지만 이제 자신이 아들이 데려온 손자들을 축복해 주어야 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눈이 어두운 것을 배려해서 큰 아들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 손 쪽으로, 둘째 에브람을 왼쪽 손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한 행동을 보십시오. [요셉이 야곱의 무릎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다가 얼굴을 땅으로 향하여 엎드려 절하고 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취해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취해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고 그들을 다 데리고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이스라엘이 알면서도 자기 손을 움직이며 오른손을 내밀어 동생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내밀어 므낫세의 머리에 얹었더니 이는 므낫세가 맏/아들/이기 때문이라. 그가 요셉에게 축복하며 이르되,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이 동행하던 하나님, 이 날까지 나의 전 생애 동안 나를 먹이신 하나님 곧 나를 모든 악에서 구속(救贖)하신 천사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고 이들로 하여금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게 하시오며 또 이들로 하여금 땅의 한가운데서 자라나 번성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창48:12-16). 그는 눈이 어두운 가운데서도 영적 분별력이 둔해지지 않았고, 요셉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인정에 약해지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정확하게 안수해 주었습니다. 야곱은 손을 거꾸로 얹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실수하는 줄 알고 손을 곧 바로 얹도록 바꾸어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이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혹독한 시련과 연단을 통해 말년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야곱의 모습입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이 아이가 맏/아들/이니 아버지의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매 그의 아버지가 거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민족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진실로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큰 자가 되고 그의 씨가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며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인하여 축복하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여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창48:8~20). 야곱은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대언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안수하였으며, 복을 주었습니다. 영적 시련과 연단이 거의 없었던 아버지 이삭은 말년에 음식을 탐하며 느낌에 의존해서 속임을 당했지만 일생동안 연단의 연속이었던 야곱은 12아들을 향한 유언은 물론이려니와 어린 손자들을 향해서도 조금도 영적 감각이 쇠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단련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욱 아름답고 성숙한 영적 분별력을 주는 귀한 예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