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악하고 육신적인 성도만 시험하시고 단련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욥은 구약의 3대 의인 중의 하나요, 하나님이 친히 인정하신 의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욥을 시험하시고, 단련하셨습니다.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깊이 살펴보았느냐? 그와 같이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가 땅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움직여 그를 치게 하고 까닭 없이 그를 멸하게 하려 하였으되 그가 여전히 자기의 순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도다, 하시니](욥2:3). 그러나 그런 욥이 선천적으로 그런 의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하루아침에 거룩한 성인의 경지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어찌하여 아침마다 그를 찾아보시고 순간마다 연단하시나이까?](욥7:18)라고 할 만큼 연단을 통해서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영위했던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단번에 이루어지지만 신앙 인격은 좀처럼 쉽게 변화되고, 성숙해지지 않습니다. 성장은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연단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성령 받았다고 신앙 인격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인격은 주님이 주시는 환란을 통해서만 성장합니다.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로다.] (롬5:3~4). 환난이 없으면, 인내가 없고, 인내가 없으면 체험이 없고, 체험이 없으면 내 안에 게신 영광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골1:27)께서 온전히 성령의 열매로 형성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진주조개가 진주를 형성할 때 자신의 상처난 부위에 끊임없이 진주질을 분비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한 개의 진주가 탄생하게 되기까지 이물질이 들어간 진주 조개는 많은 고통을 감내하여야만 됩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진주를 진주 조개의 눈물이라고 생각 했으며, 그래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진주를 눈물의 보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주 조개라고 해서 다 진주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47년 한 선원이 일주일간 채취한 35,000개의 진주조개 중에서 단지 21개만이 진주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중 상품가치가 있는 것은 단 3개 뿐 이었다고 합니다. 고통을 감싸 안고, 분비물을 품어 내어야만 진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모두 성령의 열매를 그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형성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의 연단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나의 어린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시기까지 내가 다시 너희를 위하여 산고(産苦)를 겪노라.](갈4:19)고 했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부활의 생명을 맛보고 경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모든 성도를 특별한 백성이요, 보배로 여기십니다. 그래서 연단을 통해 그 빛과 가치가 드러나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분께서 아시나니 그분께서 나를 단련하신 뒤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신약 성도들에게 인내의 본으로 제시된 욥은 주님의 단련을 통해서 정금같이 된 것입니다. 믿음의 영웅들의 이름 가운데 고난의 연단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풀무를 통하지 않고, 믿음의 시련없이 credit을 주신 예가 없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17세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리고 말았습니다. 평생 아버지의 사랑을 독점해 온 요셉입니다. 그는 형들과 달리 혼자 채색 옷을 입었습니다. 그런 그가 남도 아닌 자기 형제들에 의해 죽음의 위험에 처했습니다. 죽음 앞에 초연할 나이가 아닙니다. 그는 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창42:21). 형들의 대화를 보면 당시 요셉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서로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에 관하여 참으로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간청할 때에 우리가 그 혼의 고통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는도다, 하니](창42:21). 하나님은 요셉에게 죽음의 고통을 맛보게 한 후에는 이번에는 종의 체험을 하게 했습니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종노릇하다가 모함을 받아 이번에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감옥에 가두어 죄수의 고통을 체험하게 했습니다. 무려 13년의 세월을 이렇게 보냈습니다. 그는 30세에 총리가 되었는데 이 모든 과정이 주님의 손길이요, 연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구원자요, 총리로 세우기 전에 먼저 종이 되게 하셨고, 족쇄와 쇠사슬로 묶으셨습니다. 그는 이런 가운데 말씀으로 단련 받았습니다. [그분께서 한 사람을 그들보다 앞서 보내셨으니 곧 요셉이라. 그가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족쇄에 상하고 그는 쇠/사슬/에 매였으니 그분의 말씀이 임하기까지 /그러하였도다/. [주]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105:17~19). 요셉은 자유롭게 감옥 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발에는 여느 죄수와 마찬가지로 족쇄가 채워져 상했고, 몸은 쇠사슬에 매였습니다. 아버지의 편애를 받고 자란 요셉이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며 평안한 삶을 살았지만 주님은 그런 그를 종으로 팔리고, 죄수로 묶이게 하심으로 그를 단련하신 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을 동안 얼마나 묵상과 경건의 시간을 보냈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도와 눈물로 보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파라오 앞에서 자신의 재주나 능력을 드러내어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꿈의 해석자란 사실을 증거하는 그런 성숙한 신앙 인격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었기에 파라오는 자기 신하들에게 [파라오가 자기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창41:38)고 하나님을 드러내었고, 요셉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여 주셨으니 너와 같이 사려 깊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창41:38~39).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가 요셉의 해석을 듣고 요셉을 높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높였다는 것은 요셉이 얼마나 철저하게 연단을 받았는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요셉은 꿈의 해석을 통해 파라오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주도록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그는 빵을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 주며, 뭔가 대가를 요구했습니다. [오직 당신이 잘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원하건대 내게 친절을 베푸사 내 일을 파라오께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창40:14). 그는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의 도움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세월동안 연단을 받은 후에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자아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드러내었습니다. 요셉을 통해 사람들은 요셉의 총명함이나 지식을 본 것이 아니라 요셉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을 보았습니다. 요셉의 신앙 인격이 제대로 단련되었기에 그는 이집트의 총리로 오랫동안 공직 생활을 했지만 조금도 믿음이 쇠약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오랫동안 고생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부자가 되거나 출세를 하게 되면 이전의 생활을 잊어버리고, 교만해지거나 쓰러지기 쉽습니다. 이런 예는 히스기야나 아사를 통해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삶은 초반기나 중반기보다 말년에 아름답게 맺음을 잘 해야 하는데 이는 혹독한 단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동일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의 소유자들입니다. 사람들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보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접하지 못한 채 우리의 자아만을 접한다면 우리는 아직 더 많은 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죄의 종류는 많지만 모든 죄의 원리는 그리스도가 아닌 자아에서 출발합니다. Not I but Christ! 이것이 성도의 삶의 원리인데, 자신이 자꾸 드러나는 것은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처리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자존심이란 무엇입니까? 자아를 높이는 것입니다. 교만이 무엇입니까? 자아가 왕이 되는 것입니다. 시기심이란 무엇입니까? 자아가 밀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경쟁이란 무엇입니까? 자아가 앞서 나가려는 마음입니다. 분노란 자아가 당하는 손상에 대한 반응입니다. 비겁함이란 자아의 연약함을 보호하고 약점을 숨기려는 것입니다. 죄의 종류는 수백, 수천가지이지만 모든 죄의 배후에는 자아가 있습니다. 자아를 부인하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내 안에 더 이상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살고, 그리스도께서 드러나게 하는 것을 ‘단련’이라고 합니다. 요셉은 말씀의 단련을 통해서 30세에 그 열매를 맺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형제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십시오. [요셉의 형제들이 자기 아버지가 죽은 것을 보고 이르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으리라, 하고 요셉에게 사자(檳玆)를 보내어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말하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으니 이제 원하건대 네 형들의 범법(犯法) 곧 그들의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이제 원하건대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범법을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의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또한 그의 형들이 직접 와서 요셉 앞에 엎드려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오직 당신들로 말하건대 당신들은 나를 해치려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은 그 일이 선한 것이 되도록 계획하사 이 날과 같이 많은 사람을 살려 구원하게 하셨나니 그러므로 이제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어린것들을 부양하리이다, 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친절히 말하였더라.](창50:15-21). 그는 자신의 모든 일에 대해 형제들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었고,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요, 섭리란 사실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단련하사 의의 화평한 열매를 맺게 하시며, 원수를 용서하는 사랑과 넓은 마음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일은 고난의 연단없이 결코 맺어지지 않는 열매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성경의 어느 누구보다 영광스런 이름을 얻었지만 그만큼 연단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곧 바로 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당대의 King Maker요, 백성들의 추앙을 받던 사무엘이 친히 기름을 부어 주었습니다. 이는 얼마나 영광스런 일입니까? 하지만 그날 이후부터 다윗은 본격적인 고난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는 16세의 목동에서 일약 차세대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왕이었던 사울의 최대 정적이 된 관계로 계속 도망자 생활을 했고, 망명을 갔다가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입에 침을 흘리고 발작 증세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생활이 무려 14년간 이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평안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자식들이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켰고,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간증 한 토막을 들어 보십시오. [이는, 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은을 단련함같이 우리를 단련하셨음이니이다. 주께서 우리를 이끄사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고난을 우리의 허리에 두시며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머리 위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사오나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사 풍요로운 곳으로 들이셨나이다.] (시66:10~12). 다윗은 끊임없이 연단에 연단을 거듭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연단의 결과입니다. [폐하시고, 다윗을 일으켜 세우사 그들의 왕이 되게 하시고 또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내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그가 내 뜻을 다 성취하리라, 하시고](행13:22). 여기서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란 “a man after his own heart”-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쫓는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습니다. 범죄함으로 그 형상을 잃어 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새사람을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하나님의 자신의 마음을 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철저한 연단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의 생을 살았으며, 귀한 간증을 남겼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 따라야 할 본으로 하나님은 늘 다윗을 지목하셨습니다. 이는 다윗 안에 하나님을 쫓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그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6).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을지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라.] (빌2:5).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생명, 신성한 본성을 지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누구의 마음을 가졌는가? 에 따라서 우리의 됨됨이가 결정 나며, 삶이 결정 나며,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유업이 결정 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다른 마음,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연단하십니다. 행동 이전에 마음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음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도가니는 은을, 용광로는 금을 단련하거니와 [주]는 마음을 /단련/하시느니라.](잠17:3). 주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 한 분만이 사랑과 경배의 대상이 되도록 하시며, 탐욕과 정욕으로 더럽히지 않도록 단련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시119:36)라고 기도했는데, 이는 바로 우리 자신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탐욕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단련시킵니다. [또 음욕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죄를 그칠 줄 모르며 동요하는 혼(魂)들을 속이나니 /이들은/ 곧 탐내는 습관으로 마음을 단련시킨 자들이요, 저주받은 자식들이라.](벧후2:14). 마음이 주를 떠나고, 주의 기록된 말씀에서 멀어질 때 타락은 필연적인 것이며, 양심은 더러워지고, 마음 역시 탐내는 습관으로 단련되는 법입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우리를 고난 속에 두시고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길을 잃었사오나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은 주의 말씀을 지키도록 우리를 단련하는 파수꾼이요, 훌륭한 길잡이입니다. 고난은 사람과 환경을 통해서 우리 마음을 깨워주는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때로 고난보다 우리에게 더 훌륭한 가르침을 주는 스승도 없을 것입니다. 고난은 주의 법규들을 우리 마음 속에 새겨 주는 교사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하오니 이로써 내가 주의 법규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고난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다른 무엇으로 대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고난을 통해 배우게 하시는 것은 고난을 통해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주님이 주시는 고난을 감당하고, 배움을 입도록 해야 합니다. 병이면 병, 파산이며 파산, 이별이면 이별, 재난이면 재난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겨나갈 지혜와 믿음을 주님께 구하십시오. 그때 우리는 주의 법규들을 배우게 되며, 주의 말씀을 지키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주의 권능과 부활은 극심한 고난 속에서만 제대로 배우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없다면 결코 이런 위대한 진리를 배울 수 없습니다. 주님의 권능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고난이 없이 영광만을 원합니다. 누구나 다 고난을 싫어하고 영화는 원합니다. 그러나 영광은 고난의 텃밭에서 자라나며 맺어지는 열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절대로 없습니다.
영국의 고고학자들이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연구하던 중 피라미드 안에 있는 미이라의 손에 쥐어진 한줄기 꽃을 발견했습니다. 외부의 공기와 접촉하자 순간적으로 꽃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단지 꽃씨만 남았는데 3천년이 넘는 꽃씨를 그곳에서 얻었습니다. 그것을 영국으로 가져와 화단에 심었더니 싹이 나고 잎이 나더니 아름다운 꽃이 피었습니다. 그러나 그 꽃은 영국 식물학회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꽃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웨덴 식물학자 다알의 이름을 따서 그 이름을 다알리아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이 꽃을 마당 뒤에 심었는데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미이라 속에서 나온 씨앗이 지금은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3천년 된 꽃씨는 바짝 말라 죽은 것처럼 보였으나 그 안에 부활의 생명이 들어있어 땅에 심겨지자 싹이 나고 꽃이 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안에 있는 부활의 생명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는 결코 부활을 맛볼 수 없습니다. 어둠이 깊어야 휘황찬란한 불꽃을 볼 수 있듯이, 우리는 고난을 통과해야만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오빠 나사로의 죽음이란 슬픔을 겪지 않았다면 어떻게 부활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의 삶에 다가오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란을 못 오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방에서 고난을 당하나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난처한 일을 당하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으나 버림받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나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항상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일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일하느니라. 기록된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노라,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영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고후4:8~13). 이것이 기독교와 이교도의 차이입니다. 이교도들은 고난과 난처한 일, 죽음과 질병, 핍박, 거꾸러뜨림을 이길 힘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이 내게 닥치지 않도록, 그런 일이 제발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는 오지 않도록 빌고 또 비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속이요, 기복 종교입니다. 절에 가서 공양을 하며 비는 것도 이런 재앙이 오지 못하게 하소서! 라고 빌고, 부적을 사서 붙이는 것도, 점을 보는 것도 모두 이런 일을 미리 피하는 방법에 관한 것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고난도, 재앙도 이길 힘과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사방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통해 배움을 얻고, 능력을 체험하고, 승리할 수 있는 힘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난처한 일을 당하는 것을 피하게 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에 절망하지 않는 것이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핍박을 받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짊어집니다. 이런 고난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런 시험과 환란을 통과할 수 있는 믿음의 영이 있으며, 믿음이 바로 생명과 능력과 부활의 씨앗이 되어 고난의 텃밭을 뚫고 아름답게 삶을 꽃피우는 것입니다.
포도는 포도즙 틀에 넣고 밟아 터뜨려야 포도즙이란 단물이 나옵니다. 밟아서 터뜨리지 않으면 그냥 상해 버리고, 썩어버립니다. 옥합 속의 향유는 깨뜨려야 온 집안에 향기가 진동하는 것입니다. 올리브 열매는 부숴 뜨려야 기름이 나옵니다. 그냥 그대로 두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은 환란과 시련, 고통 속에서 아름답게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있는 말씀의 씨앗은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에 반응하며, 부활의 생명이 활동하여 넉넉히 승리를 가져다 주는 법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그 고난이 주님이 나를 빚으시는 단련임을 알고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평범한 삶으로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빚어나가시는 것으로 인해 감사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험을 모두 받아 들였고,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단련하기 위해오는 시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환영했습니다. 다니엘 3장을 보십시오. [이에 느부갓네살이 격노하고 분노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데려오라 명령하매 그들이 이 사람들을 왕 앞에 데려오매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형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한다 함이 사실이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코넷과 피리와 하프와 트럼본과 비파와 줄 달린 타악기와 온갖 음악 소리를 들을 때에 너희가 엎드려서 내가 만든 금 형상에게 경배하면 좋으려니와 만일 너희가 경배하지 아니하면 너희를 그 즉시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 한가운데 던져 넣으리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하나님이 누구이겠느냐? 하니](단3:13-15). 식민지 국가의 포로의 신분으로 제국의 황제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 쉬운 일입니까? 살 수 있는 기회를 한번 더 주겠다고 했지만 그들의 선택이 무엇입니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께 대답하기를 염려하지 아니하나이다. 오 왕이여, 그렇게 한다 하여도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에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또한 그분께서 우리를 왕의 손에서 건져 내시리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오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형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할 줄을 왕은 아옵소서.] (단3:16~18). 그들은 시련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로 단련 받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이들은 불을 통과한 믿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이 세상의 영광보다 낫고, 하나님을 위해 죽는 것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낫다는 신앙이 그들의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믿음이 강한 만큼 강한 시험이 왔지만 넉넉히 승리했습니다. 믿음의 시험은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을 드러내는 수단에 지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이나 용광로 속에 던져진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는 시련을 통해 믿음이 정련된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여 준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은 행위로 믿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 어떻게 우리를 단련하시는가?
첫째, 범죄할 때 주님은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사람의 육신은 언제나 죄성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운동을 했던 사람도 잠시만 쉬면 근육은 모두 사라지고, 살만 피둥피둥 찌는 것과 같이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믿음의 단련이 한동안 없으면 금방 영적 비만에 빠지고 맙니다. 체격이 좋다고 체력이 좋은 것이 아니듯이 살이 찌고, 덩치가 크다고 건강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영적 비만으로 인한 갖가지 질병들에 걸리지 않도록 불같은 믿음의 시련을 보내시며, 징계하시고, 바로 잡으십니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만일 그가 불법을 범하면 내가 사람들의 막대기와 사람들의 자녀들의 채찍으로 벌을 줄 것이로되](삼하7:14). 주님은 우리에게 언제 어떻게 벌을 주실 것인지 밝혀 주셨습니다. 마치 부모님이 자기 자녀에게 상벌 규칙을 정해 주듯이 주님은 “만일 그가 불법을 범하면 내가 사람들의 막대기와 사람들의 자녀들의 채찍으로 벌을 줄 것이다”라고 기록해 두셨습니다. 이는 주인이 종을 벌하듯이, 국가가 범죄자를 다루듯이 주는 벌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내리는 벌입니다. [만일 그의 자녀들이 내 법을 버리고 내 법도 안에서 걷지 아니하며 내 법규들을 깨뜨리고 내 명령들을 지키지 아니하면 그때에 내가 막대기로 그들의 범죄한 것을 벌하며 채찍으로 그들의 불법을 벌하리라.] (시89:30~32).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주님 앞에 무슨 불법이나 범죄한 것이 없는지 성찰하고 자신을 판단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잘못을 하고, 죄를 짓는데도 모른 채 하는 아버지는 아버지의 자격이 없습니다. 대제사장 엘리는 아들들의 잘못을 보고도 모른 체했다가 집안이 멸문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이 범죄할 때 반드시 벌하시고, 징계를 보내십니다.
둘째, 주님은 우리를 바로 잡기 위해서 단련하십니다. 성경의 목적 가운데 하는 바로 잡음입니다(딤후3:16). [오 [주] 내 하나님이여, 나의 거룩한 이여, 주께서는 영원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죽지 아니하리이다. 오 [주]여, 주께서 심판하시려고 그들을 정하셨나이다. 오 능하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징계하시려고/바로잡으시려고, correction-KJV 그들을 세우셨나이다.](합1:12). 무엇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물건 하나를 만들어도 규격이 있고, 설계한 그 규격대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바로 잡아야 하듯이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기준을 제시하시고, 그 기준대로 살지 않을 때 바로 잡으십니다. 성경에는 3가지의 틀이 있습니다. 진리의 틀(롬2:20), 교리의 틀(롬6:17), 말씀의 틀(딤후1:13)입니다. 틀이란 말은 영어 킹 제임스 성경에서 form입니다. 운동을 할 때 감독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form입니다. 운동 선수는 처음에 바른 자세(form)를 배우고, 반복적으로 훈련해서 어떤 환경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그 자세를 유지하도록 합니다. 폼이 흩어지면 코치나 감독이 교정해 줍니다. 투수들은 투구 폼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훈련합니다. 성적이 떨어지면 가장 먼저 점검하는 것이 자신의 폼이 잘못되지 않았나 분석하고 조언을 구합니다. 타자들은 타격 폼을 점검합니다. 어느 운동이나 자세는 매우 중요하며, 끊임없이 자세 교정을 위해 노력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 자세, 정신 자세, 신앙 자세가 틀어지거나 잘못될 때 즉시 교정하도록 하십니다. 자세를 교정해 주어도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을 부리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죄의 종이었으나 너희에게 전하여 준 교리의 틀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하여](롬6:17). 교리의 틀이란 form of doctrine입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 안에서 내게 들은 그 건전한 말씀들의 틀을 굳게 붙들고](딤후1:13). 오늘날은 형식을 파괴하고, 격식을 무시하는 것이 자유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틀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평안하고 자유로운 것입니다.
우리 몸을 생각해 보십시오. 충격으로 뼈가 부러지거나 제자리에서 이탈하면 의사는 그것을 바로 잡습니다. 카이로프렉틱은 척추를 중심으로 뼈를 본래의 틀대로 바로 잡아 줌으로써 신경을 골고루 전달하도록 해 주는 기술입니다. 하나님은 징계와 고난을 보내셔서 폼이 틀린 사람들의 자세를 바로 잡아 주시고자 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불결하고 더러운 곳, 학대하는 그 도시여! 그녀가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며 징계하는 것/(바로 잡음-correction, KJV)을 받지 아니하고 [주]를 신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습3:1~2). 여기서 징계라고 번역된 부분은 correction(바로잡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잡아 주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로잡히기를 거부하고 주를 신뢰하지 않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규칙대로, 배운 자세대로 하는 것보다 멋대로, 마음대로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 [주]여, 주의 눈이 진리 위에 있지 아니하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으나 그들이 근심하지 아니하였고 주께서 그들을 소멸시키셨으나 그들이 징계(바로잡음-correction, KJV)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며 자기 얼굴을 바위보다 굳게 하고 돌아오기를 거부하였나이다.](렘5:3).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치시고, 소멸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로잡히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틀린 자세, 잘못된 생활 습관, 못된 말투 등을 바로 잡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로잡히지 않으면 아무리 고쳐주어도 일시적인 방편일 뿐입니다. 바른 자세를 확립하고 몸에 습관이 되고, 삶의 방식이 되도록 완전히 뜯어 고쳐 주시기 위해 주님은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기 위해 주님은 단련하십니다. [또 그들 가운데 명철(明哲)한 자 몇이 넘어져서 그들을 단련하며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하되 끝이 임할 때까지 하리니 이는 그 일이 정한 때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라.](단11:35). 역전의 믿음의 용사들이라도 우리는 실수할 수 있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명철한 자 몇이 넘어졌다는 말은 말씀을 믿고, 믿음 생활하는 성도들이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넘어지는 것을 보십시오. [그런즉 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할지니라.](고전10:12). 성도들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능히 든든히 서 있도록 하시며, 넘어질지라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믿음의 단련을 통해 우리는 오뚜기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는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사악한 자는 넘어져서 해악에 빠질 것임이니라.](잠24:16). 우리는 넘어져도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한번도 넘어져 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그 간격이 좀 더 짧아지고, 후에는 금방 일어나게 됩니다. 징계를 통한 단련은 넘어져도 금방 일어나게 합니다. [이제 징계가 그 당시에는 기쁜 것으로 보이지 아니하고 슬픈 것으로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그로 말미암아 단련된 자들에게 의의 화평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므로 늘어진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행로를 만들지니 이것은 저는 자들로 하여금 길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고침을 받게 하려 함이라.] (히12:11~13). 평소에 훈련 량이 적은 사람들은 힘든 일을 할 때 쉽게 지칩니다. 그러나 많은 훈련과 연단을 통해 영적 근력이 강화되고, 체험을 통해 믿음이 성숙해진 사람들은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특수 훈련을 받은 사람들에게 일상의 어려움들은 힘든 일이 아니라 갖고 놀만한 즐거운 일입니다. 처음 신병 훈련을 받을 때 행군을 하는데 완전 군장을 하고, 40Km를 걸었습니다. 중대장과 조교들이 인솔했는데 그들은 얼마나 잘 걷는지 그저 놀랍기만 했습니다. 그들은 200Km 행군을 한 적도 있다면서 이 정도는 가벼운 산책이라고 말했습니다. 단련된 자들과 단련되지 못한 자들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련하시는 이유는 적은 일들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고 평안히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주시려는데 있습니다.
넷째, 주님은 우리를 살피시고 시험하심으로 우리 속 중심부와 마음을 단련하십니다. 직장이나 관청에서 상급 기관의 감사를 한번 받으면 업무 전체가 일괄적으로 정리됩니다. 감사를 받기 위해서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서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정리하여 없애 버리고, 필요한 것들은 모두 내어 놓을 수 있도록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살피시고 시험하시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고 나를 시험하사(try-단련하사) 내 생각들을 아시옵소서. 또 내 안에 조금이라도 사악한 길이 있나 보시고 나를 영존하는 길로 인도하소서.] (시139:23~24). 주님은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아시지만 살피시고 단련하십니다. [오 [주]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시며 내 속 중심과 마음을 단련하소서.](시26:2).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왜 40년 동안 광야에 돌리셨습니까?그들을 시험하시고 단련하기 위함이십니다. 시험하시지 않으면 단련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40년이란 긴 세월을 통해 불신과 불순종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게 하셨을 뿐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없는 악조건인 광야의 사막에서도 오직 믿음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실하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주] 네 하나님께서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너를 인도하신 그 모든 길을 기억할지니 이것은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또 너희가 그분의 명령을 지키려 하는지 그렇지 아니한지 알고자 하심이라.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주리게 하시고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2~3). 주님은 오늘날 성도들을 낮추시고, 시험하시는 것 역시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지 아닌지 알고자 하시는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를 낮추시고, 주리시게 하시는 것 역시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한 단련인 것입니다.
주님은 두려운 것이 없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음이 교만해져 주님을 잊어버리는 것을 두려워 하십니다. 주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낮추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주] 네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그분께서는 너를 이집트 땅 속박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사 그 크고 무서운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시고 또 너를 위하여 부싯돌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것은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선을 행하려 하심이었느니라.](신8:14~16). 주님은 우리를 단련하사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며, 겸손히 낮추셔서 더 많은 은혜를 받게 하려하십니다. 고난을 통해 겉 사람은 썩어 없어져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단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도요, 많은 계시를 받았지만 누구보다 더 많은 박해와 모욕과 수치를 당했습니다. 그가 받은 고난은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는 자기가 겪은 일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자냐? (내가 어리석은 자같이 말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더욱 넘치도록 하고 매도 지나치게 맞고 감옥에도 더 자주 갇히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로부터 마흔에서 하나 뺀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몽둥이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을 당하여 한 밤과 한 낮을 깊음 속에 있었으며 자주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내 동포로 인한 위험과 이교도들로 인한 위험과 도시에서의 위험과 광야에서의 위험과 바다에서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 가운데서의 위험을 당하였고 또 지치고 괴로워하고 여러 번 밤을 새우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금식하고 추위를 당하고 헐벗었노라. 이렇게 밖에 있는 일들 외에도 날마다 내게 닥치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11:23~28). 온 몸이 운동과 훈련으로 단련된 사람이라도 이런 일을 겪으면 형편없이 쇠약해지고, 몸은 망가져 거의 패인이 되고 맙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제 정신이 아니라 여러 가지 후유증으로 인해 요양을 해야 할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약을 지어 먹고, 산삼을 다려 먹고, 영양식을 해도 회복되기 힘든 그런 고난을 당했지만 바울 사도는 오히려 더 강건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지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 이는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이 우리를 위하여 훨씬 더 뛰어나고 영원한 영광의 중(重)한 것을 이루기 때문이니라.] (고후4:16~17). 성도가 당하는 모든 고난은 속 중심부와 마음을 단련하는 것입니다. 단련을 통해 믿음은 강해지고, 담대해 집니다. 하늘에 대한 소망이 생깁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신 단련의 효과입니다.
다섯째, 주님은 열매를 맺게 하시며 보상을 주시기 위해 단련하십니다. 요즘 아테네 올림픽이 개막되어 선수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받은 훈련의 성과를 겨루고 있습니다. 그들이 땀 흘려 체력과 기술을 단련한 것은 그 땀에 대한 보상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금전적인 보상, 명예, 앞으로 남은 생애에 대한 여러 가지 확실한 보상에 대한 약속 때문에 그들은 기꺼이 체력과 기술을 단련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련하시는 데는 확실한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시험을 견디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그가 단련을 받은 뒤에 {주}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왕관을 받을 것임이라.](약1:12). 시험을 견딤으로 단련을 받은 자들은 생명의 왕관을 받을 것입니다. 생명의 왕관은 올림픽 금메달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메달획득을 위해 흘리는 땀과 눈물을 흘리는 선수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올림픽과 달리 경쟁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문제입니다. 단련을 받은 뒤에 얻게 될 왕관을 생각한다면 못 견딜 시험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징계로 단련된 자들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제 징계가 그 당시에는 기쁜 것으로 보이지 아니하고 슬픈 것으로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그로 말미암아 단련된 자들에게 의의 화평의 열매를 맺느니라.](히12:11). 우리는 때로 징계의 효과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아이들을 때려서 얼마나 말을 들을지, 얼마나 깨닫게 될지 걱정이 됩니다. 우리의 매질은 감정적이 되거나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는 그로 말미암아 단련된 자들에게 의의 화평의 열매를 맺게 해 줍니다. 성령의 열매를 성령 충만할 때만 얻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징계를 통해서 의의 열매, 화평의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말씀의 씨앗이 없고 믿음이 없을 때 고난은 절망이요, 미치게 하는 것이지만 말씀이 있고 믿음이 있을 때 고난은 의의 화평의 열매를 맺는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삶이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신앙심 깊은 어머니가 남편 학대에 시달리다가 결핵으로 사망하고 심히 폭력적인 아버지가 농민들을 괴롭히다가 농민들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그가 18살 때 아버지가 맞아 죽는 것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간질병 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따돌림 받고 공부에 낙제하고 고독했습니다. 청년 시절 문학과 사회주의에 심취하여 기독교를 권력에 붙은 종교라고 혐오하며 철저한 무신론자(無信論者)가 되었습니다. 1849년 그가 스물 여덟 살 때 사회주의 혁명 단체에 가입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영하 50도 나 되는 추운 겨울날 그는 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세 사람이 기둥에 묶이는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최후의 5분이 남아 있었습니다. 28년간을 살아왔지만 단 5분이 이처럼 금덩이같이 생각되어지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이 5분을 어떻게 쓸까? 형장에 같이 끌려 온 사람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한 마디씩 하는데 2분 걸리고, 오늘까지 살아온 생을 정리해 보는데 2분, 나머지 1분은 대지를 그리고 자연을 한번 둘러보는데 쓰자 -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눈물이 고인 눈으로 곁에 묶여 있는 두 사람에게 최후의 인사를 하였고 가족을 잠깐 생각하고 나니 벌써 2분이 지나 버렸습니다. 이제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는데, 문득 [3분 후에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찔해졌습니다. 28년간이란 세월을 한순 간 한 순간 아껴 쓰지 못한 것이 그렇게도 후회가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한 번 살 수만 있다면 순간마다 값있게 쓰련만 하고 뇌까렸지만 가슴만 아파올 뿐이었습니다. 그 순간 총에 탄환을 넣는 금속성 소리가 철커덕 났고 이와 동시에 견딜 수 없는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왔습니다. 내 생명이 이렇게 끝나버리다니 하고 있을 때 드라마 같은 극적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한 병사가 멀리서부터 흰 손수건을 흔들면서 황제의 특사령을 가지고 왔던 것입니다.
사형대신 시베리아로 유배 가는 기차에 간이역에서 설 때 어떤 부인이 전도하러 왔다가 작은 성경책을 한 권 주었습니다. 그는 온갖 흉악한 범죄자들과 부대끼고 혹독한 추위와 싸우며 힘든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틈틈이 성경을 읽었습니다. 작은 성경 속에서는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누가 내게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라고 증명해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다. 나는 차라리 나를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다.'고 뜨거운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9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그동안의 고난의 체험과 깨달음을 통해 주옥같은 소설들을 써 내려 갔습니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러한 불후의 명작들은 그가 겪은 고통이 작품 속에 절묘하게 스며들어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이전에 고난은 죽음이란 공포와 절망을 주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가 겪은 모든 고난은 위대한 혼이 녹아 있는 문학 작품으로 모두 새롭게 태어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와 고난은 단련 받은 뒤에 의의 화평의 열매가 되어 모든 사람이 그 열매를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 역시 단련되어 열매가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여섯째, 단련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단련하서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드러나게 하려 하십니다. [이것은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단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훨씬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드러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나타날 때에 믿음의 시련으로 단련을 받은 사람은 주님 앞에서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시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똑 같은 꽃이라도 야생에서 자란 꽃은 향기가 강하게 나지만 온실이나 비닐 하우스에서 자란 꽃은 향기가 거의 나지 않습니다. 진한 향기를 내는 것은 시련을 통해서입니다. 향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세계에서 가장 좋은 향수는 발칸 산맥의 장미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향수 제조자는 반드시 한밤중에 장미를 딴다고 합니다. 그들은 밤 12시에서 새벽 2시까지 발칸 산맥에 가서 그 장미꽃을 따서 향수를 만듭니다. 장미는 한밤중에 가장 향기로운 향을 발산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태양이 비취는 낮에는 장미향기의 40% 가량이 감소된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밤 12시에서 새벽 2시까지는 캄캄한 인생을 통과할 때 우리의 믿음이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지 아니하면 평범하게 살다가 죽을 수 밖에 없지만 주님이 주시는 불같은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내는 성도가 됩니다. 구름 같은 허다한 증인들은 모두 믿음의 시련을 통해 정금같이 빚어졌습니다. 인생에서 별 시련이 없었던 솔로몬은 말년에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시련을 통과했던 주의 종들은 죽음이 삶보다 더 영광스러웠습니다. 환난을 통과한 성도들만이 향기를 발하고, 강해지고, 빛을 발합니다. [내가 나의 고난과 나의 고통 곧 쑥과 쓸개를 기억하며 내 혼이 여전히 그것들을 기억하므로 내 속에서 겸손하게 되었도다. 내가 이것을 내 마음에 생각나게 하므로 내게 소망이 있도다. 주의 긍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하였나니 그 까닭은 그분의 불쌍히 여기심이 끝이 없기 때문이로다.](애3:19-22). 예레미야 같은 위대한 대언자도 고난과 고통 즉 쑥과 쓸개를 기억하며 속에서 겸손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쑥과 쓸개는 지독하게도 쓰고 쓰라린 고통을 말합니다. 사람은 조그마한 틈만 있으면 교만이 삐쳐 올라옵니다. 그러나 쑥과 쓸개를 맛본 사람만이 주님 앞에서 존귀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일곱째, 단련하려고 오는 시련은 주님이 오실 때에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단련하려고 오는 불 같은 시련에 관하여는 마치 이상한 일이 너희에게 일어난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기뻐하라. 이것은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때에 너희 또한 넘치는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벧전4:12-13). 불같은 시련을 보내시는 것은 우리를 단련하려고 오는 것이요, 이는 주님께서 자신이 이 땅에 오실 때에 우리에게 넘치는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고난을 받았던 사람들은 재림을 사모하고,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며, 그 때 받게 될 영광을 기대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자신의 육신을 위해서 시간을 다 보낸 사람은 주님의 오심을 별로 기다리지 않으며, 반기지도 않습니다. 주님 앞에 서는 것이 부끄럽고,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자기가 살아 있을 동안에 오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단련하셔서 재림의 그 날에 있을 영광을 준비시켜 줍니다. 지금 받는 고난은 그 때 받을 영광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니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 당하는 것은 함께 영광도 받으려 함이니라. 이는 내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이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라.](롬8:17-18). 우리는 지금 고난을 받음으로 재림 신앙이 단련됩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동참할 자로서(벧전5:1), 현재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을 마땅하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를 단련하려고 오는 불같은 시련은 재림의 영광이 드러날 때에 넘치는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만드는 귀한 것입니다. 천로 역정을 쓴 존 번연은 단련하려고 오는 불같은 시련을 받아 들였습니다. 존 번연의 부인은 몸이 허약하여 아이를 낳고 먼저 천국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큰 딸은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다가 영국 왕실에 잡혀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앞을 못 보는 큰딸 생각에 견딜 수 없었습니다. 존 번연은 감옥에서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부르짖다가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하셨던 말씀인 “네 은혜가 족하도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날부터 쓴 책이 ‘천로역정’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재림의 영광을 맛보았고, 그 기쁨 속에서 현실의 고통을 거뜬히 이겨나갔습니다. 세계인의 영혼을 흔든 헨델의 ‘메시아’도 평안한 공간에 따뜻한 커피를 마셔가며 일하던 작업실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곡은 그가 반신불수 되어 감옥에 갇힌 후 그곳에서 작곡한 것입니다. 헨델의 메시야는 그 가사가거의 대부분 킹 제임스 성경의 재림 구절들을 따서 만든 위대한 곡입니다. 그는 고통 속에서 재림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런 불같은 시련을 통해 단련된 자들이 주님의 오심을 갈망하며, 그 날에 맛볼 기쁨을 생각합니다.
골이 깊지 않고는 높은 산이 생길 수 없는 것처럼 고난의 그늘진 깊은 골짜기를 경험한 사람만이 높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산꼭대기 같은 삶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길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산꼭대기를 올라가서 넘는 것보다 훨씬 더 시간을 단축하는 길이요, 안전한 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단련하심으로 우리에게 영광을 주시며, 기쁨을 주시며, 열매를 주시며, 보상을 주십니다.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감사를 드립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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