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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초림과 재림



이런 질문과 두려움을 가진 성경 독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질문과 두려움을 가진 성경 독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정통한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였는데, 만약 교회도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란 질문입니다. 상당히 일리 있는 질문이요, 할 수 있는 고뇌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이 과연 주님이 다시 오셨을 때, 주님을 배척한다든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이 왔는데, 그리스도라고 믿고 따르는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오심에 대해서 함께 공부해 보겠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독자라면 구약 성경의 기록된 예언이 겉보기에 완벽한 모순처럼 보이는 두 개의 대조적인 메시야의 오심에 관한 기록들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예언은 주님이 겸손하게, 약하게, 슬픔의 사람이요, 질고에 익숙한 사람, 마른 땅에서 나온 풀같이, 모양도,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풍채도 없으신 분으로 나옵니다. 주님의 모습은 상하셨고, 그의 손과 발은 찔리셨고, 사람들과 하나님께 버린 바 되셨으며, 악인들과 함께 못 박히시고, 무덤에 장사되는 그런 예언입니다(시편22:1-18, 사7:14, 사5:3, 단9:26, 슥13:6-7, 막14:27).

또 한 가지 부류의 예언은 영광스럽고,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주권을 가지고, 이 땅에 무서운 심판을 쏟으시며,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모으시고, 솔로몬 시대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다윗의 보좌를 회복하시며, 완전한 평화와 완벽한 의의 통치를 하실 것에 대해 예언합니다(신30:1-7, 사11:1-2, 10-12, 사9:6,7 사24:21-23, 사40:9, 렘23:5-8, 단7:13-14, 미5:2, 마1:1, 마2:2, 눅1:31-33). 주님은 초림 때 연약한 인간으로 오셨지만 재림 때는 영광스런 하나님으로 오십니다.

초림 때는 어린 양으로 오셨지만 재림 때는 사자로 오십니다. 초림 때는 섬기는 종이셨지만 재림 때는 섬김 받는 왕이십니다. 초림 때는 죄와 상관이 있지만 재림 때는 죄와 상관이 없습니다. 메시아 예언의 두 번째 계통은 그분을 영광스러운 왕으로 묘사합니다.

1. 메시아는 한 의로운 가지가 될 것임(렘23:5-8)

2. 그는 왕국을 갖게 될 것임(단2:44, 단7:13,14)

3. 그는 다윗의 왕좌에서 다스릴 것임(삼상7:16, 사9:6,7)

4. 그는 철장으로 민족들을 다스릴 것임(시2:6-9)

5. 그의 통치는 영광스러울 것임(시72:1-20, 사2:1-4, 사32:1-4, 15-20, 슥14:16-21)

때가 차서 이사야서의 예언대로 동정녀 탄생을 통해 이 땅에 오시고, 미가서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심으로 메시야에 관련된 예언들이 성취되기 시작했습니다. 메시야의 겸손과 약함에 관련된 모든 예언이 메시야의 영광과 강함에 관련된 예언보다 앞서 문자 그대로 모든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이는 죄를 제거하는 일이 왕국을 세우는 일에 앞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느니라. 그분은 온유하사 나귀 위에 앉으시나니 나귀 새끼 곧 어린 수나귀니라, 하라, 하였느니라.](마21:5-슥9:9인용, 요19:15-16참조)는 구약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곧 바로 십자가에 처형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악인들이 하나님의 예언과 미리 계획하심을 좌절시키거나 실패로 돌아가게 했다고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은 초림에 이어 재림을 통해 이 예언(슥9:9)을 반드시 다시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야의 지상의 영광에 관련된 모든 예언은 초림에 관련된 주님의 고난과 마찬가지로 한치의 오차없이,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모두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호3:4-5, 마24:27-30, 눅1:31-33, 행1:6-7, 행15:14-17).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고난에 관련된 선지자들의 대언을 믿는데 둔하고 완악했습니다. 반면 오늘날 교회는 메시야의 다가올 영광에 관련된 성경의 예언들을 믿는데 둔합니다. 신약의 성도들이 성경대로 믿지 않는다면 그 수치는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인해 받았던 수치와 모욕보다 당연히 더 클 것입니다. 메시야가 말 구유에서 태어나 목수의 아들로 나사렛에 사는 것을 믿는 것보다 주님께서 큰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구름 속에서 다시 오시는 것을 믿는 것이 훨씬 더 쉽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도들이 초림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유대인들보다 잘 믿는 것은 그것이 성경의 대언자들이 그렇게 말씀하는 예언 때문이라기 보다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의 불신을 비난할 입장이 아닙니다. 그렇게도 많은 구약의 자세한 예언들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았는가? 이에 대한 질문은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수많은 예언과 반복적인 기록에도 불구하고 왜 성도들은 주님의 다시 오심과 왕국의 건설에 대해서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소위 말하는 영적인 해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의 성취를 모두 가려 버렸습니다. 구약의 대언자들이 다가올 메시야의 고난에 관련된 예언들을 기록했을 때, 유대인들은 그것들을 영적인 의미로 받아들였지 문자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이나 현대의 배교한 교회들에서 흔히 보듯이 메시야의 지상 왕국 건설과 영광에 관련된 예언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모든 오류는 여기서 피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주어진 약속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위로와 권면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저택들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주님은 이 땅을 떠나실 때와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똑 같은 방식으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영적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오시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임재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주님의 모습으로 인격적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만약 처음 오신 것이 비인격적이요, 영적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분명히 기록된 성경을 자의적으로 왜곡하고, 억지로 끼워 맞춘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성경 구절을 보아도 주님의 처음 오심은 문자적이며, 인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실 때, 천사들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분께서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하늘을 주목하여 바라보고 있는데, 보라, 흰 옷 입은 두 남자가 그들 곁에 서고 또 그들이 이르되, 너희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바로 이 예수님(this same Jesus)께서는 너희가 하늘로 들려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시니라.](행1:10-11).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바로 이 예수님이 오십니다. 만약 하늘로 들림받은 적이 없는 다른 누가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면 그 예수는 성경이 말하는 예수가 아니며, 우리의 소망도 아닙니다.

바울 사도 역시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17 [이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임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도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게 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디도서 2:13, [저 복된 소망 즉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음이라.] 우리는 이 복된 소망에 대하여 “깨어 있으라”(막13:33,35,37, 마24:42, 25:13)는 가르침을 받았고, “기다리라”(살전1:10), “준비하고 있으라”(마24:44). 성경에 나오는 마지막 기도는 “주여, 오서 오시옵소서”(계22:20)입니다. 성경의 이와 같은 풍부한 구절들은 주님의 재림이 문자적으로, 몸을 입고 오시는 주님을 가리키는 것이지 성도의 죽음이나 예루살렘의 파괴나 기독교의 배교나 혼란과 같은 영적인 해석이 될 수 없습니다. 잠자는 성도들이 일어나고, 살아있는 성도들이 들림 받으며 홀연히 변화되는 것(고전15:51-52), 그리고 공중에서 사랑하는 주님을 만나, 사랑하는 아들의 모습과 일치하며, 구원받은 후 주의 이름을 위해 애쓰고 수고한 신실한 성도들에게 그들의 행위에 따라 상급을 받는 바로 그것을 교회의 복된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주님의 첫 번째 오심과 다시 오심에 대해 말씀을 통해 비교해 보겠습니다. 주님이 처음 오신 곳은 베들레헴의 어느 구유간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7, [그녀가 자기의 맏아들을 낳아 포대기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음이더라.](눅2:7). 주님이 첫 번째 오신 목적은 죄를 제거하고 잃어버린 혼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9:26, [...이제 세상 끝에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음이니라.], 누가복음 19:10, [이는 사람의 아들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음이니라.] 초림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구원이지 심판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17,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믿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이는 내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러 왔음이라.]

주님의 다시 오심은 첫 번째 오심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마태복음 24:30, [그 때에 사람의 아들의 표적이 하늘에 나타나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지파가 애곡하며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가지고 하늘의 구름들 가운데서 오는 것을 보리라.](마24:30). 첫 번째 오실 때는 매우 은밀히 오셨기 때문에 들에 있는 목자들 몇 명외에는 아무도 그의 탄생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재림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옵니다. 히브리서 9:28, [이와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헌물로 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 문제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히9:28). 초림은 세상의 죄와 연관된 오심이지만 재림은 죄문제와 상관없이 오십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7-8, [괴로움을 당하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께는 의로운 일인즉 주 예수님께서 자신의 강력한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타오르는 불로 징벌하시리니](살후1:7,8).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라도 초림과 재림의 이런 분명한 구절을 수백 구절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나 교회에게나 주님의 다시 오심은 필연적인 것이며,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이나 깊이 공부해 보지 않는 성도들은 재림에 관련된 비성경적인 주장들을 다양하게 살펴봄으로써 그리스도의 문자적이고 인격적인 재림에 대해 더 분명한 성경적 교리들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이 이 시간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 어느 곳에나 계시다는 무소부재, 편재성의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18:20, 28:20은 그런 대표적인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복된 주님의 약속이 주님의 재림 교리와 부딪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 지금 현재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분명하지만 또한 주님이 현재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것도 사실입니다(행1:9-11). 스데반은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을 본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는 주님을 본 것입니다. 많은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주님이 이미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란 조롱을 할 때, 우리는 다음 구절들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7:55-56, [스데반이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 편에 서 계신 것을 보고 이르되, 보라, 하늘들이 열리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오른 편에 서 계신 것을 내가 보노라, 하매] 히브리서 1:3, [이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라. 그분께서는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붙드시며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하게 하신 후에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 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골로새서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거든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3:1).

1. 주님의 재림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이미 성취되었고, 강력한 부흥회나 복된 기도 모임 때에 일어나는 주님의 임재가 바로 재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삼위 일체 교리를 무용화시키는 해석입니다. 성령은 분명히 하나님이시고, 한 인격이지 그리스도의 현현이나 영향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 강림이 주님의 재림이 될 수 없는 것은 주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다른 위로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 요한복음 16:7,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니라. 이는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위로자께서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임이라. 그러나 내가 떠나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리니](요16:7). 성령은 주님이시지만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는 아닙니다. 신약 성경은 모두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기록되었지만 여전히 150회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미래적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성령 강림이 주님의 재림이라면 사도들은 재림을 기다리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욱 분명한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때에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어떤 예언도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잠자던 성도들이 단 한명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고전15:22-23, 살전4:13-16). 살아 있는 성도들이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썩지 않을 몸을 입지도 않았고, 영광스럽게 변화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의 영광스런 몸과 같이 변화되지도 않았고, 공중에서 주를 만나기 위해 끌려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고전15:51-53, 살전4:7 빌3:20-21). 땅의 모든 족속들이 주님이 영광과 큰 권세로 오는 것을 보지도 못했으며, 울지도 않았습니다(마24:29-30, 계1:7). 이런 모든 현상은 주님의 재림 때에 나타날 징조입니다. 주님이 오셨다면 이런 현상들은 이미 일어났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오순절에 전혀 일어나지 않았으며, 성령의 나타나심과 전혀 무관하였습니다.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결코 성경을 바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대언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며, 영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2. 죄인이 회심하여 주님을 영접한 것이 주님의 재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주장은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하게 본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이 주님께서 그 죄인의 마음을 찾아 온 것이란 영적인 해석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것은 정확히 정반대입니다. 죄인의 회심은 죄인이 마음을 돌이켜 주님께로 오는 것이지, 주님이 마음을 돌이켜 죄인께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마11:28, 요5:40, 요7:37, 요6:37).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죄인이 회심할 때, 주님의 재림에 관련된 예언들이 단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3. 크리스천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주장을 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1:22-24에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요한)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란 말이 있습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때까지 제자를 살아 있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이 재림은 될 수 없습니다. 신자의 죽음은 주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영과 혼이 주님의 품으로 가는 것입니다(빌1:23, 딤후4:6, 고후5:8). 성경의 어떤 경우에도 성도가 죽을 때 주님이 오신 예는 없습니다. 죽어 가는 스데반이 열린 하늘을 통해 주님이 오시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본 것입니다(행7:55-56).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죽을 때 재림과 연관된 어떤 예언도 성취되지 않습니다.

4.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된 것이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 세 가지 사건이 예언된 내용에 근거합니다. 마태복음 24:3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올리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은밀히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에게 말씀해 주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께서 오시는 때의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이 무엇이리이까 ? 하니] “성전의 파괴, 주님의 오심, 세상의 끝”-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중에 성전 파괴를 들어 주후 70년경 로마의 타이터스(Titus) 장군에 의해 성전이 파괴된 것을 가리켜 이미 성취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한 가지 예언을 들어 나머지 두 가지 예언을 무시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에 자신의 서신서들을 기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의 오심을 미래적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계1:4,7, 2:25, 3:11, 22:7,12,20). 주님이 성경에 한 마지막 약속은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 하시는도다. 아멘.] 성경의 마지막 기도는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같이 오시옵소서.](계22:20). 물론 예루살렘이 파괴되었을 때도 재림에 관련된 어떤 예언도 성취되지 않았습니다(살전4:14-17, 마24:29-31, 마25:31-32).

5. 기독교의 보급이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전파와 확산은 점진적입니다. 반면 주님의 오심은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사건입니다(마24:27, 36-42, 44, 50, 벧후3:10, 계3:3). 기독교의 확산은 과정입니다. 재림은 사건입니다. 기독교의 확산은 죄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주님의 재림은 죄인들에게 “갑작스런 멸망”을 가져다줍니다(살전5:2,3; 살후1:7-10, 마25:31-46).

6. 이와 같은 주장은 매우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어떤 신학교나 교단의 공식 교리로 채택하거나, 그들의 책에 수록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문자적으로, 육체적으로 오시는 주님이란 입장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 가운데서도 주님은 기독교가 전세계에 다 전파되고, 온 세상이 복음의 진리로 1000년 동안 이 땅을 지배하고,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온 세상을 다스린 후에야 오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1) 하지만 다음 몇 가지 이유로 성경의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첫째, 성경은 주님이 재림하시기 직전 이 세계는 천년의 축복된 세상이 아니라, 역사상 가장 악하고, 암울하고, 어둠이 깊은 시기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눅17:26-32을 창세기 6:5-7, 창세기 13:13, 눅18:8, 눅21:25-27과 비교해 볼 것). 성경은 창조이후로 천년왕국까지 모든 세대가 예외없이 배교와 심판으로 끝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마13:36-43, 47-50, 마25:1-10, 딤전4:1, 딤후 3:1-9, 4:3-4, 벧후3:3-4, 유17-19).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백성을 불러내는 것이지, 이 세상의 변화가 아닙니다. 세상은 주님이 오시기 전이 아니라 주님이 오신 후에야 변화될 것입니다(행15:14-17, 마24:14-for a witness, 롬1:5-among not all, 롬11:14-some not all, 고전9:22, 계5:9-out of not all). 전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고, 기독교가 천년동안 세계를 지배한 후에 이 땅에 주님이 오신다면 성도들은 깨어서 기다려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다 알 수 있는 사건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을 통해 주님의 처음 오심과 두 번째 오심의 차이를 살펴보았고, 성경의 문자적인 해석만이 오류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성경 공부 방법임을 배웠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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