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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다섯 가지 심판



사람들이 가장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심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죽음이 확실한 것이라면 심판 또한 확실한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인 솔로몬은 전도서를 기록하면서 맨 마지막 줄에 최종 결론을 다음과 같이 맺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은밀한 일과 더불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모든 일들을 심판하실 것임이라.](전12:14).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또는 이 세상을 산 이후에 모든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 사실은 그 사람이 믿음을 갖든, 믿지 않든 관계없이 이루어질 일입니다. 심판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엄중한 말씀이시며, 우리가 가장 깊이 명심해야 할 성경 공부 주제입니다. Judgment란 단어는 “심판, 판단, 공의”등 다양하게 번역되었지만 근본적인 의미는 다 동일합니다.

경기하는 선수가 심판이 누구인지 모르고 경기할 수 있습니까? 심판이 정한 규칙을 모르고 게임에 임할 수 있습니까? 규칙인지 반칙인지 모른다면 그는 선수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는 땀흘려 뛰고도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을 지으시고 운영하시는 창조주이신 주님이 정하신 생명의 규칙들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성도들이라면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한 상이 무엇인지, 벌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먼저 심판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저는 재판에 임하는 원고측과 검사, 피고측과 변호사들이 자신들의 사건을 맡을 판사가 누구인지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재판관(판사)이 보수적인 사람인지, 개방적인 사람인지, 그 성향을 파악하여 변론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판사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식으로 판결을 내리는 사람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듯이, 성도들 역시 자신을 판단할 이 우주만물의 재판관이 누구신지, 어떤 성향의 판결을 내리는지, 전에 내린 재판 결과(선례, 판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의 재판관은 누구입니까? 주님은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심판자이십니다. 히브리서 12:23, [총회 곧 하늘에 기록된 처음 난 자들의 교회와 모든 것의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과](히12:23).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재판관이십니다. 사도행전 10:42, [또한 우리에게 명령하사 백성에게 선포하게 하시되 하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로 정하신 이가 바로 그분이심을 증거하게 하셨고](히10:42).

심판자이신 주님께서는 어떻게 심판하십니까? 주님은 한 권의 법전을 기준으로 심판하십니다. 성경은 생명의 법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법입니다(롬8:2). 성경은 의의 법입니다(롬9:31). 성경은 자유의 법입니다(약2:12). 성경은 완전한 법입니다(약1:25). 성경은 왕가의 법입니다(약2:8). 주님이 바로 법을 제정하시고, 수여하신 수여자이십니다. 두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이사야 33:22, [이는 주가 우리의 심판자시오, 주가 우리에게 법을 주시는 이시오, 주가 우리의 왕이시니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야고보서 4:12, [율법을 주시는 이가 하나이시니 그분께서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시기도 하시느니라. 네가 누구이기에 판단을 하느냐?] 심판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인 조명은 성도들로 하여금 악하고 음란한 이 세상을 의롭고 경건하게 할뿐만 아니라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성경은 여러 가지 심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갈보리의 심판. 이는 신자들에게 관련된 심판입니다(as to believers). 이 심판은 주후 30년경에 갈보리 언덕에서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위에 집행된 심판입니다. 이 심판은 역사상 가장 특이한 심판이요, 인간들의 이성을 거스리는 심판이요, 믿음이 없이는 이해되지 않는 심판이며, 진노의 심판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결정체이며, 저주의 죽음인 동시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심판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들, 죄로 인해 저주 아래 있던 인간들을 향해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와 분노를 쏟아 부을 한 희생물(犧牲物)을 준비하셨습니다. 죄인들 위에 직접 쏟아 부으셔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 직접 집행되었습니다. 이 심판은 무서운 심판이었습니다. 온 몸은 채찍으로 찢기고,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어지고, 양손과 발에는 못이 박히고, 옷은 벗겨져 수치를 당하고, 옆구리는 창이 찔려 물과 피가 쏟아진 채 갈보리 언덕에 높이 매달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혼은 지옥에 버려졌습니다. 죄를 미워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온 세상에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죄를 묵과하시지 않으시며, 죄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심판이 집행된다는 법칙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가 되셔서 죄(sin)를 제거하셨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세상에 들어온 죄, 모태로부터 타고 태어난 죄를 제거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9:26, [...이제 세상 끝에 단한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음이니라.] 주님은 우리의 죄들(sins)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3,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하게 하신 후에...](히1:3). 베드로전서 2:24,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24).

저주가 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대속하셨으니 이는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는 다 저주받은 자라, 하였음이라.]

더 이상 신자들에게 관련된 죄와 죄들에 대한 심판은 없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대신 정죄를 받으시고,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고소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신 분은 그리스도시오, 참으로 다시 일어나신 분도 그리스도시니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또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느니라.](롬8:33,34).

둘째, 신자들 안에 있는 죄의 심판(in the believer). 이 심판은 갈보리의 심판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만 해당 사항이 있습니다. 갈보리 이전에는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의롭게 되었습니다. 지금 심판은 어느 때나 해야 하는 심판입니다. 이는 죄인의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서 스스로 자신을 판단해서 하는 심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이후 우리는 저 하늘이 아니라 여전히 이 땅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여전히 육신을 입고 살아갑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죄를 짓는 본성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그것을 내가 어떻게 행할는지는 내가 알지 못하노라.](롬7:18).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고백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요한일서 1:9에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죄를 고백하는 것은 주님과의 친교의 문제이며, 깊은 사랑과 연합의 문제입니다. 내가 아들이란 사실이 아버지와 깊은 친교 가운데의 삶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하며,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필요를 채워 주며 서로 친(親)함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걷는다면 우리는 주님과의 사귐이 깊어질 것입니다. 요한일서 1:6-7은 이점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귄다 말하고 어둠 가운데서 걸으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가 빛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요일1:6,7).

아들의 범죄는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마약, 약물 복용, 술을 먹고 방탕한 생활을 하거나, 못된 친구들을 사귐으로 아버지를 슬프게 하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이유로 하나님 아버지를 슬프게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라는 공부를 하지 않음으로서, 열심히 생활하지 않음으로서, 게으름을 피우고, 일을 하기 싫어함으로서 아버지를 슬프게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지 않고, 공부하지 않음으로, 영적 생활을 태만히 함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슬프게 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형제간에 서로 다투는 일은 아버지의 마음에 근심과 걱정을 안겨 주는 일이듯이 성도들이 교회에서 같은 형제들끼리 다투고 반복하고 불화가운데 지내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가족 관계를 통해 영적 가족 관계의 조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여러분을 통제하고 강압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는 매사에 여러분을 통제하고 복종시키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친교는 사랑과 자발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올 때 빛을 발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자녀가 아버지와 화해하기 위해서는 잘못을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듯이 우리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발견할 때마다 고백하고 주님의 용서를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친교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 육신의 부모가 다루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불순종을 일삼을 때 부모는 분명히 거기에 대해 책망하고, 바로 잡으려 할 것입니다. 징계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책망은 바로잡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기록 목적 가운데 하나가 징계와 바로 잡음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디모데후서3:16,17을 보십시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 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교리, 책망, 바로잡음, 의로 교육이 성경 기록의 목적입니다. 순서를 주목하십시오. 교리는 옳고 그름, 선과 악의 절대적 기준입니다. 성경은 교리를 가르쳐 주며, 우리는 이 교리에 근거해서 믿고, 생각하고, 생활할 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 교리를 근거로 우리는 자신을 돌아 볼 수 있고, 성찰할 수 있고, 심판할 수 있습니다. 성경적 교리에 근거하지 않는 책망은 분풀이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적 교리에 근거하지 않는 책망은 자기 가치관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적 교리에 근거하지 않는 요구는 무거운 부담일 수 있습니다. 성경적 교리에 근거해서 시시비비와 옳고 그름,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을 구분하여 책망하는 것이 바른 책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행위에 확신을 갖기에 책망을 좋아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아이라도, 아버지가 자기를 꾸중할 때 싫어하고 칭찬할 때 좋아합니다. 바른 책망이 주는 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책망을 듣고 돌이킬 때 존귀를 얻게 됩니다. 반면 책망을 무시할 때 짐승같은 인간이 됩니다. 잠언 6:23에 말하기를, [훈계하는 책망은 생명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잠언12:1에 [누구든지...책망을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주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많은 유업의 상을 주기 위해 저와 여러분을 징계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기뻐하시며 의의 열매를 더 풍성하게 맺기 위해 징계하십니다. 히브리서 12:10,11을 보십시오. [진실로 그들은 잠시 자기들이 기뻐하는 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그분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하시나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제 징계가 그 당시에는 기쁜 것으로 보이지 아니하고 슬픈 것으로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그로 말미암아 단련된 자들에게 의와 화평의 열매를 맺느니라.](히12:10,11).

저와 여러분 같은 육신의 부모들은 자식을 징계해도 어릴 때 한 때 뿐입니다. 크고 장성하면 징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verily for a few days(잠시동안)이라고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자식을 징계할 때, 우리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매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징계를 통해 우리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징계가 없다면 여러분의 구원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남의 자식에게 매를 드는 부모가 없듯이 하나님은 남의 자녀에게 매를 드시지 않으십니다.

다음은 바로 잡음입니다. 책망을 받아들인 사람들만 바로 잡힙니다. 성경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다른 형제들을 통해서 여러분은 책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책망을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은 바로잡힙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잡힘을 거부했습니다. 예레미야 5:3과 7:28을 보십시오. [오 주여, 주의 눈이 진리 위에 있지 아니하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으나 그들이 근심하지 아니하였고 주께서 그들을 소멸시키셨으나 그들이 징계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며 (kjv-그러나 그들은 바로잡힘 받기를 거부으며...), 자기 얼굴을 바위보다 굳게 하고 돌아오기를 거부하였나이다.](렘5:3). 예레미야 7:28, [오직 너는 그들에게 이르되, 이 민족은 주 자기들의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도 아니하며 징계하는 것을 (nor receiveth correction:바로 잡힘을 받지도 아니하며)]6) 사람은 누구나 성경에 근거한 건전한 교리를 바탕으로 책망하고, 그 책망을 받아들일 때 바로 잡힐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을 바로 잡아 줄 사람, 나의 가치관을 바로 잡아 줄 사람, 나의 행실을 바로 잡아 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굽은 자를 가지고 측량할 수 있습니까? 굽은 연장을 바로 잡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사람이 바로 잡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욥기 5:17, [보라 하나님께서 바로 잡아 주시는 자는 행복한 자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바로 잡아 주심)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7)

넷째, 의로 교육하는 것입니다. 바른 교리를 배우고, 책망을 받아들여 바로 잡혔다면 더할 수 없이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춘다면 우리는 회개와 자백을 반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 카이로프래틱,척추 교정에 앞서 자세를 바로 잡아라. 그렇지 않으면 원상 복귀되고 만다.// 지속적인 의의 교육이 없다면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 같은 싸이클을 그리고 맙니다. 지역 교회는 여러분들을 의로 교육하는 곳입니다. 저희 조국은 교회를 쓸 때 모일 교(校)자가 아니라 가르칠 교(敎)를 씁니다. 이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의의 교육 기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경적으로 바른 뜻이 아니라 할지라도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의로 교육한다는 것은 곧 성장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람들, 저와 여러분은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대신한 갈보리의 첫 번째 심판이 과거적인 것이라면 아들로서의 심판은 현재적인 것입니다.

세 번째 심판은 신자들이 이 땅에서 행한 행위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 심판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가 행한 심판입니다. 저희들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의의 사역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몸으로 행한 일들에 대해서 회계 보고를 요구하실 것입니다. 로마서 14:2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자신에 관하여 하나님께 회계 보고를 하리라.](kjv- So then every one of us shall give account of himself to God.) 이 심판은 주님이 돌아오실 때 공중에서 행해질 심판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심판석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14:10,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무시하느냐? 이는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설 것임이니](롬14:10). 여기서 우리는 신자들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0, [이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날 것임이라. 이로써 각 사람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서 행한 것들을 받으리라.] 마음은 있는데, 몸이 따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변명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주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마음 가운데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면, 반드시 형제 사랑을 몸으로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마음 가운데 말씀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여러분의 눈은 그 성경을 읽고, 여러분의 입은 그 말씀을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 마음 속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면, 몸으로는 지역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행해지는 심판은 저와 여러분을 흠없고 점없는 정결한 어린양의 신부로 단장하는 것입니다(계19:7-9, 고후11:2, 엡5:25-27). -찾아서 읽을 것.

고린도전서 3:11-15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성도들이 받는 심판은 오직 행위에 따른 것이며, 행한대로 보상을 주는 것입니다. -찾아서 읽을 것.

우리는 주님 앞에서 선악간에 행한 일들을 다 설명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태만하고, 주님의 의와 그분의 영광을 구하는 일에 게으른 죄악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악을 행한 결과를 받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서 그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늘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을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교회에서 모두 인정받으며, 양다리를 걸친 신앙 생활을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무엇을 받게 될지 생각하면 그들의 이중적인 생활이 아무 쓸모없는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마태복음 12:26,27은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회계 보고를 하리니 네 말로 네가 의롭게 되며 네 말로 네가 정죄를 받으리라.] 우리의 언어 생활이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손과 무릎이 약한 형제들을 위로하고, 힘을 주었는가? 그들을 멸시하고 낙담시켰는가?는 바로 심판의 대상이요, 유업의 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으로 무엇을 했는가? 우리는 전쟁에서 동료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고, 그들에게 힘을 준 군인들에게 포상을 주지만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상사를 모독하고, 작전의 기밀을 누설하고, 군사들의 사기를 저하시킨 군인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은혜로 소금을 뿌리듯이 말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말, 추하고 더러운 말, 농담은 성도들에게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과 날마다 자신을 심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하지 않는 모든 죄는 다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심판의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11-15을 보겠습니다. [ 1Co 3:11 ¶ For other foundation can no man lay than that is laid, which is Jesus Christ. 12 Now if any man build upon this foundation gold, silver, precious stones, wood, hay, stubble; 13 Every man's work shall be made manifest: for the day shall declare it, because it shall be revealed by fire; and the fire shall try every man's work of what sort it is. 14 If any man's work abide which he hath built thereupon, he shall receive a reward. 15 If any man's work shall be burned, he shall suffer loss: but he himself shall be saved; yet so as by fire.]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등장하는 이 불은 지옥의 불이 아닙니다. 이 불은 각 사람의 일한 것의 종류를 밝히는 불입니다. 여기서 불타는 것은 나무와 짚과 그루터기로 쌓은 일들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저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라고 명하셨습니다. [너희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이 먹고 녹이 슬며 도둑이 들고 훔치느니라. 오직 너희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쌓아 두라....](마6:19-20).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쌓았는지 주님 앞에서 직접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이날 많은 성도들의 눈에 눈물이 쏟아 질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 버리고 세상의 쾌락을 즐기느라 인생을 허비해 버린 사람들의 눈에서 무엇이 쏟아지겠습니까? 또 성경을 무시하고 나름대로, 자기 기준으로 열심히 살아 그리스도인들이 한 일이 산더미 같다가 모두 불타 한 줌의 흙으로 남을 때 그들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 질 것입니다. 통일 운동이 그리스도인이 해야 하는 일인 줄 알고 한 평생을 보낸 목사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참여가 예수님의 가르침인 줄 아는 사람들, 병원을 짓고, 빈민 운동을 하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의 삶인 줄 아는 사람들도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계시록에는 성도들이 두 번이나 눈물을 흘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계시록 7:17은 그리스도인들이 흘릴 눈물입니다. [이는 한 왕좌 한가운데 계시는 어린 양께서 그들을 먹이시며 생명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임이라, 하더라.](계7:17). 한번은 백보좌 심판석에서 흘릴 눈물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음이라.]9)(계21:4). 우리는 우리가 구원할 수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불 못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눈에서 쉼없는 눈물을 흘려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들, 여러분의 자녀들, 여러분의 친구들, 친지들의 혼을 볼 때 우리는 울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여러분들이 그들을 구원했다면 저 하늘에서 얼마나 기쁘고 자랑스럽겠습니까?

넷째, 백보좌 심판은 신자들과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이 심판은 불신자들이 받는 심판입니다. 요한계시록20:11-15입니다. 이 심판은 천년 왕국이 끝난 이후에 받는 심판입니다. 이 심판은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불못으로 던져지는 판결을 받는 심판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 심판을 거부한 모든 사람들이 이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해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여 이 심판대에서 영원한 저주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명하셨습니다.

다섯째, 민족들의 심판(마25:31-32). 이 심판은 주님의 재림 때에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집행될 심판입니다. 심판의 근거는 대환란 때 주님의 형제라 불리는 유대인들을 어떻게 대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양과 염소의 민족으로 분류될 것입니다. 이 심판이 흔히 백보좌 심판과 혼동되거나 오해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간단히 차이를 살펴 보겠습니다. 민족들의 심판에는 부활이 없습니다. 땅에서 있습니다. 책들이 없습니다. 양, 염소, 형제들이라 불리는 세 부류가 나옵니다. 천년 왕국 이전입니다. 반면 백보좌 심판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습니다. 하늘들과 땅이 사라집니다. 책들이 펴져 있습니다. 죽은 자들 한 부류만 나옵니다. 천년 왕국 이후입니다.

성경은 또한 천사들의 심판(고전6:3, 유6, 벧후2:4)에 대해 말합니다. 또 한 가지는 이스라엘의 심판입니다(단12:1, 욜2:6-15, 마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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