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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성도의 두 가지 성품



그리스도인이 된 후 심각하게 고민하는 한 가지는 성경이 말하는 영광스런 성도의 지위와 지금 자신이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상태에 대한 너무나 넓고도 깊은 격차입니다. 구원받고 성도가 되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는데, 예전과 동일한 기질, 동일한 성품이 나올 때면 절망스럽기도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내가 과연 구원받았는가? 의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한 성경적인 답변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개혁된 것(reform)이 아니라 중생된 것(regeneration)입니다. 성경은 거듭난 성도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두 가지 성품을 지닌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한 가지는 자연적 출생으로 태어날 때 받은 죄악 되고 타락한 성품입니다. 또 한 가지는 거듭날 때 받은 의롭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성령을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고, 기도와 말씀을 열심히 한다해도 사람은 사람일 뿐 천사가 되는 것도, 하나님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죄를 아무리 짓고, 못되게 살아도 그는 사람이지 짐승이 아닙니다.

다음 몇 가지 성경 구절은 우리가 모태에서 태어날 때 얻게 되는 성품,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성품에 대해 분명히 말해 줍니다. 시편 51:5, [보소서, 내가 불법 중에서 형성되었으며 내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수태하였나이다.] 이는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기에 앞서 그 태생적 한계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17:9,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 이는 인간 본질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며, 선언입니다. 인류의 스승이라 하는 성인들이나 철학자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마음은 본래 선한 것이니, 불성이 있느니, 순수한 백지의 상태니, 교육이나 수행으로, 신의 성품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이는 인간 스스로도 인간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3:10-12, [이것은 기록된 바, 의로운 사람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다 길에서 벗어나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

하나님은 거듭나지 않는 자연인을 예외 없이 죄인이라고 단정하십니다. 주님은 자연인을 두고 교양 있는 사람이나 능력 있는 사람, 세련된 사람,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사람이란 평가를 내리신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의롭지 않고, 다 치우쳐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며, 하나님을 찾거나 깨닫는 자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 가운데 하나가 자신에 대한 악평입니다. 교양 있고, 세련된 신사, 숙녀들에게 그들의 본성이 심히 죄악 되고 더럽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의 자존심과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과 죄를 대속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멸시하는 정도입니다. 지식과 덕망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죄악된 본성에 대한 자각이 무뎌지며,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하며, 도리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심지어 강단에 선 목회자들조차 인간성에 대한 성경의 평가를 있는 그대로 선포하기 보다, 인간을 존중하고 높이는 설교, 자긍심을 주는 설교, 뭔가 된 줄로 알게 만드는 그런 설교를 함으로써 복음의 진리를 무용하게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짓말로 만드는 방법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자신이 범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10을 보십시오. 요한일서 1: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말하면 그분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요, 또한 그분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10),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그분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관하여 주신 증거를 그가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라.](요일5:10).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소극적인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아주 무서운 죄란 사실입니다. 한 죄인이 복음을 듣고 거듭났을 때, 맨 먼저 하는 죄의 고백이 “주님! 제가 그동안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주님을 모르고 살아온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요한복음 16:8-9, [그분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요16:8,9).

생각해 보십시오. 노아의 홍수 이전에 세상은 거인들의 출현으로 점점 살기 좋아질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유명한 자들이었고, 용사들이었으며, 반인 반신이었습니다(창6:4). 그러나, 곧 홍수로 멸망해 버렸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의 눈에는 엄청난 속도의 과학 기술의 발전, 문명의 이기(利器)로 인해 지상 천국이 건설될 것처럼 보입니다. 장차 외계에서든지, 지하 세계에서든지 신들이라 불리는 것들이 출현하여 더 높은 수준의 문명을 보여 주고, 인간들과 결혼을 하기라도 하는 날이라면 공공연히 ‘하나님은 없다’고 선포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창세기 6:5, [하나님께서 사람의 사악함이 땅에서 커지고 또 그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5). 노아의 홍수 이전에 가졌던 사람에 대한 주님의 평가와 앞으로 있게 될 지상의 환란 전에 보실 주님의 평가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통찰력이 바탕이 되지 않는 사람은 복음의 은혜에 대한 이해와 믿음에 대한 깊이도 바탕이 없습니다. 자신의 본성의 악함, 연약함, 무기력함, 타락함의 본질을 알면 알수록 복음의 은혜와 긍휼은 점점 깊고도 커집니다. 우리 자신을 더럽히는 것은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속에 있는 자신의 마음입니다. 이 사실은 사회학자들이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악해지고, 죄를 짓고, 더럽혀 지는 것이 사회 환경이나 가정 환경, 경제적 환경, 정치적 환경 또는 생물학적 환경 탓으로 돌리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환경적 요인이 아니라 속에 있는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마가복음 7:21-23, [이는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생각, 간음, 음행, 살인, 도둑질, 탐욕, 사악함, 속임, 색욕, 악한 눈, 신성 모독, 교만, 어리석음 등이기 때문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1-23).

타락한 사람의 마음은 자신을 더럽히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단절시킵니다.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나서가 문제가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치유책을 받아 들이지 않는데 더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저와 여러분이 복음을 믿고, 거듭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가장 큰 능력의 역사입니다. 이는 본성적으로 빛을 싫어하는 박쥐가 동굴을 나와서 낮에 날아다니는 것보다 더 신기한 일입니다. 죄인들은 스스로 신사가 될 수도 있고, 훌륭한 아버지요, 아내가 될 수 있고, 교양과 좋은 성품을 갖출 수 있으며, 때로는 정직하게 신용 거래를 할 수도 있고,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하며,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세 가지는 할 수 없습니다. 첫째, 복음을 믿지 않는 한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알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2:14,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 까닭은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요,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 까닭은 이러한 것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둘째, 복음을 믿지 않는 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7-8, [그 까닭은 육신적인 생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참으로 그리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 그런즉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7-8).

셋째, 하나님께 복종할 수 없습니다. [그 까닭은 육신적인 생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참으로 그리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 이유는 간단합니다. 에베소서 2:3, [지나간 때에는 우리도 다 그들 가운데서 우리 육신의 욕심대로 행하였으며 육신과 생각의 욕망을 채워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본래 진노의 자녀들이었으나](엡2:3).

성도들은 이와 반대로 새로운 성품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23,24 [너희의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었도다.] 하지만, 여전히 육신의 타고난 성품은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이 성품은 육신이 죽을 때까지 결코 변하거나 개혁되거나, 고칠 수 있는 성품이 아닙니다. 성도의 삶은 이 두 성품의 전쟁이며, 마음은 전쟁터입니다. 이제 새 사람의 기원과 성품에 대해서 성경의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새 사람은 옛 사람이 바뀌거나 변한 것이 아니며, 개조되거나 개혁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게 들어 온 것입니다. 자연적 출생으로 인해 받은 성품이 아버지의 것을 물려받듯이, 새로운 출생(중생-regeneration)으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물려받습니다.

이 세상에는 세 아버지가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성경을 통해 이 점을 확고하고,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첫째,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생물학적인 육신의 아버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 없이 태어난 자식은 없습니다. 둘째, 거듭나지 않는 모든 사람은 마귀가 자신의 영적인 아버지가 됩니다. 그래서, 자연인의 모든 성품은 자신의 영적인 아버지 마귀의 성품을 물려받으며, 그대로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너희가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진리가 그속에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할 때에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요8:44).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영적인 아버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 거듭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이 아버지가 됩니다. 요한복음 1:12-13, [그분을 영접한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태어난 자들이니라.](요1:12-13). 육신의 아버지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아버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마귀를 아버지로 삼느냐?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느냐? 이것은 바로 각각 선택해야 할 자신의 몫입니다. 성도들은 육신의 아버지가 있고, 하나님 아버지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26, [이는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음이요.]

흔히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 모든 피조물의 주(主)이신 것은 맞지만 모든 인간의 아버지는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들만의 아버지이십니다. 인류의 모든 사람은 다 한 형제라고 말하는 것 역시 반쪽의 진리입니다. 육신적으로는 모두 한 피로 만들어졌으며, 아담을 아버지로 하는 한 형제입니다. 영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재창조되었다는(recreated)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말 그대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 새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2:20). 바울 사도는 성도들이 육체로 사는 것이 십자가 이전의 내가 아닌 새로운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태어난 새 사람이 사는 것이며,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승천하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골로새서 1:27, [하나님께서는 이 신비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가를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게 하려 하시나니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7).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 속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십니다. 로마서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성령은 의로 인하여 생명이 되시느니라.](롬8:10)

저 하늘의 영광스런 보좌 가운데 계신 주 하나님께서 이 땅에 거하실 처소를 정하셨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계실 때는 그들이 친 장막과 성막에 계셨습니다. 레위기 26:11,12 [나는 내 성막을 너희 가운데 세울 것이라. 내 혼이 너희를 몹시 싫어하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 가운데서 걸으며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레26:12). 솔로몬의 성전이 지어진 후에는 성전의 지성소에 거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파괴되고 이방인의 때가 되었을 때 이 땅의 특정한 장소에 거하실 것을 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성전이 지어지고, 또 헤롯의 성전이 지어짐으로 주님은 다시 지성소에 거하셨지만 십자가를 기점으로 지성소의 성소를 가로막은 휘장이 갈라짐으로 더 이상 이 땅의 성전에는 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신약 시대에 주님은 이 땅 어디에 거하십니까? 여전히 예루살렘입니까? 로마입니까? 아니면 저 멀리 히말라야의 동굴에 거하십니까? 주님은 신약 2000년 동안 저와 여러분 안에 거하십니다. 주님의 처소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몸이 주님의 성전이며, 주님의 거처이며, 주님이 거하시고(dwell), 주님이 걸으십니다(walk). 고린도후서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어찌 조화를 이루겠느냐?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고 그들 가운데 거닐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후6:16). 이 영광스런 사실은 믿지 않고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자신의 처소를 삼으시고, 성막(tabernacle)을 치셨다는 사실은 여러분은 믿을 수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영원토록 함께 거하십니다.

이런 사실들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4, [곧 주께서 이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사 너희로 하여금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느니라.](벧후1:4).

새 사람, 새로운 성품은 신자들 안에서 옛 성품과 함께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한 가지 성품만 있습니다. 신자들은 두 가지 성품이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고백했던 바울 사도 역시 [이는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내가 알기 때문이니..](롬7:18)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7:21, [그런즉 내가 한 법을 발견하였나니 곧 내가 선을 행하기 원할 때에 악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로되] 이는 바울이 기도를 적게 했거나, 말씀에 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 안에 여전히 내재하고 있는 옛 성품을 본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의롭고 정직하고 완벽했던 사람인 욥은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욥기 42:6,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더라.](욥42:6).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의인 다니엘 역시 주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홀로 남아서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게서 힘이 빠졌으니 이는 내 아름다움이 내 속에서 변하여 썩은 것이 되었고 아무 기력도 남지 아니하였음이더라.](단10:9). 이 두 성품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충돌을 일으킵니다. 이런 경험은 그리스도인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는 초신자는 물론이고 몇 십년간 해결을 보지 못한 채 갈등과 패배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구원받았을 때의 기쁨은 약간 지나면서 영적인 삶에 대한 기대와 높은 수준의 삶을 열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갈수록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런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통탄을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신앙의 위기이며, 영적인 위험 상태입니다. 이 때 그가 얻은 승리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성도의 영적 신분, 영적 지위와 현재 상태와의 갈등 속에서 그가 찾은 놀라운 승리의 비결이 바로 로마서 7:25입니다. 그는 더욱 엄격하게 율법을 지킴으로 승리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좀 더 종교적이 되거나, 자신의 행위나 노력으로써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롬7:25a). 육신의 존재가 육신대로 사는 것의 핑계나 변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진리를 배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법적 지위입니다.

구약에는 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면서 이집트의 추격에서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이집트에 있었습니다. 분명히 자유인이 되었고, 놀라운 경험을 했지만 여전히 노예 근성을 가지고 있었고, 옛 시절을 그리워했습니다. 이는 교회 내의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예입니다. 여호수아를 통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주님은 이 땅을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의 합법적 주인은 이스라엘 12지파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에는 크고 강한 많은 이방 족속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현재 눈으로 보는 상태가 달라 보이는 예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있는 족속들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무려 34번의 전쟁을 완벽하게 마무리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배우고, 성장하면서 육신의 큰 죄들은 다 물리칠 수 있습니다. 습관들도 끊고, 가치관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는 몇몇 족속들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는 완벽하게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육신적인 요소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바로 살지 못했을 때는 남아 있는 족속들에게 크게 시달림을 받았듯이, 성도들 역시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 육신의 요소들에 크게 시달림을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충분히 승리하며 완벽하게 적들을 제압하고 그들을 다스리며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그렇게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에게 주님은 옛 성품들을 완벽히 제압하고, 성령을 통해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미 우리의 옛 사람은 죽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처리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3, [이는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롬8:13). 이런 이유로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고, 성령안에서 살고, 성령 안에서 걷고(갈5:25), 성령 안에서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엡6:18). 육신의 소욕들이 들고일어날 때마다 “옛 사람이 죽었음”을 선포하고, 성령님께 그 문제를 넘겨 드리십시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내가”라는 말을 무려 25회에 걸쳐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빠지고 육신과 성령의 다툼으로 넘겨 드림으로 완벽한 승리를 쟁취하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성도가 육신 안에 있는 온갖 육신의 소욕에 넘어지지 않고, 언제나 승리의 찬가를 부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수십년간 교회를 다닌 많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지위를 합법적으로 지키고, 활용하고, 누리지 못하는 비극적인 상황이 자주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 놓으신 모든 객관적인 사실들을 믿음으로(by faith) 받아 들여 향유하며, 그 영광을 찬양해야 할 때, 자신의 육신을 바라봄으로써 믿어도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믿어도 된 것이 하나 없다는 불평과 원망으로 일관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육신은 정죄받고, 사망에 처해졌으며, 필요한 모든 법적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우리의 손에는 성경을 통해 주님이 이루신 그 판결문은 주어졌습니다. 혹시 집행이 안되는 분이 있습니까? 집행관이신 성령님께 의뢰하십시오. 한국인들은 유난히 legal mind가 없는 민족이요, 제도와 법에 대한 불복종과 반항을 미덕으로 삼아온 민족이라, 합법적인 판결문과 법조문도 그냥 종이 쪽지로 아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모든 말씀은 아무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권위가 있으며, 위엄이 있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를 통해 주님의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믿는 모든 자들의 육신을 함께 처형하시고, 죄를 다 제거하셨습니다.

다음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입니다. 골로새서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이라.](골3:3). -이것은 내가 느껴지지 않고, 이해되지 않더라도 엄연한 역사적, 영적, 객관적 사실입니다. 로마서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사실은 사실로서 믿고 받아들이고, 그대로 여길 때 나의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권리 위에서 잠자는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광스런 영적 진리에 대한 무지로 인해,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을 모른채, 때로는 빼앗긴 채, 때로는 속은 채 살고 있습니다. 로마서 13:14, [오직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육신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롬13:14). 로마서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빚진 것이 아니니 육신을 따라 살 것이 아니니라.]- 마지막은 실행입니다.

이로써 성도는 두 가지 성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가지 성품처럼 살 수 있습니다. 갈등에서 벗어나 승리를 외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마치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사는 것과 같은 전쟁의 삶입니다. 육신을 벗는 날에는 그런 전쟁을 경험해 볼 기회도, 영적 승리에 대한 체험도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육체 가운데 살면서도 육신대로 살지 않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요, 의무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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