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경배를 회복하자.
말씀: 시5:7
부흥을 위한 기도 여섯째 날입니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성숙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위기를 겪는다고 사람이 모두 배움을 얻고,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의 때에 성도는 주께 부르짖을 수 있고, 믿음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날에 주를 부름으로써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과 시련의 때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때에 시편 기자와 같은 결심을 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나로 말하건대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긍휼을 누리고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두려워하며 주의 거룩한 전(殿)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시5:7). 고난을 창조적으로 이겨내고, 놀라운 비약과 부흥을 이루기 위해서 성도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변질되고 사라질 때 그 개인이나 민족 역시 패망했습니다. 성경적인 경배가 회복될 때 민족이 다시 부흥했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민족의 부흥을 경배에서 찾았습니다. 그가 갈멜산에서 한 일은 경배의 대상을 분명하게 하고, 참된 경배를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사, 히스기야, 요시야 등은 모두 우상을 혁파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로 민족의 영적 부흥을 주도 했습니다. 경배가 있는 곳에 부흥이 있고, 경배가 사라진 곳에 화와 저주와 멸망이 있습니다.
이는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고난기, 시험기에 믿음의 선배들이 한 일은 하나님께 경배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받았을 때 주님을 경배했습니다. 그는 금식하고 기도하는 대신 주님을 경배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자기 청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무르라. 나는 아이와 함께 저기에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창22:5). 아브라함은 시험을 시험으로 생각하지 않고, 경배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주님이 시련을 주시고, 인생의 시험이 왔을 때 주님을 경배하는 믿음이야말로 영적 부흥의 첫 걸음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찾고, 원인을 분석하고, 설명을 하려 하기보다 “주님께 참다운 경배를 드리는 시간”으로 승화시킴으로써 해결해야 합니다. 삶의 위기이든, 가정의 위기이든, 교회의 위기이든 위기의 순간에 주님을 찾고, 경배하는 일이야말로 참된 부흥의 출발인 것입니다. 참된 예배 없는 회복과 부흥은 거짓입니다.
고난의 순간을 경배의 순간으로 삼은 또 한 사람은 욥입니다. 그는 한날에 자녀들과 자신의 재산을 다 날려 버렸습니다. 망해도 이렇게 망할 수는 없을 만큼 철저하게 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 나올만한 그런 패망이었습니다. 이 때 욥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연속되는 시련과 고난의 순간에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절망하거나 주님을 원망하며 부르짖다가 실신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 순간에 주님을 경배했습니다. [이에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으며 머리를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욥1:20). 뿐만 아닙니다. 주님을 찬송했습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또한 벌거벗은 채 그리로 돌아가리라. 주신 이도 [주]시요, 가져가신 이도 [주]시니 [주]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어다, 하고] (욥1:21). 욥이 경배 드린 순간은 일요일 11시 주일 예배가 아닙니다. 특별 부흥회가 있던 날이 아닙니다. 욥이 경배를 드리고, 주의 이름을 찬송한 순간은 가장 힘들고, 정신이 없고, 괴로운 때입니다. 욥의 경배는 시험을 이기는 원동력이었으며, 인내로 견딘 본이 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 고난의 순간이 다가오고, 그런 가운데 놓여 있다고 생각되는 때에 ‘주께 경배’를 드리는 일이 최우선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기 위해 지음 받은 자들입니다. 경배는 모든 일의 중심이요, 목적입니다. 경배는 우리의 의식과 생각과 삶의 중심입니다. 경배는 하나님 아래 엎드리는 것이요, 무릎을 꿇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배가 중심이란 것은 하나님을 나의 머리요, 주요, 왕이요, 모든 것의 중심으로 모신다는 인격적인 순종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경배는 주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경배하고 절하며 우리를 만드신 이 곧 [주] 앞에 무릎을 꿇자.](시95:6).
경배의 회복이 없이는 참된 부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경배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삶이 모두 바른 경배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경배했고, 믿음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경배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등 모두 하나님과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만남이 있었고, 참된 경배를 드림으로써 삶이 달라졌습니다. 모든 관심을 주님께로 돌리고, 주님께로부터 시작하는 사건이 바로 경배입니다. 부흥은 하나님을 참되게 경배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주목하십시오. 예배를 통해 영광의 주를 만난 사람들은 인생의 방향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사무엘,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 등 모두 영광의 주를 만난 사람들이요, 참된 경배를 통해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들이 경험한 것과 같은 동일한 경험과 체험은 없을지라도 우리는 진리의 말씀인 성경과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더 풍성한 경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했던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어떤 나병 환자는 주님께 경배하며 병 낫기를 구했습니다(마8:2). 그는 나았습니다. 어떤 치리자는 딸이 죽었음에도 주님께 경배하며 안수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마9:18). 딸은 살아났습니다. 딸이 마귀 들린 수로페니키아 여인은 이방인이었지만 주님께 경배하며 구했습니다. [그때에 그녀가 와서 그분께 경배하며 이르되, {주}여, 나를 도우소서, 하나] (마15:25). 딸은 고침 받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어려움과 고난의 처지에서 주님께 경배하며 나아왔습니다. 경배하며 구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바르게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경배함으로써 드러나는 영적인 복들은 결코 낮추어 보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며 경배를 명하십니다. 홀로 주님 한 분을 경배하며 나아왔을 때 주님은 이들의 경배를 받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경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시고, 그들의 경배를 받으십니다. 주님을 체험하면 경배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언제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까? 자신의 의지를 꺾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놀라운 체험을 했을 때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이르되, 오 {주}여, 내게서 떠나소서.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이다, 하니] (눅5:8). 은혜를 경험하고, 맛본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이것이 경배입니다. 만약 참된 예배가 드려지면 능력 있는 기도, 살아 있는 믿음, 진정한 헌신, 말씀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뜨거운 열정을 갖게 될 것입니다.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자신이 속한 모든 곳에서 기도와 찬송이 자연스럽게 울려 퍼질 것이며, 잃어버린 혼들에 대한 연민을 갖게 되고, 마귀를 대적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경배자들은 모두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미워하고, 불법을 혐오하며, 불경건하고 더러운 것들을 피하려 합니다. 참다운 경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거룩함을 추구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는데 온 몸과 정신을 집중합니다. [[주]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분께 드리며 거룩함의 그 아름다움으로 [주]께 경배할지어다.](시29:2).
오늘날 교회는 형식뿐인 예배 프로그램과 오락을 추구하고,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예배자들이 들끓습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나오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고 불평인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에서도, 찬양에서도, 설교에서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놀라운 은혜를 얻은 것도 아니고, 경이로운 영감을 얻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았다는 결론 밖에 다른 결론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설교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선포되는 내용에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세상 지식은 머리를 채우지만 진리는 사람의 마음을 불타오르게 하며,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이해로 말미암아 감격적인 교제를 누리게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란 사실에 여러분의 마음이 정확하게 반응하고 두려움과 놀라움이 함께 찾아 들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확신 있게 다가올 때 무릎을 꿇고 찬양하며 경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감동을 받고 싶어 합니다. 감동에 목이 말라 있습니다. 명쾌한 설명이나 논리적 변증보다 영혼을 울리는 깊은 감동을 받고 싶어 합니다. 경이로움에 목말라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은 온통 경이로움으로 가득합니다. 신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경건의 신비, 왕국의 신비, 교회의 신비, 불법의 신비, 휴거의 신비 등 온통 신비로 가득합니다. 복음이나 구원도 신비의 영역입니다. [오직 신비에 쌓인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2:7). 신비에 쌓인 하나님의 지혜를 접하면서 놀라지 않고, 경이로와하지 않는다면 그는 감각이 무딘 것이 아니라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들을 맡은 자들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역자요, 하나님의 신비들을 맡은 청지기로 여길지어다.](고전4:1).
복음서의 제자들은 주님이 하시는 말과 이적과 행하시는 모든 일들에 연속적으로 놀랐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도 사도들이 선포와 행하는 일들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런 놀라움은 오늘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욥기에 보면 주님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크고 헤아릴 수 없는 일들을 행하시며 놀라운 일들을 수도 없이 행하시나니](욥5:9). [알아낼 수 없는 큰 일들을 행하시며 참으로 수도 없이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느니라.](욥9:10). 우리는 놀라운 일들을 수없이 행하시는 놀라우신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무디고, 죽어 버린 영적 감각을 살려야 합니다. 이런 영적 감각과 인식력이 바로 부흥의 시작입니다. 색맹에게 색감이 생기고, 음치에게 음감이 생겨나면 그는 새로운 세계에 접어듭니다. 신경이 끊어져 신체가 움직이지 못하거나 감각이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감각이 살아났을 때 그는 새로운 감격 가운데 삶을 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에게 영적 지각의 감각(히5:14)이 살아날 때 하나님은 가상의 공간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내 안에 실재적으로 계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영적 지각의 눈이 열릴 때 주님의 임재는 실체가 됩니다. 엘리후는 욥의 문제에 대해 지혜로운 조언을 주었는데 그의 조언은 이것입니다. [오 욥이여, 이것에 귀를 기울이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깊이 생각하라.](욥37:14). 우리 모두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깊이 생각한다면 분명히 영적 경이로움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욥은 후에 주님을 만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지식도 없이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그런즉 내가 깨닫지도 못한 것을 말하였으며 내게는 너무 놀라운 일들 곧 내가 알지 못한 일들을 말하였나이다.](욥42:3). 그가 지금까지 알았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가 생각하고 상상했던 것을 훨씬 능가하고, 초월하는 것들을 알아 버렸습니다. 욥은 그것을 “내게는 너무 놀라운 일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완전히 변화되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성령을 통해 ‘내게는 너무 놀라운 일들’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평생을 신학을 연구하고, 성경을 연구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 캐톨릭의 스승이요, <신학대전>, <신학총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란 책을 썼고, 지금도 캐톨릭 교리의 교과서 같은 작품들이며, 철학을 기독교에 끌어들인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더 이상 책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나는 더 이상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이 내게 나타나 내가 썼던 그 모든 것이 밀짚처럼 보여서 지금 나는 나의 삶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지만 평생 자신이 땀 흘려 한 모든 일들이 밀짚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자신이 평생에 한 일이 헛것이었고, 거짓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이는 마치 맹인이 코끼리에 대해 논한 것과 같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경이감과 놀라움에 압도당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흐리게 보고 있거나 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약간만 체험한 사람들이 만권의 책을 읽은 박학한 사람보다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조명, 계시, 성령 충만을 통해 임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을 영과 진리로 경배할 때 주님이 임하심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배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예배자,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이런 주님의 임재와 주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안에 영광스럽게 임하기를 원합니다.
◈ 암송할 구절: 시5:7, 요4:23-24
◈ 생각해 볼 문제
1. 언제 경배를 드리는가?
2. 하나님이 받으시는 경배자는 누구인가?
3. 참된 경배와 영적 부흥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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