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에 대해서 바른 조명을 주는 유일한 성경 |
“그들이 계속해서 길을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매 내시가 이르되, 보라, 여기에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는 데 무슨 거리낌이 있으리요?
하매 빌립이 이르되, 만일 그대가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받을 수 있느니라, 하니 내시가 대답하여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라, 하고 이에 명령하여 병거를 멈추게 하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 속으로 내려가 빌립이 내시에게 침례를 주니라. 그들이 물
속에서 나와 올라올 때에 {주}의 영께서 빌립을 채어 가시니 내시가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더라. 내시는 기뻐하며 길을 가되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모든 도시를 지나가며 말씀을 선포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행8:37-40).
성령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가 받는 침례에 대해서 매우 주의 깊게, 그러나 쉽고 분명하게 기록해 두셨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주님의 명령으로
우리들이 준수하는 두 가지 의식이 있다면 침례와 주의 만찬입니다. 이 둘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쉼없이 주님을 기억하고 증거하는 의식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의식은 구원을 주는 능력이 있거나, 나의 삶을 거룩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
마음 가운데 있는 믿음을 외적으로 보여 주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침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또는 구원의 능력으로 가르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거기에 동조한 배교한 신학자들과 종교인들이 성경을 변개하면서 만든 교리가 바로 “침례에 의한 중생”입니다.
사도행전 8:37은 누가, 언제, 어떻게 침례를 받아야 하는가 분명하게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이디오피아의 내시가 빌립을 통해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는 침례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한 자연스런 양심의 응답입니다. "이것과 동일한
모형 곧 침례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또한 우리를 구원하니 (이것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응답하는 것이라.)"(벧전3:21). 구원받고 나서 성경을 읽고 싶고, 집회에 참석해서 예배를 드리고 싶고,
찬양을 하고 싶고, 기도를 하고 싶은 마음과 동일한 마음이 침례를 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침례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입니다.
개역 성경을 비롯한 새 역본들을 들고 사도행전 8:37을 펴 보십시오. 거기에는 (없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로마 캐톨릭을
비롯한 배교한 모든 교회 교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제거해 개역 성경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36.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37 (없음)
38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39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36. 그들이 계속해서 길을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매 내시가 이르되, 보라, 여기에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는 데 무슨 거리낌이
있으리요? 하매
37. 빌립이 이르되, 만일 그대가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받을 수 있느니라, 하니 내시가 대답하여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라, 하고
38. 이에 명령하여 병거를 멈추게 하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 속으로 내려가 빌립이 내시에게 침례를 주니라.
39. 그들이 물 속에서 나와 올라올 때에 {주}의 영께서 빌립을 채어 가시니 내시가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더라. 내시는 기뻐하며 길을
가되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모든 도시를 지나가며 말씀을 선포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행8:37-40).
버린 것입니다.
침례는 누가 받는가? 이디오피아 내시는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은 다음 침례를 받고자 했습니다. 이 순서는 절대 불변의 원칙입니다. 구원은
침례를 통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서 입니다. 빌립은 침례의 요건으로 “만일 그대가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외의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면, 선행을 하면, 율법을 지키면, 성모 마리아를 섬기면, 구제를 많이 하면과 같은 일체의 조건이 더해지지
않았습니다. 침례의 필수 요건은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 고백이 없는 유아 세례를 거부합니다. 유아들은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재침례교도들은 캐톨릭의 유아 세례를 비성경적이라고 규정하고 다시 신앙 고백을
한 후 침례를 받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만약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영접한 적이 없으면서 교회 프로그램에 따라 침례를 받았다면
새로 받아야 합니다. 또 세례를 침례와 같은 것인 줄로 알고 받았다면 잘못 받은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세례를 받을
때 침례와 동일한 영적 의미를 알고 받았다”고 항변합니다. 하지만 이런 변증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침례는 언제 받는가? 이디오피아 내시는 구원받은 즉시 받았습니다. 침례를 받는 것은 특별한 시간과 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고
바로 침례에 순종하면 그 자리에서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이는 신약 성경의 모든 예가 입증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사도 바울은 간수와
그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믿자 바로 온 가족에게 침례를 주었습니다. 우리 교회 회원이 되면 침례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 성경을 배우고, 일정한 프로그램을 마친 후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침례인가? 세례인가? 침례는 물 속에 완전히 잠겼다가 올라오는 것입니다. 반면 세례는 물을 뿌리는 것입니다. 침례의 사전적인 의미는 “잠기어
동화되다”란 뜻입니다. 예를 들어 용광로 속에 쇠붙이를 푹 담그면 녹아서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인간의 몸을 흙 속에 묻으면 흙과 하나가
됩니다. 몇 줌의 흙으로 사람을 묻을 수 없듯이 몇 방울의 떨어 뜨리는 물로 사람을 묻을 수 없습니다. 세례는 성경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인간들의 전통에 불과합니다. 이는 고대 이집트에서 아이들을 낳으면 나일강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그 강물을 어린아이의 머리에 뿌려 주던 의식에서
내려온 미신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단 강에서 침례를 받으시고 물 속에서 올라 오셨다는 사실을 보여 줌으로써 바른 침례는
물 속에 완전히 잠기는 것임을 입증해 주셨습니다. 빌립 또한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가 아닌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이 물 속에서 나와
올라 올 때에”(행8:39)라고 말합니다.
침례는 누가 주는가? 침례를 집전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특별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목사가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역 교회의 질서와 역할로 인해서 목자가 주고 있을 뿐입니다. 사정이 되지 않는다면 구원받은 형제가 믿음과 공개적인 구원의 고백을
받은 후 성경이 정한 방법대로 침례를 줄 수 있습니다. 이는 로마 캐톨릭이 말한 것처럼 사제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닙니다.
이런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성경적 교리의 실행이 혼란으로 빠져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켰기 때문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어떤
성경에서도 바른 침례의 영적 의미와 실행을 조명해 주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대신 인간들의 전통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대부분의 교회에세는 침례를 구원의 수단, 또는 조건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침례가 아닌 세례가 바른 성경적 실행인줄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6:30,31을 펴 보십시오. "그들을 데리고 나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what
must I do to be saved?)하거늘 그들이 이르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우리말로는 단순하게 “어떻게 해야”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따르면 “간수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what must I do to be saved?>고 물었습니다. 여기에 만약 캐톨릭 사제와 장로교
목사와 캠벨파 목사와 안식교 목사와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 목사가 있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사도행전 2:38의 사도 베드로를
흉내내면서 “침례를 받으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다른 한명은 마가복음 16:16을 외치면서 “믿고 침례를 받으라”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 중에 한명은 “어허, 이 사람들아, 어떻게 그런 것들만 이야기 하는가? 주님께서는 믿음과 침례만 이야기하신 것이 아닐세, 믿고 침례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을 행하는 것일세. 주님께서는 분명히 율법을 지키며 살라고 하셨네”하며 마태복음 19:16을 인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보라,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이까?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오직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거든
명령들을 지키라, 하시니"(마19:16,17). 아마 이 자리에서 “믿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가는 사이비로 몰리거나 이단으로
정죄받을 것이 확실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먼저 사도 바울은 어떻게 대답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행16:31). 구원을 받기 위해서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간수에게 가르쳐 준 바울의 답변은 너무나 간단한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 수많은 교단, 교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침례가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면
사도 바울의 답변은 너무나 무성의한 거짓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기록된 말씀이냐? 인간들의
전통이냐? 하나님이냐? 사람이냐? 믿음이냐? 침례냐?
◆ 침례에 대해 오해하는 몇몇 구절들 ◆
▶ 요한복음 3:5,6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또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주님은 여기서 사람이 5절과
6절을 병렬 구조로 배열하시고 접속사 and를 통해(of water and of the Spirit) “물에서 나는 것을 육에서 나는 것”,
“성령에게서 나는 것을 영에서 나는 것”이라고 정의해 주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어머니의 모태 속 양수에서 태어나는 육신적 출생에 대한 것과
성령을 통해 영적인 출생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해 개역 성경을 비롯한 현대 역본들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이라고 번역하여 물과 성령(water and Spirit)을 하나로 처리하여 진리를 조명받는데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문에도 없고 전후 문맥에도 전혀 없는 침례란 말을 집어넣어 해석함으로써 물 침례를 구원의 필수 요소로 규정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물 침례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육신의 출생과 영적 출생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 에베소서 5:26 성경에서 말씀이 물로 예표된 예는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물 침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들을 물 침례로 보는 이유는 성경에 따라 진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들이 정한 교리에 따라 성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킹제임스
성경과 현대 역본들이 이 구절에서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지 직접 비교해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현대 역본들은 말씀이
바로 물이란 동격 구조를 파괴하고 노골적으로 세례를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 이것은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시고 정결하게 하시며 (엡 5:26)
개역한글판 -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표준새번역 -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서
현대인의 성경 -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케 하여
공동번역 - 그리스도께서는 물로 씻는 예식과 말씀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현대어 성경 - 그리스도께서는 세례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씻어
표준신약전서 - 그가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
▶ 사도행전 2:37,38
"이제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찔려 베드로와 나머지 사도들에게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까? 하거늘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회개하여 죄들의 사면을 얻고 너희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라."(킹제임스
흠정역)
<Then Peter said unto them, Repent, and be baptized every one of you in
the name of Jesus Christ for the remission of sins, and ye shall receive the
gift of the Holy Ghost.>(Acts2:38-KJV).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 구절을 구원의 근거 구절, 세례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구절로 삼고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for the remission of sins>입니다. 죄사함을 받기
위하여냐? 죄사함을 받은 것으로 인하여냐?가 관건입니다. 흠정역 성경은 교리적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 이 부사구를 느닷없이 ‘회개하라’(repent)에
당겨 버리는 재주를 부렸습니다. 이는 문장 구조론적으로 있을 수 없는 번역입니다.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죄사함 받은 것으로 인하여”로
번역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두 가지를 명령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미 주신 표적과 설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들이 믿지 않았다면 그들은 스데반을 죽였듯이 당장 돌을 들어 베드로를 쳐죽이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들은 구원받기
위해 침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믿었기에 회개를 하고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 전도자들이 잘못하는 것 중에 하나는 회개하고 믿으라고
합니다. 말씀을 통해 먼저 마음의 변화를 유발하지 않는 고해성사와 같은 회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고해성사, 자책, 고백하는 것 등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믿음,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회개였고 그에 따른 행동으론 침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도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통해 성령 충만한 믿음의 말씀을 들었고,
동일한 찔림을 받았지만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았기에 거부와 배척을했고, 그에 따른 행동은 살해(殺害)였습니다. 지금 사도행전
2장은 마음에 변화를 받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리이까?” 라고 묻고 있는 믿는 유대인들에게 답변한 베드로의 권고란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첫째, 회개하라. 이들은 생명의 주요 창시자이시며, 약속의 메시야를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죽여 버린 살인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을 믿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필요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믿지
않았던 죄, 자기들이 저지른 악행(살인)에 대해 먼저 회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에 회개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지난 날에 지었던 모든 죄가 기억나고 철저히 회개하게 됩니다. 죄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까지도 죄라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들은 침례인 요한이 전파하는 요한의 침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침례인 요한이 준 물
침례는 성령을 받게 해 주는 침례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왕국과 메시야에 대한 설교를 듣고 마음을 예비하기 위해 침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불로 침례를 주실 분”이라고 전파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처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는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받는 침례이며, 예수를 죽인 살인자들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공개적인 간증으로서의 침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음으로
이들은 문자적, 육신적 유대인에서 문자적, 영적 유대인이요, 하나님의 교회로 들어가게 됨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설교하지 않았습니까? 이들은 이미 예수의 존재에 대해서, 사역에 대해서, 죽으심에
대해서 다 알고 있었으며, 한때는 믿을 뻔하기도 했으며, 믿었던 사람도 있었으며, 믿었다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현재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잘못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이방인들과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민족의
대명절인 오순절에 유대인들을 향해 설교할 때, 이미 십자가에서 죄들의 사면을 위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단번에, 영원히”<once
for all> 흘려졌습니다. 이 피는 하나님의 약속된 그리스도를 죽인 불신자요, 살인자들이었던 모든 유대인들의 죄를 충분히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어린 양의 보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도록 권고한 것입니다. 이
둘은 모두 죄의 사면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for the remission of sins)6).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사도행전 2:38의 회개와 침례는 구원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에 대한 성도들의 올바른 반응이란 점을 정확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킹제임스 성경 외에 어떤 성경도 가르쳐 주지 못하는 올바른 계시이며, 조명입니다.
▶ 베드로전서3:21
사도행전 2:38에서 침례에 대해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킨 설교를 했던 베드로는 침례가 구원의 모형이요, 죄를 제거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란 사실을 한 구절 속에 3차례나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사도행전 2:38의 침례를 결코 구원의 수단이
아니란 사실을 동일한 사도에 의해 확증되었습니다. 하지만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모든 역본들은 이 구절을 완전히 변개해 버림으로써 사도
베드로를 “세례에 의한 중생”을 설교한 자신들의 스승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과 동일한 모형 곧 침례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또한 우리를 구원하니 (이것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응답하는 것이라.)-(벧전3:21)
표준새번역 - 그것은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는 세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 이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여러분을 구원하는 세례를 상징합니다.
공동번역 - 그것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세례를 미리 보여 준 것입니다.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이것은 차마 같은 성경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누가 봐도 이것들은 같은 저자의 목소리가 아닙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모든 성경은 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 킹제임스 성경만이 다른 목소리를 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의 목소리에 청종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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