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 90 - 25. 대적하라(resist)
말씀: 롬12:21
부흥을 위한 기도회 스무 닷새 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에 대적해야 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는 절대적 신뢰와 복종만이 있을 뿐이지만 마냥 순둥이들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세상과 육신에 대해서는 언제나 ‘비폭력 무저항’입니다. 죽이면 죽고, 때리면 맞고, 감옥에 넣으면 들어갑니다. 너무나 무기력해 보이기조차 할 정도로 모욕과 수치를 당하며, 죽임을 당합니다. 2000년 교회사는 그런 사람들의 흘린 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주님이 말씀하신 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에게 맞서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며 또 누가 너를 법에 고소하여 네 덧옷을 빼앗으려 하거든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고 또 누구든지 너로 하여금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와 함께 십 리를 가며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네게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마5:39~42)는 말씀대로 때리면 맞았고, 빼앗으려 덤벼드는 자들에게 빼앗겼고, 구하는 자들에게 등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악에게 맞서지 말라/That ye resist not evil]고 하십니다. 이것은 패배자가 되란 말씀이 아닙니다. 악에게 지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저는 학생 시절에 이 말씀이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군부 독재가 사회악이다’라며 데모를 하고 저항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저항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의 부조리, 비민주적인 제도와 법에 대해서 격렬하게 저항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때에 주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악에게 저항하지 말라/대적하지 말라/맞서지 말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자유를 빼앗는 사회악, 정치악, 경제악, 권력악에 대해서 주님은 ‘악에게 맞서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산상수훈의 진리’는 우리에게 적용할 수 없다, 교회 시대에 적용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사 2000년 동안 성경을 믿는 신자들은 악에게 맞서는 대신 빼앗기고, 감옥에 갇히고, 추방당하고, 채찍에 맞고, 기꺼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아무도 야만적인 재판에 대해서 저항하지 않았고, 인권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분신자살(焚身自殺)을 하거나 투쟁이나 불복종이나 저항을 외치지 않았습니다. 정치 조직화를 하거나 이익 집단을 만들거나 기타 등등의 일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일을 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교회 연합 운동이니, 기독교 정당 등을 만드는 일 따위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교회나 성도는 세상의 힘 즉 ‘정치적 힘’이나 ‘경제적 힘’을 갖는 순간 영적인 힘을 완전히 상실하고 맙니다. 이곳 미국은 기독교 보수주의란 이름으로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신 환란과 박해를 이기는 경건의 능력, 죄를 이기는 능력, 마귀를 대항해 싸우는 힘을 잃어 버렸습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많아지고, 돈이 있고, 건물이 커질 때 급격하게 영적인 힘을 잃습니다. 영적인 능력은 성결에서 나오며, 씨스템이나 조직이나 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주님은 [너희는 악에게 저항하지 말라/대적하지 말라/맞서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 말씀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정직한 일들을 예비하라.](롬12:17)는 말씀으로 정확히 해석됩니다. 악을 악으로, 세상적인 방법으로, 육신의 힘으로 저항하거나 맞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체포되시던 밤에 칼을 잡고 악에게 저항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잡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고 하셨습니다. 육신의 군대가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몰려 왔습니다. 거기에 대응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그냥 잡혀 가는 것입니다. 때리면 어떻게 합니까? 맞습니다. 죽이면 어떻게 합니까? 죽습니다. 이것은 악에게 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에게 패하는 것도 아닙니다.
[너희는 악에게 저항하지 말라/대적하지 말라/맞서지 말라]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그냥 죽으라는 말씀이구나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악에게 지지 말고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고 하십니다. 우리는 육신적인, 물리적인,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무기를 들고 공격하는 악을 향해 ‘영적인 전쟁’으로 파악하고 합심해서 기도하고, 금식함으로 이기라는 것입니다. 선을 행함으로써 이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매달림으로 이기라는 것입니다. 육신이 두들겨 맞지만 영으로는 그들을 압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육신을 메달아 때리던 자들이 지쳐서 더 못 때리고 죽여도 또 죽여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들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몸을 죽이는 자들을 이기는 법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혼을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주님을 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마10:28).
진정한 승리는 어떻게 오는 것입니까? 악을 악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대항하는 것입니다. 죽임에는 부활로 대항합니다. 사망에는 생명으로 대항합니다. 육신은 영으로 대항합니다.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불러 대항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신바 ‘악에게 지지 말고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여인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받기도 하며 다른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고문을 당하되 풀려나기를 원치 아니하였으며 또 다른 이들은 심한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참으로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겪었으며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고 시험을 받기도 하고 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며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니며 궁핍과 박해와 고난을 당하였으니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였느니라.) 그들이 사막과 산과 땅굴과 동굴에서 떠돌아다녔느니라.] (히11:35~38). 질병, 파산, 이혼, 가족 간의 갈등과 같은 별별 일들로 우리를 공격하는 악들에 대해서 우리는 똑같은 방법으로 저항하지 말고 기도함으로 대적하고, 그런 때일수록 더욱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기하면서 영적인 승리를 쟁취해 버리라는 것입니다. 마귀의 궁극 목적은 영혼의 무장해제입니다. 믿음의 파산입니다. 거기에는 지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resist) 아니하였노라.] (히12:4).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싸우고, 대적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저항해야 하며,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라 마귀들과 죄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다시는 범죄하지 않겠다고 고백하고, 주의 징계를 겸허히 받아들이며, 가르침을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아룀이 참으로 합당한 일이니 곧 내가 징계를 받았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불법을 행하였을지라도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하는 것이라.](욥34:31-32). 죄와 이기려면 죄와 싸울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굳은 의지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정해지지 않는 사람, 의지와 결단이 없는 사람의 기도는 두 마음을 품은 기도요, 흔들리는 기도요, 정함이 없는 기도입니다. 결코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말씀을 듣고, 믿었으면 확실하게 결단해야 합니다. 작은 여우가 포도원을 망치고, 작은 구멍이 둑을 무너뜨리듯이 작은 죄악들이 믿음의 성벽을 허물어뜨립니다.
우리는 악을 피해야 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구하고 그것을 따를지니](벧전3:11). 이겨야 할 것이 있는 반면 아예 피해야 할 악이 있습니다. 피하면 될 것들을 붙들고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피해야 할 죄는 첫째, 음행입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행하는 모든 죄는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짓느니라.](고전6:18). 구약의 걸출한 믿음의 사람 중에 요셉과 다윗은 이 죄를 다루는데 극명한 대조를 보여 줍니다. 요셉은 피했습니다. 그는 악을 피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남의 아내를 취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던 다윗도 피해야 할 죄를 피하지 않았을 때는 속절없이 무너졌습니다. 둘째, 우상 숭배입니다. [그런즉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를 피하라.](고전10:14). 우상이란 금과 돌이나 조각으로 만든 형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세워둔 무형의 것들이 훨씬 더 무섭습니다. 탐심은 우상 숭배입니다. 돈이나 명예, 권력, 학위 등은 모두 우상 숭배입니다. 셋째, 속되고 헛된 말장난입니다. [오직 /너는/ 속되고 헛된 말장난들을 피하라. 그것들은 점점 더 경건치 아니함으로 나아가느니라.](딤후2:16),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들 역시 피해야 합니다. [오직 /너는/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들을 피하라. 너도 알거니와 그것들은 다툼을 일으키느니라.](딤후2:23).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와 논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도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와 논쟁과 율법에 관한 다툼들은 피하라. 그 까닭은 이것들이 무익하고 헛되기 때문이니라.](딛3:9). 학자적 자세가 있는 체 하며 말장난하다가 말다툼을 하다가 죄만 짓습니다. 넷째, 피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배운 교리를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입니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를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실족하게 하는 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피하라.](롬16:17). 악한 사귐은 선한 행실을 부패케 합니다. 피해야 할 것들을 피함으로써 우리는 분리된 삶, 경건한 삶,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삶의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법, 악을 이기는 법, 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말로 아무리 ‘믿음으로’라고 해봐야 자신의 지각에도 전혀 열매 맺지 못한 상태라면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구할 수도 없고, 삶에서 열매가 맺히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나도 이해하지 못한 채 사용하는 성경 언어들이라면 배워서 깨달아야 합니다. 저는 영적 지성을 최우선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각의 영’을 통해 배우고, 깨닫기를 갈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평온하게 살려고 해도 나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대적하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기도회를 하는 동안에, 설교를 준비하거나 막상 하기 직전에 마귀들의 심한 공격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설교하는 도중에도 마귀의 불붙은 화살이 날아듭니다. 성도들을 향해 날아갑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장면을 함께 봅시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주]의 천사 앞에 서 있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對敵)하는 것을 그분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슥3:1).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마귀의 존재만 보여 주신 것이 아니라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도 이런 장면을 환상으로 보여 주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환상이나 신비적 체험을 성경적 진리처럼 강조하지 않습니다만 성경적 진리와 정확히 일치할 때는 주님이 주신 환상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입니다. 저의 안에는 주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십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성경적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은 저의 오른쪽에 서서 나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사탄은 기도를 방해하고, 설교를 방해하고, 말씀 묵상을 방해합니다. 우리의 생각 속으로 들어와 진지를 구축합니다. 우리의 몸으로 죄를 범하게 합니다. 눈으로, 손으로, 입으로, 발로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고 속입니다. 주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사탄은 이 세상에 자신의 일꾼들을 동원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마귀에게 지지 말고 대적해서 승리를 쟁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약4:7). 대적하면 도망가는데 굴복하면 마귀의 올무에 걸리게 되고, 마귀의 종노릇하며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마귀의 활동에 대해서 ‘울부짖는 사자처럼’이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격렬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는 눈에 보이는 갖가지 일이나 사건이나 사람들을 통해 삼킬 것처럼 찾아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사건의 배후에서 일하는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건을 해결하려는데 급급하지 말고 그 사건의 배후에 일하는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어떻게 대적합니까? [/너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벧전5:9a). ‘믿음에 굳게 서서’ 이것이 답입니다.
마귀를 대적해야 할 성도들이 반대로 성령을 대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자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역하되(resist) 너희 조상들이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는도다.](행7:51). 이렇게 주님을 대적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도 그들을 대적하여 걸으신다는 것입니다. [또 그들이 나를 대적하여 걸으므로 나도 그들을 대적하여 걸었으며] (레26:40b~41a). 나는 성령님을 대적한 적이 없다고 생각되시는 분들은 참으로 복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 국가 권력에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권력에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거역하는 것이니 거역하는 자들은 스스로 정죄를 받으리라.](롬13:2).
◇ 주님이 세우신 자를 거역하는 것은 진리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제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이들도 진리를 거역하니(resist)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니라.](딤후3:8).
◇ 교만은 주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아,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 자신을 낮추어 장로에게 순복하고 참으로 다 서로 복종하며 겸손으로 옷 입으라. 이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resist)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니라.] (벧전5:5).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며, 주님의 더 많은 은혜를 받는 방법입니다. 은혜를 주옵소서, 은혜를 주옵소서! 구할 때마다 겸손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대적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란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더 많은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되(resist)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 하시느니라.] (약4:6). 교만한 자를 향해서 주님은 대적하시며, 그들의 원수가 되어 싸우십니다. 교만은 마귀의 성품입니다. 겸손은 우리 주님의 성품입니다. 교만한 자들은 마귀의 자녀들입니다. 마귀는 교만한 자녀들의 왕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교만한 것은 마귀의 자녀로 귀화한 것입니다. 죄의 왕국으로 이민(移民) 간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 암송할 말씀 : 롬12:21, 히12:4
☜ 생각해 볼 문제 :
- 당신은 마귀와 대적하고
있는가?
- 당신의 오른 쪽에 사탄이 서 있는 까닭은?
- 마귀를 도망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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