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부흥 90 - 28.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씀: 고전2:2



부흥을 위한 기도회 스무 여드레째 날입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함께 말씀을 살펴보고, 이 십자가를 통한 죽음과 삶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000년 전에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던 유대 땅에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대 페니키아에서 유래한 십자가란 사형 제도는 지독히도 잔인한 사형 방법이긴 하지만 사회악을 척결하고 그에 합당한 범죄자를 다루는 것으로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었던 사람이 한 둘도 아니고, 사형제도 폐지를 외치는 이런 서구 사회의 분위기도 아니고, 인권을 운운하던 시대도 아니었다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사형수들에게 동정과 연민 정도라면 모를까 그다지 큰 의미를 둘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한 사람을 하나님으로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입니다. 십자가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고, 십자가 위에는 죄인의 이름과 죄인들의 범법 사항이 죄명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 죄명과 죄인의 이름이 적힌 명패를 보고 침을 뱉고 저주를 했습니다. 십자가는 저주와 수치의 상징이며, 죽음과 모욕의 대명사였습니다. 어떻게 사회에서 가장 멸시받고 모욕적인 방법으로 사형을 당한 사람, 법정 최고형을 받아 죽임을 당한 사람을 하나님으로 믿고, 그 사실을 선포하며 자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미리 기록되고, 예언된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에 죽으신 분은 자신의 죄로 인해 못 박힌 것이 아니라 인류의 죄로 인해 못 박혔고, 나의 죄로 인해 피 흘려 죽은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이렇게 죄명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분의 머리 위에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왕 예수] 라고 쓴 죄명을 붙였더라.](마27:37). 그것도 간단히 적힌 것이 아닙니다. 당시 통용되던 모든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분 위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로,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왕], 이라 쓴 글도 있더라.](눅23:38).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로 기록함으로써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라도 그 글을 보고 알 수 있었고,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름 역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명패(名牌)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유대인들의 왕 나사렛 예수], 라 기록되었더라.](요19:19). 그 이름은 다름 아닌 ‘나사렛 예수’이십니다. 나사렛 출신의 예수란 뜻으로 누구나 다 아는 이름입니다. 성경은 유독 한 명의 십자가만을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말해 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요, 높이 매달리셔서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이는 인류 6,000년 역사에 전적으로 독특하며,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십자가입니다. 무엇이 이 십자가를 그토록 유명하게 했고, 이 십자가를 바라보게 했고, 이 십자가를 지려는 자원자로 넘치게 했습니까? 채찍에 맞으시고, 높이 매달리신 십자가의 죽으신 주인공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때문이라.](고전1:23a)고 합니다.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하였음이라](고전2:2). 왜 이토록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만을 선포하고 알기로 결단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이 외쳤던 주님의 모습은 주님의 유년 시절이나 기적을 행하시던 모습이나 설교하시던 모습이 아닙니다. 바울이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a). 병자를 고치신 그리스도, 빵을 배불리 먹이신 그리스도, 물위를 걸으신 그리스도, 마귀를 쫓아내신 그리스도, 산상수훈을 가르치신 그리스도 등 멋지고 자랑스럽고 위대한 일을 행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라 하필이면 채찍에 맞고,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그분을 알기로 결단하는 것입니까?

저와 여러분 역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 사이에 맺어진 원수 됨을 완전히 풀어 화평의 관계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화해’입니다. 십자가로 인해 저주와 심판은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사 모든 것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음이니라.](골1:20). [또 십자가로 그 원수 되게 하는 것을 멸하사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6).

-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대적하는 모든 범법 사항이 기록된 규례들을 말소해 주었습니다. [손으로 쓴 규례들 곧 우리를 대적하고 반대하는 규례들을 지우시고 그것들을 길에서 취하사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으시고](골2:14).

-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대적하는 정사들과 권능들을 노략했습니다. [정사(政事)들과 권능들을 노략하사 십자가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골2:15).

-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의 몸을 멸하여 죄를 섬기지 않게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다시는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롬6:6).

-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이는 십자가를 선포함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되기 때문이라.](고전1:18).

-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때문이라. /그분은/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에게나 그리스인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시요, 하나님의 지혜이시니] (고전1:23~24).

-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함께 못박은 십자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갈2:20a)

-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히고, 세상을 못 박는 관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이런 이유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아가 추구하는 욕망과 이상, 꿈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도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것입니다. 장사하시는 분들은 고객들 앞에서 자기를 부인합니다. 자기를 죽입니다. 자아를 죽이지 않고 영업에 성공하거나 장사로 성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의사는 환자 앞에서 자아를 죽입니다. 학원에서 강사들은 애들 앞에서 자아를 죽입니다. 자아를 죽이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죽여 버립니다. 모든 분야가 그렇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죽어야 상대가 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아가 죽어야 하고, 세상에 대해서도 자아가 죽어야 하며, 모든 것에 대해서 늘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죽어지내는 사람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고’란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질 좀 죽여!’ 란 말을 하는 것은 ‘자아를 좀 부인해’란 의미와 상통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란 말은 현대인들에게 좀 생소한 의미인지 모릅니다. ‘발에 족쇄를 차고’란 표현이나 ‘목에 형틀을 차고’란 말이나 ‘손이 묶인 채’ 또는 ‘손에 수갑을 찬 채’란 표현은 익숙합니다. 이런 것은 죄인들에게 흔히 사용되는 방법이고 우리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십자가’는 현재로선 거의 사라진 사형 도구이며, 형벌 방법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매우 익숙한 형벌의 도구요, 사형 방법으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를 말씀하신 것은 십자가에 못박힐 죄수들은 법정에서 판결을 받아서 십자가가 세워질 사형 집행 장소까지 자신이 못 박힐 그 십자가를 자신이 직접 지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자아의 육신은 사형에 해당한다’고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조금도 의롭게 여기지 말고, 살아 있을만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고,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며, 사악한 것이며, 내 육신 안에는 조금도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다는 것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도 예외 없이 사람은 다 죄인이며, 모두 십자가형에 처할만한 그런 중죄인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고를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못 박혀야 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저주의 형벌이 집행될 장소로 가라는 것입니다. 거기가 어디입니까? 우리는 어디까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까? 갈보리 언덕입니다. 거기에는 앞서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입니다. 거기에 가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가 못 박혀야 할 그 자리에 주님이 못 박혀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란 말은 거의 저주나 다름없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지고’란 말은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아 모욕과 수치 가운데 죽어’란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땅에서 자기를 높이고 왕관을 쓰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나 한두 달, 일이년이 아닙니다. ‘날마다’입니다. 제자의 삶이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어제는 자기를 부인했지만 오늘은 못하겠다. 오늘은 했지만 내일은 못하겠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내가 십자가를 졌지만 언제까지 질 수는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예외 없이 모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자신의 손에 수갑이 채워지는 것을 원치 않고, 몸을 두르는 포승줄을 원치 않고, 발을 묶는 차꼬를 원치 않고, 목이 메여 끌려 다니는 것을 원치 않듯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고, 죽으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 사람은 살았으나 산 사람이 아닙니다. 죽으라는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죽으면 날마다 부활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생명을 낳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십자가의 그리스도,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는 시대입니다. 성공, 축복, 형통을 추구하는 교회들과 신자들 사이에서 십자가는 어디서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신 다른 무엇이 대신 자리를 차지합니다. 십자가는 자아가 못 박히는 것이요, 낮아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거침(offence)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수치스런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모욕을 받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아를 완전히 죽음에 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도들은 자아를 존중받고 싶어 합니다. 교회에서도 인정받고 싶고, 형제들 사이에서도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자아를 건드리는 소리, 자존심을 건드리는 소리를 조금이라도 들으면 참지를 못합니다. 자신이 폄하되거나 약간의 모욕이라도 받거나 조금 낮추는 소리를 들으면 벌컥 뒤집어집니다. 이런 자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목사가 나에게 상처를 줬다. 어떤 형제가 나에게 상처를 줬다.” 별별 소리를 다 해댑니다. 어느덧 설교의 최고 미덕은 “듣는 사람 마음 안상하게, 듣는 성도 기분 안상하게”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아를 상하게 하지 말라!!] 이것이 오늘날 목회자들의 성공 기본 요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교회에는 죽은 자가 없어 보입니다. 십자가는 어디에 있습니까? 2000년 전에 갈보리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미 썩어 흔적도 없어져 버렸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여러분 안에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까? 죽은 놈이 무슨 소리를 들으면 어떻습니까? 십자가를 지지 않는 자들은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이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이기 때문이라.](빌3:18).

나의 영적 성장, 영적 부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내 안에 얼마나 깊이 적용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의 전부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부흥, 열매, 성장의 원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사랑하고 선포하고 자랑하십시오. 그것만을 알려고 하십시오. 십자가에서 죽은 성도들 안에 성령이 역사합니다. 생명의 성령은 죽은 자들을 일으킵니다. 살아 있는 자들은 무슨 짓을 해도 결코 새 생명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내가 못 박힌 그 십자가, 나를 대신해 못 박힌 그리스도, 나와 함께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 보십시오.

☜ 암송할 말씀: 고전1:23, 고전2:2, 갈6:14

☜ 생각해 볼 문제:

- 지상에서 유일무이한 독특한 십자가는 누구의 십자가인가?
-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 )요, ( )이다.
 - 우리가 자랑하고 선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