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 90 - 29. 날마다 죽노라
말씀: 고전15:31
부흥을 위한 기도회 스무 아흐레 째입니다. 우리는 부흥과 성장, 변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충만케 해 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90일 간의 기도 못지않게 90일간 날마다 말씀을 살펴보고, 그 말씀에서 교훈을 얻고, 마음에 새기는 작업은 더욱 중요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기 위해 가장 강조되는 진리는 ‘자아의 죽음’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고는 제자의 삶을 살 수 없고,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모든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곳은 자아란 씨앗이 죽은 그 곳입니다. 그런 면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출생지는 갈보리의 십자가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아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우리의 영적 생명이 탄생한 탄생지입니다.
누가 영적인 성도가 되는 비결, 성숙한 신앙을 소유하는 방법이 있는가를 물을 때 단연 처음 나오는 말은 ‘죽으면 된다’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어떤 문제도 없습니다. 죽은 자에게는 원함도 분냄도 성냄도 다툼도 없습니다. 죽은 자는 느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에 대한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제자도의 첫 걸음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또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고 했습니다. 갈보리에서 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역사상 단 한번 영원히 드려진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날마다 적용될 수 있고,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을 말하라고 한다면 영이요, 생명이신 말씀을 육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거듭남의 진리를 알아듣지 못했던 니고데모나 목마르지 않는 물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던 사마리아 여인이나 바리새인들의 누룩에 대해 빵이 없음으로 걱정했던 제자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에는 이런 예가 수도 없이 많이 나옵니다. 살과 피에 대해서 말하면 누가 능히 제 살을 주어 먹게 하겠느냐? 고 했고, 성전 된 몸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46년이나 걸려 지은 이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단 말이냐 하며 의문을 표했던 것같이 많은 성도들이 영적 진리를 선포하면 육신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논리의 모순에 빠지고 말씀을 어렵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예는 너무나 많습니다. 십자가의 진리 역시 그런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성경적 진리를 마치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못 박힌 것으로 이해하면 “내가 언제?”란 질문 밖에 나오지 습니다. 반대로 영적 진리만을 이야기하다 보면 꿈속을 헤매듯이 못 알아듣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죄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죄 가운데 태어났다는 말은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또한 그분께서 범법(犯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2:5). 이 말씀을 들을 때 “내가 언제 죽었지?”라는 분들이 있습니까? [또 너희의 죄들과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골2:13a)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죄들 가운데서 죽어 있었습니다. 자연인은 죄와 허물 가운데 죽은 채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믿을 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생명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친히 들어와 사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 중생의 체험을 가진 성도들에게 주님은 다시 죽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날마다 죽으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기쁨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날마다 죽는것이 기쁨이란 것입니다. 이 죽음은 생물학적인 죽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육신은 단 한번 죽을 수 있을 뿐 여러 번 죽을 수 있는 생명이 아닙니다. 사람의 육신은 누구나 한 번 죽지 두 번 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신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 역시 죽었음을 선포했습니다. 자신의 영은 살아나고, 속 사람은 살아나고, 새 사람이 되었음을 분명히 알고 난 후 자신의 옛 사람은 죽었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옛 사람의 행실을 벗어 버렸습니다. 그린 것들이 다시 살아날 때면 죽여 버렸습니다. 몸은 죽은 것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생활 방식입니다.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쫓아 사는 것, 말씀을 따라 사는 것, 그리스도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이는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임이라.](롬8:13).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성질이 없었겠습니까? 그는 보통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바울과 함께 동역하거나 동행한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부류에 속하는 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실제로 그와 동행했던 사람들은 거의 다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죽었다면 다시 죽일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물리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죽이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죽었다]는 진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이라]는 명령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肢體)들을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골3:5). 이것은 금욕주의를 주창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땅에 있는 지체들을 죽여야 합니다. 십자가에 넘겨주어야 합니다.
전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2:20)란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성도들은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매우 헷갈려했습니다. 이유는 영이요, 생명인 말씀을 육신적으로, 물리적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었는데 그럼 왜 죄를 짓지?”란 의문에서 시작해서 “죽었다고 하면서 왜 죽이라고 하지”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이 솟아났던 것입니다. 이외로 성도들이 성경의 기본적 진리들에 대한 이해력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말씀을 이해하는 지각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평안도 은혜도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더욱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육적으로, 물리적으로, 땅에 속한 것으로 이해하려 해서는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죽은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다시는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롬6:6).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옛 사람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결과는 무엇입니까? 죄의 몸을 멸하여 다시는 죄를 섬기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진리입니다.
바울이 날마다 죽어야 했던 것은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나라가 망하면 그 나라의 풍속이나 언어나 생활양식은 2-3 세대가 지나지 않아서 사라지고 맙니다. 이유는 풍속과 언어와 생활의 양식의 뿌리가 되는 나라가 망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중남미 사람들은 모두 스페인어를 씁니다. 본래부터 내려오던 것들은 죽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어떤 아이가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양자로 입양되었습니다. 그러면 고아원의 기억은 잊어 버려야 합니다. 이전 생활 방식을 모두 잊고 입양된 가족들의 생활양식을 배우게 됩니다. 고아원에서 쓰던 말도 버리고, 고아원에서 입던 옷도 벗어 버립니다. 이전에 즐거웠던 일, 괴로웠던 일은 모두 추억으로 넘어가 버립니다. 더 신경 쓸 일도 없습니다. 자신의 삶의 근거지, 삶의 터전, 삶의 뿌리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잊어버리라, 이전 행실을 벗어 버리라, 이전 행실을 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었기 때문에 죽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것을 붙들고 있으면 자기만 고생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옛 사람이 죽어 버렸습니다. 이전에 살던 민족과 나라와 가정이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졌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습니다. 과거는 잊어 버려야 합니다. 벗어 버려야 합니다. 수십 년을 살아온 가치관이 있고, 말투가 있고, 생활 방식이 있겠지만 우리는 변해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이전의 행실에 관하여는 너희가 속이는 것으로 가득한 욕심들에 따라 부패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너희의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었도다.](엡4:22~24). 환경이 바뀌고, 신분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 것을 고집하면 바뀌었음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게 해야 합니다. 단 기간에 잘 되지 않더라도 주님은 꾸준히 그 사실을 가르치십니다. ‘너희들은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니다. 너희들은 더 이상 어둠의 자녀들이 아니다. 마귀를 따를 필요가 없다. 세상에 동화되지 말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의 신분을 철저히 인식시켜 주십니다. 옛 사람과 그의 행위를 벗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신분, 새로운 생명, 새로운 위치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근거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다 새롭게 변했습니다(고후5:17). 그래서 주님은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너희가 옛 사람과 그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골3:9)라고 말씀하시며 동시에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 (골3:10)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분 확인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가르쳐 주신 신분을 확인하고, 자신의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거듭났다하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과 능력과 거룩함과 경건이 드러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여전히 오랫동안 살아온 지난날의 습관들과 말투와 성품들이 드러납니다. 어떤 이들은 새로운 삶의 방식이 너무 힘들다면 옛 생활 방식을 고집합니다. 변화를 거부합니다. 성장도 거부합니다. 영적 진리를 배우고, 변화를 구하는 대신 안주하려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니지만 여전히 옛 것을 고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컴퓨터를 주어도 타자기를 고집하고, 차를 주어도 마차가 편하다는 사람이 있듯이 여전히 옛 것을 고집하는 자들이 늘 있습니다.
이전에 우리는 자아 독립적인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된 후론 ‘주님 의존형 존재’로 변해 버렸습니다. 이전에는 자아가 왕이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왕이십니다. 이전에는 육신을 만족케 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이제는 영적 만족이 우선입니다. 이전에는 농담, 허황된 말, 비속한 말, 추잡한 말, 음탕한 말, 비뚤어진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건전한 말, 덕을 세우는 말, 적합한 말, 골수에 양약이 되는 말, 영을 시원케 하는 말을 하려 합니다. 말에 소금으로 간 맞추어 항상 은혜가 있게 하려 합니다(골4:6). 이것은 사투리를 쓰던 사람이 표준어를 쓰는 것만큼이나 훈련이 필요합니다. 한국말을 쓰다 영어를 쓰는 만큼이나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배우고, 익히면 쉽습니다. 편합니다. 열매를 맺습니다.
자신이 죽지 않으면 자아에서 옛 성품과 옛 행실과 옛 사람의 습관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이루신 일들을 생각하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씀은 바로 날마다 새 성품으로 옛 성품을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자아가 살아 있는 성도들은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자아가 상하거나 자아가 낮아지거나 무시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며 견디지 못합니다. 영적 생활에 가장 큰 걸림돌은 마귀가 아니라 ‘죽지 않은 채 살아 있는 자아’란 말이 있습니다. 교회 부흥의 가장 큰 걸림돌 역시 마귀의 공격이 아니라 ‘성도의 육신적인 자아’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모든 혼란과 분란은 마귀와의 전쟁이나 공격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육신적인 자아였습니다. 육신의 성품이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육신의 행위들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色慾)과 우상 숭배와 마법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5:19~20). 이런 것들은 처리되지 않는육신적 자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고, 죄의 몸을 멸하여 다시는 죄를 섬기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그 죽음을 내 안에 적용할 때 우리의 옛 성품은 죽고,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은 우리를 대신한 죽음이며 동시에 우리와 함께 한 죽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받아들일 때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 실제적인 일들이 우리 안에 생명으로 드러납니다. 열매로 맺힙니다. 능력으로 드러납니다. 바울이 끊임없이 십자가 죽으신 그리스도에 집착하고 그것을 추구했던 것은 거기에서 부활의 권능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하여 그분의 죽으심과 같은 모습이 되어](빌3:10). 십자가를 통한 죽음을 날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역사적 사건일 뿐 아니라 현재적 사건입니다. 우리 모두 ‘나는 날마다 죽노라’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암송할 말씀: 고전15:31, 고후4:10
☜ 생각해 볼 문제:
- 우리는 언제 어떻게
죽었는가?
-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를 왜 죽으라고 하는가?
-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종류에 대해서 논해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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