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에스겔 29:1-17

요절: 에스겔 29:


오늘 말씀은 이집트 왕 파라오에 대한 말씀입니다. 느부갓네살,
두로 왕, 앗리리아인과 더불어 마귀를 예표하는 왕이 파라오입니다. 하나님은 영적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세상의 것들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예언적 사실을 가르쳐 주실 때 역사적 사건이나 사실을 통해 가르치십니다. 성경은
기록된 과거의 역사인 동시에 미래에 있을 예언적 사실입니다. 에스겔 28장에 나오는 두로 왕을 통해 주님은 적그리스도, 마귀의 정체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집트의 파라오를 통해 '큰 용 마귀'를 가르쳐 주십니다. 고대의 이집트는 군사력, 경제력,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세계를 주도하는 최 강대국이었습니다. 나일 강을 중심으로 비옥한 토지에서는 많은 농산물이 나왔고, 면화를 비롯한 방직 산업이 발전해 있었습니다.
피라밋으로 대표되는 기하학이나 천문, 수학, 역술이 매우 발전해 있던 나라입니다. 성경은 이집트를 세상을 예표하고,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는
세상의 통치자인 마귀를 예표합니다(요12:31, 14:30, 16:11). 이집트는 태양신을 섬기는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향해 심판을
선포하셨는데 이를 통해 세상의 통치자인 마귀에 대한 심판을 가르치십니다.


1-2절입니다. [제십년 시월 곧 그 달 십이일에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네 얼굴을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로 향하게 하고 그와 온 이집트를 쳐서 대언하며
](1-2).
때는 예루살렘이 멸망한지 십년이 지난 10월 12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방 왕들과 그 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이 나라들은 모두 이스라엘과
연관되어 있는 나라들입니다. 성경이 약속의 민족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에 관련된 성경의 예언은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들의 민족적 미래가 너무나 암울하고 저주와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대언자들이 이스라엘 민족 외에 어떤 이교도들에게도
국운(國運)이 상승하는 좋은 대언을 담은 적이 없기 때문에 중동의 모든 이교도들은 이스라엘을 극도로 미워합니다.


3절입니다. [말하여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이집트 왕 파라오야,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네 강들 한가운데 누워 있는 큰 용이라. 네가 말하기를, 내
강은 내 것이요,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3). 이집트 왕 파라오는 용에 비유되어 있습니다. 28장에서 두로 왕이
마귀와 동일시되었던 것처럼 이집트 왕 파라오 역시 큰 용인 마귀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큰 용의 정체는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이에 그 큰
용이 내쫓기니 저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상을 속이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천사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계12:9). [용을 붙잡으니 저 옛 뱀 곧 마귀요 사탄이라. 그 천사가 그를 붙잡아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바닥 없는
구덩이에 던져 넣어 가두고 그 위에 봉인을 하여 천 년이 차기까지는 더 이상 민족들을 속이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뒤에는 그가 반드시 잠시 동안
풀려나리라.
] (계20:2~3). 큰 용은 옛 뱀, 곧 마귀요, 사탄입니다.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마귀]로부터 권세를 받아 이집트를
다스렸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하늘의 정사와 권세들의 대리자 역할을 하고 있으며, 마귀는 이 세상을 그렇게 다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 왕 파라오는 ‘내 강은 내 것이요,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도다’라고 말하는데 이 강은 나일 강입니다.
“내가...내가 ..나를 위하여”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마귀의 화법이요, 어법입니다. 마귀는 I will...을 외칩니다. 주님은 I
Am이십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의 음성을 들을 때 ‘내가..내가’가 자꾸 나오면
그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아니라 마귀로 충만한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나’를 내세우지 않고 항상 ‘하나님,
주님’만을 말합니다. ‘내가 아니요...내가 아니요’ 이것이 성도의 화법입니다. 우리는 이미 전에 몇 번 다루었지만 상기시키기 위해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경에서 [내가 ...하리라]고 큰 결심으로 행했다가 완전히 망한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있다면 이집트의 파라오일 것입니다.
열 번의 재앙을 몸소 경험한 후에도 그는 무기력함을 느끼거나 허망함과 절망 속에 빠지지 않고 오뚜기 같은 불굴의 정신력과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을 발휘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특히 야망의 청소년들에게 죽을지언정 결코 굴복하지 않는 표상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출애굽기 15:9절에 파라오의 발언은 '초인적인 정신력'의 사나이가 절망을 딛고 재기하려는 놀라운 발언입니다. [그 원수가 말하기를, 내가
쫓아가서 따라잡고 노략물을 나누리라. 그들을 덮쳐 내 욕망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
](출15:9).
파라오의 놀라운 의지력, 정신력, 결코 굴복하지 않는 도전 정신,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경탄하고 성공의 비결로 칭찬해 마지않는 그런 요건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죄인들의 완악함과 구분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하리라'를 반복한 최초의 인물은
바로 루시퍼였다는 것을 안다면 오늘날 설교와 수많은 강연회의 논조는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파라오의 결심을 보십시오.
'나'라는 말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내가 쫓아가서, 내 욕망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 죄인들의
특징은 온통 '나'로 시작하여 '나'로 끝을 맺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이루었습니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1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주의 바람으로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강력한 물 속에 납같이 가라앉았나이다](출15:10).


비슷한 한 예를 더 보겠습니다. 바빌론 제국의 왕이었던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이 주신 권능을 자신의 것인줄 알고, [... 이 큰 바빌론은 내가 내 권능의 힘으로 건설하여 왕국의 집으로 삼고 내
위엄의 영광으로 삼은 것이 아니냐?...
](단4:30)고 하였습니다. 내가..내 권능의 힘으로, 내 위엄의... 그 역시 파라오와 같은
부류였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7년간 들에서 풀을 뜯는 병이 걸린 후에야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이성이 돌아왔을 때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날들의 끝에 나 느부갓네살이 내 눈을 들어 하늘을 보매 내 지각(知覺)이 다시 내게로
돌아오니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를 찬송하며 영원토록 사시는 그분을 찬양하고 공경하였나니 그분의 통치는 영존하는 통치요, 그분의 왕국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단4:34).


성도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께서
원하시면”, “주께서 허락하시면”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 우쭐대는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권능을 알아 보겠노니
](고전4:19). [이런 까닭에 너희가 마땅히 말하기를, {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요,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약4:15). 히브리서 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히6:3).
십자가에서 자아가 처리된 성도만이 주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고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전사이신 주님을 따라 승리하는 비결은 먼저
자신이 주님께 철저히 정복되고, 굴복함으로써, 주님의 권능이 지속적으로 머무르게 하는데 있습니다.


4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네 아가미에 갈고리를 꿰고 네
강들의 물고기가 네 비늘에 붙게 하며 네 강들 한가운데서 너를 끌어올리리니 네 강들의 모든 물고기가 네 비늘에 붙으리라.
](4).
이집트는 고대 문명의 핵심이었습니다. 찬란한 문화, 강력한 국력, 고대의 중심 국가였던 이집트의 파라오의 권세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강에 누운
큰 용과 같았던 이집트였지만 주님은 그의 아가미에 갈고리를 꿰어 올리셨습니다. 강들의 물고기가 비늘에 붙었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바빌론에 의해
이집트가 박살이 난 사건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8,19절을 보면 확연합니다. [사람의 아들아, 바빌론 왕 느부갓레살이 자기 군대로
하여금 두로를 치는 큰 수고를 하게 하였으므로 모든 /사람의/ 머리가 대머리가 되고 모든 /사람의/ 어깨가 벗겨졌도다. 그러나 그와 그의 군대가
두로로 인한 대가(代價) 곧 그가 두로를 치며 수고한 것에 대한 대가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집트 땅을 바빌론 왕 느부갓레살에게 주리니 그가 그녀의 무리를 잡아가며 노략물과 탈취물을 가져가리라. 이것이 그의 군대를 위한 대가가
되리라.
] (겔29:18~19). 주님은 영적 진리, 예언적 진리를 역사적, 세상적 사건을 통해 분명히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큰 용과 그의 군대를 멸하시는 모습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네 강들의 물고기 비늘에 붙게 하며”란 말씀은 이집트를
의지하는 많은 주변 나라들을 말합니다. 바빌론이 제국을 건설할 때 많은 나라들은 이집트가 바빌론을 대적하고 막아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역시 이집트에 사신을 보내고 원조를 요청했습니다. 큰 용 이집트의 비늘에 달라붙은 물고기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예레미야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파라오를 찾아갔습니다. 이런 민족들을 주님은 파라오의 비늘에 달라붙은 물고기로 묘사한 것입니다. 참조. (렘42:11-16,
렘43:10-14).


5절입니다. [또 내가 너와 네 강들의 모든 물고기를
광야에 던져 버려 두리니 네가 빈 들판에 떨어지겠고 너를 함께 거두거나 모으지 아니하리니 내가 너를 들의 짐승과 하늘의 날짐승에게 먹이로
주었노라.
](5). 하나님의 갈고리에 꾀인 큰 용은 강에서 들려져 광야에 던져졌습니다. 그의 비늘에 붙은 물고기들 역시 함께 던져져
버렸습니다. 이로써 이들은 들의 짐승과 하늘의 짐승들의 먹이로 주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집트와 그와 동맹을 맺었던 나라들은 철저히 약탈을 당했고,
포로로 끌려가고,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집트를 큰 용으로 말씀하심으로 우리는 역사적 사건을 예언적 사건으로 전환해서 볼 수 있게 됩니다.
용은 영적 존재요,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요한계시록 19장에 그대로 대입해 보십시오.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 안에 서서
하늘 한가운데로 날아가는 모든 날짐승을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만찬에 모여 왕들의 살과 총대장들의 살과
용사들의 살과 말들의 살과 말 탄 자들의 살과 자유로운 자나 매인 자나 작은 자나 큰 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
.]
(계19:17~18). 이집트에 연합했던 자들이 이집트와 함께 망해 버렸듯이 마지막 날에 마귀와 연합한 자들은 이와 같이 망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큰 용]의 나라인 이집트를 멸망케 하신 것과 같이 마지막 날 적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민족들을 이렇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6절입니다. [이집트의 모든 거주민들이 내가 [주]인 줄을
알리니 이는 그들이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집에게 갈대 지팡이였음이라
.](6). 이집트의 거주민들은 심판을 받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태양신 파라오가 주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주 하나님입니다. 알라가 주 하나님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 하나님이란 사실은 모슬렘 국가인 이들이 알게 됩니다.


이집트는 세상의 모형으로 나오는 국가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늘의
하나님 대신 세상의 이집트를 의지했는데, 아무 힘도 되어 주지 못한 ‘갈대 지팡이’에 불과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하늘의 하나님대신 땅의
그 무엇을 부르고 의지할 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친구든 친척이든 자신이 벌어 놓은 돈이든 조직이든
그 무엇도 힘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대적하시고, 세상의 통치자 마귀를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선포하시기 때문입니다. ‘큰 용’으로 예표되는 파라오가 도움을 의지하는 이스라엘에게 갈대 지팡이였듯이 세상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갈대 지팡이에
불과합니다. 세상은 의지하는 만큼 상처를 입습니다.


7절입니다. [그들이 너를 손으로 잡을 때에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어깨를 찢었고 그들이 네게 기댈 때에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허리가 움직이지 않게 하였느니라
.](7). 갈대 지팡이를
의지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손으로 잡으면 부러져 버립니다. 고이 부러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했던 사람이 넘어짐으로 어깨를 찢어
버립니다. 기대면 부러져서 허리를 다치게 해서 움직이지 못하는 불구자를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세상을 의지할 때 경험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를 가르쳐 줍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2:15).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음행입니다. 영적 간음입니다. 성도들의 영적 능력을 모두 빼앗아 가버리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주님에 대한 신실함이 파괴됩니다.


-세상과 친구가
되지 말라.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
](약4:4). 세상과 친구가 되는 순간 하나님과
대적하게 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세상과 친구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논리는 죄인들의 상투적인 변명입니다. 성도들은 세상과 분리되어야
세상을 비출 수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세상과 교회, 마귀와 하나님 중간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원수들(빌3:18)로서 행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동화되지
말라.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
](롬12:2). 세상에 동화되었던 롯을 보십시오. 세상을 사랑하고 친구가 되면 세상이
나를 닮아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 완전히 동화되어 버립니다. 주님은 세상을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4). 세상은 십자가에 못박아야 할 대상입니다.


8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내가 칼을 가져다가 네 위에 임하게 하고 네게서 사람과 짐승을 끊을 것인즉
](8).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칼을 가져가십니다.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칼뿐입니다. 하나님의 칼로 마귀를 멸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길들 중에서
으뜸이니 그를 만든 이가 자신의 칼을 그에게 가까이 댈 수 있느니라.
] (욥40:19). 이집트에는 주의 칼이 임했다는 것은 전쟁을
말합니다. 역사적으로는 바빌론에게 멸망한 것을 말합니다. 예언적으로는 주의 재림 때 임할 재앙을 말합니다. [그분의 입에서 예리한 칼이
나오니 그분께서 그 칼로 민족들을 치시고 친히 철장(鐵杖)으로 그들을 다스리시며 또 친히 전능자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즙 틀을 밟으시리로다.
](계19:15),
[그 나머지는 말 타신 분의 칼 곧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칼로 죽임을 당하니 모든 날짐승이 그들의 살로 배를 채우더라.](계19:21).
이 시대에 우리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마귀와 대적해야 합니다(히4:12). 우리는 모두 영적 전쟁을 치르는 군사들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검입니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라.](엡6:17).


9절입니다. [이집트 땅이 황폐하고 피폐하게 되리니 내가
[주]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그가 말하기를, 그 강은 내 것이요, 내가 만들었다, 하는도다.
](9). 이집트의 강은 ‘나일 강’입니다.
이들은 이 강을 매우 신성시했는데 이 강을 통해서 이집트는 농사를 짓고, 식수를 삼았기 때문입니다. 특이한 점은 “그 강은 내 것이요, 내가
만들었다”고 말하는 점입니다. 이집트가 언제 나일 강을 만들었습니까? 이 일은 고대의 일이 아니라 근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스완 댐을 만들어서
물길을 돌리는 바람에 이전의 나일 강과는 딴 판의 강이 형성되었습니다. 1905년 영국이 주도한 이 댐은 관개용수와 홍수 조절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후에 나세르 대통령은 소련의 원조를 받아 그 위에 하이 댐을 건설했습니다. 이 댐의 크기는 제방 길이 3.6 Km에 저수지의 총
길이가 500Km 나 됩니다. 이 때 신전들을 비롯한 각종 우상들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되자 유네스코에서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하여 이것들을
모두 옮기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이 댐 위에 고대에 만들어진 이집트의 우상들과 신전들이 하이 댐 위에 새롭게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 강은 내 것이요, 내가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강을 없애 버릴 것입니다. [바다에서 물들이 없어지겠고 강이
피폐하게 되어 마르겠으며 사람들이 강들을 돌려서 멀리 보내리니 방어하던 시내들이 다 없어져서 마르겠고 갈대와 부들도 시들겠으며 시냇가와 시내
어귀의 종이 갈대들과 시냇가에 심은 것이 다 시들고 사라져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 (사19:5~7). 나일 강과 아스완 댐, 그 위에
있는 하이 댐 등 인간들이 만든 강들, 시내들이 모두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10절입니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와 네 강을
대적하노라. 내가 이집트 땅을 /쳐서/ 수에네 망대로부터 이디오피아 경계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피폐하게 하며 황폐하게 하리라.
](10).
하나님께서 왜 이집트와 나일 강을 대적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사19:1) 이들을 내리치실 때 나일
강을 굽어 보며 ‘내가 만든 강’이라고 자랑하던 우상들은 떨게 됩니다. 댐이 폭파되어 ‘수에네 망대’에서 이디이오피아 경계까지 물이 넘치다가
모두 말라 버리면 이집트는 이제 살 수가 없게 됩니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나일 강을 끼고 성업하던 수산업도 망해 버립니다. 한 마디로
이집트 국가 경제는 도산되고 맙니다. 나일 강 유역에 그 유명한 목화(면화) 산업도 망해 버립니다. 나일 강에 의존해서 살던 그들이 강이
없어짐으로써 철저히 피폐하게 되고, 황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이사야는 [어부들도 애곡하며 시내에 낚시를 던지는 자들도 다
슬퍼하고 물 위로 그물을 던지는 자들도 기운을 잃을 것이며 고운 아마포로 /옷을/ 만드는 자들과 그물 제품을 짜는 자들이 당황할 것이며 또
고기를 잡으려고 수문(水門)과 연못을 만드는 자들이 다 그 목적한 것에서 낙담하리라
.] (사19:8~10)고 노래했는데 너무나 생생하고
사실적인 묘사입니다.


11절입니다. [사람의 발이 거기를 지나가지 아니하고
짐승의 발도 지나가지 아니하며 사십 년 동안 사람이 거주하지도 아니하리라
.](11). 나일 강의 상실로 인해 이집트는 사람이 살 수 없고
짐승도 살 수 없는 그런 곳이 되어 버립니다. 주님은 이 기간을 사십 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림의 때에 이집트와 이스라엘 및 중동 지역에는 큰
자연적 지각 변동이 있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산과 바다, 강이 재배치되는 정도의 강력한 변동이 있을 것입니다. 지진으로 인해서 땅이
솟아나고 갈라지고 가라앉는 등의 일을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이집트 땅의 일부는 황무지로 변하고 40년 동안 사람과 짐승이 살 수
없는 곳이 되고 맙니다.


12절입니다. [내가 이집트 땅을 황폐한 나라들 한가운데서
황폐하게 하며 그녀의 도시들도 피폐하게 된 도시들 가운데서 사십 년 동안 황폐하게 하고 이집트 사람들을 민족들 가운데로 흩으며 여러 나라로 흩어
버리리라.
](12). 하나님은 이집트를 황폐하게 만들어 버리시고, 도시들을 피폐하게 한 후에 이집트 사람들은 지상의 여러 민족들을
유랑하는 민족들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이집트는 앗시리아의 공격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기 시작해서 바빌론, 페르시아, 알렉산더에게 차례대로 정복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B.C 30년 경 로마는 이집트를 정복해 버림으로써 이후 700년 동안 풍성한 농산물과 광물들이
모두 로마에 수탈되고 맙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철학, 종교, 수학, 의학 등이 발달했지만 이집트 자체 문화의 발전이 아니라 로마에
의해 주도된 것인지라 이집트는 더욱 쇠락하고 말았습니다. 주후 640년경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단결한 아랍인들은 이집트를 로마로부터 해방시켰지만
이집트는 자유, 해방, 독립을 이룬 것이 아니라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사라센 제국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땅에서 난 농산물은
시리아와 이라크로 모두 수탈되어 버렸습니다. 이들은 급격히 이슬람화가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번영은 요원했습니다. 터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다음에는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에 의해 차례대로 정복되었습니다. 이들의 역사는 참으로 기구한 정도가 아니라 참담한
역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12절 말씀은 한 번 더 이들에게 닥칠 민족적 운명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 국가들에 대한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13절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십 년이 끝날 때에 이집트 사람들이 흩어져 /함께 거하는/ 백성들로부터 내가 그들을 모으되
](13).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이 모여들듯이 다시 모여듭니다. 결국 대환란 때 흩어졌던 이집트 사람들은 천년 왕국이 시작된 후에야 모여 든다는 것입니다. 천년 왕국
초기 40년 정도까지 이집트는 황폐한 상태로 있게 될 것입니다. 천년 왕국 때에는 모든 자연 환경이 회복되어 이들에게 있었던 저주도 풀려야 할
터인데 이들은 주님을 경배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 오지 않음으로 저주를 받습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모든 민족들 중에서 /살아/ 남은
모든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곧 만군의 [주]께 경배하며 장막절을 지키리라. 땅의 모든 가족들 중에서 그 왕 곧 만군의 [주]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주께서/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이집트 가족이 올라가서 그/곳에/ 이르지 아니하면 비를
받지 못하리니 곧 [주]께서 장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교도들을 치시는 재앙을 거기에 내리시리라. 장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모든 민족들이 받을 벌과 이집트가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 (슥14:16~19).




이 구절을 오늘날 우리에게 영적으로, 교훈적으로 적용해 봅시다. 주님은 자신을 경배하지 않는 민족에게는 비를 주시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현 시대에는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차별 없이 비를 내리시고, 햇빛을 주십니다. * 주님을 경배하지 않으면 비를 내리지 않는다. 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오 하늘들이여, 너희는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오 땅이여, 내 입의
말들을 들을지어다. 내 가르침은 내리는 비요, 내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내리는 가는 비요, 풀밭에 내리는 소나기로다.
]
(신32:1~2). 주님을 경배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에 와도 말씀이 단비를 받지 못합니다. 설교를 듣고,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해도 그 마음은
이슬조차 얻지 못합니다. 마음속에 들은 말씀이 싹이 맺고 자랄 수가 없습니다. 수분이 없으면 말씀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8:6에
이르기를,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수분이 부족하므로 곧 시들어 버렸고](눅8:6).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에
뿌려지고 그 위에 비가 내릴 때 우리에게 임한 말씀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와 거기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움이 돋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씨뿌리는 자에게 씨를 주고 먹는 자에게 빵을 주는 것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을 이루며 내가 그 말을 보내어 /이루게 하려는/ 일에서 형통할 것임이라.
]
(사55:10~11).


비란 무엇인가? 주님 자신입니다. [그가 베어 낸 풀 위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나기같이 내려오리니
](시72:6). 주님은 비처럼, 소나기같이 임하십니다.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해가 돋을 때의 아침 햇살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가 온 뒤 맑게 비침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는도다.]
(삼하23:3~4). 주님을 경배할 때 주님의 백성들 역시 그러합니다. [또 야곱의 남은 자들이 많은 백성들의 한가운데 있으리니 /그들은/
[주]께로부터 내려오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떨어지는 소나기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사람들의 아들들을 기다리지 아니하리라.
](믹5:7).
주님을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비를 얻을 수 없습니다. 비를 얻지 못한 풀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비’를 주시지 않습니다.


14절입니다. [이집트의 포로들을 다시 데려다가 그들을
바드로스 땅 곧 그들이 거주하는 땅으로 되돌아가게 하리라. 그들이 거기서 미천한 왕국이 되되
](14). 주님의 벌을 받아 비가 내리지
않던 땅에 다시 비가 내리고 주님의 저주가 걷히면 그들은 다시 자신들이 거주하던 땅으로 가게 됩니다. 그 따 이름이 ‘바드로스 땅’입니다.
이들은 강대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위가 미천한 왕국’이 됩니다. 이들은 고대 왕국이 멸망한 후로 한 번도 강성 대국이 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 태양신을 섬기던 그들이 결국 맞게 될 종국이 이것입니다.


15절입니다. [왕국 중의 가장 미천한 왕국이 되어 다시는
민족들 위로 자신을 높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을 줄어들게 하여 다시는 민족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할 것임이라.
](15). 이집트가
바빌론에 의해 멸망당하기 전까지 분명 다른 민족들 위에 자신을 높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이집트는 현재까지, 앞으로도 미천한 왕국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들이 어떤 정치 제도를 도입하고 경제 개발을 단행하고 교육에 모든 것을 투자해도 다시는 민족들 위에 자신을 높이는 일은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이쪽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의지할 만한 것들을 모두 낮추어 놓으심으로써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게 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큰 영적 교훈을 줍니다. 만약 우리가 이집트를 의지하듯이 무엇인가를 의지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무너뜨려 버리십니다.


16절입니다. [이집트가 다시는 이스라엘의 집의 신뢰가
되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집은 그들을 바라볼 때에 자기 불법을 기억하리니 내가 {주} [하나님]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
](16).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의지할 것이 아닌 것을 의지한 그들의 불법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이집트를 의지했고, 원조를 구했습니다. 특히 앗시리아와 바빌론의 침공 때 하나님을 버리고 이집트로 달려가
주님을 진노케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이집트는 의지할 무엇이 아닌 미천한 왕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이 의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것들이 모두 부러지고, 쇠해질 때에야 불법을 깨닫지 말고, 말씀을 듣는 바로 이 시간 깨닫고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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