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에스겔 47:1-12
요절: 에스겔 47:12
주님의 보좌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이 장면은 너무나 놀랍고도
아름답습니다. 조금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강은 문명의 발상지요, 강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산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큰 강이 흐르는
곳에는 어김없이 큰 도시와 민족과 국가가 형성되었습니다. 상식적인 질문 가운데 하나가 세계 4대 문명의 발원지와 연관된 강에 관한 것입니다.
나일 강을 중심으로 한 이집트 문명, 유프라테스 강을 중심으로 한 메소포타미아 문명, 갠지스 강을 중심으로 한 인더스 문명, 황하 강을 중심으로
한 황하 문명입니다. 국토 지리를 배울 때도 한국의 산맥과 더불어 4대 강(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에 대해서 배웁니다. 물론 남한에
국한해서 한 이야기지만 강을 따라 사람의 주거지가 결정됩니다. 강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읽을 때 에덴에서 강 하나가
흘러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강 하나가 에덴에서 나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개의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이라. 이 강은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니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이 강은 이디오피아 온 땅을 둘렀으며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이 강은 아시리아의 동쪽으로 흘렀고 넷째 강은 유프라테스더라.](창2:10-14). 강의 발원지, 수원지는 에덴입니다.
여기서 4개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에덴의 동산에서 발원되었던 강이 이번에는 성전의 어린 양 보좌를 근원지로 해서 강이 흘러 나옵니다. 성소에서
물이 흘러나오는데 이 물은 생명을 살리는 물입니다.
요즘 물 장사들이 많습니다. 약수, 생수, 광천수, 암반수,
증류수, 알카리수 등 무슨 물 이름이 그리도 많은지 계속해서 물 광고를 합니다. 우리 몸의 대부분은 물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약을 달일 때나
차를 다릴 때도 물을 가려서 썼습니다. 물의 중요성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한의학에서는 물의 종류를 32종류로 나누었는데 제가 자주 들은
것만해도 정화수(井華水, 새벽에 처음 길은 우물물), 한천수(寒泉水, 찬샘물), 국화수(菊花水, 국화 밑에서 나는 물), 납설수(臘雪水, 섣달
납향에 온 눈 녹은 물), 춘우수(春雨水, 정월에 처음으로 내린 빗물), 추로수(秋露水, 가을철 이슬) 등입니다. 그러나 산 중 깊은 곳에서
나는 물이든 나무 뿌리나 줄기를 잘라 받은 물이든 간에 이 땅에서 나는 물은 다시 목마른 물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는 물과 전혀
다른 물이 흘러 나는 것을 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1절입니다. [그 뒤에 그가 다시 나를 데리고 그 집의
문에 이르매, 보라, 그 집의 출입 통로 밑에서 물들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더니 이는 그 집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여 서 있었음이더라. 그 물들이
그 집의 오른쪽 곧 제단의 남쪽에서부터 흘러내리더라.](1). 성소에서 문자 그대로 물이 흘러나오고, 그 물은 강이 되어 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천년 왕국의 수도로 정해진 예루살렘에는 강이 흐릅니다. [한 강이 있으매 그 강의 시내들이 하나님의 도시 곧 지극히 높으신
이의 장막들이 있는 거룩한 처소를 즐겁게 하리로다.](시46:4). 과거나 현재는 예루살렘에 강 같은 강이 없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은 큰 강이 있는 땅이 아니라 비를 흡수하는 땅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가서 소유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을 흡수하는 땅이요,] (신11:11). 주님은 나일 강이나 유프라테스 강과 같은 큰 강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주님을 의지하고 비를 구하도록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땅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제 때에 주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즙과 기름을 거둘
것이요,] (신11:14). 하나님의 백성들은 땅이 아니라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은 하늘의 날씨가 그 날의 매출에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 것입니다. 가게에서 장사를 하신
분들은 날씨에 매우 민감합니다. 농부들만 하늘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하늘을 보고 살도록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천년 왕국
때에 이스라엘은 하늘을 보지 않아도 됩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의 보좌에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때에 비를 내려 주시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성전에 앉아
계십니다. 이제 유다의 모든 강에는 물이 흐릅니다. 토양이 비옥한 이 지역은 엄청난 수확을 거두는 지상 최고의 땅이 됩니다. [그 날에는
산들이 새 포도즙을 떨어뜨리고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리며 유다의 모든 강에 물이 흐르고 [주]의 집에서 샘이 흘러나와 시팀 골짜기에 물을 대리로다.](욜3:18).
이사야는 말하기를, [오직 영광스런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은 강과 시내가 있는 장소가 되실 것이요,](사33:21a)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지형이 변하고, 기후가 변하고, 땅이 변하고, 강이 변합니다. 예루살렘은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발원지가 됩니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나가되 그 반은 앞바다로 그 반은 뒷바다로 나갈 것이요,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슥14:8). 여기서
앞 바다는 사해를 말하고 뒷 바다는 지중해를 말합니다. 이 물이 흐르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나고, 나무는 과실을 맺습니다. 강물이 흘러 들어가면
사해는 더 이상 죽은 바다가 아니라 생명이 넘치는 바다가 됩니다(10).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이 본문을 택해서 설교를 하는 강단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가기를 소망합니다. 저 역시 그런 소망을 품고 기도합니다. 본문의 교리적 의미를 안후에 우리는 영적 적용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저 하늘에 계시지만 동시에 성도들의 몸 안에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몸 안에 계시면 성전 된 몸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물리적인 물이 아니라 영적인 생수가 흘러나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한 것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 (요7:38). 우리 몸 안에 계신 주님이 생수의 강의 발원지가 됩니다. 우리 몸에서 나가는
생수의 강들을 통해 목마른 혼들이 시원케 되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독사의 독입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돌무덤이라. 그들이 자기 혀로 속임수를 쓰나니 그들의 입술 밑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롬3:13).
참조-시140:3. 그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 나가지 않는 사람들은 그 입에서 독사의 독이 흘러나옵니다. 악독과 저주와 험담, 욕설, 비방과
쓴 뿌리 등이 나옵니다. 우리 입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쏟아 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우물이 되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하리라.](요4:14). 주님이 주시는
물은 주님께 나아와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물을 주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물은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입니다. 성령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며, 솟아납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살아 계시면 그 배는 샘솟는 우물이 되고, -[그러므로 너희가 기뻐하며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12:3)-, 흘러넘치는 강이 됩니다. 우리는 입으로 그 주님을 증거하고 찬양하고 선포하기만 하면
됩니다.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원천은 흐르는 시냇물과 같으니라.](잠18:4). 우리 입을 통해 배 속에서
흐르는 생수의 강들이 흘러 나가기를 빕니다.
2절입니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쪽을 향한 문의
길에서 나와 바깥 길로 나를 인도하여 동쪽을 바라보는 길 옆의 바깥 문에 이르니, 보라, 그 오른쪽에서 물들이 흘러나오매](2).
에스겔은 북쪽을 향한 문으로 나와 바깥 길로 해서 동쪽으로 바라보는 길옆으로 왔습니다. 그 오른 쪽에서 물들이 흘러 나왔습니다. 성전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이 물은 조금씩 흐르는 물이 아니라 강을 이루는 물입니다. 주님이 출입하시는 동문으로 물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생수의 근원이심을 보여 줍니다. 이미 주님께서 40년간 광야에서 물은 누구에게서 오는가? 실증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거기서 호렙에 있는 반석 위에서 너를 마주보고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 반석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하시매 모세가
이스라엘의 장로들 눈앞에서 그대로 행하니라.](출17:6).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에서 내린 비나 땅에서 솟아난 지하수나 흐르는 강이나
오아시스가 아니라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셨습니다.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온 /물을/ 그들에게 주어 마시게
하셨으며](시78:15). *반석에서=매우 깊은 곳에서. 이 물은 적은 양의 물이 아니었습니다. [또 반석에서 시냇물을 내사 물들이
강같이 흐르게 하셨으나](시78:16). [보라, 그분께서 반석을 치시매 물들이 쏟아졌고 시냇물이 흘러 넘쳤도다.](시78:20a).
[그분께서 반석을 여신즉 물들이 솟아나 마른 땅에 강같이 흘렀으니](시105:41).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고전10:4).
이들은 영적 음료를 마셨던 것입니다. 출애굽한 백성들과 함께 동행하신 하나님께서 생수의 근원이셨고, 주님으로부터 물이 나와 강을 이루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행한 죄악 중에 하나는 생수의 샘이신 주님을 버린
것입니다. [이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음이니 곧 그들이 생수의 샘인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물 저장고들을 판 것인데 그것들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저장고니라.](렘2:13). [오 [주]여,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여, 주를 버리는 자들은 다 부끄러움을 당하며
나를 떠나는 자들은 땅에 기록되리니 이는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주]를 버렸음이니이다.](렘17:13). 생수의 샘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는 영적, 도덕적, 교훈적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물리적, 육체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을 버렸을 때 가뭄과
기근을 당했습니다. 영혼이 곤비해졌을 뿐 아니라 타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을 찾으러 다녀야 했습니다. 생수의 근원을 버리면 그 증상은
다양하게 드러납니다. 어떤 이는 학문에, 어떤 이는 명예에, 어떤 이는 권력에, 어떤 이는 돈에, 어떤 이는 자녀 교육에, 어떤 이는 정욕을
찾아 채움 받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를 버린 채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저축해 두지만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저장고입니다. 주를 버린 채
열심히 운동을 하고, 약을 먹고 건강을 챙기지만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를 버린 채 가정의 안녕과 화목을 위해 함께 식사를 하고 캠핑을
다니지만 때가 되면 그것들이 모두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저장고란 사실이 드러나게 되며, 모래 위에 지은 집보다 더 약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 일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저장고에 불과합니다.
에스겔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물을 보았습니다. 성소에서 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짐승들도 물을 찾는 능력이 있는데 만물의 영장이라 자처하는 인간들은 생수의 근원이 누구로부터 나오는지,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살고 있습니다. 주님은 백성들에게 물이 있는 곳으로 부르셨습니다. 물을 주시는 이가 누구인지 선포하셨습니다. [그 명절의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목마른 자는 누구에게로
가야 합니까? 내게로 와서. [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참으로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치르지 말고 와서 포도즙과 젖을 사라.](사55:1). 하나님은 값없이 생수를 주시고자 부르십니다. 오라. 물로 나아오라.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을 부르십니다. 말씀에 기갈이 들린 이들을 부르십니다.
3절입니다. [손에 줄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이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 큐빗을 측량한 뒤에 나를 데리고 그 물들을 지나가니 그 물들이 발목에 이르더라.](3). 동쪽 문에서 물길을 다라 천 큐빗
지점에서 물들을 지나가니 물의 깊이가 발목에 이르는 정도였습니다. 성전 외곽 둘레의 한 변이 오백 큐빗인 점을 감안하면 에스겔이 선 지점은
거기서 다시 오백 큐빗 떨어진 어느 곳이 됩니다.
4절입니다. [다시 그가 천 큐빗을 측량한 뒤에 나를
데리고 그 물들을 지나가니 그 물들이 무릎에 이르며 다시 그가 천 큐빗을 측량한 뒤에 나를 데리고 지나가는데 그 물들이 허리에 이르고](4).
다시 에스겔을 데리고 천 큐빗을 더 가서 물들을 지나갔습니다. 이번에는 물이 더 허리에 이르렀습니다. 성소 문지방 아래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나가면 나갈수록 큰 강을 이루고 더욱 깊어집니다.
5절입니다. [그 뒤에 그가 천 큐빗을 측량하니 그것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되니라. 이는 그 물들이 솟아올라 헤엄칠 물이 되고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음이더라.](5). 다시 천 큐빗을 더
가서 강을 보았을 때 그 강은 에스겔이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3-5절까지를 주로 ‘성령 충만’의 정도에 비유하곤 합니다. 어떤
성도는 말씀과 성령에 은혜의 깊이를 깊이 경험하지 못한 채 발목까지 밖에 차지 못하고, 어떤 이는 무릎까지 차고, 어떤 이는 강처럼 온 몸이 푹
잠길 정도로 차고 넘칩니다. 발목까지 찬 사람들은 자신들이 개울을 걸어 다니기도 하고 뛰어 다닐 수도 있습니다. 물이 무릎까지 차면 어느 정도
조심을 하겠지만 자신의 힘으로 건너려고 합니다. 기도하거나 주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자신이 앞을 보면서 행합니다. 허리까지 차면 좀 겁을 먹고,
물속에서 몸이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에 휩쓸릴 수도 있고, 인생을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시골에서 강을 건너 학교를 다니면서 여름에 홍수가 질 때마다 허리는 고사하고 머리에 잠길 정도의 물을 건넌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의 물의 깊이가 되면 잔뜩 긴장을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날 때 그는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 전적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면 할수록 자신을 덜 의지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내가 기도하고, 성경 읽고, 교회 잘 다니고, 이런
저런 일을 하는 줄로 알았는데 이제는 주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혼자서는 기도조차도 할 수 없고, 성경 한 페이지조차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와 힘으로만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은 주님의 크신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전에는 신앙생활의 주체가 나 자신이었고, 주님이 조력자였는데 어느덧 주님이 주가 되고 나는 철저히 주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6-7절입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사람의 아들아,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고 나를 데려다가 강가로 돌아가게 하기에 이제 내가 돌아왔더니, 보라, 강둑의 이쪽과 저쪽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6-7).
에스겔을 데리고 물을 보여 주던 천사는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고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강둑의 이쪽과 저쪽에 있는 나무들입니다. 강둑의
나무들이야 말로 최상의 복된 자들입니다. 성경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들과 주를 신뢰하는 자들을 강둑에 심긴 나무들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복있는 사람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뜻대로 걷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조롱하는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주]의 율법을 기뻐하며 그분의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강가에 심은 나무가 제 철에 열매를 맺으며 또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무슨 일을 하든지 다 형통하리로다.] (시1:1~3)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 역시 강가에 심긴 나무와
같습니다. [[주]를 신뢰하며 [주]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가 물가에 심은 나무 같아서 그 뿌리를 강가에 뻗치고 더위가
오는 때를 보지 아니하며 그 잎이 푸르르고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으며 열매맺는 일을 그치지 아니할 것임이라.] (렘17:7~8).
우리는 강가에 심겨진 나무인가? 광야에 메마른 땅에서 말라 비틀어져가고 있는 나무인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생수의 강둑에 있는 나무는
열매를 맺으며, 더위가 오는 때를 보지 아니하고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그런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몇이나 됩니까?
이는 우리가 여전히 세상을 바라보고, 육신을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8절입니다. [그가 또 내게 이르되, 이 물들이 동쪽
지역을 향하여 흘러나와 사막으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바다로 들어갈 때에 물들이 치유(治癒)되리라.](8). 생수의 강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 그 바다가 치유되어 고기들이 살게 됩니다. 지금 이 바다는 북으로부터 요르단 강이 흘러들지만, 흘러든 물이 나가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도
사해의 수위는 계속 같은 수준을 유지합니다. 이유는 기후가 매우 건조하여 사해에서 증발하는 물의 양과 흘러들어오는 물의양이 거의 같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염분 농도가 보통 바닷물의 약 6배로 매우 높아 하구 근처 외에는 생물이 거의 살지 않습니다. 사해(死海), 즉 '죽음의
바다'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염분이 높은 사해의 바닷물은 밀도가 커서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라도 물위에 잘 뜰 수 있습니다. 요즘은
이곳의 물이 피부 미용에 좋다는 등의 말을 하면서 화장품 개발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 바다에 생수의 강이 흘러 들 때 물들이 치유되어 마실 수
있는 물이 될 것이고, 어류, 해조류 등의 생물이 풍성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 적용할 때 구원받지 못한 혼들은 빛이 없는 흑암 같고,
생명이 없는 사해 바다와 같습니다. 성령이 사람 안으로 들어올 때 그 사람은 치유를 받습니다.
9절입니다. [이 강들이 이르는 곳마다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이 살고 또 물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는 이 물들이 거기에 이르므로 그것들이 치유될 것임이라. 이 강이 이르는 곳에는 모든 것이 살
것이며](9).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은 생명을 살리는 물입니다. 이 물이 흐르는 곳마다 그것들이 치유됩니다. 이것은 성령의
사역입니다. 영은 살리는 것입니다. 육은 아무 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합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요3:6).
육에서는 난 것은 아무리 화려하고 위대해 보여도 그것은 육일뿐입니다. 육은 아무리 개발하고 개선해도 영이 되지 않습니다. 육은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도 육일 뿐 영이 될 수 없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영은 생명을 줍니다. [율법 조문은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기 때문이라.](고후3:6b).
생명수의 강물이 이르는 곳에는 모든 것이 살듯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이르는 곳에는 모든 것이 살아납니다. 성령은 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려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우리는 모두 영의 사역자들로서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10절입니다. [또 어부들이 그 위에 서되 엔겐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서리니 그 /지역들/이 그물을 치는 곳이 되리라. 그 /지역들/의 물고기가 그들의 종류대로 큰 바다의 물고기같이 심히 많으려니와](10).
엔게디는 사해 서해안이고 에네글라임은 사해 동편입니다. 한 마디로 사해 전체를 표현한 말입니다. 한국식으로 하자면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란 식으로
국토 전체를 표현하는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지금은 낚시도 할 수 없는 염해 바다인데 그 때는 그물을 치는 황금 어장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것이
생수의 강이 생명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이런 성령의 능력이 흘러넘치기를 빕니다.
11절입니다. [그 /지역들/의 수렁과 늪지대들은 치유되지
못하겠고 소금에 넘겨지리라.](11). 천년 왕국이라 해도 치유 받지 못한 땅이 있습니다. 치유되지 못하는 수렁과 늪지대들은 사해 남단의
소금 지대로 장차 불 못이 될 곳입니다.
12절입니다. [또 그 강가의 둑 위에는 이쪽 저쪽으로
먹을 것을 /맺는/ 모든 나무가 자라되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며 그 열매가 없어지지 아니하고 제 달에 새로운 열매를 맺으리니 이는 그
/나무들/을 위한 물들이 성소에서 흘러나왔음이라. 그 /나무들/의 열매는 먹을 것이 되며 잎사귀는 약이 되리라.](12). 여기서 말하는
나무는 계시록 22:1에 나오는 강과 나무가 아닙니다. 에스겔은 천년 왕국 시대를 말하고 있지만 사도 요한은 영원 시대의 새 예루살렘에서 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장면이 비슷하기 때문에 오해하기 쉽습니다. [또 그가 하나님과 어린양의 왕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정결한 강을 내게 보여 주니라](계22:1). 그러나 이 장면은 다른 장면입니다. 요한이 본 것은 영원시대의 새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오는
강입니다. 이 강은 사해로 흘러들지 않습니다. 새 예루살렘과 지상의 예루살렘은 완전히 다릅니다. 나무는 열매를 맺는 성도들을 예표 합니다.
열매는 먹을 것이 되고, 잎사귀는 약이 되는 그런 나무가 바로 성도들입니다. 우리가 맺은 열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그 열매는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먹습니다. 성도들은 영혼의 치료를 위한 약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치유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위로해 줄 수 있고, 힘을 줄 수 있고, 쓰러진 자를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의 혀는 건강을
줍니다. [칼로 찌르듯이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건강하게 하느니라.] (잠12:18)
성경에서 약(medicine)이란 표현이 총 4번 나옵니다. 세
번은 주를 떠난 백성들에게는 고칠 약이 없다는 말씀입니다(렘30:12-13). 첫째, 즐거운 마음입니다. [즐거운 마음은 약같이 좋으나
상한 영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잠17:22). 즐거운 마음은 어떤 좋은 약보다 더 강력한 치료제입니다. 주님과 주의 말씀으로 인해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는 일은 우리의 건강을 담보해 줍니다. 즐거운 말들 역시 뼈에 좋은 약과 같습니다. [즐거운 말들은 벌집 같아서 혼에
달고 뼈에 건강을 주느니라.] (잠16:24). 둘째, 성소에서 흘러나온 강둑의 나무들이 맺은 잎사귀입니다. 천년 왕국에서는 이 나무
잎을 따서 약으로 사용할 것입니다(겔46:12). 셋째,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치유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켜 세우시리라. 혹시 그가 죄들을 범하였을지라도 용서받으리라.](약5:15). 넷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 아들아, 내 말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들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한가운데
간직하라. 그 까닭은 그것들을 찾는 자들에게 그것들이 생명이 되며 그들 모두의 육체에 건강이 되기 때문이니라.] (잠4:20~22).
참조:잠3:7-8. 하나님은 우리의 건강을 위해 성경적인 건강법과 치유법, 좋은 약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좋은 약을 늘 상비해 두시고,
복용하시고, 건강한 영적 삶을 영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