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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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의 기도-


말씀: 다니엘 9:1-23

요절: 다니엘 9:24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명문의 기도를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민족을 위해 중보한 모세의 중보 기도나 전쟁터에서 해와 달을 멈춘 권위와 명령의 기도를 한 여호수아의 기도, 기도를 쉼으로 결코 죄를
범치 않겠다는 사무엘의 기도, 시편에 기록된 주옥같은 다윗의 기도, 성전 봉헌을 하면서 하나님께 드린 솔로몬의 기도, 배교한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을 드러내 주시기를 구한 엘리야의 기도 등은 우리에게 참된 기도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더불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니엘의 기도 역시 기도의 참된 모범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 주는 그런 기도입니다.


1-2절입니다. [메대 사람들의 씨에 속한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사람들의 영토의 왕으로 세워진 첫 해 곧 그의 통치 제일년에 나 다니엘이 여러 책을 통하여 [주]의 말씀이 대언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사 /알려 주신/ 그 햇수를 깨달았나니 곧 그분께서 예루살렘이 황폐한 가운데 칠십 년을 채우시리라, 하신 것이니라.]
(9:1,2).
1절에 나오는 시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다니엘은 B.C 538년 바빌론을 다스리던 메데의 다리오 통치 원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때,
다니엘의 마음은 환상으로 몹시 번민하였습니다. 그는 네 짐승의 환상과 “숫염소와 숫양”의 환상으로 먼 훗날이기는 하지만 자기 민족에게 닥칠
엄청난 재앙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에게 계시된 것들을 믿었습니다. 지금은 현재 포로로 잡혀와 반세기 이상을 이곳 바빌론에 살고
있는 자신의 백성들 즉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글들과 대언자들의 글을 가르치며 곧 있게 될 민족의 운명에 관해 깨달은 것입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서를 통해 자기 백성에게 주어진 바빌론 포로기간이 70년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예언이 역사의 등불이란 사실을 분명히 알고
믿습니다. 다니엘 역시 그러했습니다. 다니엘은 매일 하루도 쉬지 않고 하루 세 번의 기도를 드리는 기도의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연구하고 그 예언을 공부하는 말씀의 사역자란 사실을 봅니다.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기로(행6:4) 결단했듯이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념해야 합니다. 다니엘이 본 말씀은 예레미야 25장, 29장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온 땅이 폐허가
되고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빌론 왕을 섬기리라.]
(렘25:11). “거짓 대언자들”은 이 말씀을 반대했고,
잘못 가르쳤으며, 포로기간이 짧을 것이라고 백성들을 격려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포로기간이 긴긴 70년의 세월임을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
예레미야는 포로로 끌려가 바빌론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습니다. [나 만군의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하여 포로로 끌려간 모든 자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정원을 만들고 거기서 나는
열매를 먹으라. 너희는 아내를 취하여 아들딸들을 낳고 너희 아들들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들을 그 남편들에게 주어 그들로 하여금
아들딸들을 낳게 하고 그리함으로 너희가 거기서 늘어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너희는/ 내가 너희를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한 그 도시의
평안을 구하고 그것을 위하여 [주]께 기도할지니 이는 그 도시가 평안하여야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만군의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가운데 있는 너희의 대언자들과 너희의 점쟁이들이 너희가 속이지 못하게 하고 너희가 꾸고자 하여 꾼 꿈들에 귀를 기울이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너희에게 내 이름으로 거짓되이 대언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느니라. [주]가 말하노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빌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아보고 너희를 향한 나의 선한 말을 이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렘29:4-10).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분명하여서 읽는 그대로 믿는 이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예레미야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감 받은 대언자임을 알 수 있으며, 다니엘 또한 대언자이며, 그
자신도 예언을 연구하는 성경학도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그대로 믿었습니다. 우리도 다니엘처럼 부지런히 성경을 상고해야
하며, 성경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에 대해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또한 그 말하는 바를 믿어야 합니다.
다니엘은 자신이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온 B. C 606년이 포로기간의 시작이었으며, 이제 68년이 지나 2년 후면 유대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대언자 이사야가 포로가 된 유대인을 고국으로 돌려 보내줄 칙령을 내릴 왕이 고레스임을 예언해 놓은 것도
보았습니다(사44: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내 목자라. /그가/ 나의 기뻐하는 것을 다 행하리라, 하고 예루살렘에게는
이르기를, 너는 세워지리라, 하며 /성/전에게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놓이리라, 하는 자니라.]
(사44:28).


이제 포로기간은 2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때 다니엘은 기도와
말씀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글들(레26:40~45; 신30:1~10)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갔을지라도 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주께서 그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들의 땅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는 기도야 말로 바른 기도이며, 믿음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언제나 기도의 근거가 되는 말씀을
믿고, 붙들고 구하도록 해야 합니다. 능력있는 기도란 목소리를 높여 울며 구하는 그런 외적 자세가 아니라 말씀을 믿고 붙드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3절입니다. [내가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을 향하여 내 얼굴을 세우고 기도와 간구로 구하니라.]
(3). 다니엘의 기도는 성경의 여러 기도 가운데서도 가장
장엄한 기도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고백, 간구, 중보의 순으로 성경적 기도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가장 완벽한
인격의 소유자였으며, 의인이었던 그는 자신의 민족의 죄악을 자신의 죄악과 동일시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지기 건에도 하루에 세 번씩 늘
기도했으며, 사자 굴에 던져져서도 기도했을 사람입니다. 다니엘이 70주의 환상을 보고 나서도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의 저녁기도(오후 3시경)로
인해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이제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응답이 왔습니다(21). 우리도 다니엘과 같은 기도 생활을 영위한다면 사자 굴에
던져져도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는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자세로 다니엘은 자신의 얼굴을 하나님께 향하고, 금식하며, 기도와
간구로 구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뿌렸습니다. 다니엘의 겸손한 인간적인 변모를 볼 수 있습니다(3).


4절입니다. [내가 [주] 내 하나님께 기도하고 고백하며
이르기를, 오 {주}여,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명령들을 지키는 자들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이시여,]
(4).
다니엘은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는지 보십시오. 오늘날 성도들이 흔히 하는 기도의 처음 시작 부분과 비교해 보십시오.
다니엘에게 주님은 “나의 하나님”(my God)이셨습니다. “내가 주 내 하나님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주님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요, 주를 사랑하고 주의 명령들을 지키는 자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신약 성도들은 다니엘보다 더 친밀하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 또는 “아버지 하나님”하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성품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교제하는 이들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 한결 쉬울 것입니다.


5절입니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불법을 행하고 사악하게
행하며 주의 훈계와 주의 법도를 떠나 반역하였사오며]
(5). 다니엘은 모세 율법을 통해서 자신들의 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행한 불법, 사악하게 행한 것, 주의 훈계와 법도를 떠나 반역한 것을 알았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알고
회개하는 것과 말씀 없이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서 아는 죄의 회개는 분명 다릅니다. 많은 성도들이 회개를 할 때 그 회개가 참된 회개가 되지
못하는 것은 말씀의 빛 앞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을 기준으로 죄를 보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기준이 성경적이지 못하면 회개 역시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다니엘은 말씀을 연구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행한 범죄를 모두 깨달아 알았습니다.
요시야 왕을 보십시오. 그는 서기관 사반이 말씀을 읽을 때 죄를 깨달았습니다. [또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보여 주며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었나이다, 하고 왕 앞에서 그 책을 읽으매 왕이 율법 책의 말씀들을 듣고는 자기 옷을 찢으니라.]
(왕하22:10~11).
말씀의 빛이 들어오면 이전에는 죄인 줄 몰랐던 것들까지 환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백과 회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무릎을 굻게 됩니다.


6절입니다. [우리가 또한 주의 종 대언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왕들과 우리의 통치자들과 우리의 조상들과 그 땅의 모든 백성에게 말한 것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나이다.]
(6). 유다가
범한 가장 큰 죄는 주의 종 대언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말한 것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우상 숭배나 마술하는 죄와 같습니다(삼상15:23). 이들은 특히 대언자 예레미야의 말을 지독히도 배척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때부터
줄기차게 주의 말씀을 대언했지만 그들은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유다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의 제십삼년부터 이 날 곧 제이십삼년까지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므로 내가 너희에게 일찍부터 일어나 말하고 말하였으나 너희가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주]께서 너희에게 자신의
모든 종 대언자들을 일찍부터 일어나 보내시고 보내셨으나 너희가 주의하여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
(렘25:3~4).
그들은 도리어 거짓 대언을 하며 예레미야를 대적했고, 주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렘28:3-4).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주]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모든 일을 행하였으므로 이제 내가 너희에게 일찍부터 일어나 말하고 말하였어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고 내가 너희를 불렀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하였도다.]
(렘7:13). 죄의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와 불법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 죄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하나님께 어떤 죄가 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웃에게 행한 죄라 할지라도 먼저 그것이 하나님께 어떤 죄가 되는지
발견하고 “내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7절입니다. [오 {주}여, 의는 주께 속하고 당황한
얼굴은 우리에게 속함이 이 날과 같아서 /그것이/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주민들과 가까운 데나 먼 데 있는 온 이스라엘 곧 주께서 쫓아내신
모든 나라에 있는 자들에게 속하였사오니 그 까닭은 그들이 주를 대적하여 범법한 그 범법 때문이니이다.]
(7). 다니엘은 민족의 수치,
당황한 얼굴에 대한 원인과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그들을 주를 대적하여 범범한 그 범법 때문이니이다.” 이것이 대답입니다.
죄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민족의 수치요, 그들을 수치스럽고 당황하게 합니다. [의는 한 민족을 높이거니와 죄는 어느 백성에게나 수치거리가
되느니라.]
(잠14:34)는 말씀대로입니다. “가까운 데나 먼 데 있는 온 이스라엘”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전쟁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각
지역, 아시아, 유럽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먼데 있는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이는 이 약속이 너희와 너희 자녀와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기 때문이라, 하고]
(행2:39)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주님과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유대인들입니다. 반면 이방인들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공영권(共榮圈) 밖에 있던 외인들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낯선 자요,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떨어져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2:12~13).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십니다.


8-9절입니다. [오 {주}여,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사온즉
당황한 얼굴은 우리와 우리의 왕들과 우리의 통치자들과 우리의 조상들에게 속하며 비록 우리가 주께 반역하였을지라도 긍휼과 용서는 {주} 우리
하나님께 속하였나이다.]
(8-9). 다니엘의 회개의 기도는 철저히 “주께 범죄하였음”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다니엘은 주께 범죄, 주를
대적, 주의 말씀에 불순종 한 일, 주께 반역함 등 계속해서 주님 앞에서 죄를 자백하고 또 자백합니다. 이는 긍휼과 용서가 주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1:9)란 말씀과 일치합니다. 우리는 모든 죄가 다 주님께 범죄한 것이요, 주께 반역한 것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자신의 문제, 우리 가족의 문제, 당사자의 문제로 치부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죄란 죄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주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손해 배상을 하고, 당사자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화해했다고 다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죄를 범하고 오랫 동안 그 죄를
숨겼습니다. 그가 나단으로부터 죄에 대해 책망을 받았을 때 “내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외친 것은 그 죄가 일차적으로 주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나, 형제간에 다툼이나 시기와 같은 문제도 결국 “주님께 범죄하였음”을 알고
자백해야 합니다.


10-11절입니다. [우리는 [주] 우리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여 주께서 주의 종 대언자들을 통해 우리 앞에 세우신 주의 율법 안에서 걷지 아니하였나이다. 참으로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그것을/ 떠나서 주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맹세와 저주가 우리 위에 쏟아졌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10-11). 우리는 다니엘처럼 회개해 본 적이 있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율법 안에서 걷지 아니하였나이다.”, “참으로 주의 율법을 범하였나이다.”,
“주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이와 같은 진실한 고백이야 말로 참된 부흥의 기초입니다.
회개 없는 소생은 없습니다. 회개 없는 새로움은 없습니다. 회개 없는 영적 회복(부흥)은 없습니다. 회개없는 주님과의 교제는 없습니다. 회개없는
죄사함은 없습니다. 회개없는 깨끗함, 회개없는 거룩함은 없습니다. 이런 자백과 죄에 대한 시인이 없이 주님과의 깊은 친교를 바라고, 기도에 대한
놀라운 응답을 기대하는 것은 황당 그 자체입니다. 다니엘은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맹세와 저주가 우리 위에 쏟아졌음”을 알았습니다.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와 있는 것이 정치, 경제, 국방, 외교의 문제가 아니라 죄 문제임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12절입니다. [주께서 큰 재앙을 우리 위에 내리사 우리와
우리를 재판하던 재판관들을 치시면서(against) 하신 말씀을 확증하셨사오니 이는 온 천하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 같은 것이 일어난 적이
없었음이니이다.]
(12). 하나님께서 왜 재판관들을 대적하셨습니까? 그들이 율법대로 공의로 재판하지 않고 비성경적, 반성경적 재판을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뇌물을 받아서 재판을 굽게하는 것은 기본이려니와 신성 모독이나 우상 숭배, 마법, 살인, 음행 등에 대한 재판 역시 거짓
증인들의 증언대로 재판하거나 권력의 눈치를 보기 일쑤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소위 기독교 국가라 표방하는 나라들의 재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대법원은 종교의 평등, 차별 금지 등을 내세워 학생들이 공립 학교에 성경을 가져오는 것, 기도하는 것까지 금지하는 판결을
내립니다. 낙태가 합법이란 판결을 내립니다. 하나님께서 재판관들을 치시고 성경에 하신 말씀을 확증하시는 이유입니다. 유대와 예루살렘에 큰 재앙을
내리시고, 기록된 말씀을 확증하셨는데 이는 이전 역사에 단 한 번도 없었던 큰 재앙이었습니다. 성전이 불타고, 예루살렘이 황폐화되고, 모든
민족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하나님은 참된 재판관이시며, 심판자이십니다. 이 세상에 많고 많은 도시들이 있지만 예루살렘에 일어난 일 같은 것이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13절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돌이켜서 우리의 불법들에서 떠나 주의 진리를 깨닫고자 하여 [주]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지 아니하였나이다.]
(13).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재앙이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불법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포로로 잡혀간
땅에서도 회개하지 않았음을 에스겔서를 통해 잘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죄를 깨닫고 돌이키는데는 무려 70년이란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주의 진리를 깨닫고자 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주의 진리를 알고자 하지도 않는 이 마음이야 말로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을 찾지도 않는 것이야말로 완전한 배교입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이 자기 얼굴에게 증거하나니 그들이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주] 자기들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그분을 찾지도 아니하는도다.]
(호7:10). 이 죄야말로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재앙을 당한 백성들이 전혀 회개하지 않는 장면을 봅니다. [사람들이 큰 열기로
태워지매 그들이 이 재앙들을 다스리는 권능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 다섯째
천사가 자기 대접을 짐승의 자리 위에 쏟아 부으매 그의 왕국이 어둠으로 가득하고 사람들이 아픔으로 인하여 자기 혀를 깨물며 또 자기의 아픔과
헌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모독하고 자기 행실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계16:9~11). 이것이 죄인들의 특징입니다.


14-15절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 재앙을
지켜보시다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셨사오니 이는 [주] 우리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모든 일에서 의로우시되 우리가 그분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오 강한 손으로 주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 날과 같이 스스로 명성을 얻으신 {주}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는 범죄하였고 사악하게 행하였나이다.]
(14-15). 비록 재앙이 백성들에게 임하였더라도 문제는 백성들에게 있는 것이지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의로우십니다. 6일 전쟁의 영웅이었던 이스라엘의 모세 다얀 장군은 말하기를,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닥칠지라도
모든 잘못은 우리에게 있고 하나님께는 아무 책임도 없으시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옳으시다.”라고 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이는 주
우리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모든 일에서 의로우시되”란 고백대로 주님은 무엇을 하든지 다 의롭습니다. 죄에 대한 다니엘의 고백은 끊일 줄
모릅니다.


16절입니다. [오 {주}여, 간청하옵나니 /주는/ 주의
모든 의를 따라 주의 분노와 주의 격노를 돌이키사 주의 도시 예루살렘 곧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들과 우리 조상들의
불법들로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우리의 사방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치욕거리가 되었음이니이다.]
(16). 죄의 자백을 하던 다니엘은
이제 주님께 필요를 간청했습니다. 간구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주의 모든 의를 따라”입니다. 우리의 의, 나의 의가 아니라 “주의 의를
따라”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롬3:21, 10:4).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의 근거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주님의 의를 따라 우리는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의 이 기도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주님을 배척하고 죽임으로써 주의 분노와 격노를 돌이키기는 고사하고 더욱 가중시켜
버렸습니다.


17절입니다. [오 우리 하나님이여, 그러하온즉 이제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이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빛을 비추게 하옵소서.]
(17). 다니엘의 간구는 우리의 기도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의 간청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를 위하여’입니다. 모든
믿음의 용사들이 그러했듯이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은총을 구할 때 무엇을 위해서 구하는가?
기도의 동기와 목적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니엘의 기나긴 기도를 모두 기록해 두신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이요, 본으로 기록해
두신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의 기도가 무엇이며, 간구의 근거와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 등등에서 탁월한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18절입니다. [오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주의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주의 눈을 여사 우리의 황폐하게 된 것과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도시를 보시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우리의 간구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의로 인함이 아니요, 오직 주의 크신 긍휼로 인함이니이다.]
(18). 다니엘이 간구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의로
인함이 아니요, 오직 주의 크신 긍휼로 인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간구를 드릴 때 그 근거는 오직 이것입니다. 때로 어떤 성도들은 자신이
지난 주, 지난 달에 그 어느 때보다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당당히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가르쳤고, 봉사했고,
구제했고 등등을 근거로 주님께 구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은혜와 보좌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분의 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
(히10:19).
바른 기도, 응답 받는 기도의 근거는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긍휼에 기초한 간구입니다.


19절입니다. [오 {주}여, 들으소서. 오 {주}여,
용서하소서. 오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오 내 하나님이여, 주를 위하여 지체하지 마옵소서. 이는 주의 도시와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기 때문이니이다.]
(19). “오 주여, 오 주여, 오 내 하나님여”란 짧고도 간절한 부름은 성경에 일관적으로 나오는
기도의 표현입니다. 오늘날 이곳 미국에서 사람들이 흔히 외치는 “Oh, my God”은 성경에 나오는 “오 주여, 오 내 하나님이여”란 표현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성경에 원망이나 불평으로 “오 나의 하나님”이라 부른 예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에는 완전히 불평과 원망, 놀람을 표할
때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다시 한번 “주를 위하여” 간구했습니다. “주의 도시, 주의 백성, 주의 이름” 등 온통 모든 것이 다
주님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니엘이 “자기 자신을 죄악의 이스라엘”과
일치시키고 있음을 봅니다. -“보소서, 백성들이 죄를 지었나입니다”가 아니라,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불법을 행하고 사악하게 행하며 주의 훈계와
주의 법도를 떠나 반역하였사오며 우리가 또한 주의 종 대언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왕들과 우리의 통치자들과 우리의 조상들과 그 땅의 모든
백성에게 말한 것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나이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부끄러운 사실들을 남김없이 고백했으며, 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수치의
얼굴이 우리에게 돌아오는도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이 모든 재앙이 모세의 율법을 거역하고 주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이나 자기 백성이 행한 어떤 의에 기존해서 기도하거나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집트에서 백성을 구출해 내신 주님의
자비와 은혜에 기초해서 간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의 모든 의에 따라 주께 간구하였으며, 주님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구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주의 도성과 주의 백성, 성소와 황폐한 땅이 회복되도록 하기 위해 백성들을 구원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이 모든 기도의 핵심은
“그들 자신의 존엄이나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드려지고 있습니다.


20-23절은 기도의 방해자로 등장하는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악에 대한 정보가 나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지상 세계만이 전부가 아님을 압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이 있습니다.


20절입니다.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주] 내 하나님 앞에서 간구를 드릴 때에]
(20). 다니엘이 기도하고
있을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 쓰고 장장 3주에 걸쳐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기도가
얼마나 강렬하고도 간절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방해가 없었다면 그는 계속해서 응답이 올 그 때까지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21절입니다. [곧 참으로 내가 기도를 드리며 말할 때에
내가 처음에 환상 속에서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신속히 날아가도록 /명령을/ 받고 저녁 봉헌물을 드릴 즈음에 내게 손을 대더니]
(21).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에 직접 개입하시는 일은 좀처럼 흔치 않습니다. 이 경우는 매우 특별한 예입니다. 기도가 중단되게 된 때는 저녁 예물을
드릴 즈음이었으며, 오후 3시경이었습니다. 바빌론에는 성전이 없었으며,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도 이미 박살나고 없었으나, 다니엘은 아주 어릴 때
배운 성전의 의식에 따라 성전 예배의 시간을 준수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다니엘의 신앙생활의 일면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 왔다는 특별한 설명이 여기 나와 있습니다. 가브리엘은 분명히 천사였지만 다니엘은 “그 사람 가브리엘”이라고 말함으로써 ‘사람’임을 밝히고
있음을 볼 때, 가브리엘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음에 틀림없습니다. 천사들이 사람에게 나타날 때는 항상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납니다(창18:1,2).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온 이유는 ‘다니엘이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우주에서 가장 크고 존엄하신 성부, 성자, 성령님과 하늘의 천사들이 이 땅 위에 존재하는 한 늙은 노인 다니엘을 그토록 높이 평가하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천사 중에서도 상당한 지위에 있는 가브리엘을 직접 보낼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내가 처음에 환상 속에서 본 그 사람”(21)이란 말에서,
기도를 시작할 때 성경에서 기록되지 않은 어떤 것을 환상을 통해 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에게 설명해 주지 않는 환상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만약 성경 상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을 다니엘이 본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70째 주에 관한 것임을 간단히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70째 주에 대한 환상은 어떤 면에서든지 70년간의 바빌론 포로기간과 연관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기도 내용을 살펴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70년의 포로 생활”이 “70주”의 기나긴 역사의 한 모형임을 설명해 주기 위해 보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70주의 역사적 연대기적 시간은 명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70년의 포로기간이 끝난 뒤에야 귀환할 수 있듯이 490년간의 방황이 있고 난
후에야 이스라엘은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구체적인 예언입니다.


22절입니다. [그가 내게 알리며 내게 말하여 이르되, 오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능숙함과 깨달음을 주려고 나아왔느니라, 하니라.]
(22).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능숙함(skill)과 깨달음을
주기 위해 가브리엘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환상을 깨닫는 일은 우리의 노력이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셔야 가능합니다.
주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진리를 알게 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1:17).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세상의 일들을 미리 알 수 있도록 천사와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23절입니다. [네 간구가 시작될 때에 명령이 나왔으므로
내가 네게 알리려고 왔나니 이는 네가 크게 사랑 받는 자이기 때문이니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깨닫고 그 환상을 깊이 생각할지니라.]
(23).
다니엘은 3절부터 금식하며 죄를 자백하는 기도를 하다가 16절에 와서 간구를 시작했는데 그 때에 하나님의 명령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이
기도하는 것을 보시고 가브리엘을 속히 보내신 것은 다니엘이 “크게 사랑 받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가브리엘은 24절부터 70째 주에 대한 말씀을
해석해 주고, 다니엘에게 깨달음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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