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 70이레 -

말씀: 다니엘 9:24-27요절: 다니엘 9:24-27

“70주(이레)”의 환상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묘사된 가장 중요한 '계시'입니다 예언적 연대기의 해석에서뿐만 아니라 진리의 성경들을 푸는 핵심 열쇠입니다. “70주”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본토에 거주할 시기를 말해 줄 뿐 아니라, 현재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다시 모여 자신들의 역사를 회복하며 “주 예수그리스도의 재림”때 까지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칙령을 받게 될 것입니다.

24절입니다. [/주께서/ 네 백성과 네 거룩한 도시에게 칠십 이레를 정하셨나니 이것은 범죄가 그치고 죄들이 끝나며 불법에 대하여 화해를 이루고 영존하는 의를 가져오며 환상과 대언을 봉인하고 또 지극히 거룩하신 이에게 기름을 붓고자 함이라.](24). 우리는 24절에서 70주의 목적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목적은 6가지입니다. 첫째, 범죄가 그치고, 둘째, 죄들이 끝나며 셋째, 불법에 대하여 화해를 이루고(To make reconciliation for iniquity)1) 넷째, 영존하는 의를 가져오며 다섯째, 환상과 대언을 봉인하고 여섯째, 또 지극히 거룩하신 이(곳)에게 기름을 붓고자 함이라. 이것이 70이레의 목적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한 가지 그 말씀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범죄가 그치고. 이 여섯 가지는 모두 다니엘의 백성 즉 유대인과 연관되어 있으며, 예루살렘과만 관계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70주는 이방인이나 교회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합니다. *네 백성과- 이스라엘(유대인들)을 말합니다. 네 거룩한 도시에게(예루살렘). 26절의 묘사대로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야(예수 그리스도)가 끊어질 것이며, 그 때에 죄 들을 종결”(히10:12)시키시고, “불법을 단념”시키셨습니다(롬5:6-10). 이는 온 세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위해 죽을 것이라는 “대속”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것은 온 세상이 아닌 한 종류의 민족(유대인)의 불법과 죄를 제거하고 없앤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민족적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제거되지 않았고, 불법에 대한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둘째, 죄들이 끝나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의미하는 구절입니다. 어떤 성경에서는 난외주를 달아 놓고서, “죄들을 봉인하며”라는 말을 써 놓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들을 제거하고, 내가 그들의 죄들을 없애리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구원자”(Deliverer)가 와서야 이루어 질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는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셋째, 불법에 대하여 화해를 이루고(To make reconciliation for iniquity). 여기서 다시 “이스라엘의 불법”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둡시다. “불법”(iniquity)이란 사악함(wickedness), 불의(unrighteousness)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사야 53:6절에서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도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세대에서 유대인들은 한 민족적 단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현재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고자 한다면, 그는 자신의 민족을 포기하고,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몸“(교회)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갈3:26-28, 골3:10,11).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이 완성되고, 그분 앞으로 들려 올라갈 때에, 유대인들은 한 개개인이 아닌 민족적으로 그들이 찌른 그분을 보게 될 것이며(계1:7) 한 날에 모두 회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날이 이스라엘이 태어난 날이 됩니다(사66:8). 이 날이 바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거민들에게 죄와 불결을 씻는 샘이 열리게 되는 날입니다(슥13:1).

넷째, 영존하는 의를 가져오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땅에 천년 왕국을 세우실 때까지 “영원한 의”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허물들이나 죄들이 종결될 수 없으며, 이스라엘의 집과 새 언약을 맺으실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그 날들 이후에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 /중심/부에 두고 그들의 마음 속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 다시는 그들이 각각 자기 이웃이나 자기 형제를 가르쳐 말하기를, /너는/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의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다 나를 알 것임이요, 또 내가 그들의 불법을 용서하고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할 것임이라. [주]가 말하노라.](렘31:33,34).

다섯째, 환상과 대언을 봉인하고. “환상”과 “예언”들이 유대인에게 봉인되지만,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에 대해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눈멀게 된다는 것이라.](롬 11:25). 이스라엘의 죄과들이 종결되고 그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할 때, 이제는 더 이상 계시나 환상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되 대언은 있다 해도 없어질 것이요, 타언어도 있다 해도 그칠 것이며 지식도 있다 해도 사라지리니 이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대언하나 완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이 없어질 것임이라.](고전13:8-10). “환상”과 “예언”들이 유대인들에게만 한정되었으며, 모든 예언과 환상들이 그들에게 성취된 후에는 이것들이 그들에게 필요치 않을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언과 환상들은 보존되기 위해 봉인되었습니다.

여섯째, 또 지극히 거룩하신 이(*곳)에게 기름을 붓고자 함이라.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지극히 거룩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므로 그분이 침례인 요한에게 침례 받으실 때 성령을 받은 것을 일컫는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초림 때 성취된 말씀이 됩니다. 문맥적으로 말이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말씀이 “거룩한 이”가 아닌 “거룩한 곳”이며 천년 왕국 때에 건설될 “에스겔의 성전”을 가리키고 있다고 말합니다(겔41:1-42:20). 우리는 이 문제를 간단히 풀 수 있습니다. *the most Holy. 일반적으로 장소를 가리킬 때는 “the most holy place”에서 holy는 소문자로 place는 이탤릭체로 처리합니다. 지성소란 뜻입니다. 킹 제임스 성경에서 "the most Holy"라고 대문자로 처리하고 뒤에 아무 말도 없는 것은 천년 왕국의 지성소에 영광의 구름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왕으로서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아 나타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출13:21,22), 후에 성막이 세워졌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지성소에 머물게 되었으며 “언약궤” 위의 두 그룹들 사이에 거하셨습니다(출 40:34,35; 출 10:22-25:10; 민 7:89). 솔로몬의 성전이 지어졌을 때, 하나님의 임재가 그 거룩한 곳에 가득 차게 되자 제사장들은 서서 섬길 수 가 없었습니다(왕상 8:10,11). 에스겔 대언자는 “주의 영광”이 그 집(The House-성전)을 떠나는 것을 보았음을 기탄없이 말하고 있습니다(겔9:3). ‘주의 영광’은 에스겔 11:23절에서 “그 도시”(예루살렘)로 다시 되돌아옵니다. 환상 가운데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하심이 천년 왕국 기간 중에 동쪽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겔43:1-6). 그러므로 주의 성전이 재건될 때 “주의 영광의 임재”하심이 되돌아오고, 주님께서 친히 지극히 거룩한 곳(지성소)에 친히 거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친히 임재하시면 거룩한 도시(예루살렘)는 그 자체 이름이 [주께서 거기 계시다]가 됩니다. 그러므로 the most Holy는 인물과 장소를 모두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주의 영광이 떠나시고 주님께서 친히 영광의 구름과 함께 성전에 돌아오는 이 사이 기간이 바로 “이방인의 때”입니다. 70주의 모든 목적들이 미래에 있을 역사적 예언이며, 70주는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재림으로서 막을 내립니다.

25절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알고 깨달을지니라.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축하라는 명령이 나가는 때로부터 통치자 메시아에 이르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있을 것이요, 이 곤란한 때에 거리와 성벽이 다시 건축될 것이며] 70이레는 문자적으로 우리는 이 말씀을 70×7로 읽어야 합니다. “주(week)”란 말은 잠깐 유보해 두고, 성경을 읽어봅시다. 히브리어로 “7”이란 말에 가장 적합한 단어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7”이라고 하며 7일이 될 수도 있고, 7주가 아니면, 7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7“주”(week)란 정의는 문맥을 통해서 얻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영적 세계나 물질세계나 모두 “일곱 체계”(laws of sevens)로 이루어져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다 같은 분에게서 출발했으며, 한 분 하나님이 기원임을 설명해 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자연 세계는 하나님께서 6일간 일하시고 7일째 쉬게 하셨습니다. 7이란 숫자는 성경 전체를 통해 가장 기본이 되는 수입니다. 7일 체계, 7월 체계, 7년 체계, 70주, 7천년 체계가 모두 성경에 나오는 구조이며, 모든 시대는 7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은 종말의 책이라 할 수 있는데, 7로 구분되어져 있습니다. 1. 일곱 교회 2. 일곱 봉인 3. 일곱 나팔 4. 일곱 인물 5. 일곱 호리병 6. 일곱 심판 7. 일곱 개의 새로운 것들. “일곱”이란 수는 완전한 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수인 3(성부, 성자, 성령)과 세상의 수(4계절, 네 방향)인 4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연 세계와 성경이 모두 “일곱 체계”로 되어 있다면, 시대와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하나님의 예언적 역사에도 어떤 “시간적인 구성요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여, 그 때에 이스라엘에 그 왕국을 회복하시겠나이까?” 물었습니다. 주님은 즉시, “너희에게는 그 때와 시기(Times or seasons)를 알게 하신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한에 두셨느니라”(행1:6,7)고 말씀하고 계심을 통해, 하나님의 예언의 시간이요, “때(times) 와 시기(seasons)”가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갈라디아서 4:4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때”에 맞춰 우리에게 오셨음을 봅니다. [그 때가 차니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을](갈4:4).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때에 맞춰서 일어나고 있음을 다른 말씀들을 통해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성취된 예언 가운데 어떤 것도 정해진 때에 정확히 일어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미래의 모든 예언된 사건도 정확한 시점에 정확하게 발생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언적 연대기에서 우리는 ‘시’와 ‘날’, ‘주’, ‘달’, ‘년’,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정확하게 나눕니다. 그렇다면, 이 같이 나눈 ‘때’ 그 시간의 단위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한 해석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민수기 14:34절을 읽어 보자.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 수 곧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 년 동안 너희가 너희 불법들을 담당할지니 이로써 내가 약속을 깨뜨린 것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민 14:34). 이스라엘의 불신에 대해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은 하루를 일 년으로 계산하여 40년간 광야에서 방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으로 정탐을 간 40일의 기간을 40년으로 징계 받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시간 계신 방법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 4:6절을 보라. [...내가 네게 하루를 일 년으로 정하였느니라.](겔4:6b). 하나님의 예언적 연대기의 시간적 요소를 볼 때, 하루는 일 년에 해당합니다. 이 원칙을 70주에 그대로 적용해 보면 490일이 490년이 됨을 볼 수 있습니다. 9:25절에 [그러므로 알고 깨달으라. 예루살렘을 복원하고 건축하라는 그 명령이 나오는 때부터 메시야 통치자까지 칠 주와 육십이 주가 될 것이요, 그 거리와 그 성벽이 재건되리니 곧 고난스런 때들이라.](25). 즉 7주와 62주란 69주입니다. 예언적 연대기로 볼 때 69주란 483일인데 결국 483년입니다. *핵심은 “예루살렘을 복원하고 건축하라는 그 명령이 언제 나왔는가? 메시야 통치자까지란 말씀이 메시야의 탄생을 말하는가? 아니면 특정 사역의 시점이나 죽음을 말하는가?” 등입니다.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그러므로 알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신 이 말씀을 우리는 다니엘만큼 잘 깨달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70주의 출발점은 언제인가? “70주”의 기간을 연구함에 있어서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시작점을 찾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저마다 약간의 견해차가 있습니다. 바빌론 포로 생환 후에 예루살렘과 성전을 재건하라는 칙령이 모두 4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 칙령은 B. C 536년 고레스에 의해 내려졌습니다. [이제 페르시아 왕 고레스 제일 년에 주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영(靈)을 움직이시매 그가 자기의 온 왕국에 선포도 하고 또 글로도 기록하여 이르되,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라. 하늘의 주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왕국을 내게 주시고 또 내게 명하사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에 자신을 위하여 집을 건축하게 하셨나니 너희 모든 사람 가운데 그분의 백성인 자가 누구냐? 그는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라. 그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니 (그분은 하나님이시요,) 그분의 집은 예루살렘에 있느니라. 그 남은 자가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금과 은과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자원 헌물을 드릴지니라, 하였더라.](에스라1:1-4). 이 칙령은 역대기하 36:22,23에 의해 확증됩니다.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의 집’에 대한 건축에 관한 기사만 있을 뿐 그 어디에도 [그 도시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말이 단 한 마디도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단지 “주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재건하라는 명령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들은 고레스가 왕위에 오르기 176년 전에 이미 이사야 대언자를 통해 예언된 이사야 44:28절에 의해 해석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내 목자라. /그가/ 나의 기뻐하는 것을 다 행하리라, 하고 예루살렘에게는 이르기를, 너는 세워지리라, 하며 /성/전에게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놓이리라, 하는 자니라.](사 44:28). 이 말씀은 이방 왕인 고레스가 들었다면 매우 경이롭게 여겼을 말이었을 것입니다. 고레스의 칙령이 떨어지자마자 50,000명의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했고(에스라2:64-65), 그들은 제단을 세우고 희생제를 드렸고, 절기들을 지키기 시작했으며, 성전 건축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대적자들로 인해 성전 건축은 계속 지연되었습니다. 고레스는 자신의 명령에 성전 재건에 대해서만 언급했을 뿐 예루살렘 재건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예언과 고레스의 칙령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고레스의 칙령은 예루살렘이 아닌 성전 건축이므로 주께서 말씀하신 70주의 시작으로 볼 수 없습니다. 고레스의 첫 번째 칙령에 담긴 말만 본다면, 주께서는 그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집”(성전)을 건축하라는 명령만 내리게 했음이 분명합니다.

두 번째 칙령은 B. C 519년의 다리오 칙령입니다. 에스라 6:1-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라 5:1-17절에는 성전을 재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대적들에 의해 “무슨 권한으로 이 일을 하느냐?”는 질책에 시달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리오 왕에게 바빌론에 있는 왕들의 보물 창고를 뒤져보도록 간청했습니다. 다리오는 조사해 본 결과 고레스의 칙령을 찾아내었고, 다리오는 고레스의 명령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었으며, 만일 어길 경우 강한 벌을 내릴 것을 추가해 주었습니다(에스라6:11,12).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다리오의 칙령이 성전 건축에 제한되어 있을 뿐 예루살렘이란 도시 재건에는 미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 칙령은 B. C 458년 페르시아의 왕이 아탁세르세스의 것입니다. 그 칙령은 단지 제사장 에스라에게 준 한 장의 편지였습니다. 아탁세르세스 왕은 에스라에게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중 함께 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왕의 보물 창고를 열고 수송아지, 숫양들, 어린 양들을 사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은은 백 달란트까지, 밀은 백 고르까지, 포도즙은 백 바스까지, 기름도 백 바스까지 하고 소금은 양을 정하지 말고 하라...이 외에도 네 하나님의 집에 필요하여 네가 드리고자 하거든 무엇이든지 왕의 보고(寶庫)에서 취하여 드릴지니라.](스7:11-22)고 하였다. 이 칙령에도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칙령은 단지 ‘주의 율법을 찾고, 그것을 행하고, 규례들과 명령들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칠 것을 마음으로 준비한’ 한 제사장이요 서기관인 에스라에게 주어진 편지였습니다.

네 번째 칙령은 B. C 445년 아탁세르세스 제위 20년에 내린 것으로써, 느헤미야 2: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왕의 잔을 맡은 느헤미야에게 주어진 칙령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왕궁에서 잔을 드는 자는 왕의 신임을 얻는 자로서 그 지위가 매우 높은 자였습니다. 왕은 느헤미야에게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느2:4a)고 물었고 느헤미야는 즉시 기도한 후에 [왕에게 아뢰되, 왕께서 만일 기뻐하시고 종이 왕의 눈앞에서 은총을 입었사오면 나를 유다로, 내 조상들의 돌무덤이 있는 도시로 보내사 그 도시를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느2:5)라며 답했습니다. 왕은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읍을 재건하라는 명을 내립니다.이것은 그의 대적자들인 산발랏과 토비아 같은 자에게 종교적인 임무가 아닌 정치적인 임무로 보였습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마치 반역 행위와 같았습니다. 성벽들은 52일 만에 세워졌지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성읍을 복원하고 율법을 다시 선포하고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는 데는 무려 12년이 걸렸습니다. 느헤미야의 임무는 정치적 수도로써 예루살렘을 복원하고 유대 국가를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칙령에 그 내용이 담겨져 있진 않지만 느헤미야가 한 일의 성격을 볼 때 “성읍의 회복”은 더욱 분명해 보입니다. 왕이 느헤미야에게 준 편지는 분명히 칙령의 형태였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느헤미야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읍을 회복하라는 칙령을 내린 왕은 아탁세르세스가 느헤미야에게 준 것뿐이므로 이것이 바로 예언에 나오는, 즉 가브리엘이 말했던 그 ‘70주’의 시작점이 틀림없습니다. 성전을 재건하고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분명히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축하라는 명령이 나가는 때로부터”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네 번의 칙령 가운데 느헤미야가 받은 칙령만이 70주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통치자 메시아에 이르기까지]란 말씀입니다. 이것을 메시아 탄생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공생애 사역의 시작인 침례를 받은 때인가? 등입니다. 메시아의 탄생으로 잡으면 고레스 왕이 B. C 536년에 내린 “첫 번째 칙령”이나 B. C 519년에 내려진 “두 번째 칙령”인 다리오의 칙령, B. C 458년에 내려진 아탁세르세스 왕의 “세 번째 칙령”, B. C445년에 내린 아탁세르세스 롱기메누스(Artaxerxes Longimanus)의 “네 번째 칙령” 역시 483년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메시야 통치자의 탄생이 아닌 공생애 기간 중 특별한 사건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연관 지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탄생을 “때가 차서”(Fullness of time)(갈 4:4) 오신 것이고 했는데 이 때란 것은 다니엘의 예언과 연관 지어 말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통치자로 태어나셨습니다(눅1:30-33). 주님은 왕으로 오셨고, 왕으로서 경배 받으셨고(마2:1-2),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으로서 처형했습니다(요18:33-39). 하지만 예수님은 아직 왕관을 쓰시지 않았으며, 그분의 왕국을 받지도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현재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앞으로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왕국을 받을 때까지 왕이 아니십니다(단 7:13,14). 예수께서 그 분의 초림 때 메시야 통치자로 불렸다면, 이는 가브리엘이 69주의 예언이 그 분이 왕으로 오실 재림까지는 염두에 두고 한 예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그분이 비밀리에 은밀하게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분이 과연 예언의 성취인가 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탄생과 연관 지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첫째 사건인 “침례”는 30세에 이루어 졌으며 “아버지와 성령”이 증인이 되셨습니다(마 3:13-17). 아버지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라.]하셨으며, 성령도 비둘기의 모습으로 내려와 그 위에 기름 부으셨습니다(눅4:16-19). 메시야란 단어는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입니다. 이때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던 시점이므로 69주의 끝이 여기가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분은 곧 바로 “왕국이 가까웠다”고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왕국은 곧바로 거절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역의 형태를 바꾸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침례”는 69주가 끝나는 시점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로서 자신이 선포되는 것을 피하셨으며, 숨으셨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제자들이 수차례 대중들 앞에서 메시야임을 공개적으로 밝히도록 간청하고, 촉구했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생애의 세 번째 주요 사건이라면 A. D 30년 4월 2일에 있었던 “종려 주일”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는 순간입니다. 이는 십자가에서 못 박하시기 불과 몇 일 전의 일로써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69주가 끝나는 바로 그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곧이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다니엘서 9:26절에 나오는 “메시야가 끊어질 것이나”하는 말씀이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분의 “메시야 되심”이 그 사건 이전에 백성들에게 널리 인식되었고, 예수님이 스스로 스가랴 9:9절의 예언을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오 예루살렘의 딸아, 큰 소리로 외칠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느니라. 그분은 의로우시고 구원을 소유하시며 겸손하사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 새끼 곧 어린 수나귀니라.](슥 9:9). 요한복음 12:13에서 올리브 산에서 내려오는 예수님을 맞이하면 뛰쳐나간 사람들이,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은 복이 있도다”라고 외쳤습니다. 이 사건은 왜 예수께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왕 되심을 선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다른 때와는 달리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이 “승리의 입성”을 위해 제자들에게 어떤 장소에 다서 사람이 한 번도 타 보지 않은 나귀를 가져오라고 명하셨으며(마 21:1-3), “호산나”라고 외치지 못하도록 제자들이 백성들을 제지했을 때,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백성들이 가만히 있으면, 이 돌들이 소리쳤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왕이심에 동의한 것뿐만 아니라, 승리의 입성을 통해 예언에 나오는 그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69주가 끝났다는 사실을 이 보다 더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사건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니엘 9:25절과 스가랴 9:9절의 예언들이 한 사건을 통해 동시에 성취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승리의 입성을 통해 백성들은 예수를 왕으로, 메시야 통치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길 때, 그분은 공의와 겸손으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 가셨지만, 다시 오실 때 그분께서는 한 말을 타고 하늘의 군대들을 이끌고 입성하실 것입니다(계 19:11-16).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탄생이나 침례 받으시는 사건보다 승리의 입성을 69주의 종결 시점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논리 타당합니다. 69주의 시작점을 B. C 445년 3월 14일 아탁세르세스 왕이 내린 칙령으로 결론짓고 마지막 시점을 A. D 30년 4월 2일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종려 주일로 못 박는다면 이 두 날짜들 사이에 69주의 시간적 길이를 메울 수 있는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논의하기에 앞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의 시기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은 헤롯왕이 죽기 전에(마 2:1-23) 탄생하셨으므로, 절대 A. D 1년이 탄생 년도가 될 수 없습니다. 헤롯은 B. C 4세기말에 죽었습니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 그분의 나이가 약 30세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눅3:23), 역사적 연대로는 A. D 26년 중반 또는 후반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공생에 사역 기간이 3년 반이셨으므로 A. D 30년 봄까지는 사역이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은 A. D 30년 4월 7일 수요일이셨으며, 승리의 입성이 있던 날은 A. D 30년 4월 2일 일요일이었을 것입니다.

천문학에서 1년은 365와 ¼(365.2524)일이지만, 태음력은 이와 다릅니다. 태양력은 365일 체계이지만 실제 달력은 360일 체계로 되어 있었고, 태음력은 354일 체계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사용된 역력은 어느 것인가? 창세기 7:11-24, 8:3,4절의 홍수 기사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둘째 달 17일부터 일곱째 달 17일까지 5개월을 150일 이라고 정의하고 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한 달을 30일로 계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언적 연대기를 계산할 때 360일 체계를 사용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에 사용하시는 시간적 단위는 하루를 1년으로, 한 달을 30일로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단위로 다니엘의 70주를 적용해 보기로 합시다. B. C 475년에서 B. C 445년에서 A. D 30년까지 정상적인 태양력으로 연대를 따진다면 475년입니다. 이 두 연도들(444+29=473) 사이에는 B. C 1년과 A. D 1년이 있으므로 이것은 2년으로 계산해야 합니다. 473년간을 태양력으로 계산하면 365를 곱하면 되니까 간단히 172,645일이 됩니다. 여기에다 칙령이 내린 해인 B. C 445년은 3월 14일부터 12월 31일까지로 계산해야 하므로 293일이 되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A. D 30년은 1월 1일부터 4월 2일까지이므로 92일간으로 계산해야 하므로, 이 모든 수를 더하면 172,645+293+92=173,030일이 됩니다. 여기에다 계산에서 빠진 날들(1년은 365일이 넘기 때문에 4년마다 하루씩 더해 주어야 하므로)인 116일을 더하면 우리는 173,146일이란 결론을 얻습니다. 이 날들을 360일로 나누어 보면 481년에서 14일이 빠지고, 69주의 연대인 483년에서는 2년 2주간이 모자랍니다. 클레어린스 라킨 목사가 처음 시도한 이 계산법에 따르면 483년에서 2년 14일이 모자라며, 로버트 앤더슨 경의 계산법대로 정확히 계산해 보면 1년 5일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이 부족한 날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세상의 역사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만약 이런 계산법의 오차가 1-2년에 불과하다면 그것을 완전히 무시할 것이 아니라, 7주와 62주 사이에 어떤 시간적인 공백이 있지 않았는가 하는 가정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위에서 해 본 계산은 아탁세르세스 롱기메너스가 B. C 445년에 내린 칙령과 A. D 30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이의 483년이란 기간과 오차가 너무 작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언을 연구하는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서 늘 깨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70주를 연구하는 것은 과연 그분이 메시야인가 아닌가 하는 척도가 될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날 성경 교사들이나 신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예언을 통해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처음 오실 때 유대인들은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했듯이 그 분의 재림이 언제, 어떻게 임할지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것은 마땅히 책망 받을 일입니다. 강둑에 서있는 세마포 옷을 입은 사람이 다니엘에게 말하기를, “악한 자들 중 아무도 깨닫지 못할 것이나, 현명한 자들은 깨달으리라”(단 12:10). 즉 성경에 현명한 자는 영적으로 더 현명한 자입니다.

26절입니다. [육십이 이레 후에(after) 메시아가 끊어질 것이나 자기를 위한 것은 아니니라. 장차 올 통치자의 백성이 그 도시와 그 성소를 파괴하려니와 그 끝에는 홍수가 있을 것이며 또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황폐하게 하는 것이 작정되었느니라.](26). 육십이 이레가 승리의 입성이고, 그 후에 곧 바로 메시아이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물론 이 죽음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이었고, 유대 민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장차 올 통치자란 적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첫 번째 예루살렘과 성소의 파괴는 바빌론에 의해서, 두 번째는 로마에 의해서, 세 번째는 장차 대 환란 중간에 적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에 의해 일어날 것입니다(계11:2). 주님은 마귀를 이 세상의 통치자(요14:30,16: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로 장차올 통치자가 누구인지는 이미 성경에 완벽히 밝혀져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파괴는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건은 예언적 사건의 모델이며, 예표일 뿐입니다(전1:9). [그 끝에는 홍수가 있을 것이며]란 말씀은 요한계시록 12:13-16절에 나오는 용이 그 입에서 쏟아 놓는 홍수입니다.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사내아이를 낳은 그 여자를 핍박하더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았으니 이것은 그녀로 하여금 광야 곧 자기 처소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얼굴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게 하려 함이라. 뱀이 자기 입에서 여자의 뒤에 물을 홍수같이 내뿜어 여자를 홍수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자기 입을 벌려 용이 그 입에서 내뿜은 홍수를 삼키니](계12:13-16). 적그리스도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의 정체는 짐승입니다. 성경은 마귀를 용이라고 부르며, 비히못(욥40:15), 리비야단 등과 같은 초자연적인 짐승으로 부릅니다. 그는 요르단 강을 입으로 빨아 들여서 광야에 도망하는 유대인들을 토해 쏟아 낼 것입니다. [보라, 그가 강을 마시되 서두르지 아니하나니 요르단 강을 입으로 빨아들일 수 있다고 스스로 믿느니라.](욥40:23).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란 말씀은 아마겟돈 전쟁을 말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땅은 천년 왕국의 시작으로 새롭게 됩니다.

27절입니다. [그가 많은 사람과 한 이레 동안 언약을 확정하겠고 그 이레의 한중간에 희생물과 봉헌물을 그치게 할 것이며 또 가증한 것들로 뒤덮기 위하여 그것을 황폐하게 하되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리할 것이며 작정된 것이 그 황폐한 곳에 쏟아지리라, 하니라.](27). 여기서 대명사 “그”는 25절의 메시야 통치자가 아니라 26절의 “장차올 통치자”를 말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유대의 많은 사람들과 평화 조약을 맺을 것입니다. 한 주간 언약을 확정한 후에 중간에 언약을 파기해 버립니다. 대언자 이사야는 이 언약을 사망과의 언약, 지옥과의 합의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사망과 언약을 맺었고 지옥과 합의를 보았은즉 넘치는 채찍이 지나갈지라도 우리에게 이르지 못하리니 이는 우리가 거짓으로 우리의 피난처를 삼았고 거짓된 것 밑에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였도다.](사28:15). 이 언약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144,000명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언약을 파기한 후에 하는 일은 “희생물과 봉헌물을 그치게”하고, “가증한 것들로 뒤덮기 위해 성소를 황폐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 예배와 제사를 드리는 것이 금지 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자신을 높여서 하나님으로 경배 받으려 합니다. 하지만 그의 결국은 유황으로 불타는 못에 산채로 던져지는 것입니다(계19:20). 칠십 째 주가 종료되면 주님께서 친히 다스리는 천년 왕국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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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위역 성경(A.V 1611)에는 “불법을 단념시키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죄악과 화해를 이루며”라는 오역을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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