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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51)


나더러, 주여 , 주여, 하는 자마다

말씀: 마7:21-23
요절: 마7:21-23

누구나 신앙은 말이 아니라 행위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말보다는 행위”란 구호는 성경적입니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백문이 불여일견이요, 백견이 불여일행이라.”고 하여 듣고, 보는 것보다 몸으로 직접 행해보는 것이 참된 배움임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간혹 “말보다는 행위”를 외치다가 “믿음보다 행위”라는 구호를 외치게 되면 이는 성경에서 한 참 멀어진 것입니다. 말과 행위를 일치시키는 ‘언행일치’의 삶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강한 정신력이나 풍부한 자본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말을 단지 말에 그치지 않고 열매로, 선한 행위로, 삶의 결과로 이끌어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을 그대로 받아 믿음으로 생각하고 말할 때 그 말은 강한 능력이 되고, 열매가 되고, 참된 삶이 되는 까닭입니다. 믿음이 없는 말은 거짓말이 되거나 부풀린 말이 되거나 허황된 말이 되고 말지만 믿음으로 하는 말은 산을 들어 바다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에게 이르기를, 옮겨져서 바다에 빠지라, 하며 마음 속으로 의심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말하는 그것들이 이루어질 줄 믿으면 그가 무엇을 말하든지 다 받으리라.](막11:23). 이 구절은 말과 믿음의 효과적인 결합이 이루는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는 말은 태양과 달을 멈추고, 병자를 일으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믿음으로 하는 말은 그 믿는대로 다 이루어집니다. 믿음 없이 하는 말은 그냥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가득한 것이 말로 나오는데는 어려움이 없습니다(마12:34). 생각과 말은 완전히 일치할 수 있습니다. 간혹 눈치를 보거나 압력을 견디지 못해서 또는 어떤 두려움으로 인해서 생각과 다르게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이 말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말로 나온 것이 행위로 옮겨지는 일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다 인정하듯이 말로는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나의 어린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고 했습니다. 말과 혀로 하는 사랑에 행동이 요구될 때 참으로 힘들고 어렵습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 말로만 하는 구제는 아무 것도 아니란 것입니다. 말로만 믿는다는 믿음 역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야고보서 2:15-16,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가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떠나가라.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2:15~16). 말로만 해서는 굶주린 형제의 배가 부르게 되지 않습니다. 말로만 해서는 몸이 따뜻하게 되지 않습니다. 말이 아닌 실천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의 여부는 말이 이루어지는가? 행위와 결합하는가? 열매를 맺는가? 등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말로는 못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말로만 할 수 있는 일은 실제로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불가능한 일이 없으셨지만 사람들은 말로 되는 일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 자체에 하나님의 숨 즉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죽은 이도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은 물론이요 말씀하신즉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권능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병자를 향해 “일어나 걸으라” 하면 그는 일어납니다. “네 시력을 받으라” 말씀하면 소경의 눈이 떠집니다. 말씀으로만도 멀리 떨어져 있는 백부장의 종이 나음을 입었고, 죽었던 회당장의 딸이 살아 났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말씀의 권능을 보이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해 주신 까닭입니다. 하나님의 말은 그냥 말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생명이요, 권능이요, 모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말은 어떻습니까? 말로는 종이 한 장 들어 올릴 수 없습니다. 권위와 권능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의 말에 권능을 입히고 싶다면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말해야 합니다.

21절입니다.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하등 잘못된 것이 있습니다. 이런 신앙 고백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며, 삶을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결코 예수님께 ‘주여, 주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가룟 유다 역시 예수님을 한번도 ‘주여, 주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예수님은 ‘선생’이라고 부른 것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Saviour)이실 뿐 아니라 우리 개개인의 주님(Lord)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곧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고 했습니다. 입술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백번 천번 지당한 일이며, 성도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왜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이는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거짓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믿고 시인하는 고백이 아니면 그 고백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조상 때부터 하나님을 믿어온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종교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회심이나 회개의 경험 없이도 “주여, 주여”라고 외칩니다. 수 백년 동안의 기독교 전통이 있는 나라의 사람들은 별 다른 믿음없이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주여, 주여”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고백으로서가 아니라 관습과 전통으로서 주님의 칭호를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알고 깨닫고 한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면 “주여, 주여”를 아무리 외쳐도 그는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일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마태복음 16:15-16,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들이시니이다, 하매](마 16:15-16). 베드로의 이 고백은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를 확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그것을 네게 계시한 이는 살과 피가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는 예수님이 주요 그리스도임을 믿고 시인했으며,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그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확신하나이다, 하매](요6:69). 예수님을 주라고 알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결과입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깨닫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말하는 자는 아무도 예수님을 저주받은 자라 말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라고 말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예수님을 주(Lord)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이런 계시의 결과로 내 안에 예수님이 주요, 그리스도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다니다 보니까 ‘주여, 주여’라고 한다든지 일반적으로 관용구로 사용되다 보니 ‘주여....’라고 외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선한 고백으로서 주님을 고백하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면 주님을 부르는 자체가 신성 모독입니다.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21a). 우리는 이런 예를 마태복음 25:11-1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뒤에 다른 처녀들도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하나 그가 응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느니라.](마25:11-12). 이들은 분명히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무리들이지만 주님은 이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들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믿고 안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주요, 그리스도란 사실을 안 것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회개 없는 구원, 성령 없는 중생, 믿음 없는 고백”으로 기독교란 종교 생활을 한 것이 전부입니다. 죄 사함의 은혜, 구원의 확신, 영원한 생명의 소유와 같은 것을 전혀 누려보지 못한 채 교회 활동을 한 것이 전부입니다. 오늘날 이곳 대부분의 교회들을 보십시오. 교회에 나오면 모두 신자요, 성도인 것처럼 대우해 줍니다. 침례를 받기라도 하거나 직분이라도 주어지면 뿌리 깊은 신앙인이 된 줄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듭남으로 먼저 하나님의 왕국을 소유해야 합니다(요3:5,7). 이 시대의 어떤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의 왕국이 임하지 않으면 그는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늘의 왕국 vs 하나님의 왕국.

주님은 지금 행위 구원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누구도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21절 말씀은 무엇입니까?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 입술의 고백에 합당한 믿음의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드러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로 죽은 것입니다. 모든 영적인 원리가 동일합니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와 더불어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참된 회개이고, 믿음은 마음의 회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과 의지가 동반될 때 참된 믿음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주님의 뜻을 알기 원하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고백은 거짓 고백입니다. 누가복음 6: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들은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 예수님을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순간 그의 제일 관심사는 주님의 뜻을 알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인생의 모든 소망, 목표는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 됩니다. 이는 제 개인적으로도 충분히 증인으로서 증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만약 그러하지 않다면 그의 고백은 처음부터 잘못된 근거에서 잘못된 시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제 말이 아니라 성경의 일관된 증언입니다. 디도서 1:16, [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이요 모든 선한 일에 대해 버림받은 자들이니라.](딛1:16).

발람의 예를 보십시오. 그는 분명히 체험과 환상을 통해 주님을 알았고 그렇게 고백했지만 행위로는 주님을 부인했습니다(민24:16). 배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안다, 믿는다고 고백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호세아 8:2-3, [이스라엘이 내게 부르짖기를, 내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이스라엘이 이미 선한 것을 내버렸으니 원수가 그를 따르리라.](호8:2-3). 이것이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의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자기 입으로는 나를 공경하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고 그들이 사람들의 훈계로 가르침을 받아 나를 두려워하는도다.](사29:13). 예수님을 배척한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가 이러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했고, 어디서나 예수님을 배척하고 반대했습니다. [오 야곱의 집이여, 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유다의 물들에게 나왔으며 주라는 이름로 맹세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되 진실함과 의로움이 없도다.](사48:1).

입술의 고백대로 믿고, 믿는 대로 행하는 자라야 하늘의 왕국에 들어갑니다. 21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b). 주님은 또 말씀하시기를, [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 곧 그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니라.](마12:50). 우리가 행해야 할 아버지의 뜻이란 무엇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아버지의 뜻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뜻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성경의 다른 모든 일을 다 행한다 해도 아버지의 뜻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믿고 영접한 후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모두 행하십니다. 우리 스스로 아버지의 뜻을 단독으로 행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기도하시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가 없다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어떤 일도 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일하는 원칙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빌4:13)입니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승리를 주시고(고전15:57), 그리스도를 통해 화해케 하는 사역을 주시며(고후5:18),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을 주셨고(딛3:6), 복을 주셨습니다(갈3:14).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3:21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선한 일에서 너희를 완전하게 하사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자신의 눈 앞에서 매우 기쁜 것을 너희 안에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히13:21a).

22절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22). 이 말씀은 다소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이들은 주의 이름으로 대언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았습니다. 이 정도면 능력 있는 주의 종으로 교회 내에서는 칭송이 자자할 것이고, 유명세를 타기에 적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했다고 주님 앞에서 당당히 주장할 정도라면 큰 교회를 이루고, 병원을 짓고, 자선 단체를 만들고, 출판 사역을 하고, 고아원을 짓고, 학교를 세우는 등의 일을 했을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밀림의 성자라 불리는 슈바이쩌 박사나 가난한 자들의 어머니라 불리는 테레사 수녀 같은 이들을 알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종교와 이념을 초월해서 존경을 받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로 알려져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몸으로 실천한 이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외에도 우리 주변에는 언론을 통해 알려진 많은 성직자들을 압니다. 꽃동네를 일군 오웅진 신부, 활빈 교회를 세운 김 진홍 목사, 밥 퍼주는 목사로 알려진 김 일도 목사님, 통일 운동을 하다 죽은 문익환 목사, 종교 통합 운동에 매진한 강원룡 목사 등은 다 주의 일을 많이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독교 방송국을 세우고, 기독 대학을 세우는 등 이들의 왕성한 활동은 사회의 귀감이 됩니다. 또 많은 기독교 봉사 단체들이나 선교회들이 주의 일들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입니다.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일을 했지만 주님으로부터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깃발을 꼽아서 사람들을 모아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지 않고 세상을 위해 일하는 이들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또한 오늘날 은사주의자들, 오순절 교회들에 강한 경종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지금 수많은 교회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보다 ‘성령의 은사’를 전부인 것처럼 표방하고 자랑하는 교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집회 때마다 병을 고치고, 마귀들을 내 쫓고, 방언을 하고, 대언을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보다 표적적인 은사들을 추구합니다. 늘 강한 능력을 원하고 감정적 흥분을 추구합니다. 집회나 어떤 행사 중에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주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행합니다. 이들은 모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22). 거짓 대언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마귀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많은 거짓 대언자들은 모두 주의 이름으로 대언했습니다. 주님은 “거짓 대언자들”을 양의 옷을 입은 약탈하는 이리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거짓 이적과 능력을 보여서 사람들을 속입니다. 이들은 표적과 각종 기적들을 일으킴으로써 택함 받은 자들까지 미혹하려고 합니다. 거짓 교사들 역시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인문주의를 외치고, 이성으로의 복귀를 외칩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격하시키고,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킵니다. 이런 자들이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일한다고 외칩니다. 우리는 주여, 주여 외치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다 믿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선한 것을 굳게 붙들라.](살전5:21). 주님은 열매로써 그들을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23절입니다.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 (23). 주님은 입술로는 주여, 주여 고백하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이들이 “주의 이름으로 대언을 하고 마귀들을 내 쫓고 많은 놀라운 일들”을 했지만 이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는 것은 저주와 심판의 선포입니다. 주님께서 “내게서 떠나라”고 외친 당사자들은 누구입니까?

첫째, 거짓 대언자들과 거짓 교사들입니다. 주님은 모든 죄인들을 향해서 “내게로 오라. 가까이 오라”고 말씀하시지만 거짓 대언자들, 거짓 교사들을 향해서는 “내게서 떠나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최후의 판결이라 돌이킬 기회가 없습니다.

둘째, 유대인들을 박해하고 도와주지 않는 민족들입니다. 주님은 여호사밧의 판결의 골짜기에서 민족들을 모아 양과 염소로 분류할 때 이들을 향해 “내게서 떠나라” 외치십니다. [그 때에 그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존하는 불에 들어 가라.](마25:41). 이들이 저주를 받는 이유는 42-44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백성들이요, 자녀된 자들에게 잘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 자녀들에게 행한 선악을 자신에게 행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약 성도들은 여기서 단지 ‘유대인들’을 넘어서 크리스천 형제들 그리고 이웃들에게까지 범위를 넓혀야 합니다. 주님은 형제들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고, ‘네 이웃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우리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긍휼을 베풀어 주는 대상 모두에게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불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서 떠날지어다. 주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시6:8).

넷째, 악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날지어다. 내가 내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리로다.](시119:115).

다섯째, 주님을 버린 자들입니다. 성경에는 주님께서 “너희는 내게서 떠날지어다”로 말씀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알아서 주님을 떠나는 예가 나옵니다. 배교한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마음에서 몰아 내었습니다. [오 주여,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여, 주를 버리는 자들은 다 부끄러움을 당하며 나를 떠나는 자들은 땅에 기록되리니 이는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주를 버렸기 때문이니이다.](렘17:13). 이들은 주님께 버림받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주님을 버렸습니다. [범죄자들과 죄인들은 함께 멸망하고 [주]를 버린 자들도 소멸되리니](사1:28). 하나님을 버린 이들 역시 주께 버림 받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하고 주 앞에 쓰러진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5: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이르되, 오 주여, 내게서 떠나소서, 나는 죄 많은(sinful) 사람이니다, 하니](눅5:8). 주님의 신성을 접한 베드로의 이런 고백이 모든 죄인들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에게 주님은 은혜를 더 많이 주십니다. 상한 마음, 자신을 낮추는 이들을 주님은 치유하시고 높이십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을 향해서는 영원히 함께 하시고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히13:5). *렘32:40참조. 이미 주님을 믿고 마음에 영접한 이들은 아무 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을 해 주시기를 기도하시고, 헌신할 때 우리는 말이 아니라 행위의 본, 경건한 삶,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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