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헌장
말씀: 히브리서 11:1요절: 히브리서 11:1 우리는 신앙의 위기가 오고, 세대가 혼란스럽고, 참된 믿음의 가치가 퇴색될 때일수록 더욱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을 통해 격려를 받고 도전을 받으며 힘을 얻어야 합니다. 바울이 고난 받는 히브리 성도들에게 이 서신을 보낼 필요가 있었던 것처럼 마지막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서신은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들과 동일한 믿음, 동일한 고난, 동일한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말씀)해 주시고 그대로 행하는 이들을 믿음으로 살았다고 인정하십니다.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해서 살았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믿음(faith)이란 말보다 더 흔히 사용되는 말이 없고, 믿음(faith)이란 말보다 더 곡해되고, 오용되는 말도 없습니다. [믿음으로]라는 말을 적극적 사고 방식이나 긍정적 인식, 원하는 것을 마음에 그리는 상상력, 굳은 신념 등으로 말하는 것은 미신을 조장하는 것이지 결코 믿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공부했지만 성령의 조명이나 계시를 받지 못한 이들은 교리 체계, 신학적 사상은 가지고 있지만 결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여론 조사 기관에서 ‘한국에서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란 질문을 했는데 1위는 ‘돈’ 2위는 ‘능력’이라는 답변이 나왔습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인 듯 하지만 교회 내에서 동일한 항목으로 질문을 했다고 해도 똑같았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현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한국에 사나 미국에 사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교과서적인 모범 답안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당장 아들이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데 돈이 더 필요한가? 믿음이 더 필요한가?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자식을 공부시키는데는 믿음이 아니라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집을 사고 차를 사는데 돈이 아니라 믿음이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웃을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당장 날아드는 payment, bill들을 보면서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돈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살라! 이것이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by faith)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구하라. 믿음으로 바라라. 믿음으로 걸으라. 믿음으로 싸우라. 믿음으로 살라. 우리는 이런 말을 많이 듣고 삽니다. 이는 단지 목사님들이 대답이 궁색할 때 내 놓는 모범 답안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삶의 방법이요, 삶의 원칙’입니다. 믿음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오해는 믿음을 통해(through faith)할 수 있는 일은 구원받고, 의롭게 되는 것, 마음의 평안을 얻고 등등의 영적인 것들 뿐이란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런 오해를 단번에 불식시킬 수 있습니다. 사라는 여인의 관례가 끝난 노인이었지만 믿음을 통해 수태할 힘을 얻어 출산했습니다(히11:11). 히브리서 11:3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믿음을 통해 여러 왕국을 정복하기도 하며 의를 이루기도 하며 약속들을 얻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히11:38). 믿음은 현실의 삶을 사는 방법이지 뜬 구름 잡는 추상적인, 영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현실적이고, 현재적이며, 구체적인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 또 한 가지의 일반적인 오류는 ‘믿으면’ 저절로 무엇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은사주의, 오순절 신학의 영향을 받은 이들 중에 특히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습니다. [믿음으로](by faith)란 말은 우리의 순종과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지 방관자로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구경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만들었지 방주가 저절로 만들어지기를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고향을 떠났고, 아들을 바쳤지 저절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기를 빌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 장에 나오는 그 누구도 수동적인 삶을 산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믿음에 따라 무엇인가를 해야 할 일들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믿음으로’란 의미입니다. 믿음은 ‘말씀’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롬10:17). 이 말은 계시가 없는 곳에는 믿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에 대한 반응, 순종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 장에는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 이들을 믿음의 사람들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어느 시대나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말씀을 선포해 주시고, 그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거나 들었지만 순종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은 흔히 믿음의 헌장이라 불리는 성경의 위대한 장이지만 믿음의 정의를 학문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대신 역사적으로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실제적인 예들을 반복해서 제시함으로써 참 믿음이란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믿음은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실체요, 증거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수단이요, 도구입니다. “믿음으로”(by faith/ Through faith).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서 친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사람에게 뜻을 계시해 주십니다. 말씀을 들려주시고 그것을 듣고 행할 때 ‘믿음’으로 행했다고 하십니다. 믿음의 출발은 말씀을 듣는 것이요, 믿음의 결과는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무엇인가? 란 철학적 논증은 성도의 삶에 별 유익이 없습니다. 믿음은 관찰과 실험으로 규정할 수 있는 어떤 개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사유의 결과로 연역적 방법으로 정의할 수 있는 사상이 아닙니다. 믿음은 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 안에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를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씨앗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분량대로 나누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저자이십니다. 믿음은 성령의 열매이며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학문적 정의를 규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부여받았는가? 나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 란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아벨로부터 시작해서 믿음으로 산 구약의 인물들이 쭉 나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등등 우리는 창세기로부터 시작되는 구약의 믿음의 인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이름은 하나님이 친히 뽑으신 인물들입니다. 사람들이 종교 회의를 해서 믿음의 산 증인들로 선정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처럼 인기 투표를 해서 선정된 것도 아닙니다. 이들이 뽑힌 기준은 거룩한 삶을 살았다거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거나 아니면 많은 책을 저술하거나 많은 교회를 세웠다는 등의 일이나 업적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매우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따랐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아벨은 일생에 단 한번 주님께 바른 희생물을 바친 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임을 당했지만 ‘의인 아벨’로 칭송을 받습니다. 우상의 고장에 살던 아브라함이 주님의 명을 받고 고향을 떠남으로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고 명하실 때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믿음으로’ 행했다고 합니다. 결국 믿음으로 사는 삶이란 자신의 생각이나 세상의 가치관, 상식이나 지식대로 산 것이 아니라 말씀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선정해서 그 이름을 기록하시고 그들이 어떻게 말씀에 순종해서 살았는가?를 기록하신 것이 ‘믿음의 헌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이름을 기록하시고 본으로 삼으신 것은 이들이 “믿음으로”(by faith)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 장에 기록된 사람들 중에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해서 놀라운 발명을 했다든가 엄청난 권력을 쥐고 정치적인 틀을 갖추었다든가 법전을 완성했다든가 군대를 이끌고 정복 전쟁을 해다는 등의 어떤 일을 함으로 업적(공적)을 남긴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는 재판 받는 것을 두려워해서 도망을 쳤고,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 속일만큼 겁이 많았습니다. 기드온 역시 겁쟁이 축에 속했지 영웅에 속하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입다는 사생아였고, 라합은 창녀였습니다. 이들의 출생이나 신분은 너무나 평범하여 비범(非凡)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특별한 재주나 엄청난 재산을 소유한 인물들도 아니었습니다. 곁에 뛰어난 참모들을 두고 부족들을 상대로 무역을 해서 부를 일으켜 거상(巨商)이 된 것도 아닙니다. 학문으로 대가를 이룬 사람들도 없습니다. 일찍 뜻을 세우고 야망의 성취를 이룬 이들도 없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하나님께 들은 바 말씀대로 행했던 것이 전부입니다. 아벨은 희생 제물을 드렸고, 노아는 방주를 예비했고,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났고,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 때 바쳤고, 모세는 이집트를 버렸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쉽다거나 아무나 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은 아닙니다. 그들이 한 일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는데 노아가 방주를 예비했다면 그는 예지력이 있는 사람이란 칭송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천문을 읽을 수 있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했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계시된 말씀에 순종해서 행하는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산 사람들을 기록하시고 기억하십니다. [의인을 기념(memory-기억)하는 것은 복된 일이거니와 사악한 자의 이름은 썩게 되느니라.] (잠10:7). [참으로 그가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니 의로운 자는 영원토록 기억되리로다.](시112:6).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고 하나님께 영원히 기억되는 것은 위대한 업적을 남기거나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믿음으로 살 때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 많은 돈을 기부해서 건물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길 이름이나 지명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도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을 보십시오. 정복지마다 마음에 드는 곳은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현재 알려진 곳만도 34 곳이나 됩니다. 이곳 미국에서 아브라함 링컨이름이 들어간 공원, 거리, 도서관 대학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이름을 딴 공항도 있습니다. 이들은 땅에 이름을 남겼습니다(시49:11, 렘17:13). 여러분은 땅에 이름을 남기는 대신 하늘의 하나님께 기억되는 이름을 가진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살 때 가능합니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언어마다 고유의 종교가 있고, 학문이 있고, 가르침이 있지만 그 어느 곳에도 ‘믿음으로 살라’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깨끗하게 살아라, 정직하게 살아라, 양심대로 살아라, 책을 가까이 하며 살아라, 성실하게 살아라, 최선을 다해 살아라, 소신껏 살아라 등등... 우리는 별별 가르침을 듣고 배우지만 성경을 알기 전까지 단 한번도 ‘믿음으로 살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 종교, 철학, 학문은 없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대상이나 믿음의 근거가 없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단 한 번이라도 ‘믿음으로 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만이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히브리서 11 장에 나오는 인물들은 자신의 능력대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았다는 평판(report)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예지력이나 상황 판단력에 따라 인생의 행로를 결정하는 대신 [믿음으로] 삶의 중대 문제를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이나 가진 소유를 기반으로 인생의 행로를 선택하거나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결정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감정, 주위 상황, 여러 가지 다양한 여건들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에 상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유일무이한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실제 그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참 믿음, 구원하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산 사람들의 기록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이 인물들입니다. 이들이 ‘믿음으로’란 말을 빼면 그다지 뛰어난 업적이나 탁월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라 볼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믿음]의 유무입니다. 어떤 이들은 돈을 믿고, 어떤 이들은 권세를 믿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문에 나오는 뉴스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지만 우리는 소위 전문가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보다는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를 더 신뢰합니다. 때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는 것이 상식과 이성의 저항을 받을 때도 있고, 세상의 배척을 받고 친구들의 조롱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고되고 힘든 삶을 강요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 시간 모든 사람들이 ‘믿음으로’(by faith)란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로 충만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한 일이 믿음으로 한 것인지 그냥 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것이 믿음으로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경 공부를 처음 할 때 ‘무슨 일이든지 믿음으로 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참으로 난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믿음으로’라는 말이 아무데나 갖다 붙일 수 있는 말인지 그렇지 않는지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신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단지 믿는 것(believing) 이상입니다. 믿음은 막연한 낙관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마음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것을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대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믿을 때 말씀의 권능(히4:12), 성령의 권능이 드러납니다. 멋대로, 마음대로, 좋을 대로 하는 것에다가 ‘믿음으로’라는 말을 갖다 붙이는 것은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통해 성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우고,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예를 통해서 우리에게도 동일한 믿음, 동일한 삶을 요구합니다. 신약 성경을 잘 보십시오. 앞 부분은 교리적 진리가 있고 뒷 부분은 모두 그 진리를 바탕으로 한 실천적 삶에 대한 명령이 들어 있습니다. 로마서 1-11장의 교리적 진리를 배우면 로마서 12-16장의 실천적 삶이 나와야 합니다. 에베소서 1-3장의 진리를 배우면 4-6장의 실행이 나와야 합니다. 모세 오경을 보십시오. 출애굽기에는 구속받은 백성이 나오고 레위기에는 거룩함이 나옵니다. 민수기에는 백성들이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사복음서가 있으면 다음에는 사도행전이 나옵니다. 사도행전은 진리를 믿고 그대로 산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이런 형태를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교리에 따른 바른 실행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른 진리의 지식이 없이는 바른 성경적 실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예들을 봅시다. 왜 사람들이 [믿음으로]란 말씀을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까? 이는 나에게 구체적인 순종, 행위를 요구하지 않는 믿음들로 인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믿음으로 거룩하게 되는 등의 일은 믿음에 순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믿음으로 뭔가를 행해야 하는 것이 없고 주님께서 행하신 것, 이루신 것을 믿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믿음으로] 무엇을 바치든가 어디로 떠나든가 어떤 것을 포기하든가 등등의 어떤 일도 내가 직접 해야 할 일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일을 행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었진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거룩하게 되는 것, 성령을 받는 것, 화평을 누리는 것 등등 모든 일 앞에 ‘믿음으로’는 들어가는데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것처럼 “행했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행해야 할 일도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군가 우리를 대신해서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신약 성도들은 [믿음으로]란 말만 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걸어야 하고(고후5:7), 믿음으로 싸워야 하고(딤전6:12), 믿음의 진보(빌1:25)를 이루어야 하며, 믿음의 방패를 취해야 하고(엡6:16), 믿음의 단련도 받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믿음의 신비를 간직해야만 합니다(딤전3:9). 믿음으로 할 일은 매우 많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면 의를 행해야 하고, 의롭게 살아야 하며, 의의 전파자가 되어 의의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거룩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거룩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모든 말이나 행실에서 거룩함을 지녀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도모하고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란 매우 어려운 고난도의 영적 수련이나 영적 지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믿음으로 된 것들을 알고 깨달은 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믿는다면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자연스럽고 성품에 맞는 일입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를 말하라고 하면 단연 믿음과 행위의 분리를 말합니다. 믿는다고 말만할 뿐이지 행함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 우려를 표하고 고민합니다. 이는 비단 사역자들만의 고민이 아닙니다. 조금만 지각이 있는 성도라면 이 문제에 대해서 다 생각해 보았을 것이고, 기도해 보았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걷자. 믿음으로 서자. 믿음으로 달리자. 믿음으로 살자. 믿음에서 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다 믿음으로 행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인격적 성품을 믿으십시오. 아벨은 올바른 희생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올바른 희생물이 무엇인지 들었고 그대로 드렸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드렸다”고 말합니다. 에녹은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을 들었고 그것을 선포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라는 말씀을 들었고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아브람은 고향을 떠나라는 말을 들었고 떠났습니다. 어떤 이는 불을 통과했고, 어떤 이는 물을 통과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들은 대로 행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행16:31). 성경은 반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주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정말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성품으로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비결은 믿음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형제는 물론이고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는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증거입니다. 믿을 때 사랑하고, 믿지 않을 때 사랑하지 않습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흥분의 고취, 막연히 좋은 감정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희생을 동반하고, 치러야 할 대가가 큽니다. 영적인 모든 일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서 일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믿음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이 산을 옮깁니다.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전적으로 믿음의 힘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살리라]는 성도들의 삶의 방법이요, 원칙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행위(순종)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란 말 뒤에 항상 뭔가를 행했다는 행위 동사가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드렸다, 만들었다, 떠났다, 숨겼다, 거절했다, 바쳤다 등등. 절마다 우리는 “믿음으로”란 말에 호응하는 동사들을 발견합니다. 믿음은 활동합니다. 갈라디아서 5:6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효력이 없으되 오직 사랑으로 활동하는 믿음 뿐이니라.](갈5:6). *활동하는 믿음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믿음은 무동력, 정적 상태가 아니라 ‘활동’(work)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반응하고 자라나며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말씀하셨다면 나는 거기에 반응해서 무엇을 하게 되는데 그 때에 “믿음으로...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사고와 행동의 근거가 되는 모든 말씀이 성경 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직장 선택, 결혼, 이사, 자녀 교육 등 모든 문제에 대한 근거는 성경 속에 들어 있습니다. 어려운 결단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무엇을 기준으로, 무엇을 원칙으로 해서 결정하는가? 그것이 곧 믿음으로 했는가? 자신 생각대로 했는가?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한 일은 하나님이 도우시고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히11:6). 믿음으로 행한 일들에 대해 보상해 주십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주제별(글) > 히브리서11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을 통해 깨닫나니 (0) | 2007.11.10 |
---|---|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0) | 2007.11.10 |
믿음의 역할 (2) | 2007.11.09 |
소망의 실체 (1) | 2007.11.09 |
믿음이란 무엇인가? (1) | 2007.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