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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말씀: 히브리서 11:1
요절: 히브리서 11:1

지난 시간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소망하는)의 실체’라는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은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의 성령께서 듣는 귀와 깨닫는 마음을 주시고, 기록된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권능 있게 살아서 저희 마음 판에 단단히 박힌 못처럼 박히고, 영으로 기록되는 귀한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빕니다. ‘증거’(evidence)란 말은 신약 성경에는 히브리서 11:1 이곳에서 딱 한번만 나오는 아주 희귀한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에 여섯 번 나오는데 모두 예레미야에서만 나옵니다. 여러분이 우리 말로 성경을 통독하는 중에 ‘증거’라고 번역된 대부분의 단어는 ‘증언’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증거]란 말은 법정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입니다. 특히 형사 법에서는 ‘증거 채택’을 제일 원칙으로 합니다. 자백보다, 증인보다 증거의 효력이 더 크고 강합니다. 증거로 채택되는 순간에 모든 말은 잠잠하게 되고, 확증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것들을 믿으려면 증거를 요구합니다. 증거가 없을 때 그 이야기는 신뢰가 사라지고 헛소문, 꾸며낸 이야기로 치부됩니다. 흔히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분들을 접합니다. 누군가 믿기 위해서 증거를 요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표적을 증거로 요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고전1:22a)란 말씀대로 그들은 늘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논리적으로 이해되는 그런 지성과 철학을 증거로 요구했습니다. 항상 새로운 것과 지혜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속한 것들에 대해서는 문서나 담보나 증인이나 기타 여러 가지 증거를 요구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약속에도 증표나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계약서를 작성하고, 각서를 쓰고, 증인의 입회 아래 공증을 만듭니다. 보이는 것들에도 이런 증거가 필요할진대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는 도대체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두 구절을 봅니다. 로마서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8:24).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바라보나니 보이는 것들은 잠깐 있을 뿐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은 영원하니라.](고후4:18).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이 말씀은 현세적 복을 갈구하는 기복 신앙을 가진 성도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더 좋은 집, 직장, 더 많은 돈, 이 땅에서의 눈에 보이는 성공과 출세를 지향하는 이들은 이 두 구절을 받아 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지만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명확하고 분명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고난에 처한 히브리 성도들을 향해 편지를 쓰는 바울 사도는 그들에게 무슨 증거를 주기를 원했고, 증거가 무엇인지 알려 주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소망하는 실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믿음]을 증거로 주셨습니다. 믿음을 주시면 증거를 얻은 것입니다. 성령의 불세례니 성령 체험이니 방언이니 그런 것이 증거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증거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런 불평을 합니다. 설교 때 마다 먼 장래 일이나 죽고 난 후의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라 현재, 현 세상에서 현실의 삶을 사는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는가? 장래의 소망보다는 현재를 생각하자고 외칩니다. 저 하늘보다는 이 땅을 이야기하자고 외칩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지 말고 손에 잡히는 것부터 한 가지 한 가지 해결하는 신앙이야 말로 참된 기독교라고 외칩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과 호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실천 신학, 민중 신학 등등 교회의 현실 참여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현실을 의롭게 경건하고 깨끗하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이 ‘소망’입니다. 주님의 오심, 하늘의 상급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악한 현 세상에서 매 순간 승리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미래를 바라 보았기에 현실에서 믿음으로 걸을 수 있었습니다. 에녹 역시 그러했습니다. 모세 역시 그러했습니다. 믿음으로 산 이들은 다 미래를 바라 보았기에 현재를 믿음으로 살 수 있었고, 믿음의 좋은 평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들을 때, 또는 누구에게 말해 줄 때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수많은 것들에 대한 실체를 듣습니다. 영적인 것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은 땅에서 볼 수 없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미래의 일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요, 실제라는 뜻입니다. 실험과 관찰과 같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실제적 증거가 [믿음]입니다. 논리나 설명과 논증과 사유를 통하지 않고 말씀을 통해 계시로 우리 속에 주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란 뜻입니다.

역사적 사실은 역사적 증거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땅을 파서 한 조각의 증거라도 찾기 위해 갖은 애를 씁니다. 역사학자들은 유물이나 기록을 찾습니다. 과학적 사실은 과학적 증거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의미심장해도 증명되지 않는 가설, 이론에 불과합니다. 이론이 실제가 되기 위해서는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그분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증거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증거가 있습니까? [믿음]입니다. 내 안에 믿음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증거입니다. 어떤 이는 ‘믿음’이 어떻게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생각할지 모릅니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분명하고도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불신의 세대, 음란하고 패역한 세대, 죄악된 세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믿음을 지녔다는 것은 어떤 역사적, 고고학적, 과학적 증거보다 더 강력한 증거입니다. 외적 증거는 출처의 오류, 해석의 오류 등이 늘 상존하지만 성령을 통해 주어진 [믿음]이란 내적 증거는 분명하고 오류가 없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요](히11:1).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사진으로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화가들을 통해서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는 것들은 사진으로도 그림으로도 표현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보여 주시지도 않습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환상을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대신 세우신 종들을 통해 말씀을 선포하시고 믿음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말씀을 통해 우리 속에 주님을 믿는 믿음을 주심으로 우리 속에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십니다. 믿음이 오면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말씀을 통해 온 세상이 지어진 줄을 깨닫게 됩니다(히11:3). Through faith we understand... 믿음은 육신에 속한 오감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감각입니다. 믿음으로 진리를 알고 나면 믿지 않는 것이 도리어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은 믿는 것이 쉽습니까? 믿지 않는 것이 쉽습니까? 불신자들은 믿는 것이 어렵고, 신자들은 믿지 않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 차이는 우리는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오면 믿음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증거입니다. 자, 다 같이 갈라디아서 3:23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붙잡혀서 나중에 계시될 믿음이 오기까지 갇혀 있었느니라.](갈3:23). “믿음이 오기 전...믿음이 오기까지”란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믿음은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옵니다. ‘믿음’이 왔다는 것은 단지 내가 교인이 되었다,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믿음의 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시고,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통해 의롭게 하시고, 화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믿음을 나누어 주심으로 각양 다양한 일들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땅을 그들의   상속이요,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그 땅에서 나는 것으로 성전에 십일조를 내고, 각종 세금을 내고,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반면 신약 성도들에게 주님은 땅을 나누어 주시는 대신 ‘믿음’을 나누어 주십니다. 로마서 12:3,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 너희 가운데 있는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자기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냉철하게 생각하라.](롬12:3).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각 사람이란 모든(every)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믿는 신자들에게 믿음을 나누어 주시는데 이 ‘믿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약속의 말씀들에 대한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선포할 때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내 안에 주어진 믿음입니다. 내 마음 속에 그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무지개를 증표로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는 몸의 포피에 행하는 할례를 증표로 주셨습니다. 기드온에게는 표적을 그 증거로 주셨습니다. [기드온이 그분께 이르되, 이제 내가 주의 눈앞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주께서 나와 말씀하심을 보여 주는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삿6:17). 삼손에게는 긴 머리카락과 육신의 힘을 증거로 주셨습니다. 사도들에게 사도의 표적(고후12:12)을 사도란 증거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에게는 무엇을 증거로 주셨습니까? 고난받는 히브리 성도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믿음이 증거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믿음이 실체요, 믿음이 증거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누구를 믿고, 무엇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증거는 시험의 때에 강력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어떤 범죄자도 명백한 증거 앞에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경찰이나 검사들은 물론이고 법정에서는 ‘증거 제일주의’를 채택합니다. 내게 증거가 있다면 원수들은 나를 속일 수 없고, 노략할 수 없습니다. 증거가 없을 때는 불꽃 튀는 설전(舌戰/말싸움) 벌이고 속임수가 힘을 쓰지만 확실한 증거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모든 혀를 잠잠케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가진 증거가 무엇입니까?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증거를 가진 것입니다. 믿음은 소망의 실체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11:1). 주님께서 믿음을 주심으로 우리 안에 소망의 실체와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영적인 것들의 증거를 우리 안에다 주신 것입니다. 절대 잃어버리지 않도록 우리 마음 판에 심어 주시고, 기록해 주셨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실체는 점점 더 분명하게 다가오고 증거는 더욱 확실하게 인식됩니다. 주님은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십니다. 성경은 믿음의 말씀입니다. 성령은 믿음의 영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바로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증거가 있어야 믿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특히 영적인 것들은 지성으로 이해되지 않고, 느낌으로 잡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믿는 다는 것이 맹신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맹목적인 믿음은 자신을 바보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절대 확실(infallible)한 증거(proof)를 주셨습니다. 누가는 말하기를, [그분께서 수난을 받으신 뒤에 또한 자신이 살아 계심을 절대확실(絶代確實)한 많은 증거들로 그들에게 보여 주시고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것들을 말씀하시니라.](행1:3)고 합니다. 주님은 믿을만한 무오한 많은 증거들을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적 증거들은 넘치도록 많습니다. 고고학 자료들, 지질학적 자료들은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역사성과 진실성을 더욱 강하게 입증해 줍니다. 또 다른 증거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을 통해 그 모든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듣고 봄으로써 믿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믿을 수 있도록 볼 수 있는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막상 보아도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죽는 것도 보았고 부활하신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믿었습니까? 자, 마태복음 28:16,17을 보십시오. [그 뒤에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정해 주신 산에 들어가 그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나 의심하는 자들도 있더라.](마28:16-17). 이들은 주님에 대해서 그동안 소문만 들었다거나 오늘 처음 만났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보고 수많은 표적을 체험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빵을 떼었고, 잔을 나누었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왕국을 기다리고 간절히 사모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할 때 모두 그 신앙을 고백했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몇은 현재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보면서 경배하면서도 의심하고 있습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증언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분을 셋째 날에 일으켜 세우사 그분을 공개적으로 보여 주셨으니](행10:40)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전 유대에 알려진 공개적인 사건이었고, 그분의 부활 역시 그러했습니다. 어느 지구촌 시골 구석에서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란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이 본 것과 들은 것을 증언할 뿐 지어낸 이야기나 자신들이 깨닫게 된 사상이나 철학이나 교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역사적 사실들이 어떻게 기록된 말씀과 일치와 조화를 이루는가를 말해 줌으로써 누구나 듣고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준 것입니다. [그들이 그분에 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성취하고 나무에게 그분을 내려다가 돌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셨으므로 그분께서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이제 그들이 백성에게 그분의 증인이 되었느니라.](행13:29-31). 사도들이나 몇몇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믿었지만 그 후로 주님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우리는 사도들처럼 표적을 행할 수 없고, 말씀을 선포할 때 뒤따르는 어떤 기적도 없습니다. 우리는 보지 않고 믿습니다. 우리는 느낌이나 체험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믿습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습니다. [너희가 그분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지금도 너희가 그분을 보지 못하나 믿으며 이루 말할 수 없고 영광이 가득한 기쁨으로 기뻐하니](벧전1:8).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증거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나누어 주셨습니다. 믿음의 말씀을 통해 믿음이 자라나게 하십니다. 성령을 통해 믿음을 열매로 맺게 하십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주님을 보지 못하지만 믿으며 기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다른 것을 증거로 요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증거는 물적 증거가 아니라 ‘믿음’ 자체가 증거입니다. 현대 기독교는 세상에 당당히 기독교의 교리를 변증하고 설명하려고 다양한 시도를 거듭합니다. 신앙은 이성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조화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신앙은 과학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이란 사실을 알리려고 합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이 각 민족의 고유한 민속 전통과 다양한 종교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세상 속으로 기독교의 확산,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반감을 완화하려는 이런 인간적인 수단은 성경도 하나님도 알지 못한 데서 오는 어리석은 행위들입니다. 저는 ‘기독교의 역사적 증거들’이란 책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성경 지리학이나 성경 고고학에 관한 자료들을 많이 접해 보았습니다. 창조 과학회에서 출간하는 영상물이나 책들도 보았습니다. 그런 것들이 궁금하게 생각했던 많은 것에 약간의 이해를 주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없었습니다. 나의 믿음은 땅 속에서 나온 뼈 조각이나 기와 조각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믿음은 그들이 밝혀낸 과학적 이론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깊은 수행과 명상을 통해서 깨달은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계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만이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증거’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믿음은 따로 증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가 증거입니다. 믿음을 위해서는 어떤 눈에 보이는 증거가 필요치 않습니다. 믿음을 위해서는 성령의 권능을 입고 선포되는 믿음의 말씀이 전부입니다. 히브리서 11 장에 나오는 ‘믿음의 본과 자취를 남긴 사람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말씀이 전부였습니다. 거기에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었습니다. 추가적인 증거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서!”라고 했던 백부장처럼 말씀만으로 족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이들은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믿음만으로 족합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믿음이 보상을 줍니다. 믿음이 열매를 낳습니다. 믿음이 능력을 발휘합니다. 믿음이 실체요, 증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히10:38)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저희 안에 주신 믿음이란 증거를 굳게 붙들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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