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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좋은 평판


말씀: 히브리서 11:2,39 
요절: 히브리서 11:2,39


다 같이 2절 말씀을 유념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으로 장로들이 좋은 평판을 얻었느니라.](2). 모든 성경 구절이 그러하지만 대명사는 앞에 있는 실 명사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으로’란 말은 1절에 나오는 믿음입니다. 즉 [믿음으로](by faith)란 말입니다. 2절부터는 계속해서 “믿음으로” 된 일들을 적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장로들은 좋은 평판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평판을 얻은 장로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아래 4절부터 나오는 인물들입니다. 아벨, 노아, 아브라함을 장로라고 부르면 아마 장로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놀라 자빠지고 말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들]이란 오늘날 장로 교회에서 말하는 행정이나 재정, 목사 선임권을 가진 장로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2에 나오는 장로들은 분명히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저의 주장이나 신학자들의 견해가 아니라 11:2과 39절을 비교해 보면 간단하게 답이 나옵니다. 성경을 한번이라도 통독해 보신 분이라면 신약 성경에서 베드로나 요한이 스스로 자신들을 ‘장로’라고 부르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였지만 또한 장로였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장로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란 문제부터 살펴 보아야 합니다.

장로는 신약 교회의 직분이 아닙니다. 장로는 모세가 출애굽하기 전에 이미 이스라엘 안에 있었습니다. 소위 족장이라 불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거치면서 요셉의 때에 이들은 이집트에 살게 되었는데 무려 430년 동안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집트 땅에 사는 이스라엘에 사람들에게 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족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행정과 치리는 장로들에게 의존했습니다. 그렇다고 장로가 이스라엘 내에만 존재하던 영적 직분도 아닙니다. 창세기 50:7에 보면 요셉이 죽은 야곱을 묻으러 갈 때 동행했던 인물들이 나오는데 [...파라오의 모든 신하들과 파라오의 집 장로들과 이집트 땅의 모든 장로들과](창50:7)라고 말합니다. 파라오의 집 장로들이 있고, 이집트 땅의 장로들이 있습니다. 장로는 왕이 있는 국가나 민족은 물론이고 어느 사회, 어느 지역에나 있습니다. 로마에서는 장로란 말대신 ‘원로’라는 말을 썼습니다. 같은 말입니다. 이곳 미국에서는 나이가 든 사람들을 노인이라고 부르는 대신 ‘senior’(원로)라고 부르는데 성경적 용어로 하면 장로입니다. 한국에서는 65세가 되면 ‘노인증’을 주는데 성경 용어로 하면 [장로증]을 주는 것입니다. 국가에서 당신은 대한민국의 장로로 인정한다는 증서가 노인증입니다. 그 때부터 국가로부터 주는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통비, 의료비 등을 포함해서 다양한 혜택을 줍니다. 민수기 22:4에는 미디안의 장로들이 나옵니다. 민수기 22:7에는 ‘모압의 장로들과 미디안의 장로들’이 함께 발락의 말을 전하러 발람에게 갑니다. 장로란 말은 이스라엘이나 교회의 고유한 직분이나 명칭이 아니란 점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일부 성경 신자들조차 ‘장로’가 지역 교회의 성경적 직분인 줄로 알고 교회에는 목사가 아니라 ‘장로들’이 다스려야 한다며 복수 장로제를 주장합니다. 일부 교회에서는 그렇게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 목사(pastor)란 말은 한 번 밖에 없어도 ‘장로’라는 말이 여러 번 자주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장로들이 좋은 평판을 얻었느니라.](2). Elder(장로)란 말이 장로교로 인해 한국에서는 교회 용어, 신학 용어처럼 굳어져 버렸습니다. 장로(elder)란 어떤 집단에서 가장 연장자, 오래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집안에서는 ‘집안의 큰 어른’이 장로입니다. 군대에서는 ‘고참’, 직장이나 학교에서는 ‘선배’란 말이 모두 [장로]와 동의어입니다. 어떤 조직이 체계적으로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그때는 일반적으로 제일 나이 많은 사람이나 그 일에 오래 종사한 사람들이 대표성을 지니게 되는데 그들을 일컬어 ‘장로’라고 말합니다. 군대에서 지휘관들은 언제나 ‘고참’들을 불러서 사병들에 대한 임무를 맡기는데 ‘고참’이란 말이 ‘장로’란 뜻과 같습니다. 한국은 물론이고 동양 사회에서는 나이 그 자체가 어떤 계급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나이가 들면 나이에 걸 맞는 책임과 역할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시골 마을에 살 때면 마을에 어떤 일이 있으면 나이든 어른들이 모여서 의논합니다. 군청이나 행정 기관에서 나온 공무원들도 먼저 마을의 어른들을 찾아서 설득하고 행정 지도를 하고 부탁합니다. 소위 말하는 어른들이 그 마을에서는 ‘장로들’입니다. 그러나 학력, 능력이 중시되면서 이런 나이든 사람들의 역할은 급격히 약화되고 줄어들었습니다. 교회에서도 많이 배우고, 신학을 전공한 젊은이들이 [지식]으로 무장해 오래 믿은 연로한 어른들을 밀어 내 버렸습니다. 오랫동안 믿음의 생활을 한 이들이라도 히브리어, 헬라어 몇 줄 배우고 영어 서적을 읽은 사람들 앞에서는 꼼짝 못하게 된 것이 오늘날 교회의 영적 현 주소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각 지역 교회마다 ‘믿음으로 좋은 평판을 얻는 장로들’이 희귀한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신 나간 목사들이 집사, 전도사, 장로를 마치 계급장 달아 주듯이 하면서 교회 행정에 관여할 권한을 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신약 교회에서 가장 어른들, 고참들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사도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나 요한은 자신들을 [장로]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전서 5:1, [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노니 나 역시 장로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또한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벧전5:1). 바울은 자신을 그냥 ‘나이가 많은 나 바울’(aged)라고 했습니다. 모두 같은 말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장로’로 불렀는데 이는 교회에서 장로란 직분을 맡았다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성도로서 나이가 많은 연장자요, 먼저 주님을 알고 따랐던 오래된 선배란 뜻입니다. 요한 역시 요한일서 1:1, 요한삼서 1:1에서 자신을 일컬어 ‘장로는...’하고 편지를 시작합니다. 이 역시 지극히 나이든 원로란 뜻입니다. 어느 지역교회의 목회자나 직분을 맡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날 [장로]의 성경적 의미를 왜곡해서 마치 ‘장로’ 제도가 맞고 ‘목사’ 제도를 배척하는데 쓸 말이 아니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선포해서 각 지역에 교회를 세운 후에 그 곳에 장로들을 세웠는데 가장 먼저 믿은 사람들을 교회의 행정과 치리와 때로는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을 하게 했습니다.

초대 교회로 가 봅시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도 있었고, 장로들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어떤 일을 맡기지 않고 따로 일을 할 사람 일곱을 뽑았습니다(행6). 야고보, 베드로와 같은 걸출한 사도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교회 내에는 교회의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무슨 말입니까? 유대교에 오래 몸담았던 이들이 한 날에 동시에 회심을 하면서 교회 내에서도 그대로 유대교에 있었던 관습들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장로는 전혀 새로운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수천년간 내려오던 제도였습니다. 당시 소아시아에 있는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 교회의 장로들은 놀고 먹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과 장로들이 함께 모여서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 보고를 받기도 했으며 중요 결정을 내렸습니다(행15:2-4). 바울이 교회에 부탁할 일이 있거나 명령을 내릴 때는 장로들을 불렀습니다(행20:17). 각 지역 교회의 나이가 든 대표자들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신약 교회에서는 이스라엘의 장로나 백성들의 장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의 장로들이 필요한데 사도들이 각 교회에 장로들을 임명했습니다(행14:23). 디모데는 바울로부터 장로들을 세우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습니다. 장로들은 다스리는 일을 하기도 했고, 성경 공부를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두 배나 존경할 자로 여기되 특별히 말씀과 교리에 수고하는 이들에게 그리할지니라.](딤전5:17). 신약 교회의 장로는 먼저 믿은 선임자요, 원로들로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역할을 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육신의 나이가 아니라 신앙 연륜을 말합니다. *딤전4:12- 디모데는 나이가 어렸다. 하지만 그는 감독이었고, 장로들을 임명했다. 오늘날 [장로]란 말은 교회 용어로 굳어져 있지만 ‘오래된 자’란 뜻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사역을 맡기시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하게 할 때 [장로들]을 모으게 하셨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각계 각층의 대표자’들을 모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란 말은 성경에서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장로들’이란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이는 백성들을 대표하는 ‘대표자’란 뜻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그다지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불신으로 인해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에스겔에 나오는 장로들은 모두 우상 숭배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에스겔 8:12, [그때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집 원로들(장로들)이 어두운 곳에서 저마다 자기 형상을 둔 방에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주]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신다. [주]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겔8:12). 태어나면서도부터 율법을 듣고, 율법을 지키는 일을 했던 유대 사회에서는 나이든 자들이 장로로서 역할을 했던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왕정이 확립되었을 때도 치리자들이 있고, 장로들 역시 일정한 정치적 역할을 했습니다. 대언자들과 제사장들이 있었지만 장로들은 종교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완전히 배교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누구부터 죽였는가 보십시오.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여자를 철저히 죽이되 표가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부터 시작하라, 하시니 그들이 그 집 앞에 있는 원로(장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하더라.](겔9:6). 장로들은 믿음의 대표자들이 아니라 그 백성들의 대표자들이었을 뿐입니다.

다시 히브리서 11:2입니다. [그것으로(믿음으로) 장로들이 좋은 평판을 얻었느니라.](히11:2). 여기서 장로들이란 누구를 말합니까? 아벨로부터 시작해서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등등 구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조상들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에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을 ‘장로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신앙의 선배, 고참’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들은 모두 대언자들이 아닙니다. 모두 제사장들이 아닙니다. 모두 재판관들(사사들)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왕들이 아닙니다. 모두 치리자들이나 어떤 직분을 맡지도 않았습니다. 모두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모두 남자들도 아니었습니다. 아벨은 양치기였고, 라합은 기생이었고, 다윗은 왕이었고, 삼손은 재판관이었고, 요셉은 총리였습니다. 다니엘은 바빌론의 총리였지만 내시였습니다. 이들을 총칭해서 부를 수 있는 마땅한 말이 있다면 딱 한 가지 ‘장로들’입니다. 장로란 이들의 성별, 나이, 직급 등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말입니다. 11:39절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And these all, having obtained a good report through faith, received not the promise:](히11:39). *이들은 다(these all):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 전부를 말합니다. 11:2에서 말한 장로가 누구인지는 성경 자체가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신약의 사도들이나 순교자들, 이전 세대의 모든 신앙 선배들이 다 ‘장로들’입니다. 현재 우리가 볼 때 사도행전에 나오는 일곱 명의 집사 가운데 하나였던 스데반이나 빌립은 당시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집사였지만 현재 우리에게는 ‘장로’입니다. 계시록 5:6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니, 보라, 왕좌와 네 짐승의 한가운데와 장로들의 한가운데에 어린양께서 서 계시는데 전에 죽임을 당하신 것 같더라.](계5:6a). *장로들의 한 가운데에... 란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여기서 말한 장로들이 누구입니까? 히브리서 11:2에 언급된 장로들입니다. 믿음으로 좋은 평판을 받았던 사람들로서의 장로들입니다. 구약에 언급된 믿음의 사람들은 물론이요, 신약의 베드로, 요한, 바울, 스데반 등 믿음으로 살다간 이전 세대의 모든 믿음의 형제들이 다 장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장로란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셨기를 빕니다. 우리도 이후 세대의 모든 믿음의 후배들에게는 ‘장로들’이라 불릴 것입니다. 믿음의 세대가 한 번만 넘어가도 ‘믿음으로 장로들은.... ’이라고 할 때 장로들이란 말 속에는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나올 것입니다.

다시 2절입니다. [그것으로(믿음으로) 장로들이 좋은 평판을 얻었느니라.](2). 믿음으로 아벨은 좋은 평판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좋은 평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얻은 좋은 평판은 돈이나 권력이나 고매한 인품이나 철학으로 얻은 유명세가 아닙니다. 그들이 얻은 것은 성취나 업적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믿음으로’ 얻은 것입니다. 이들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은 것이 아니라, ‘좋은 평판’을 얻었습니다. *good report. 하나님으로부터 높은 평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좋은 평판(good report)란 말을 인기, 명성, 종교적 권력을 얻었다는 말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얻고, 영광을 얻으면 좋은 평판을 얻었다고 말하지 않고 evil report가 하나님께 올라 갑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너희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눅6:26a)라고 주님을 경고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각자 사람들의 행한 행위에 대해 무게를 달아 보십니다. 각자가 행한 일의 종류를 시험하십니다(고전3). 뿐만 아니라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하늘의 왕국은 마치 자기 종들에게서 회계 보고를 받는 어떤 왕과 같으니](마18:23).

저와 여러분이 두 번째로 살펴 볼 말씀은 ‘좋은 평판’(good report)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report가 있습니다. good report, evil report, false report, well report, true report 등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형들의 악한 일들을 일러 바쳤는데 그것을 일컬어 ‘그들에 관한 악한 보고’(their evil report)를 아버지께 가져왔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벧전4:8). [무엇보다도 서로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미움은 다툼들을 일으키거니와 사랑은 모든 죄를 덮느니라.](잠10:12). 고난 받기 전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고 자라며, 형들에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충분히 연단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3:1에는 “너는 거짓 보고를 올리지 말지니라.”(Thou shalt not raise a false report)라고 말합니다. 재판에서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은 거짓 보고를 올리는 것입니다. 평판(report)란 말은 평판, 보고, 소식, 소문 등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되어 있는 그 모든 말을 관통하는 기본 의미는 무엇인가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보고를 듣고 삽니다. 매일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와 그 뉴스를 현장에 가서 직접 취재한 reporter를 봅니다. 리포터는 사건이 있는 곳에 카메라 기자와 함께 달려 갑니다. 직접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합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화면을 통해 전국으로 내 보내는데 'reporter ***'라고 이름을 밝힙니다. 잘못된 보고를 했을 때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신문 기자들도 자신들이 듣고 본 것들을 취재해서 전달하는데 모두 보고서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보고를 듣고, 보고를 합니다. 야곱은 요셉으로부터 아들들에 대한 악한 보고를 들었습니다. 대제사장 엘리는 백성들로부터 아들들에 대한 좋지 않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아니라, 내 아들들아, 내가 듣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 너희가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도다](삼상2:24). *no good report. 엘 리가 아들들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 중에 좋은 보고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자기 자녀들의 비행, 악행을 다른 누군가로부터 듣는 것보다 마음이 아프고 슬픈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역시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악행과 불법과 죄들에 대해서 마귀의 참소를 받는 일이 결코 기쁜 일이 아닙니다. 반대로 형제들 간에 우애가 있고, 친함이 있고, 남들에게 좋은 평판을 들을 때보다 더 기쁜 소식도 없습니다. 세바 여왕은 자기 땅에서 솔로몬에 대해 올바른 보고를 받았습니다. [왕에게 이르되, 내가 내 땅에서 당신의 행적과 당신의 지혜에 관하여 들은 소문이 참되도다(true report that I heard).](왕상10:6). 자, 보십시오. 세바의 여왕은 지혜의 대왕 솔로몬에 대한 명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들은 보고(report)가 거짓이 아니라 참이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세바의 여왕이 들었던 것과 동일한 보고를 듣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솔로몬의 행정과 지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지혜에 대해 반복적으로 보고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지혜에 대해서 한 두 마디 보고를 받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예수님을 만난다면 ‘내가 들은 보고는 참되도다!’라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바의 여왕이 솔로몬에 대한 보고를 듣고도 예루살렘으로 달려왔는데 이 세대의 사람들은 솔로몬보다 더 큰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보고를 듣고도 무시합니다(마12:42). 이사야는 말하기를, ‘우리의 보고를 누가 믿었나이까?’라고 합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의 팔이 누구에게 계시되었느냐?](사53:1). 우리의 전한 것=우리의 보고(our report). 우리는 예수님의 인격과 그분의 행적을 보고하는 reporter(보고자)들입니다. 대언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면 그것을 백성들에게 전했는데 그것을 보고(report)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언자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전하라, 우리도 그것을 전하리라.](Report, say they, and we will report it.)(렘20:10). 우리가 진리를 보고할 때 선한 보고자가 되고, 참된 보고자가 됩니다. 말씀을 가감없이 그대로 전하지 않으면 우리는 악한 보고자, 거짓 보고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보고했으면 그 다음에 우리가 직접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회계 보고를 해야합니다. 로마서 14:12,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자신에 관하여 하나님께 회계 보고를 하리라.] (롬14:12). 여기에는 과장이나 거짓을 포함시킬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사실이 아닌 것들을 첨가할 수 없고, 불리한 내용이라고 임의로 삭제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남의 인생을 보고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 회계 보고해야 합니다. 자신이 행한 말에 대해서도 회계 보고를 해야 합니다(마12:36). [그들은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할 준비가 되신 이에게 회계 보고를 하리라.] (벧전4:5). 하나님께 좋은 평판(good report)를 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걷고, 믿음으로 살 때 우리는 장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좋은 평판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히브리서 11장을 주신 것은 ‘좋은 평판’(좋은 점수)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믿음으로]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도록 실증적, 역사적 예를 들어 주신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기록은 우리의 본보기요(고전10:6, 11), 마지막 날들을 사는 우리에게 배움을 주시기 위함입니다(롬15:4). 좋은 평판을 받은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믿음으로] 무엇인가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들었고, 믿었고 그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악한 보고를 가져왔던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보십시오. 민수기13:31-32, [그와 함께 올라간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가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니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자기들이 탐지한 땅에 대하여 나쁘게 보고하며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것의 거주민들을 삼키는 땅이요, 우리가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키가 큰 자들이며](민13:31-32). *evil report(KJV). 그들의 보고는 하나님의 존재, 능력, 인도하심 등을 철저히 배제한 채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만으로 보고했습니다. 거짓 보고는 아니었지만 성경은 그들의 보고를 ‘악한 보고’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없는 상황 분석, 판단, 예측은 모두 악한 보고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본대로 느낀대로 생각한대로 솔직하게 보고했습니다.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들의 보고는 ‘악한 보고’였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민수기 14:37, [곧 그 땅에 관하여 나쁘게 보고한 그 사람들이 주 앞에서 재앙으로 말미암아 죽었고](민14:37). 하나님은 그들을 죽이심으로 심판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을 때 아무리 예리하게, 정확하게 분석한 보고라도 그것은 악한 보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을 때 인간의 이성과 지성, 판단력은 자신에게, 백성들에게 재앙이 되는 법입니다.

신약 성경으로 와 보십시오. 신약 성경에 좋은 평판을 받았던 인물들이 나옵니다. 고네료는 선한 평판을 받았습니다(행10:22). 드메데리오는 좋은 평판을 받았습니다. [데메드리오는 모든 사람에게서와 진리 그 자체에게서 좋은 평판을 받았고 참으로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희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 아느니라.](요삼1:12). 데메드리오가 좋은 평판을 받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진리 안에서 걸었습니다(요삼3), 2. 진리 안에서 걷는 그대로 자신의 속에 있는 진리를 증언했습니다(요삼3). 3. 낯선 자들에게 무엇을 행하든지 신실하게 행했습니다(요삼5). 이런 이유로 그는 모든 사람들과 진리 그 자체에게서 좋은 평판을 받았습니다. 이는 오늘을 사는 성도들이 좋은 평판을 얻는 성경적인 방법의 모델입니다. 초대 교회의 집사들은 정직하다는 평판을 받았습니다(행6:3). 디모데는 좋은 평판을 받았습니다(행16:2). [디모데는 루스라와 이고니움에 있던 형제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더라.](행16:2). *well reported. 바울에게 침례를 주었던 아나니아는 좋은 평판의 소유자였습니다. [율법에 따라 독실한 사람으로 거기 거하는 모든 유대인에게 평판이 좋은 아나니야라 하는 이가](행22:12). 하나님은 우리가 좋은 평판, 선한 평판, 정직하다는 평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위선자들이라고 비난합니다.

빌립보서 4:8, 디모데전서 5:10을 보십시오. 성도들이 어떤 평판을 받아야 하는지 나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이든지 진실한 것과 무엇이든지 정직한 것과 무엇이든지 의로운 것과 무엇이든지 순수한 것과 무엇이든지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좋은 평판이 있는 것과 덕이 되는 것과 칭찬이 되는 것이 있거든 이러한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라.](빌4:8). 좋은 평판을 얻는다는 것이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구하고, 인기를 얻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좋은 평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요, 진리 안에서 걷고 자신 안에 있는 진리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장로들이라 불리는 믿음의 선진들이 그러했듯이 우리 역시 믿음으로 살 때 우리는 good report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칭찬 받는 한 가지 방법은 신실함입니다. 매우 적은 것에 신실하십시오. 그 때 주님은 이와같이 칭찬하십니다.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매우 작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열 도시를 다스릴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눅19:17).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좋은 평판을 받는 방법입니다.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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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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