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믿음으로 아벨은


말씀: 히브리서 11:4 
요절: 히브리서 11:4


 믿음으로 좋은 평판(report)을 얻었던 장로들 가운데 처음 언급된 사람은 아벨입니다. 아벨이란 이름은 ‘수증기(vapor), 호흡(breadth), 헛됨(vanity)’이란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우리는 잠깐 창세기 4장으로 가서 아벨의 가족사를 보아야 합니다. 아벨은 인류의 첫 사람이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며, 이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정복할 권세를 받았던 왕이었던(시8:5) 아담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아담의 불순종과 죄악으로 인해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나 그 동쪽에 정착해서 살았습니다. 아벨은 에덴의 동산이 아닌 추방된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벨은 아담과 이브가 역사적 인물이듯이 역사적 인물입니다. 결코 신화나 종교적 가공의 인물이 아닙니다. 창세기를 공격하는 마귀의 사역자들이 신학자들로 위장하여 강단에서 창세기 1-11장까지는 완전히 신화요 전설인 것처럼 공격합니다. 이들은 아담과 이브, 가인과 아벨을 신화적 가공 인물로 만들어 버리고, 창세기 설화라고 우깁니다. 진화론을 믿는 이들에게 창세기가 역사적, 과학적 사실이라면 그들은 당장 밥줄이 끊기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담과 이브, 가인과 아벨을 역사 속에서 지우고 신화요, 전설로 만들려는 것은 성경을 믿을 수 없고, 믿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아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실명을 거론하시면서 역사성을 인정하셨습니다(마23:35, 눅11:51). 히브리서 기자 역시 아벨을 두 차례나 언급하고 있습니다(11:4, 12:24). 아담이 인류의 첫 번째 죄인이었다면 아벨은 인류의 첫 번째 의인이었습니다. 아담이 결코 얻지 못했던 의로운 자란 증거를 아벨은 얻었습니다. *본문을 유념해서 보라. he was righteous 란 말이 있다. 의로운 자란 증거를 얻은 첫 번째 사람이 바로 아벨입니다. 또한 믿음으로 무엇인가를 행한 첫 번째 사람 역시 아벨입니다. 아벨은 참된 예배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헌물이 무엇인가? 를 입증한 사람입니다. 또한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 준 사람입니다.

4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욱 뛰어난 희생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들에 대하여 증언하시느니라. 그가 죽었으나 믿음으로 지금도 말하고 있느니라.](히11:4). By faith Abel offered unto God a more excellent sacrifice than Cain, by which he obtained witness that he was righteous, God testifying of his gifts: and by it he being dead yet speaketh.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욱 뛰어난 희생물을 하나님께 드리고”(4a).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납니다(롬10:17). 아벨은 하나님께 직접 들었던지 아버지인 아담에게 들었던지 간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면 그에게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믿음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던 의식이 깨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각(自覺) 즉 홀연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마음 속에서 저절로 생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말씀의 씨앗이 우리 마음 속에 뿌려져야만 생길 수 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에게 직접적으로 들었든, 아담에게 들었든, 천사를 통해 들었든, 환상이나 꿈을 통해 계시를 받았든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들은 말씀을 믿었습니다. 아벨이 들은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려야 한다.”(히11:4a).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이는 아벨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아벨의 형 가인 역시 들었고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렸습니다.

창세기 4장으로 가 보십시오. 가인과 아벨은 이들은 둘 다 희생물을 들고 주님께 나아와 드렸습니다. 강제로 시켜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왔습니다. 이들은 경배의 필요성과 경배의 대상이 누군가에 대해서는 일치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들은 경배의 대상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오늘날 우상 숭배자들처럼 자신도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절을 하는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거나 해와 달을 향해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땅을 대지의 신이라 부르지 않았고, 그리스 사람들처럼 쥬피터나 다이아나를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누구에게 경배를 드려야 하는지 정확히 들었고, 알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요, 한 가족이요, 형제로서 모든 일을 서로 돕고 마음을 합할 수 있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둘 다 같은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이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환경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운명론을 무색하게 합니다. 가인이 아벨보다 영적으로 더 나쁜 곳에서 자랐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습니까? 그들은 둘 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 났습니다. 같은 부모, 같은 환경에서 자랐고 같은 진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가인은 장자였기에 오히려 더 많은 애정과 보살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둘 다 부지런하게 일했고, 둘 다 주님께 희생물을 가져와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같은 종교였습니다. 그렇다면 가인과 아벨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희생물을 드렸습니다. 가인은 멋대로 드렸습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가인은 경배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경배의 대상을 정확히 알았지만 경배를 드리는 방법을 자신이 결정했습니다. 들은 바 말씀을 믿지 않고 자신의 눈에 좋게 보이는 대로, 자신의 생각대로 희생물을 정했습니다. [믿음으로]란 말은 [말씀대로]란 말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것은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믿음이 아닙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희생물을 드렸고, 가인은 자기 생각대로 희생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희생물을 가인의 희생물보다 “훨씬 뛰어난 희생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건의 배경이 되는 창세기 4:3-5을 보십시오. [시간이 흐른 뒤에 가인은 땅의 열매 중에서 헌물을 가져와 주께 드렸고 아벨도 자기 양 떼의 첫 새끼들과 그것들의 기름들 중에서 가져왔더니 주께서 아벨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가지셨으나 가인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갖지 아니하셨으니 가인이 몹시 분을 내고 그의 얼굴 빛이 변하니라.](창4:3-5). 가인은 땅의 열매 중에서 헌물을 가져왔습니다. 곡물이나 과일을 주님께 헌물로 가져왔습니다. 아벨은 양 떼의 첫 새끼들과 그것들의 기름을 가져왔습니다. 어느 것이 더 귀하냐? 더 비싸냐? 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주받은 땅에서 가져 온 것이 문제다!”라고 진단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은 땅에서 나는 소산물도 받으셨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대로 듣고 믿음으로 가져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임의대로 희생물을 정한 것입니다. 자신이 예배의 방식을 정합니다. 예배의 법규를 마음대로 정합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종교입니다. 종교는 경배를 드리는 자가 경배의 대상, 경배의 방법, 경배의 시기, 경배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다 관할합니다. 가인은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제물을 원하는 만큼 가져와 주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종교는 자신의 땀과 피를 하나님께 바치고 인정받으려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성을 다해 드린 것들을 받아 달라고 엎드립니다.

자, 다시 본문을 보십시오. 가인과 아벨이 각자 주님 앞에 헌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헌물 이전에 주님이 보신 것이 있습니다. [...주께서 아벨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가지셨으나 가인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갖지 아니하셨으니 가인이 몹시 분을 내고 그의 얼굴 빛이 변하니라.] 그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헌물보다 먼저 아벨에 관심을 가지셨고, 가인의 헌물보다 가인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헌물의 종류가 무엇인가 보다는 헌물을 드리는 사람이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이것이 더욱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잠언15:8, [사악한 자의 희생물은 [주]께 가증한 것이나](잠15:8a). [사악한 자의 길은 [주]께 가증한 것이나...](잠15:9a). [사악한 자의 희생물은 가증한 것이거늘 하물며 그가 사악한 생각으로 가져오면 얼마나 더 가증하겠느냐?](잠21:27). 가인의 문제는 희생물 이전에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사악한 자에게 속해 있으며, 악하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요일3:12, 유11).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들의 중심을 보시고 그들의 영을 달아보시며, 그들의 믿음을 보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은근히 가인을 동정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가인의 후예요, 가인의 길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동시에 주님께 헌물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이미 죄로 인한 속죄를 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아담 이후로 인간의 본성으로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리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속죄제는 주님의 특별 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아담을 통해서든지, 꿈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말씀하셨든지 간에 희생물을 드리는 속죄제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고,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에 제단 앞에 나아와 희생물을 드린 것입니다. 죄의 속죄는 오직 “어린양의 피”로만 가능합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믿음으로 어린양을 드렸습니다. [피흘림이 없는 곳에는 죄사함이 없느니라.](히9:22). 가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씀을 들었지만 믿음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우 종교적이었을 지는 몰라도 의롭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창세기 4:5절을 보면 [가인과 그의 헌물에는 관심을 갖지 아니하셨으니 가인이 몹시 분을 내고 그의 얼굴 빛이 변하니라.](창4:5). 하나님은 믿음으로 행치 않을 때 가인을 받지 않으시고 그의 헌물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잘 행하면 어찌 너를 받지 아니하겠느냐?](창4:7). 여기서 ‘네가 잘 행하면’이란 말씀은 “믿음으로 행하면, 들은 말씀에 순종해서 행하면”이란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 행하는 것’은 선행이나 의로운 행실, 거룩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한대로 [...[주]께서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주]의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시겠나이까? 보소서, 순종이 희생 헌물보다 낫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란 말씀대로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차이는 결국 믿음의 차이였습니다. 인격의 차이가 아닙니다. 업적의 차이가 아닙니다. 학력과 경제력의 차이가 아닙니다. 종교와 철학의 차이가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을 확연하게 구분해 준 것은 ‘믿음의 차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유일한 희생물은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해 주신 그대로 드릴 때입니다. 성실, 열심, 나의 견해는 주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4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욱 뛰어난 희생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들에 대하여 증언하시느니라. 그가 죽었으나 믿음으로 지금도 말하고 있느니라.](히11:4). 아벨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영적 진리 중의 하나는 바른 희생물, 바른 예배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고, 증거하시는 희생물은 ‘믿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죄입니다(롬14:23). 가인과 아벨은 동일한 하나님께 동일한 희생물을 드렸지만 그 결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아벨은 자신이 드린 희생물을 통해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받았지만 가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by faith) 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아벨이 드린 희생물이 그의 믿음을 입증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받으셨고, 아벨이 드린 예물들에 대해서 증언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에게 무슨 희생물을 드려야 하는지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어린 양’입니다. 어린 양의 죽음과 피를 통해서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양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히셨고, 아벨이 드린 양의 희생물로 속죄제에 대한 진리를 계시해 주십니다. 성경은 에덴에서부터 시작된 어린 양에 대한 계시가 점진적으로 구체화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침으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유월절 어린 양을 계시해 주십니다. 어린 양의 피와 죽음에 대한 증언은 마침내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란 말씀을 통해 절정을 이룹니다. 성경에서 누가 “믿음으로” 무엇을 행했을 때 그 일은 반드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어떤 진리도 ‘믿음’과 상관이 없습니다. 믿음의 행위는 모두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해 낸 자신들의 방식대로 헌물을 드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보여 줄 수 없게 됩니다. 아벨이 드린 희생물은 주님을 예표하는 희생물이요, 우리의 죄를 위해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우리는 바로 점없고 흠없는 어린 양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되었습니다. 아벨은 단지 한 마리 양을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올바른 희생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제시해준 믿음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구속받은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드려야 할 올바른 희생물은 무엇입니까? [너희도 생기가 넘치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벧전2:5). 아벨과 같이 믿음으로 더 나은 희생물을 드려 보십시오. 의인의 증거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드려야 할 더 나은 희생물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롬12:1). 여러분은 주님께 마음을 드리셨습니까? 주님은 여러분의 몸을 원하십니다.

둘째, 감사함입니다. [내가 주께 감사의 희생을 드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시116:17). 주님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찬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계속해서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이것은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가정에 늘 찬양이 흘러나오게 하십시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내가 사는 동안에 주께 노래하며 내가 생존하는 동안에 내 하나님께 찬양하리로다.](시104:33). 찬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닙니다. 다윗이 하프를 탔을 때 사울 안에 있던 악령이 쫓겨났습니다(삼상16:14-23).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양을 불렀을 때 지진이 나 옥문이 열렸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찬양의 희생물을 계속해서 드리십시오.

넷째,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오직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누어주는 것을 잊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희생물을 매우 기뻐하시느니라.] 믿음의 형제 자매님들이 서로 서로 나누어주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희생물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것을 서로 나누어 가지십시오.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에게 물질을 공급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일컬어 [오직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보낸 것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것은 달콤한 향기요, 받으실 만한 희생물이요, 하나님을 심히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4:18). 선교 헌금을 하는 것이나 목자를 지원하는 일은 하나님을 매우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다섯째, 상한 영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희생물은 상한 영이라. 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주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치유하러 오셨습니다. 마음이 상한 것은 죄가 아닙니다. 영이 상한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무엇 때문에 상하셨습니까? 진리를 알지 못하는 가족들로 인해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구원은 받았지만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 받지 못해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성장하지 않고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에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입술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열매 없는 어둠의 일과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을 보고 마음이 상하셨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희생물입니다. 지난 한 달간 단 한 명에게도 복음을 전해 보지 못한 자신을 볼 때 마음이 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바른 희생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마음이 상하고 영이 상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침 밥상에 반찬이 나쁘다고 속 상해하고, 피부가 거칠어졌다며 속상해 합니다. 심지어는 T.V 프로그램이 재미없다고 속상해 합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이 상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나뉘어져 있는 것입니다(호10:2). [그들의 마음은 나뉘어졌도다.] 상한 마음이 아니라 갈라진 마음을 가졌다면 회개하십시오.

위에서 언급한 이 다섯 가지는 모두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따라 내 안에 형성된 믿음대로 행하십시오. 믿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가식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모두 아벨과 같이 더 나은 희생물을 드리는 성도들이 됩시다. 3절의 요점은 “믿음으로 드리자”입니다. 이렇게 드린 예물은 하나님께서 증거해 주십니다. 최초의 사람은 아담이었지만 최초의 죽은 사람은 아벨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예물을 드렸다가 형에게 돌에 맞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지금도 바른 예물은 어린양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아벨이 죽었으나 그가 믿음으로 지금도 말하는 것은 자신의 흘린 피가 아니라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순교자들 가운데 단연 아벨을 으뜸으로 뽑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님과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들을 말하는 피 곧 뿌리는 피니라.](히12:24). 아벨의 피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이요, 죽이는 삶이 아니라 죽임 당하는 삶이며, 자신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죄로 인해 죽은 모든 사림들이 이 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결론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좋은 평판을 얻읍시다. 이제 아벨처럼 더 좋은 희생물을 드립시다. 아벨에 대해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아벨은 성경에서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린 최초의 인물이다. 2. 아벨은 믿음으로 희생물을 드렸다.3. 아벨은 의로운 자란 증거를 얻었다. 4. 아벨이 드린 것은 양의 새끼였다. 5. 하나님은 아벨이 드린 예물들에 대해 증거하신다. 6. 아벨은 죽임을 당했다.- 최초로 죽은 사람. 죽임 당한 사람. 의인. 7. 아벨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 지금도 말한다.

다음 시간에 좀 더 다루겠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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